왕궁 | 사지 | 왕릉 | 도시방어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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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시대 (공주) |
공산성 | 송산리고분군 | ||
사비시대 (부여)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 정림사지 | 능산리고분군 | 부여나성 |
사비시대후기 (익산) |
왕궁리유적 | 미륵사지 |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된 후, 백제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성을 포기하고 오늘날의 공주(서울에서 약 130Km 남쪽에 위치)인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공주으로 천도할 때 가장 중요시했던 입지 조건은 방어적 요소였다. 백제의 공주 천도는 기본적으로 고구려가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후에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주 지역은 금강의 중류 상에 위치한 마름모꼴의 분지형 지형을 띠고 있다. 동부는 계룡산지가 남-북으로 크게 펼쳐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남쪽과 서쪽 역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개를 통과하지 않고는 공주으로 쉽게 진입할 수 없다. 즉 공주지역은 동·서·남쪽은 산지가 가로막고 북쪽은 금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면서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지형은 백제가 당면한 고구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주 지역이 최적지로 판단된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이 공주 지역의 입지는 방어에 유리한 지세에 중점을 둔 수도의 입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은 수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과 개방성 등은 약화되었으며, 이는 후에 다시 부여로 천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웅진지역은 지금의 공주 시가지를 가로 지르는 제민천(濟民川)에 의해 동서로 양분된다. 제민천과 금강의 합류지점은 홍수 시에 침수의 위험이 있는 저습지였으므로 공주 시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웅진시대의 수도 범위와 관련하여 오래전부터 외곽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웅진시대에는 외곽성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수도의 범위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능묘의 분포범위를 참고할 수 있다. 능묘구역이 수도 바깥에 배치되는 구조가 확실히 보이는 것은 사비시대지만 이러한 인식은 웅진시대에도 존재하였다. 공주 시가지 주변의 능묘군은 동쪽으로는 금학동고분군, 서쪽으로는 송산리고분군 등이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고분군 안쪽의 공간 범위를 당시의 수도 범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38년 백제는 오늘날의 부여(공주에서 약 35Km 남서쪽에 위치)인 사비로 2차 천도를 단행한다. 이후 신라와 당 연합군에 패망하게 되는 660년까지 123년 동안의 사비시대가 열린 것이다. 공주로 천도할 때 가장 중요시했던 입지 조건이었던 방어적 요소는, 6세기 초반 거듭되는 고구려와의 전승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상당 부분 약화되었다. 부여로의 천도를 단행한 성왕(聖王)(재위:523~554)은 선왕인 무령왕(武寧王)(재위:501~523)대의 성공적인 국가경영의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고, 기득권을 지닌 귀족 세력들의 견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하여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공주 분지의 면적은 10㎢로 수도가 입지하기엔 협소한 지역이었다. 공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넓은 개활지(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의 면적은 약 20㎢를 상회한다)가 있어 부여 지역이 인구수용에 유리하다는 조건도 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부여 지역은 밀물 때에는 바닷물이 도달하는 지역으로, 대형 선박이 별다른 동력 없이 조수의 힘만으로 오고 갈 수 있는 지역이다. 이 점은 물자의 유통과 문물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인이다
그렇다하여 부여가 방어에 취약한 자연지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부여의 북·서·남으로는 금강이 휘감아 돌면서 자연적인 방어막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도 험준한 편은 아니지만, 보조적인 방어시설을 설치할 경우 수도의 방어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해발 200m 내외의 산지들이 연달아 분포하는 지형이다. 백제는 부여 동쪽 방면의 방어력을 높이고자 수도의 외곽을 두르는 외곽성인 부여나성을 축조하였다.
백제는 공주가 가진 수도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538년 부여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부여는 왕궁과 그 배후에 후원이자 유사시 피난성의 기능을 수행한 산성이 세트를 이루는 왕성이 금강에 인접한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왕성을 포함한 도시 전체를 외곽성인 부여나성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다.
부여지역의 수도 관련 유산도성에 대해서는 30년이 넘는 장기간에 걸쳐 정밀한 고고학적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왕궁으로 여겨지는 대형건물지 및 수도 내 사찰터, 나성, 능묘 등 1500년 전 백제의 수도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武王)(재위:600~641)은 익산(부여에서 약 50㎞ 남쪽에 위치)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재위 기간 미륵사의 창건 등 적극적인 익산 경영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무왕 대의 익산 경영은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의 견제를 통한 왕권 강화와 대 신라 전쟁 수행 등을 위해 전략적 거점인 익산의 경영을 통해 백제 남방지역의 확고한 장악력 확보 등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금강, 만경강 등의 수운과 바다와 지극히 가까워 수상교통이 발달할 수 있는 이점과, 남쪽으로 전주, 임실, 남원으로 이어지는 육상교통로의 요지라는 입지는 익산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익산을 포함한 주변의 논산, 완주, 김제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탁월한 농업생산력을 고려할 경우, 백제 시기에도 이 지역의 농업생산력은 타 지역에 비해 월등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경제적 동기 또한 익산 경영의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무왕 대의 익산 경영을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가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인데, 백제 후기의 주요 유적들은 미륵산(해발 430m)과 용화산 자락(해발 340m) 남쪽의 선상지 및 저평한 구릉 등에 분포한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문화적 환경 등은 익산지역에 사비시대 수도의 기능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별궁 등이 입지할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이 될 수 있다.
