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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 연중 09:00 ~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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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연중무휴 |
관람료 | 어른 2,000원(30인 이상 단체 1,500원) 청소년 1,500원(30인 이상 단체 1,000원) 어린이 1,000원(30인이상 단체 500원) |
주차시설 | 무료 |
500여년 전에 당산에 고려청자 요지가 있었는데 이 근처에 자라던 나무가 남은 것이며 300여년전 폭풍으로 원간이 쓰러지고 밑부분 에서 돋은 맹아가 자란 것이라고 한다.
지상 87cm 높이에서 6개의 가지가 거의 비슷한 굵기로 발달하여 높이 16m로 자랐다. 밑부분의 둘레는 8.16m로써 가운데 부분은 썩었고 그 주위에서 발달한 가지는 사방으로 13.4m 내외로 퍼져 있다.
신목으로서 10여년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제를 지내 왔었으나 지금은 중지하고 있다. 제를 지낼때 제주의 고역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제주가 되기를 매우 꺼렸다고 한다. 7월 7일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나무의 관리 문제를 의논한다고 한다. 나무의 보호에 관련된 전설로는 어느 나무꾼이 가지를 자르고 급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6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개방시간 | 09:00 ~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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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무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없음 |
주차요금 | 없음 |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 8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전시관 앞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도 아무 불편이 없다.
* 참고사항
- 전시관 주차가 전시관과 다산초당 관람에 편리.
- 단체관광의 경우 전시관 안내소에 요청하여 다산초당 안내 받을 수 있고 전시관을 먼저 관람한 후 다산초당 관람이 보다 효과적.
관람시간 | 09:00 ~ 18:00 09:00 ~ 17:00(동절기 1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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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연중무휴 |
주차시설 | 없음 |
사의재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임 이름으로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개방시간 | 09:00 ~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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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연중무휴 |
주차시설 | 무료 |
고성사(보은산방)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1917년 계정(戒定)이 지은 《천불산화엄사사적비》에는 1211년(고려 희종 7)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가 인근에 있는 만덕산 백련사(白蓮寺)를 중창할 때 함께 지은 말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고성암(高聲庵)이라 되어 있다.
특히 1805년(순조 5) 가을 강진군에 귀양온 정약용(丁若鏞)이 머물며 혜장(惠藏)과 교우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요사가 남아 있으며. 이 중 대웅전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의 높이는 138cm, 협시불의 높이는 124cm이고 1994년 복장(腹藏)에서 250여 년전 금색으로 다시 칠하였다는 기록이 나왔다.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와 지장탱화·감로탱화·신중탱화가 있다. 이 중 지장탱화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33년 제작된 것이다. 칠성각에는 4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보은산은 산세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인데, 꼭대기는 소의 머리에 해당하는 우두봉(牛頭峰)이고, 이 사찰이 자리잡은 곳은 소의 목 아래 방울을 다는 부분에 해당하므로 사찰 이름을 고성(高聲)이라 하였다. 옛날 금릉(金陵)이라 불리던 강진군의 금릉팔경 중 으뜸으로 치는 고암모종(高庵暮鐘)은 해질녘 고성암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말한다. 《강진고성암중종시주안서》에 따르면 본래의 종은 19세기에 교윤(敎允)이 주조하였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근래에 새로 주조한 종을 사용하고 있다.
개방시간 | 05:00 ~ 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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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무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무료 |
영랑생가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개방시간 | 09:00 ~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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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무료 |
강진시문학파기념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네티즌 여러분,
시의 향기를 흠뻑 머금고 있는 시문학파기념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시문학파’는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 동인회의 명칭입니다.
당시 참여했던 동인은 영랑 김윤식, 용아 박용철, 정지용,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 수주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 보 등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입니다. 이들 9명의 동인이 1세기여 만에 시문학파기념관이란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국내에 여러 문학관들이 있지만, 이렇듯 특정 문인이 아닌 유파 전체를 한자리에 아우르는 예는 강진의 시문학파기념관이
전국 최초입니다.
