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일본 간도대토벌과 경신참변
“NO, 아베” 물결이 한반도를 휩쓸 때, ‘엄마부대’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아베님,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외치는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뼛속까지 일본인인 ‘토착왜구’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우리의 역사 교육의 심각성과 동시에 한국인의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신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떠올랐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며 모인 보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종교의 대표라는 자들이 모여서 만든 ‘뉴 라이트’ 집단의 역사관이다.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21세기 신판 친일파의 이런 주장은 다름 아닌 일본 극우파들의 역사관이자 극우 정치인들이 일본의 악한 과거를 미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자국 국민들 기만용으로 읊어대는 단골 레퍼토리다. 그런데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일본극우파들의 왜곡된 거짓 주장을 역사 교과서에 넣어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거세하고 친일 사대주의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중국 및 아시아 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창씨개명, 일왕사진 경배, 황국신민서사 등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급기야는 꽃 같은 우리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강제로 징병, 징용, 위안부로 끌고 나가 전쟁의 소모품으로 사용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하 노동자∙군인∙군속 등으로 강제동원 된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는 배상 대상자인 사망자 숫자 2만 1919명(군인 6178명, 군속 1만 5741명)만 밝혔을 뿐 전체 강제동원 숫자와 명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1990년 일제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강제연행자 명단 일부를 공개하였는데, 그 숫자는 7만 1476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91년 초에 학도병 출신의 정기영 씨가 입수한 1947년 일본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1934년부터 패망 때 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이었다. 물론 이 숫자에는 그야말로 전쟁의 소모품이 된 징병, 학도병, 위안부 수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듯 식민지 백성을 강제 징용하여 노예처럼 부린 일제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미화시키며 찬양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중심의 ‘뉴 라이트’ 학자 집단이 있는 한국의 현실이 고뇌스럽기 그지없고 그들이 요지부동한 보호색깔인 반공∙친미주의 옷을 입고 반역사적인 행진을 해도 되는 한국의 현실에 가슴이 먹먹하다.
‘뉴 라이트’ 집단의 친위대 같은 ‘엄마 부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보수 한국교회가 일본을 찬양하는 ‘뉴 라이트’ 운동의 적극가담자라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검찰개혁에 반대하며 말씀 왜곡과 거짓 예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자기 집단 기득권 수호를 위한 외침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소리처럼 들린다.
교회가 사회와 시대를 위하여 바르게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오히려 반동의 도구가 되어 세상을 어둠과 혼란에 빠트리는 죄악을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뉴 라이트’ 와 함께 반 개혁 수구의 깃발을 날리고 있는 보수 교회와 교우들에게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1920년 간도에서 일어난 일제의 독립군기지 대토벌과 한인학살 만행의 사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다. 일제의 조선인 대학살사건인 간도참변의 내막을 파악하려면 일제의 간도 침투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1.일본 제국주의의 간도1) 침투
일제는 1907년 8월 간도의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였다. 1909년에는 간도협약에 따라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폐하고 <간도일본총영사관>를 설치하였다. 그 산하에 연길, 배초구, 투도구, 훈춘에 4개의 영사분관을 설치하였으며 간도 전지역에 19개의 경찰서를 두었다. 그 외에도 일제는 <일본인거류민회>,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도지점>,<조선인민회>, <조선은행 용정지점>, <용정금융부>, <광명회> 등을 설립하여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 침투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영사관과 산하기관들을 이용하여 한인들을 이간질하며 교회와 학교들을 감시하였다. 뿐만 아닐라 무시로 애국 청년들과 투사들을 체포, 구금하였으며 고문으로 괴롭히고 서대문감옥으로 보내는 일을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집행하였다.
간도총영사관은 일제가 간도의 모든 정보를 탐문, 수집하는 곳이었고, 만주의 모든 자원을 약탈을 기획하는 곳이었으며, 한인들의 항일독립투쟁을 탄압하는 구금과 고문의 자리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만주를 조선처럼 식민지화하려는 음모의 본산이었다.