공산성
백제가 웅진에 수도를 두었던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왕성은 웅진성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의 공산성이다.
성은 공주시 금성동·산성동에 걸쳐 있는 약 20만㎡ 규모의 거대한 산성이다.
공산으로 불리는 산은 남쪽으로 공주시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금강의 물줄기와 접한다. 동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지 외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전체가 병풍이 돌려진 천연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공산성은 산봉우리를 연결하고 계곡을 가로질러 성벽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전형적인 방어용 산성이다. 이 안에 왕궁을 비롯한 중요 시설들을 배치하였다. 공산성은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 축조양상, 왕궁지 및 왕궁 부속시설지 등이 발견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이하에서는 공산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들에 대하여 백제시대 유구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성체 총길이 2,660m(석성 1,925m, 토성 735m). 공산성은 토성구간과 석성구간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이 석성구간인데 처음에는 토성을 쌓았지만 나중에 여러 차례 고쳐 쌓으면서 석성으로 변화되었다. 토성은 동쪽 구역의 내·외성으로 구분된 범위에 위치한다. 이 중에서 외성 구간은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공산성 대부분은 석성으로 남아 있고, 대부분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백제시대에 쌓았던 석성의 흔적도 발견된다. 성곽의 현황을 통해 최초 백제시대에 토성으로 쌓았고 부분적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본격적으로 석축으로 쌓는 개축과 보축의 과정이 있었다.
왕궁지 유적은 공산성 내부에 솟아 있는 표고 110m 정도의 산봉우리 두 개 중에서 서쪽 산봉우리 정상의 면적 약 7,000㎡ 규모의 광장에 자리한다. 이 곳은 공주시가지와 금강, 그리고 왕릉인 송산리고분 등이 한 눈에 조망되는 위치에 있다.1985년의 발굴조사 결과 넓은 범위에서 백제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유구는 대부분 건물지와 그 부속시설들로서, 동서 35m, 남북 20m 정도의 대형 대벽건물지와 여러 채의 굴립주 건물지, 왕궁 내에서 필요한 용수조달 시설인 연못과 저장시설 등이다. 유적에서는 기와와 청동 거울, 다양한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다양한 와당들은 높은 위계의 건물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해 준다.
공산성 내부에서 성안마을로 불리는 지역은 북쪽의 금강 변에 위치한 계곡 사이의 분지상태로 남겨진 약 40,000㎡ 규모의 공간으로 산성 내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공간이다. 성안마을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8년에 시작되었고, 2011년과 2012년에는 백제시대의 문화층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진행된 백제시대의 유구 조사는 약 6,300㎡ 정도이다. 백제시대의 문화층은 현재의 지표면 보다 깊게는 7m, 얕게는 4m 정도의 깊이에서 확인되며 그 위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이 층층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백제시대 건물지 15채, 축대, 계단지와 도로, 저수시설과 배수로 등의 유구가 노출되었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공간을 구획한 후 축대를 이용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각각의 대지에 건물을 축조한 모습이다. 건물지는 2채의 기단 건물지를 비롯하여 대벽건물지와 굴립주건물지 등인데 왕궁지의 부속시설물인 것으로 판단된다.
성안마을에서 노출된 백제시대 유구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수시설이다. 절반정도만 조사되었는데 내부에서 옻칠된 가죽 갑옷과 철제의 찰갑, 마갑(馬甲), 대도(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옻칠된 가죽 갑옷은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한데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옻칠된 갑옷 위에 붉은 색의 글씨가 세로 방향으로 쓰여져 있다. 그 중 ‘정관 19년 4월 21일’ 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해는 645년 이다. 이 갑옷은 백제에서 생산되는 황칠수에서 채취한 칠을 한 갑옷으로서 고대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 의하면 백제는 당나라에 명광개를 만들어 수출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갑옷이 명광개의 실물일 가능성이 높다. 양국이 큰 전쟁을 치르기 전에 서로 교류하였던 명백한 실물자료가 지하에서 출토된 것이다. 마갑은 백제지역에서 처음 출토된 것으로 말에게 갑옷을 입히고 그 위에 중무장한 기병이 당시 전쟁에서 활약하던 모습을 보여준다.
왕궁지의 북쪽 사면을 비롯하여 서문 부근 등의 평탄한 대지에서는 다수의 건물지와 저장시설, 연못 등이 발견되었다.
