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알게 모르게 호박을 잘 먹는다.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봐도 우리나라 호박 요리가 훨씬 다양하다. 호박볶음에서부터 호박전, 호박조림, 호박찌개, 호박나물, 호박죽, 호박고지, 호박떡, 호박엿에 이르기까지 얼핏 떠오르는 종류만 해도 손으로 다 꼽기 힘들 정도다. 애호박은 애호박대로, 늙은 호박은 늙은 호박대로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호박을 직접 먹는 것 외에도 된장찌개에 호박 줄기를 넣으면 맛이 더 산뜻하고 찐 호박에 된장을 얹어 싸먹는 호박쌈은 여름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별미다.
우리가 이렇게나 좋아하는 호박이지만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졌을 무렵 호박은 구박덩어리였다. 양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다. 평민들도 호박은 즐겨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절간에서 중이나 먹는 채소’라는 뜻에서 승소(僧蔬)라고 했다. 18세기 영조 무렵에 활동한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호박을 소개했다.
채소 중에 호과(胡瓜)라는 것이 있는데 색깔은 푸른빛에 생긴 모양은 둥글며 익으면 색이 누렇게 바뀐다. 큰 것은 길이가 한 자쯤 되는데 잎은 박처럼 생겼고 꽃은 누런데 맛은 약간 달콤하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없었지만 지금은 농가와 절에서 주로 심는데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이다. 요즘 사대부 집에서는 심는 사람들이 있다.
또 “호박이 전해진 지 거의 1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 호남 지방까지 퍼지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성호사설》을 근거로 보면 18세기 중반 무렵에도 호박은 모든 사람들이 즐겨 먹는 채소도 아니었고 재배 지역 역시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창기에는 가난한 농부나 절간의 승려들 이외에는 별로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재배도 하지 않던 호박은 19세기 중엽, 그러니까 헌종과 철종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채소가 된 것이다.
호박이 전해진 초창기에 우리는 낯설어하면서 배척했지만 유럽은 또 달랐던 것 같다. 서양에서 호박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마법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마녀 혹은 마법사 이야기에 호박이 자주 등장한다.
동화 〈신데렐라〉도 그중 하나로 재투성이 아가씨인 신데렐라를 왕자님에게 데려다주는 것이 호박 마차다. 또 미국인들이 즐기는 할로윈 축제에도 호박이 빠지지 않는데, 촛불을 켜놓은 호박 램프가 밤하늘을 떠도는 영혼의 해코지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이 왜 호박을 마법에 연결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박과 연결된 마법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무의식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해리포터》가 그 예다. 호박으로 만든 주스는 마법의 세계에서 즐겨 마시는 음료고 마법 학교인 호그와트의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주스다.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시면 마법의 힘이 강해질 것 같은 이미지가 호박 음료에 녹아 있다. 반면 마법의 힘이 없는 일반인이 사는 세상, 다시 말해 머글의 세계에서는 호박 주스를 마시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대신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호박을 먹느냐 오렌지를 먹느냐에 따라 마법의 힘이 있고 없고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서양에서 선악과라고 하면 먼저 사과를 떠올리는 것처럼 호박 역시 마법과 이어지면서 은연중에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호박은 역사적으로 옛날 서양 사회와는 관계가 없는 작물이다. 유럽에 전해진 것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1492년 이후다. 원산지가 아메리카 대륙이기 때문이다.
호박은 옥수수와 함께 초기 이주민들의 생명을 구해준 작물이다. 개척민들이 농사에 실패해 굶주림에 지쳐 있을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마법처럼 전해준 옥수수와 호박을 먹으며 겨울을 견디어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호박 파이를 먹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동화의 세계에서건, 아니면 현실 세계에서건 서양에서 호박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형성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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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