2. 용정 <3∙13> 독립만세 시위
일제의 억압, 중국 관리들의 횡포, 비적들의 수탈로 삼중고를 겪었던 조선인들은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만세 시위의 영향과 독립에의 열망과 용기로 용정에서 <3∙13> 항일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3만 여명2)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일제 타도를 외치며 일본총영사관을 향해 가는 중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맹부덕의 군대의 발포로 19명이 죽고 48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94명이 체포를 당하였다.
3월 17일에는 순국한 18인3) 열사의 장례식에 3,0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서 애도하며 동참하였고 그들은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평화시위가 무력에 의해 제지를 당하였으나 시위의 소식은 연길현의 이도구, 팔도구, 투도구, 용두산, 국자가 등지에서 수백 내지 수천 명이 참가하는 반일 시위로 확산되었고 왕청현의 배초구, 라자구, 석현 등지에서, 안도현의 현성과 관지에서, 훈춘의 성내와 횡부자구, 로황구 등지에서 항일 만세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연변지역에서 3월부터 5월 초까지 30여 곳에서 58회에 걸쳐 일어난 항일만세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8만 1000명이었다. 당시 간도 거류 조선인은 대략 80여 만 명이었으며 연변지역 거주자는 반이었다고 하니 연변인구의 5명 중의 1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서간도의 통화현, 금두화락에서, 홍경현의 왕청문에서, 환인현성에서, 유하현의 삼원포 대화사에서 , 장백현의 장백가, 팔도구, 매방로에서, 집안현의 양목교자, 구채원자 등지에서 수천 명의 군중들이 집회와 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3∙13> 만세 시위를 주도한 지사들은 무력 진압에 좌절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독립은 피 흘리는 무장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공동인식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애국 청년들과 의기투합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3. 무장독립단체 결성과 봉오동 전투
전투 <3∙13> 만세시위 후, 북간도에서 많은 무장단체들이 건립되었다. 연변지구가 무장독립단체 결성에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연변지구가 가장 큰 조선인 집거지역으로서 군대의 기초가 되는 인적자원이 충분하였고 둘째, 기독교와 대종교 계통에서 세운 사립학교들이 10 여년 세월 동안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으로 청년들의 독립투쟁에의 열망이 한껏 고양되어 있었고 셋째,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교를 통해 독립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으며 용정 <3∙13> 만세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당하는 체험 중에 피 흘림이 없이는 독립이 없다는 “무장독립투쟁론”이 연변 조선인 사회의 공동의 담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초 까지 독립투사들은 무장독립투쟁단체를 편성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 때 연변지역에 건립된 주요 무장단체들은 간도국민회, 북로군정서, 훈춘한민회, 신민단, 도독부, 군무도독부, 광복단, 의군부, 라자구의사부, 대한독립군 등이다.
무장독립단체들은 창건을 시작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시작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200여 명의 정예부대로 8월에 혜산, 갑산을 습격하여 맣은 무기와 군수품을 획득하였고, 10월에 만포진, 자성을 기습하였으며 도독부와 함께 회령, 종성, 온성을 습격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조선총독부의<국경방면의 배일파침입상>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6월 까지 그들(독립군)이 조선당을 침입한 것이 전후 32차에 이르렀다> 고 하였다. 또한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1년간 국경삼도지역에 대한 무장독립군의 출동건수는 무려 1651건, 4,645명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4)상해임시정부군무부는 <독립신문> 제 88호에서 3월 1일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유격전을 벌인 것이 32회며 일제 군경들의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고 공식적으로 확인 발표하였다.
1920년 6월 4일 <신민단>이 종성군 강양동 초소를 습격하였다. 일제의 <월강추격대>는 독립군을 쫒아서 두만강 국경을 넘었으며 봉오동 골짜기까지 쳐들어 왔다. 홍범도장군의 유인, 매복 전략으로 일본군의 침략을 대비하고 있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도독부>, <신민단>의 부대들은 157명의 일군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전투는 민초 의병들과 정규 일본군과의 전투로 화력 면에서 만만한 전투가 아니었기에 망국의 백성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실로 민초 의병들의 연합과 연변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참여와 지도자들의 탁월한 전략의 결과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우리의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일제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3∙13> 만세 시위 이후 만주지역의 무장독립단체들을 쓸어 없앨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1919년 9월에 조선군사령관은 ‘조선 외부로부터 무력 진입하는 불령선인을 타격하기 위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훈령을 발표하였다. 1919년 10월 조선군사령부는 총독부에 ⌜재지나불령선인에 관한 각서⌟를 제출하였는데 이는 1920년 10월의 간도대토벌의 밑그림이었다.