시문학파기념관은 한국의 서정시를 이끈 시문학파 시인들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나아가 20세기 시문학의 산실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사계절 내내 시의 향기가 흐르는 시문학파기념관에서 한국 순수 서정시의 진수를 맛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개방시간 | 9:00 ~ 18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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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1월1일,설날,추석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무료 |
백련사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개방시간 | 09:00 ~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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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무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무료 |
백련사동백림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백련사 동백림은 도암면 만덕리 소재 백련사 주위의 경사지 5.2㏊ 면적에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m쯤 되고 줄기 아래부터 가지가 갈라져 관상목으로 된 것이 많으며 주위에는 비자나무, 후박나무, 왕대나무, 차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동백꽃은 초겨울부터 기온에 따라 한두송이씩 피고 지기를 계속하면서 겨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좋은 경관수로 조선시대에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라 하여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또한 이곳 백련사의 동백은 꽃잎을 따 녹차, 밀, 수수, 찹쌀, 보리 등의 가루를 이용하여 전을 부쳐 전차(錢茶)와 함께 간식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썼다는 동백화전은 그 역사가 수백년에 이른다고 전한다.
주변의 관광지로는 고려 후기 8국사의 도량(道場)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8대사를 배출하여 전국에서 명실공히 으뜸가는 명찰로 알려진 유서 깊은 백련사와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6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집필하여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동백림을 지나 800m의 오솔길(좁은 산길)이 있는데 이 길은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초당에 거처할 당시 백련사의 명승 혜장과의 교우를 위해 이용했던 길로 약 20분정도가 소요되며, 이곳은 자연생태 학습장으로 걸어가는 코스로 제격이다.
무위사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서기 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던 사실은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번째 중건인 서기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 만은 최근(1956년경)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보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십이 병신삼월초길 화성"이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 12년(서기 1476년)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개방시간 | 09:00 ~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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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무료 |
전라병영성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조 500여 년간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을 맞아 병화로 소실되었고, 이어 1895년 갑오경장의 신제도에 의해 폐영되고 말았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3.139㎡(28.175평)인데,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병영성 내의 당시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고 없으나 성곽은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의의를 고려하여 2010년까지 정비할 계획으로 현재 복원 중이다. 특히 병영성은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하멜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어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으로서, 주변의 ‘하멜 기념관’과 함께 하멜 관련 역사문화 유적지로서의 역할도 크다.
병영비자나무
비자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으로 학명은 Torreya nucifera Siebold & Zuccarini이다. 이 비자나무는 수령 약 400년으로 높이가 10m이고 가슴높이 둘레가 5.2m이다. 북향 경사지에 있으며 주위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밑에는 자주괴불 주머니가 자란다. 앞에서 볼 때에는 지상 1.87m에서 커다란 가지가 길게 뻗었으며, 뒤쪽에 가지는 짧고 양쪽 가지는 비슷하게 자랐다. 가장 큰 가지의 밑부분 둘레는 2.6m 나 된다.
태종 17년에 전라 병마절도사영을 이곳으로 정했을때 쓸만한 나무는 모조리 다 베어 버렸으나 이 나무는 굽었고 키가 작아서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남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조선 500년 동안 호남지방의 방어 진지였던 병영성이 갑오동란으로 동학군에 함락되어 마침내 폐영될 때가지 이 근처에는 많은 병사가 있었으나 열매를 촌충구제에 사용하기 때문에 잘 보호되어 온 것 같아 보인다. 앞 마을에는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85호)가 자라고 있으며 이 나무는 지금 신목으로 되어 있는 듯 하다.
홍교, 석장승
홍교는 유한계(劉漢啓, 1688-1794) 정승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지개다리이다. 병영면소재지에서 하고리로 가는 길목 배진 강에 개설되어, 일명 ‘배진강다리’라고 한다. 장방형 화강석재 74개를 무지개(홍예)형으로 결구하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다음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는데, 현재 지방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교의 상단 중앙에 돌출된 용머리 조각은 여의주를 입에 물고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인데, 그 모습이 매우 해학적이다. 이러한 다리는 전남지역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병영성 홍교는 그 자태가 우아하여 18세기 다리 중 수작으로 꼽을 만하다. 또한 홍교 입구에는 문인상과 무신상의 석장승 2구가 세워져 있는데, 병영성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듯 늠름하고 야무진 병사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석장승과 홍교,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배진강이 서로 어우러져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한다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 Hamel)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하였다.