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군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웅진시대의 백제왕실의 능묘군이며, 백제 왕릉 혹은 무령왕릉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의 남안에 솟아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작은 구릉의 동남향 능선 8부 정도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표고 75m 내외 지점이다.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27년, 1932년에 이루어졌으며, 1971년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무령왕릉이 뜻하지 않게 발견되어,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송산리 고분군 중 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백제 무덤으로는 횡혈식석실분과 전축분이 있는데, 1~5호분은 돔형태의 횡혈식석실분이며, 백제 전통의 고분 형태이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vault형의 전축분으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형태이다. 이들 무덤들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하는 475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축분 2기를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이 모두 횡혈식석실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웅진시대 백제 왕실에서는 이미 횡혈식석실분에 대하여 형식이나 구조면에서 제도적으로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왕실 전용의 무덤 양식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듯하다.
동중서(東中西) 3개 원은 각기 긴 회랑으로 구획되어 독립된 공간을 이루지만, 북쪽으로는 1동의 큰 강당터로 연결된다. 즉 예불공간을 3개 원으로 분화되었지만, 강당은 하나로 전체를 통합하였다. 이와 같이 정형화된 웅진시대의 횡혈식석실분은 6세기를 기점으로 공주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백제의 변방 지역까지 급속하게 전파되어 지방 지배 계층의 무덤으로도 조성될 만큼 점차 사용 계층이 확대됨에 따라 대표적인 백제 무덤 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횡혈식석실분이 구조적인 약점으로 손쉽게 도굴의 대상이 되었던 까닭에 주인과 함께 매납(埋納)되었던 부장품들이 상당량 도굴되어 당시 문화상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점이다.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횡혈식석실분의 구조를 살펴보면, 무덤의 입구인 널길[羨道], 시신을 모시는 나무널[木棺], 피장자의 껴묻거리[副葬品]가 함께 안치되는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에는 무덤을 덮었던 거대한 봉분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봉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무덤 내부의 규모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널길의 길이는 2m 내외이며, 폭과 높이는 1m 내외이다. 널방의 규모는 대체로 길이와 폭이 3m 내외이고, 바닥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천장의 구조는 돔형태로, 널방 벽면의 모습이 바닥에서 일정 부분까지는 수직으로 올라가나 일정 높이의 부분부터는 서서히 안쪽으로 좁아지다가 정상부에 이르면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어 마감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군 중 무령왕릉
무령왕릉송산리 고분군에는 횡혈식석실분 외에도 2기의 전축분이 있는데, 송산리6호분과 무령왕릉이 그것이다. 두 전축분은 아치형 천정, 장방형 묘실, 동ㆍ서벽과 북벽에 설치된 복숭아형 등감이 있으며 바닥에는 ‘인(人)’자 모양으로 벽돌을 깔고 벽과 연접하는 부분의 공간은 삼각형 벽돌로 채운 점 등이 특징이다. 6호 전축분의 벽화는 전형적인 사신계(四神系) 벽화에 속한다. 전축분 내에 사신도를 그린 유일한 사례이다. 벽화는 네 벽의 벽화를 그린 위치에 진흙이나 회를 바르고 그 위에 호분으로 사신도를 그렸고, 남벽에는 일월상도 나타난다. 무령왕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는데, 동아시아 왕릉으로서 피장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은 동아시아 능묘연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중심점 역할을 한다. 묘지가 발견됨으로써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란 점이 밝혀졌으며 이들의 사망과 매장시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로써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분연구에서 유적과 유물의 연대결정, 고분 피장자의 신분추정에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들은 무령왕대 백제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본산 금송을 목관의 재료로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진묘수 및 도자기 등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줄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교류는 동북아시아를 뛰어 넘어 동남아시아, 멀리는 인도지역과도 교류하였음을 짐작케 하는 유물도 관찰된다. 즉 왕릉 출토 유리구슬에 사용된 납의 산지가 태국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며, 왕비 관식의 삽화(揷花) 문양은 인도 산치탑의 난간(欄干)에 묘사된 문양과 동일 계열이다.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에 대해서는 1980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었다.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의 왕성구조에 대한 해명이 대부분 이루어졌다.
이 일대를 왕성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첫째, 왕궁의 시설물로 볼 수 있는 면적 650㎡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과 남북방향으로 일직선 위에 위치한 부소산 중턱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므로 이 일대가 왕의 생활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가장 위계가 높은 관청에 사용된 ‘수부(首府)명’ 기와, 대형 석조, 당나라 장군 유인원의 행적을 기념한 비가 모두 이 일대에서 발견된 점도 이곳이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셋째,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이곳에 지방을 통치하는 중요 관청을 건립한다. 이때 백제시대 건물의 하부구조가 새로운 관청 건축에 재활용되었다. 이 점도 이곳이 백제의 왕성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왕궁의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의 남쪽으로는 대규모 건물이 들어서기에 평탄한 지형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사비에서 이곳이 왕궁이 입지하기에 가장 좋은 지형이다.