4. 일제의 간도침략 준비와 훈춘사건 조작
봉오동전투 이후, 날로 대범해지는 무장독립단체들에 독립운동에 대하여 일제는 연속 3차례 걸친 봉천회의를 통해서 장작림에게 진압조치를 요구하였다. 7월 24일, 일제에 굴복한 장작림은 연길주둔 맹부덕 부대에게 무장독립단체들을 “토벌” 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토벌대는 무장독립단체에 대한 호의로 사전에 토벌계획을 통보하거나 사람을 파견하여 협상함으로써 “토벌”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토벌”을 핑계 삼아 연변에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장독립단체들에게 연변지구를 떠날 것을 요청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간도국민회 연합부대들은 어랑촌 일대로 집결하였다. 어랑촌이 길림성과 봉천성의 접경지역이어서 일제 토벌과 중국군경들의 단속을 피하기 적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국내와도 가까운 곳이어서 국내진공작전에도 편리하였고 지역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 신도들이고 간도국민회 관할지역이였기 때문이다. 북로군정서는 화룡현 청산리일대로 이동하였다. 청산리일대의 산들의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여 근거지 건설이 유리하였으며 조선의 무산일대와 연접해 있고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역이어서 일본군의 토벌을 피하기 쉬운 장점에다 주민들 대다수가 대종교 신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중국의 협조 없이 무장독립단체들을 직접 토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했다. 일제는 1920년 8월 15일 경성회의에서“일지협동”정책을 확정하고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을 정하고 북만주파견군 사령관에게 “조선파견군(일본군)이 9월 하순에 간도의 반일부대에 대한 토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통보하였다.
일제는 9월 12일 제 1차 훈춘사건을 만들었다. 토비 진동과 왕사해 무리들을 매수하여 일본 낭인을 참모로 보내 훈춘현성을 습격하여 약탈, 방화, 납치를 하도록 사주하였다. 200여 채의 가옥이 불타고 80여 명의 사람들이 납치당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전혀 피해가 없었던 1차 훈춘사건으로 출병을 할 수가 없자 그들은 2차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토비들은 새벽 4시에 훈춘주재 일본영사관을 공격하였다. 2차 사건에서 일본 영사분관과 6채의 일본상점이 불타고 11명의 일본인이 죽고 6명의 조선인이 사살되었으며 무고한 주민 200여 명이 납치되었다. 일제는 일본인의 생명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출병 여론을 조성하고, 10월 9일 “간도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조선군 19사단과 20사단의 78연대, 연해주 파견군 제 11,13,14사단, 북만주파견대의 안자이지대, 관동군 19연대와 기병 20연대 도합 2만 명5) 의 정규군을 출동시켜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연변지구를 포위하고 무장독립단체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정부는 주권 침해를 엄중히 항의하고 침입한 일본군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중국의 철수 요구에 아랑곳 하지 않고 1920년 10월 “간도토벌”을 시작하였고 “간도한인대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5. 일제의 간도토벌과 한국인의 수난
일제가 저지른 간도참변은 세 개의 단계로 진행되었다. 제 1단계는 10월 14일부터 11월 20일 까지로 이 기간에 제 1차 토벌이 감행되었다. 이 단계에는 항일단체들과 무장독립운동기지로 지목된 마을, 학교, 교회당 등에 대한 대규모 소탕을 감행하였다. 제2단계는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까지이다. 이 단계에는 일제가 ‘잔당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마을과 무장독립운동기지에 대하여 반복적인 수식을 함과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 비행대와 국경수비대를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제3단계는 12월 17일부터 1921년 5월 9일 일제가 철수하기까지이다. 이 단계에는 간도 파견대를 기반으로 경찰분서의 증설과 총독부 경찰력 증가 그리고 친일세력 육성 및 확대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하면서 이른바 간도지역에 일제경찰 무장력 강화와 친일세력을 구축하는데 진력하였다. 간도참변이라 하면 주로 1단계인 10월 중순부터 11월 후반 사이에 일제가 저지른 악마적인 만행을 가리킨다. 이소바야시부대, 기무라부대, 회령수비대, 종성수비대, 제 11사단, 제13사단, 아즈마부대, 관동군은 연변각지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총영사관과 분관, 경찰서에서 작성한 한인 무장독립단체의 동태, 주둔지점, 독립운동 지원 마을, 학교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은 대로 거침없이 방화, 살상, 약탈, 강간을 자행하였다.