타원형의 목조건축으로 지어진 왼쪽의 전시관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며, 오른쪽 각진 형태의 건물은 망망대해에 표류한 조난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상징한다. 전시실은 『하멜보고서』를 비롯하여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 그리고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자매결연 등 각 주제별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있다. 하멜기념관은 1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7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하멜기념관은 하멜의 조선 표착의 역사적 의미 및 17세기 국제 교류사의 조사연구, 유물 전시를 통한 교육, 나아가 한국·네덜란드 간의 문화적 교류 증대를 위해 지역 전문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관람시간 | 연중 09:00 ~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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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신정, 구정, 추석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무료 |
한골목
한골목은 835번 지방도와 동쪽 도로의 병영천 사이에 위치한다. 성남리 118번지 앞에서 지로리 회관 앞까지 약 1.5km의 골목을 가리키며, 골목이 크고 길다 하여 ‘한골목’이라 불렀다. 한골목은 병영성이 설영된 후 촌락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졌다. 특히 한골목은 병마절도사가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통행하던 길이었는데, 이 길의 담장이 높이 쌓아졌던 것은 병사들이 주로 말을 타고 이 길을 다니므로 집안이 다 보여 이를 가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골목의 담장은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빗살무늬 방식으로 쌓아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일명 ‘하멜식 돌담’이라 하여 하멜 관련 유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농촌 개발이 확산됨에 따라 돌담이 훼손되고 점차 한골목의 원형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여, 한골목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곡선을 이루며 길게 펼쳐진 한골목 길을 산책하다보면 고즈넉한 옛 정취에 흠뻑 젖을 수 있을 것이다.
병영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수령이 8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30m, 둘레 6,75m 크기로 나무의 모양이 곧고 아름다워 천연기념물 제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은행나무로부터 약 500m 거리에는 조선 500년 역사의 산물인 전라병영성이 있으며, 병영성 동문 밖 은행나무 근처에서 하멜이 강진에 유배되어 7년간(1656~1663)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어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멜은 병영에서 사는 동안 이 나무 아래에서 떠나온 고국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은행나무 주변 마을에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곳곳에 있어, 이 일대의 유구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오래되고 신령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어 신이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병마절도사가 폭풍으로 부러진 은행나무 가지를 목침으로 만들어 사용하다가 병이 들어 치료했지만 소용없었다 한다. 어떤 노인이 은행나무에 목침을 붙여주고 제사지내면 병을 고칠 수 있다 하여 그렇게 하였더니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5일 자정에 마을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제사지내는 풍습이 생겨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월남사지3층석탑
월남사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월남사지진각국사비
월남사는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창건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각국사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혜심(慧諶)으로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월남사 터에 서 있는 이 비는 절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어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발톱에서 보이는 현실성이나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잘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고종 때로 추정된다.
남미륵사
세계 불교 미륵대종 총본산인 남미륵사는 1980년에 석 법흥 스님이 창건하였다. 이후 법흥스님이 30여 년 동안 새로운 건물을 중창하고, 꽃과 나무로 사찰 안팎을 가꾸어 현재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경관을 갖게 되었다.
현재 남미륵사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황동 아미타불 불상이 있으며, 일주문에서부터 경내에 이르는 길에는 500 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대웅전, 시왕전, 33관음전, 만불전, 천불전, 팔각 13층 석탑, 사각 33석탑, 18m 해수 관음보살, 5m 부부코끼리상 등 아름다운 시설물이 풍동 마을 경관과 잘 어우러져 불자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개방시간 |
연중 09:00~ 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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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무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무료 |
마량미항
마량항은 조선초기 태종조 1417년 마두진이 설치되어 만호절제도위가 관장하였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을 당시 거북선 1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유서깊은 만호성터가 남아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있으며, 고금도와 약산도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주는 마량포구는 1종 어항으로서 천혜의 미항으로 손꼽히고 있다.