군창지(軍倉址)
군창지대형 건물지는 규모와 구조를 볼 때 왕궁 내에 배치된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전각 건물이다. 거의 같은 규모와 구조의 건물이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건물의 기단은 위와 아래 2단으로 조성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50cm 정도이다. 기단의 북서쪽 모서리에 한 변 길이 77cm의 방형 주춧돌 하나가 남아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주춧돌은 사라졌지만 기둥과 주춧돌을 받히던 하부의 흙다짐기초가 총 36개 발견되었다.
물을 담을 수 있는 4m 크기의 대형 목곽수조 2곳이 발견되었다. 수조에서 불순물을 여과한 후 40m 정도 길이로 연결된 수도관을 통해 필요한 만큼 물이 흘러가게 된다. 목곽 수조의 기능은 물을 모으는 기능과 여과하는 기능 두 가지이다. 수도관은 수키와 2매를 원통형으로 맞대어 연결시켰다.
저장시설은 목곽고 5기, 석실고 3기,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저장시설 내부에서는 다양한 식물유체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종류는 참외, 다래, 복숭아, 살구, 수세미, 오이 등인데 엄청나게 많은 양의 참외씨앗이 발견되었다. 저장시설은 대부분 식물성 음식물을 보관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하였다. 1호 목곽고의 경우 약 8㎡ 규모의 장방형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각목과 판목으로 목곽을 짜 맞춘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연못이 발견되었다. 그 규모는 동서 10.6m, 남북 6.2m이며 평면은 장방형이다. 1~1.2m 정도 깊이로 땅을 파내고 가공된 석재를 5~6단 쌓아서 만들었다. 연못의 북쪽으로는 기와를 이용하여 만든 수로가 발견되었다. 이 수로는 연못에 물을 넣는 입수시설로 추정된다. 연못 내부에서는 연꽃잎과 줄기가 발견되어 연지(蓮池)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백제시대의 기와, 토기, 목간, 짚신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관북리유적에는 백제시대의 건물지, 도로, 석축, 공방시설 등의 유구가 존재한다.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기 왕궁의 배후산성이다.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에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을 끼고 부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표고 106m의 부소산 정상에 축조되었다. 산성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도 이 안에 있다.
1993~1994년에 걸쳐 실시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계곡을 품으면서 외곽을 두르는 백제시대 성벽, 그리고 그 안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백제시대 산성의 전체 길이는 외곽선을 기준으로 2,495m이며, 바닥의 너비는 5~6m, 높이는 3m 내외이다.
성벽의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대통(大通)’명 기와를 비롯한 유물을 근거로 하면 부소산성은 사비시대 이전인 웅진시대부터 성벽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통’은 중국 양나라의 연호(527~529년)이다. 이 연호가 사용된 시기는 부여로 천도한 538년보다 10년 정도 앞선다.
부소산의 서남부 언덕에 위치하며, 기록에는 그 내용이 남아 있지 않은 백제시대 사찰이다. 1980년에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약 3,500㎡에 달하는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이며, 특이하게 강당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비시대 대부분의 절터는 평지나 나지막한 약한 경사지에 자리잡는데, 이 절터는 산의 능선을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특이하다.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서남쪽으로는 금강이, 동남쪽으로는 부여 시가지가 잘 조망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제 허리띠, 연화문 와당, 인장와, 금동풍탁, 소조불상, 치미 등이 있다. 금동제 허리띠는 일본 나라현에 있는 정창원 소장품과 유사하다. 매우 잘 가공된 석재들로 기단을 구축한 점, 최고 신분의 인물이 사용한 금동제 허리띠 등을 볼 때, 왕을 위한 사찰인 것 같다.
이하에서는 산성의 주요 시설들에 대하여 백제시대 유구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이른바 판축기법인데, 이러한 판축기법은 뒤에 설명할 나성의 축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축조 과정을 보면 먼저 토사(土砂)가 밀리지 않게 지탱할 나무를 두 줄로 세우고 그 안쪽에 점질토와 마사토를 번갈아가며 다져서 성을 만들었다. 바깥쪽으로는 급한 경사로 말미암아 성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할석을 이용해 간단한 석축시설로 보강하였다. 그리고 중심 토루 안쪽에는 보강용 다짐층을 쌓아 완성했다.