상해임정이 발표한 북간도지역 한인참변 조사통계표에 의하면 피살된 사람은 3,664명, 체포는 155명이고 불탄 가옥은 3,520동, 불탄 학교는 59개교, 불탄 교회당은 19개소, 불탄 곡물은 59,970섬에 달했다.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독립신문> 87호에서 북간도 피해상황은 피살된 사람이 2,626명, 체포 46명, 강간 71명, 불탄 가옥이 3,208동, 불탄 학교는 39개교, 불탄 교회는 11개소, 불탄 양곡은 53,265섬으로 보도하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10월 5일 ~ 11월 23일까지 북간도 피해 통계를 피살된 사람 3,138명, 체포 117명, 강간당한 여성 76명, 불탄 가옥 2,722동, 불탄 학교가 31개교, 불탄 교회당이 10개소, 불탄 양곡이 40,815석이라고 집계하였으며 서간도 피해상황은 피살된 사람 804명, 체포된 사람 125명이라고 집계하였다. 그러나 후에 피살자 350여 명, 불탄 학교 10개교, 불탄 교회당 9개소, 불탄 가옥 70여동을 추가 기록하였다.6)
침략자인 일제의 통계는 인명 살해 494명, 체포 707명, 불탄 가옥 531동, 불탄 학교 25개교, 불탄 교회당 1개소로 피해상황을 은폐하며 최소화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서간도 지역의 유하, 삼원포, 홍경, 왕청문, 관전, 삼도구, 철령 등지에서 1,323명을 사살하고 125명을 체포하였으며 장백현 일대에서도 한인 212명을 사살하고 4백여 명을 체포하였다.7)
간도 통신원의 보도에 따라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마을을 살펴보면, 백운평(청산리)과 장암마을로 교회, 교회, 가옥전체가 불탔으며 각각 409명과 75명이 살해당하였다. 투도구는 175명이 죽었으며 293채의 가옥이 불탔다. 동구일대는 42명이 살해당하였고 57채의 가옥이 불탔다. 대전자는 40명이 살해당하였고 800채의 가옥이 불탔고 학교 3개, 교회당 2개가 불에 탔다. 송언동은 46명이 피살되었으며 115채의 가옥이 불탔다. 약수동은 271명이 피살당하였으며 57채의 가옥과 1개의 학교가 불탔다. 대모록은 117명이 피살당하였으며 56채의 가옥, 학교 1개, 교회당 1개가 불탔다. 소영자는 166명이 살해당하였으며 56채의 가옥, 학교 1개, 교회당 1개가 불탔다. 허문은 45명이 피살당하였으며 26채의 집, 학교 1개, 교회당 1개가 불탔다. 의란구는 162명이 죽임 당하였으며 154채의 가옥과 학교 3개가 불탔다. 옹성라자는 32명이 피살되었으며 40채의 가옥이 불탔다. 이도구는 40명이 죽임 당하였으며 57개의 가옥, 학교 1개, 교회 1개가 불탔다. 조양하는 19명이 피살되고, 120채의 가옥이 불탔고 학교 2개와 교회 2개가 불탔다. 육도구는 35명이 피살되었고 강간 2명, 기타 상황은 미상이었다. 대교동은 43명이 피살되었고 6강간 6명, 나머지는 미상이었다. 팔도구는 44명이 살해되었고 가옥 50채가 불탔다. 세린하는 6명이 피살되었고, 강간 4명, 가옥 70채가 불탔다.
일제는 토벌에서 살아남은 노약자, 여성, 어린이들이 동북의 긴 겨울의 추위에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굶어 죽도록 대부분의 마을에서 집과 곡물을 불태웠으며 물건들을 약탈하는 비열한 비적의 행위를 자행하였다.
