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에 대한 사유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 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p9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p10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p13
오늘날의 시가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의 상실이라는 가장 큰 비극으로 통일되어 있고, 이 비참의 통일을 영광의 통일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 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p36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기가 막힌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참말로 눈을 돌릴 곳이 없다. 우리의 양심의 24시간은 온통 고문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시는 좀 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시의 양심을 지킬 만한 여유는 가여야 할 것 같다. 시대는 언제나 성인(聖人)이 되라고만 하지 시인이 되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을 만들어야 할 때는 성인이 되라고 한다. 이런 유혹에 쓸려들 때 항용 가장 위험한 자위의 시가 나오기 쉽다. p37
시를 쓰기고 어렵지만 시의 독자가 되기는 더 어려운 것 같다. 진정한 시의 독자는 시인이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피상적으로 시의 독자가 있으니 없느니 말할 수도 없고, 시의 독자가 없다고 비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p41
흙은 모든 나의 마음이 때를 씻겨 준다. 흙에 비하면 나의 문학까지도 범죄에 속한다. 붓을 드는 손보다 삽을 드는 손이 한결 다정하다. 낚시질도 등산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이 아우의 농장이 자연으로의 문을 열어주는 주는 유일한 성당이다. p97
“내가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자식이 떨어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파요.” 자식은 자기 몸보다도 더 사랑스러운 것이 부모의 상정이다. 자식의 미련을 청산하기란 자기의 미련을 청산하기보다도 몇 배나 더 어루운 것 같다. 그러나 이 미련도 꺾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p116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 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터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 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본 일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과거 십수 년 동안 문학 작품이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문학 작품이 없는 곳에 문학자가 어디 있겠으며 문학자가 없는 곳에 무슨 문학 단체가 있겠는가. 아마 있었다면 문학 단체의 이름을 도용한 반공 단체가 있었을 것이지만, 이 반공 단체라는 것조차 사실에 있어서는 반공을 판 돈벌이 단체이거나, 문학과 반공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돈벌이 단체에 불과하다. p130
비트의 미학, 이런 미학을 우리 동네의 ‘떡집’ 며느리가 알고 있다. 그녀는 저녁때면 워커힐로 출근을 하는 댄서다. 환갑이 넘은 시아버지는 어찌나 인절미를 지긋지긋하게 많이 만들었던지 손가락 끝이 바둑돌처럼 반들반들하다. 시어머니도 그와 비슷한 변형이 호리병처럼 오그라진 잔등이에 나타나 있다. 아들은 한때 챙이 좁다란, 장동휘가 갠 영화에 쓰고 나오는 모자에 깃털까지 달고 다녔고, 키가 작다고 해도 구두 뒤꿈치를 반 힐처럼 돋우어서 신고 다녔다. 두 내외가 우리 집 앞길을 지나갈 때면, 한때는 우리 내외까지 밥을 먹다 마고 마루로 뛰어나가서 내다보고는 했다. 그들의 필사적인 메이크업과 분장에는 처절한 비장미까지 있다. 마포의 새우젓골로 이름난 완고한 무식한 동네 사람들이 시아버지한테 그 며느리의 칭찬을 할 리가 없는 것은 뻔한 일이다. p154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