문지(門址)는 남문지와 동문지, 두 군데가 확인되었다. 이 중 남문지는 산성의 정문이다. 백제시대 병영으로 사용했던 수혈주거지가 산성 내부 서남편에서 3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 제3호 주거지는 한 변의 길이 4m, 깊이 90㎝ 내외이며 내부에 온돌이 설치되었다. 내부에서 금으로 만든 봉황장식, 와당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산성 내부에는 백제~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지 12기, 석축, 저수조, 목책열 등 다양한 유구가 노출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설들은 부소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이후 1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다. 정림사지 인근 지역의 표고는 서측과 남측 대부분의 평탄지는 0~14m의 표고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정림사지 인근 지역의 경우 표고 약 30m 이하의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북측 부소산과 동측 금성산의 경우 표고 약 120m 내외의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였다. 정림사지에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정면
정림사지의 대지는 북동에서 남서로 경사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북동쪽은 깍고, 낮은 서남쪽은 성토하여 조성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정심사지 사역의 남편과 서편은 원래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사역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 사찰의 위용이 한껏 과시되었을 것이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중문, 금당지, 강당지 및 그 북·동·서편의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다. 그 배치 평면은 과 같은데, 이러한 회랑에 접속된 북·동·서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으로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예불대상이 되는 불상이 안치되는 금당과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는 탑이다.
탑과 금당간의 관계에 따라 <1탑-1금당>, <1탑-2금당> 등의 가람배치양식을 구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림사지는 강당과 승방지, 그리고 회랑으로 둘러진 공간 내에 탑과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사찰터로서, 각 건물들은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건축된 목조의 기와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전체 사찰지의 규모는 북승방지에서 중문지까지 107m이며, 폭은 동서건물지 외곽 기준으로 62m이다. 두개의 연못지가 중문지 남쪽에서 발굴되었다.
정림사지에는 높이 8.3m의 석탑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림사지 정경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기단을 낮게 사용하고 1층 탑신을 높게 설정하면서도 2층부터는 탑신의 높이와 너비를 급격히 줄여 시각을 1층 탑신에 머물게 하는 건축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1층 탑신은 모서리안쪽으로 쏠린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각면 2매씩의 판석(板石)으로 짜 맞추어 마치 두 쪽 문을 달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얇은 지붕돌은 각 층마다 약간의 경사를 주면서 옆으로 길게 뻗어나가다가 지붕의 1/10 지점에서 끝이 살짝 올려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기단부터 5층 지붕돌까지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으나 상륜부는 노반석의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유실되었다. 조사 결과 상륜부를 고정시켰던 찰주 구멍이 5층 지붕돌까지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석탑이 전체적으로 안정되며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보다도 비례의 완벽성에 있다. 정림사지석탑을 정확히 실측하여 수리적 원리를 얻고자 한 사람은 일본인 건축학자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그의 측량에 의하면 정림사지 석탑의 건립에 쓴 자[尺]는 1자의 길이가 약 35㎝ 정도인 '고려척'이었다. 그는 탑의 지대석 너비가 고려척으로 14척이고,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에 기본 척도로 쓰였다고 단정하였다. 이러한 증거들은 각 부분의 측량 결과 사실로 드러났는데 1층 탑신과 1층 지붕돌을 합한 높이가 7척이며, 1층탑의 너비 역시 7척, 기단의 높이는 7척의 반인 3.5척, 기단 너비는 7척에서 3.5척을 더한 10.5척이었다. 말하자면 7척이 가진 등할적(等割的) 원리로 이 탑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탑의 세부를 살펴보면 1층 너비인 7척에 대하여 2층과 5층의 합이 7.2척, 3층과 4층의 합이 7척으로 거의 7척에 맞춰진다. 이러한 원리는 탑의 높이에도 적용되어 탑신과 지붕돌을 합한 1층 높이 7척에 대하여 2층과 5층의 합이 7척, 3층과 4층의 합이 6.9척으로 거의 7척에 맞춰진다. 정림사지에서는 발굴결과 수많은 기와와 흙으로 만든 인형의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흙으로 만든 인형은 당시 중국 북위의 수도에 있었던 영녕사(永寧寺) 출토품과 제조기법과 형태가 상당히 유사하다.
능산리고분군
능산리고분군은 충남 부여군 능산리 부여나성 바로 밖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백제 왕릉으로 전하는 이 고분군은 동서로 이어지는 해발 121m의 능산리산의 남사면 산록에 위치한다. 좌우로는 야트막한 구릉들이 감싸고 있으며, 고분군 앞으로는 왕포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고분군은 3기씩 앞뒤 2열을 이루고, 여기서 북쪽 후방으로 50m의 거리를 두고 1기가 자리하고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부여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의 동쪽 부분 바로 밖에 위치한다.
능산리 고분 전경
능산리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1915년과 1917년에 이루어졌으며, 조사결과 세 가지 형식의 횡혈식석실분이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백제의 횡혈식석실분은 천장을 어떤 형태로 마무리했는지에 따라 Volt형과 평천장 구조로 나뉘고, 평천장 구조는 다시 단면의 형태에 따라 육각형과 사각형 구조로 나뉘는데, 능산리고분군에는 세 가지 형식의 고분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 천정의 모습에 따라 <아치형 천장→단면 육각형(또는 사각형) 평천장>의 순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인정된다.