침략자 일제의 통계는 한국 측의 통계 그리고 중국의 통계와 차이가 크다.
일제는 살해당한 사람 494명, 체포 707명, 불탄 가옥 531동, 불탄 학교 25개교, 불탄 교회당 1개소로 피해상황을 자의로 은폐하고 최소로 축소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서간도 지역의 유하, 삼원포, 홍경, 왕청문, 관전, 삼도구, 철령 등지에서 1,323명을 사살하고 125명을 체포하였으며 장백현 일대에서도 한인 212명을 사살하고 4백여 명을 체포하였다.7)
우리는 일본의 거짓 통계를 믿지 않지만, 상해임정이 발표한 피살된 사람 3,664명, 체포 155명, 불탄 가옥 3,520동, 불탄 학교 59개교, 불탄 교회당은 19개소, 불탄 곡물 59,970섬이라는 통계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사실에 가깝다고 믿는다. 그러나 훈춘과 화룡에서 발행된 지역사에 보면 한국인의 통계도 많은 오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독립신문> 87호에서 화룡현의 피살자가 613명, 불탄 가옥 361채, 불탄 학교 8개, 불탄 교회 2개라고 했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화룡현의 피살자 583명, 불탄 학교 6개, 불탄 교회는 없다고 집계하였는데, 김동섭은 ⌜화룡인민의 항일투쟁⌟에서 피살된 수 1,362명, 불탄 가옥 866채, 불탄 학교 10개교, 불탄 교회 3개소로 집계하고 있다.
훈춘의 피해상황 또한 다시 연구,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독립신문> 87호에서 훈춘현의 피살자가 249명, 체포 없음, 불탄 가옥이 457채, 불탄 학교가 2개교, 불탄 교회는 없다고 집계하였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피살자 249명, 불탄 가옥 457채, 불탄 학교는 1개교로 정리하였으나, 양봉송이 편저한 ⌜훈춘조선족발전사⌟에는 피살자 1,124명, 체포 110명, 불탄 가옥 1,094, 불탄 학교 19개, 불탄 교회 7개로 나온다. 이 숫자들을 비교해보면 화룡의 피살자는 749과 779명의 차이가 나고 훈춘의 피살자는 875명으로 더 큰 격차가 난다. 이는 상해 임정의 공식적인 통계 숫자인 3,664명 보다 대략 1,500여 명이 더 많은 숫자인데 우리는 간도참변의 피해자와 일본의 학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렇듯 간도참변, 대토벌과 학살에 대한 기록이 상해 임정,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독립신문 간도 특파원의 보도, 중국 측 기록, 일제의 기록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참변을 조사하고 기록한 시점, 광범위한 지역조사의 한계성, 접근이 어려운 궁벽한 마을의 누락, 기록자 고의적인 가감삭제 그리고 사건 후에 발생한 죽음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간도참변의 역사적 정리는 우리가 끌어안고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
어쨌든 통계는 일제가 일본영사관에 막대한 피해를 준 왕사해와 진동, 만순 등의 토비들을 토벌하지 않고 총부리를 한인 무장독립단체에 겨누고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체포 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의 간도침략과 토벌 과정에서 나타난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만행은 너무 잔악무도해서 필설로 표현하기가 고통스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인들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사르고 약탈한 것은 완벽한 토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이었다며, ‘중국 정부가 봉천회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이 직접 불령선인(독립군)들의 근거지를 뿌리 뽑아야 했다.’고 변명하였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일제의 토벌은 살인과 방화, 약탈이었으며, 그 목적은 한인사회를 초토화시켜서 항일운동의 근거지를 뿌리 뽑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의 간도침략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무장단체를 말살할 뿐 만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의 토대가 되는 한인사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6. 간도참변에 관한 당시 기록
간도토벌, 대학살의 현장인 연변 땅을 밟은 지 어언 3년 6개월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사이에서 학살의 현장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독립유적지를 따라서 정동, 석현, 수남촌, 봉오동, 연통라자, 대황구, 와룡촌, 장암동, 청산리, 걸만동, 소영자, 육도구, 옹성라자, 대교동 등등에 다녀왔다. 연변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알기에 일제의 겨울철(10월~ 4월) 7개월에 걸친 대토벌과 학살, 가옥 방화, 곡물 방화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린다. 죄 없는 백성들이 겪은 고통과 가슴에 맺힌 한을 어떻게 풀 것인가!