낮보다 밤의 정취가 아름다운 이곳 마량미항에서는 매주 토요일 아름다운 항구와 관광객이 하나되는 흥겨운 음악회가 열린다.
금릉경포대
강진의 북쪽 영암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월출산은 옛부터 남쪽의 소금강이라 불리워 왔다.
이 월출산의 남쪽 계곡이 바로 금릉 경포대로 불리는 또 하나의 강진 절경이다. 월출산은 천황봉과 구정봉을 이은 능선을 경계로 해서 그 북쪽은 영암, 남쪽은 강진이 된다. 경포대쪽의 월출산은 산세 가 북쪽의 그것에 비해 아주 순탄하며, 2km에 걸친 계곡은 주변의 기암괴석과 맑은 계곡물로 절경을 이룬다. 그리고 이곳 경포대 계곡에서 천황봉을 지나 구정봉에 이르는 약 3km에 이르는 등산로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현재 이곳은 1988년 월출산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입구에는 전라남도 교육위원회가 설치한 청소년 야영장과 태평양화학에서 조성한 녹차 밭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이 든다는 월출산을 북쪽으로, 구강포와 바다를 남쪽으로, 그리고 수많은 섬들과 갯벌, 산과 하천, 평야 등 자연이란 항목에서 어느 것 하나 빠진 것이 없는 선택받은 곳이라 할 수 있는데, 금릉 경포대계곡 역시 강진 땅이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명승지이다.
설악산과 청송 주왕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암산으로 꼽히는 월출산이 거느린 여러 계곡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하는 금릉 경포대계곡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위치하고 있다.
동해안에 있는 강릉 경포대와 이름이 같아 간혹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금릉 경포대는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첩첩산중에 있는 계곡이다. 월출산의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발원하여 약 2㎞에 걸쳐 흘러내리는 경포대 계곡은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맑은 물과 곡류 그리고 폭포수가 어우러지는가 하면, 계곡물마저 차디차서 여름 피서지로는 더할 나위없는 곳이다.
개방시간 | 08:00~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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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무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무료 |
주차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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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야영장
국보 10호인 무위사와 인접하여 국립공원 월출산 등산로와 경포대 맑은 계곡 등 주변경관이 수려하므로 청소년 심신 수련의 장소로 적합하다.
속박시설 | 30인실 12개, 수용정원 250명(야영 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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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시설 | 강당, 회의실, 야외광장 |
체육시설 | 배구, 축구, 탁구, 체력단련장 |
기타시설 | 주차장(대형5, 소형 10대) |
휴관일 | 공휴일 |
강진다원
월출산은 큰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산세가 뛰어나며 예로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되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번째로 좋은 차라고 극찬한 곳이기도 하다.
월출산 기슭은 해마다 5월 초가 되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색으로 채색된다. 5월의 강진 다원은 취미로 다도를 즐기는 이들뿐 아니라 일반 나들이객들에게도 관광 명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문객들은 단지 관광이나 사진촬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윽한 차 향기에 취하며 녹찻잎을 따보는 이색체험을 할 수도 있다.
인물여행
다산은 1762년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마을(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 고문(古文)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다산은 1776년 풍산홍씨와 결혼하였다. 홍씨부인과 다산 사이에는 6남 3녀의 9남매가 있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하고 2남 1녀만이 살아남았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오늘날의 다산이 있기까지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정조이다. 개혁 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이자 동시에 경전에 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 스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을 위한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배다리를 만들어낸 다산은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 정조로부터 화성(수원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게 된다. 다산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인 화성(수원성)은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의 나이 40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표2서)을 완성하였다. 또한『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얘기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하였다.
1903년 강진의 오백석지가 부유한 김종호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진 보통학교(현 강진 중앙초등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중퇴
1919년 위문의숙 재당 당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하였으며,
1920년 동경 유학시절 박열(학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과 같은 방에서 하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김현구, 차부자, 김길수등과 강진에서 청구 라는 학문 동인지를 발간
1933년 동경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지 창간을 주도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독립 축성회 강진군 단장으로 활약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949년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
1950년 6.25전쟁시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저 9월 29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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