능산리의 주요 무덤 가운데 능산리 2호무덤은 volt형의 천장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널방은 직사각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남벽 중앙에 널길이 부설된 횡혈식석실분이다. 널방의 규모는 남북 3.21m, 동서 1.98m이며, 높이는 2.15m이다. 벽면은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여 터널처럼 곡면이 이루어지도록 쌓아올려 송산리 6호무덤이나 무령왕릉의 경우와 흡사하다. 다만, 사다리꼴의 판석을 사용하지 않고 정상부에 편평한 판석을 사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능산리 진입로
능산리 3호무덤과 5호무덤은 천장의 구조가 매우 이색적이다. 잘 다듬은 판석으로 벽면과 천장을 구축하였으며, 남벽 중앙에 널길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무덤과 유사하지만, 벽면을 수직으로 올린 다음 일정 높이에서 판석을 45°각도로 얹어 각을 줄인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된 뚜껑돌을 올려놓아 단면이 육각형이 되게 마무리하였다.
능산리 1호무덤 지하에 땅을 파고 그 안에 잘 다듬은 거대한 판석 1매씩을 이용하여 동벽과 서벽, 그리고 북벽을 구축하여 만든 횡혈식석실분으로, 수직으로 세워진 벽석(壁石)들 위에 그대로 뚜껑돌을 올려 완성한 관계로 단면이 사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널방의 규모는 길이 3.27m, 너비 1.52m이며, 높이는 1.95m이다. 또한 1호무덤 널방의 네 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그린 벽화가 발견되어 백제 회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능산리고분군의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금동제 장신구 및 허리띠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고분군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567년 제작된 석제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 능산리고분군이 사비시대의 백제왕실 무덤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었다.
나성
나성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외곽성으로서 현재의 부여읍을 감싸며 원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보호하고 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나성 동 측면
부여의 서편과 남편은 금강이 자연적인 방어시설로 기능하였고 자연제방이 성벽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동쪽의 경우 산지 사이로 평지가 분포하므로 인공적인 시설물이 필요하였다. 나성은 고고학적조사 결과 총 6.3㎞의 구간이 확인되었다. 나성은 북나성과 동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나성은 부여 북단에 자리한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청산성의 외곽을 돌아 석목리에 이른다. 동나성은 석목리에서 염창리까지이다. 북나성은 백제 멸망 후 그 기능을 상실하여 현재 육안으로 성벽이 확인되는 구간은 많지가 않다. 그렇지만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성벽이 고고학적 조사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면 전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나성은 현재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20여 년간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축조 시기, 성벽의 축조기법, 문지를 비롯한 시설물 등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나성은 산성과는 다른 유형으로 산지와 평지를 연결하여 수도의 외곽을 둘러싸는 새로운 형태의 성곽으로 지형에 따라 특이한 축성방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구릉구간과 저습한 평지를 통과하는 구간에 사용된 축성법이 달랐음이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먼저 구릉을 통과하는 구간은 성벽 안쪽으로는 흙을 다져 성토한 후, 성벽의 바깥쪽은 산을 깎아 급경사면을 만든 후, 2m 정도 높이로 돌을 쌓아 올려 방어력을 높였다.
하지만 저습지를 통과하는 구간은 지엽부설의 공법과 나무말뚝을 박아 연약한 지반을 보강하는 공법 등 특수한 축조공법이 적용된다. 먼저 정리된 기반토 위에 직경 5~6㎝되는 나무와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성곽 기저부 외곽선에 맞추어 나란히 깔아 기반토층과 그 위에 성토될 토축층 사이를 차단함으로써 연약한 기반층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나뭇가지를 깐 면 위에는 점질토를 두께 50㎝ 가량 성토한 후 다시 나뭇가지를 까는 공정을 반복하였다. 현재 세 번에 걸쳐 배열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지엽부설층과 성토층을 반복하여 쌓아 올린 그 높이가 2m 가량 잔존하여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벽 안팎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말뚝 박아 고정시킨 흔적이 확인되었다. 말뚝의 크기는 5~10㎝ 가량이며, 각 말뚝사이의 간격은 50~100㎝로 말뚝의 뿌리가 기반토층위에 최초의 나뭇가지를 깔아놓은 층 위에 이르고 있어 수분으로 인하여 성토층이 그 아래층과 잘 결합 될 수 있도록 하고 성벽 외부면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하여 축성한 신공법을 적용한 사례이다.
저지대 통과부분의 축조공법으로 다른 것 중 또 하나는 기초부 면 외부에 석열 또는 적석층 등의 보강시설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나성 성벽에 새겨진 글자
부여 지역은 북·서·남의 3면이 금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자연 조건 때문에 부여나성의 정문은 동쪽에 만들었다. 정문에 해당하는 제1동문지는 능산리 왕릉 옆의 평지에서 발견되었다. 성문의 너비는 9.5m이며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정연하게 축조되었다.