간도참변에 대한 당시의 기록 몇 개를 소개하며 눈물을 그 분들의 전에 바친다.
함북노회 제7회록에는 교회의 피해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금당촌 교회 영수 1인, 전도사 2인, 교인 7인 피살, 남별리교인 50명 참살, 감옥에 갇힌 자, 징역선고를 받은 자, 떠난 자, 실종자 이루 헤아릴 수 없음.8)
다음은 박은식 선생의 탄식이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롯하여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사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9)
박은식은 북경과 천진에서 발간된 <태오사보>의 기사를 인용하였다.
간동이라는 곳에서는 일본군이 각 부락에서 14명의 양민을 붙잡아 넓은 들판으로 끌고 가 큰 구덩이를 팠다. 그러고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시켜 장작∙석유 등을 가져오게 했다. 잡아온 14명을 총살하고 화장한 뒤, 백골을 구덩이 속에 던져 버려 시체조차 구별해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중략~
용정촌에서 40리 떨어진 어떤 마을에서는 일본군이 밤 1시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강제로 집을 나오게 했다. 사람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곧 발포하여 한 집에서 2,3명씩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고는 그 시체들을 한군데 모아 불태운 뒤, 다시 집을 불태우고 교회에 불을 질러 건물 19동이 불태웠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가 이 참상을 목도했는데, 새 무덤이 30군데나 되었으며, 고아와 과부들이 무덤을 둘러싸고 울고 있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망자들은 모두 선량한 백성들이다. 혁명운동을 한다는 이들은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피신했으며, 피살된 사람들은 모두 불구자들이나 노약자들뿐이었다.
어떤 선교사는 말하기를 “나배교회가 불탈 때는 한국인 6명이 손발이 묶여 불 속으로 던져졌으며, 소왕교회에서는 먼저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질렀다”고 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주로 기독교 신자들을 상대로 했으니, 무릇 교회가 있는 부락이면 성한 데가 없었다.10)
일제 측 자료는 장암동과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은 화전사 허문동 과 함께 모두 불령선인의 소굴로 불리 우고 있는데 동지방의 영신학교 및 화전사의 배영학교 등을 불령행동의 획책장소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대부분은 예수교신자들이며 불령행동의 주모자들은 모두 예수교 신자들이고 불령행동의 음모는 이 불령자들로 부터 꾸며지고 있다.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 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나라(일본)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 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 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 후 시체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11)
간도토벌 당시 용정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제창병원 원장이었던 마틴은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견문기>를 남겼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들이 야소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마구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 남자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은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볼 수 있었다. ~중략~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 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중략~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고 ~중략~ 큰 나무 아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 였다. ~ 중략 ~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36개와 시체들을 목격하였다. 12)
이튿날 일본군 17명은 다시 장암동에 쳐들어와 유가족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하고 채 타지 않은 시체를 다시 소각하였다. 사건 당일 현장을 조사한 연길현 경찰 제5분소 순경 “총진하”는 장암동참안에서 조선족주민 33명이 사망되고 2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하였다.13)
로이터 통신 27일 상해발신의 글의 일부이다.
동창태에 구금된 한국인 9명을 몇 리 밖으로 옮긴 후,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그대로 죽여 버렸다. 머리를 찍히거나 가슴을 찔러, 피살된 사람 중에는 교회 간부가 3명, 교원이 2명이었다.
이날 경내에서 한국인 교회 하나가 소실되고, 며칠 후 또 교회 하나가 파괴당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군들이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중국인들이 나서서 ‘만일 방화하면 온 마을의 무고한 중국인들에게 까지 재앙이 미친다.’고 강경히 항의했기 때문에 파괴당하기만 하였다.
11월 4일, 또 교회당 1채 성경 등 모든 종교서적이 불타버렸다. 8명을 체포해갔는데, 그 중에서 교원 1명, 교회 간부 2명은 벌써 교회당 안에서 죽었다. ~중략~
중국 경내에서 일본인들이 이렇게 행동하였으니, 중국의 주권을 전혀 무시한 셈이다. 그러니 중국인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이 어떻겠는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14)
중국 동삼성 재경학생연합회가 왕청현으로 부터 받은 글의 일부이다.
또 진주한 일본군대는 모두 마을과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한국의 독립군을 수색했다. 진짜 독립군은 벌써 모두 달아나고, 화는 무고한 백성들이 당하고 있다.
왕청 한 고을에도 각지의 보고에 의하면, 피살된 한국인이 1천명이 넘었으며, 그 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일본군들은 한국인들의 가택을 수색할 때 마다 모든 세간을 뒤진다.
그리하여 글자 하나라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으면, 곧 온 집안 식구를 1명도 남김없이 모두 총살하고, 그 집과 양식을 불태운다고 한다.
왕청∙대감자∙대황구∙탁반구∙대왕청 등지의 한국인 피해가 더욱 심하며, 그 가혹한 수단과 참혹한 정경은 차마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총살하고 생매장하기도 하며 여자는 흔히 칼로 찔러 죽인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는 수백 호 되는 한국인 마을에서 도망한 사람이 겨우 10명이며, 한국인 학교와 교회도 일시에 불탔다고 한다.
11월 20일, 왕청 북쪽에서 한국인 10여 명을, 포승으로 손바닥을 꿰어 잡아끌고 왔다고 한다. 참으로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한 것이다. 15)
경신참변은 악마의 탈을 쓴 일제가 동북아를 식민지 삼으려는 탐욕으로 저지른 잔인무도한 조선인 민간학살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조선과 조선 양반이 힘없고 약한 상민들에게 유산으로 물려 준 준비된 재난이기도 하다.
“아베님,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구호를 외치던 엄마부대 집단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 라이트’ 지식인들과 함께 한 하늘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한 것이다.” 라는 말이 청년들의 가슴에서 공명되기를 빌며 <간도참변>에 학살당한 조상들을 추모하며 그 분들이 꿈꾸었던 소박한 세상을 꿈꾼다.
2019.11.8.금
우담초라하니
각주
1) 간도는 흔히 북간도를 의미하며 현재 연변지구에 해당된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 방향에 있으며 압록강 상류 대안 위쪽에 있는 유하현, 관전현, 홍경현, 장백현 등이다.
2)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에서 윤병석, 안장원은 3만 명, 강룡권은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 발전방략연구⌟ 제 2장 항일투쟁 (상)과 중국당국의 <외교보존서류> 에 기재된 길림성장 곽종희의 <밀자>에는 2만 여명으로 집계 되였다.
3) 1명은 장례식이 끝난 후, 제창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서 순국하였다.
4) 김춘선 저, 북간도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 운동, 471쪽
5) 학자에 따라서 적게는 1만5000명, 많게는 2만 5000명으로 추산한다.
6)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46~453쪽
7) 김춘선 저, 북간도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 운동, 517쪽
8)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75쪽
9)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45~446쪽
10)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54~455쪽
11)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437,439, 441,442쪽
12) 양소전 외 4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207쪽
13) 동상서 208쪽
14)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67, 468쪽
15) 동상서 470, 471ㅣ쪽
참고서적
1)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 서문당, 2019
2)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3) 김광희 외 다수,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4)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5) 박환,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국학자료원,2014
6) 박창욱외 다수,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연변인민출판사, 1999
7) 양소전 외 다수,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 연변인민출판사, 2009
8) 김기봉, 방영춘, 권립 편저, ⌜일본제국주의의동북침략사⌟, 연변인민출판사,1987
9) 김동섭, ⌜화룡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2006
10)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연변교육출판사, 2015
11)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최진동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12)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연변대학출판사, 2018
13) 강룡권 외 다수,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발전방략연구⌟,료녕민족출판사, 1997
14) 김춘선 외 다수,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연변인민출판사, 2015
15) 안화춘, 김철수 외 다수, ⌜연변조선족사 상⌟,연변인민출판사, 2011
16) 김춘선, 김철수 외 다수 ⌜중국조선족통사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첫댓글 간도 참변 역사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