한편 2013년 고고학적 조사에서는 제2동문지가 발견되었는데, 제2동문지는 제1동문지의 북쪽 800m 지점 능선을 타고 북향하던 부여나성이 서북쪽으로 꺽어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해발 120m 야산의 정상부로 부여 시내와 멀리 익산의 미륵산까지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문지 유구에서 출토된 다량의 기와편과 기둥구멍 등이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문루와 같은 건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궁리유적
왕궁리 유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왕실이 수도 사비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든 별궁 유적이다.
용화산에서 시작하는 능선의 말단부에 형성된 낮은 구릉 위에 만들어졌다.
왕궁리유적 전경
높은 곳은 깎아 내고, 낮은 곳은 성토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왕궁이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였다. 담장이 들어설 지점은 바깥쪽을 경사지게 깎아내서 왕궁 내부가 담장 바깥보다 3-4m 이상 높게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공간 조성은 중앙부를 높게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높은 대지 위에 만들어진 건물이 궁장 밖에서 보면 더욱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왕궁리 유적은 1976년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그 전모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왕궁관련 시설, 금과 유리 등을 생산하는 공방시설, 사찰로 구성되어 있다. 왕궁관련 시설은 장방형의 석축 궁장을 비롯하여 동서석축, 총 33기의 건물지이다. 특히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가 발견되어 백제 왕궁 구조 및 공간구획의 원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건물지는 부여의 관북리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왕궁은 뒤에 그 기능이 사찰로 바뀌었는데, 사찰로 기능이 바뀌는 시기에 대해선 백제 말기(7세기 중엽)~통일신라 초기(7세기 후엽)라는 이견이 존재한다. 현재 남아있는 오층석탑이 이를 보여준다.
궁궐(宮闕)을 보호하기 위한 담장이다. 궁장의 규모는 동벽 492.8m, 서벽 490.3m, 남벽 234.1m, 북벽 241.4m인 장방형이다. 궁장의 폭은 3~3.6m이다. 부속시설로는 수구(水口), 석축배수로, 암거, 문지 4개소가 확인되었다. 동벽의 남측 부분을 통해서 확인된 궁장의 구조는 2단의 석축이 높이 1m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 위에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왕궁의 내부 공간을 보면 남측에는 의례, 정치와 관련된 건물지가 있고 북측에는 휴게 공간인 정원(후원), 수공업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왕궁은 전체적으로 2:1 또는 1:1의 비례를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궁장의 남북(492.8m, 490.3m)과 동서(234.1m, 241.4m) 길이는 2:1이다. 왕궁 내부 공간은 남측 공간과 북측 공간을 1:1로 분할하여 활용하였다. 이처럼 왕궁의 남측에 중요 생활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두는 구조는 중국과 일본의 고대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은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왕궁건설의 원리와 기술을 활발히 교류하고 공유하였음을 보여준다.
건물이 들어설 평탄면을 확보하기 위한 시설로서, 궁성 내부의 공간을 일정한 비율로 구획하였다. 동서 석축 4개소, 남북 석축 2개소가 확인되었다. 석축은 잘 다듬어진 석재를 정연하게 쌓고 점토와 잡석을 사용하여 뒷채움을 하였다. 현재 2m(6~7단) 정도가 남아 있다. 남측 공간은 4단의 석축을 쌓아 4개의 공간으로 구획하였다. 각각의 규모는 그 폭이 남쪽에서부터 76.6m, 44.5m, 72.3m, 45.7m로서 대략 2:1:2: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석축의 높이는 제1 동서석축이 2m 정도이며, 나머지는 0.5m에서 1m 정도이다. 제1 동서석축은 다른 석축에 비해 높게 만들어졌다. 왕궁리유적은 규모나 공간의 활용 과정에서 2:1 또는 1:1이라는 비례개념을 염두에 두고 건립되었다. 이는 이 유적이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전 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동서 35m × 남북 18.3m)는 제1 동서석축 바로 앞에서 확인되었다. 이 대형 건물지는 부여 관북리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와 유사하며, 왕궁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 건물지는 왕궁의 중심축에 위치하며, 건물을 최대한 제1 동서석축 쪽으로 편재시켜 중문에서부터 건물까지 조회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이 건물은 정전 성격의 중층 건물로 추정된다.
동서석축 3 바로 앞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그 기단 구축방법이 기와를 평적한 와적수법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와적기단은 부여지역의 백제시대 왕궁 유적과 사찰유적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왕궁의 북측 부분에서는 정원과 관련된 시설이 발견되었다. 정원은 물을 가두어두는 연못 형태가 아니라 기암괴석과 장대석, 강자갈을 이용하여 주변의 자연경관을 축소해 만들고 물이 흐르게 한 형태이다. 정원에 물을 끌어오기 위한 저수조, 물을 흘려보내면서 완상하는 중심시설, 수조의 수량 조절을 위한 암거배수시설, 정원에서 나온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 출입시설과 정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원 북쪽의 후원에서는 정원으로 공급하는 물을 집수하기 위한 U자형의 환수구와 곡수로가 발견되었다.
백제의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왕궁리유적에서 사비시대의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백제의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왕궁리유적에서 사비시대의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왕궁리유적에서는 금제품, 은제품, 유리제품 및 그 원료,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등 다양한 종류의 생산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왕성 내부에 왕실 직속의 수공업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방지 남쪽에서는 대형의 화장실 3기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1호 대형화장실의 규모는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이다. 이 대형화장실 유구는 왕성 내에 거주하였던 관리나 궁인들이 사용한 것이다. 고대의 대형 화장실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며 이웃한 일본의 화장실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왕궁리유적은 처음 축조될 때에는 왕궁이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 왕궁의 용도는 사찰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사찰로 전용되는 과정에 탑, 금당, 강당 등 중요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한정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활용하였다. 사찰로 용도가 변화한 정확한 시기에 대하여서는 학문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석탑을 비롯한 사찰 관련 시설들에 대하여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즉 백제의 유구가 아닐 가능성이 남아 있으므로 신청유산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의미임)
미륵사지
미륵사(彌勒寺)터는 익산시 금마면 표고 430m의 미륵산 아래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을 자랑한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한다.
미륵사지 전경
즉 무왕 부부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 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으며,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제한다는 불교경전의 내용에 따라 가람배치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들 사항은 1974년부터 이어진 23년간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사찰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초이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폐사(廢寺)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사는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이른바 백제식 <1탑-1금당> 형식의 가람 세 동을 나란히 병렬시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양쪽의 동원(東院)과 서원(西院)보다는 가운데 중원(中院)의 면적과 금당 및 탑의 규모가 더 커 중심을 형성하였다.
동중서(東中西) 3개 원은 각기 긴 회랑으로 구획되어 독립된 공간을 이루지만, 북쪽으로는 1동의 큰 강당터로 연결된다. 즉 예불공간을 3개 원으로 분화되었지만, 강당은 하나로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강당과 연결된 북·동·서 회랑터에는 후대 승방(僧房)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되었다.
백제시대의 사찰지 규모는 강당에서 중문지까지 134m이며, 폭은 동원과 서원의 외곽 기준 172m이다.
뒤쪽 미륵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가람의 네 면에 걸쳐 인공 물길로 정리되었고, 가람의 남쪽 정면에 큰 연못을 조성했던 흔적도 나타났다. 또한 강당 북쪽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어서 인공 물길을 건너 뒤편의 후원(後園)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습지였던 곳이어서 각별히 치밀하게 배수 처리를 한 점과 아울러, 각 원의 금당도 특별한 구조로 습기를 예방하였다. 금당 바닥에는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에 1m 정도 높이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에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다. 따라서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백제는 1탑 1금당의 사찰구조를 바탕으로 불교의 미륵신앙을 구현하기 위해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사찰구조로 미륵사를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이 미륵사를 통하여 누구나 평등한 삶을 염원했던 미륵하생의 꿈을 이룩하려 하였고, 이로써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려는 간절한 염원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고대 백제인들의 신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이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정성이 우려되어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석탑의 해체조사 및 보수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2002년부터 본격적인 해체조사 및 학술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미륵사지-가을-금당지 앞 석등
미륵사지석탑은 발굴 조사 때 동탑지에서 노반석(露盤石)과 없어졌던 지붕돌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서탑과의 비례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계산하여 복원한 결과 9층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결론에 따라 1992년 미륵사지 동원에 석탑을 복원하였는데, 복원된 높이는 총 24m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높은 경주 감은사지석탑이 13m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미륵사지석탑은 그 두 배에 가까운 규모가 되는 셈이다.
한편 2009년 서원의 석탑에 대한 1층 해체조사를 진행하던 중 심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사리공 주변에는 십자(十字) 먹선과 석회로 밀봉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리장엄은 사리공 안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 다양한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사리봉영기의 판독 결과 석탑은 639년 사리를 안치하면서 건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미륵사가 백제 무왕 집권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해 준 보기드문 사례이다.
첫댓글 지난 4월 초에 부여역사지구를 다녀왔었습니다. 문화 해설사의 해박한 지식이 흥미를 끌었던 것도 있었지만, 제가 사는 경주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던 유적과는 또다른 유적들을 접해본 신선함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 온적이 있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니^^ 반갑네요.
답사 한번 해야겠네여~
부여도한번가고.....
안그래도 부여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등재되었다니 더욱 가보고 싶네요
시간내서 답사해보렵니다.
좋은정보감사합니다. 이곳 너무 맘에 들어요^^
우리나라에 좋은곳이 많네요
자랑스럽네요 이제곧 시험에도 나오려나요?ㅎㅎㅎ 잘봤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백제 사비시기랑 부여시기가 항상 헤갈려서 ~~
운영자님 노력으로 좋은 자료 공유 감사해요 ~~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