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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大한민국
방 안에 모인 사람은 혁명위원회 부위원장 최무섭 중장과 안기부장 권준규, 제1차장 심재택과 김상철 등 넷이었다. 밤 9시, 과천의 혁명위원회 청사 5층에 있는 부위원장실 안이었다.
상석에 앉은 최무섭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러시아까지 가담했다면 이미 근대리아의 강총독 시대는 끝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후줄근한 군복을 입은데다가 덜 깎은 수염이 한쪽 코 밑에 남아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자신감이 풍겨나왔다. 쿠데타는 성공인 것이다. 국민은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중이었고 이제 남은 것은 새 정권이 창출된 다음 물러나는 일이다.
그가 입맛을 다셨다.
「내 입장에서 이런 말하기가 우습지만 총독이 너무 방심하신 것 같습니다. K공작의 정보가 있었다면 철저하게 경계를 했어야지요.」
힐끗 김상철을 바라본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여기 계신 김사장이 한국에 왔던 겁니다. 그래서 이근복을 만나 조직원과 공작내용의 자백을 받았는데 바로 그 다음 날 일이 터진 거요.」
「그쪽도 알고 있었겠지. 김사장이 이근복을 만날 것이라는 것도. 그래서 서둘렀는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말한 최무섭이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솔직히 우리가 공식적으로 도울 일은 없습니다. 이미 근대리아는 미,러,중,일 사국의 지원 하에 새로운 체제로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는데다가 총독은 그대로 직책을 유지하고 있어요. 물론 연금상태로 있겠지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사장을 돕지요. 우리가 해드릴 일이 있습니까?」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한국 정부에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돕는다고 하셨지만 공인이십니다. 폐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만남은 최무섭이 주선한 것이다. 혁명 전에 김상철의 도움을 받았던지라 근대리아의 정변을 듣자 가만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기부장 권준규가 입을 열었다.
「대국적으로 보면 근대리아가 사강(四强)의 위성국이 되는 것이 한국에 좋은 결과가 될 리가 없어요. 구체적으로 미국은 남북한은 물론 근대리아까지 조종하게 되었습니다. 러,중,일은 미국과 이해가 같단 말입니다.」
그가 최무섭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우리 안기부가 맡아 하겠습니다. 본래 이 일은 우리 일이오.」
그날 밤, 12시가 20분이나 지났을 때 세 대의 승용차가 고르지 못한 샛길을 맹렬하게 달려오더니 축사 앞에서 멈췄다. 잠이 깬 젖소 몇 마리가 짧게 울었고 언덕 위의 저택에서 불이 켜졌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김상철이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비탈길을 올라 열려져 있는 저택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김상철은 아버지 김영환 씨와 방 안에 마주앉아 있었다.
「완이는 다시 장모님께 맡기고 갑니다, 아버지.」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데려온 유모가 아이를 잘 봅니다. 유모도 장모님 댁에서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미 정부가 넘어 갔다던데, 무슨 일로 가는 거냐?」
김영환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할 일이 있느냐?」
「예, 아버지.」
「제 주변에서만 해도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빼앗다니, 누가?」
「주인은 한민족입니다. 지금 집권하고 있는 놈들은 열강의 꼭두각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려고 근대리아를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김상철이 상체를 조금 굽혔다.
「아버지, 완이를 잘 부탁합니다. 그저 건강한 아이로만 키워 주십시오.」
「열흘쯤 전에 가보았더니 애가 잘 자랐더라.」
「이곳에서 목장일이나 시키시지요.」
「그때까지 내가 살아야 할 텐데.」
「저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갑니다.」
「알고 있다.」
김영환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재떨이 위에 그냥 던졌다.
「내 아들이 큰일을 한다는 것을.」
「자랑스럽다.」
「아버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이가 젖소를 끌고 갈 때까지 살 테니 마음놓거라.」
김영환이 어깨를 펴고는 머리를 조금 뒤로 젖혔다.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모양이다. 어서 가거라.」
「이것 보시오, 동무.」
방일산이 상체를 곧게 세우고는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난 하준일 동지로부터 동무의 충성심과 공적을 여러 차례 들었소. 그래서 미진한 점이 있더라도 눌러 두었던 거요.」
타운의 중심부로 향하는 차 안이다. 방일산이 옆자리의 이금철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는 안전장치를 확보한 셈이나 마찬가지요. 행정청에 국장 세 명과 이십여 명의 간부급 실무자를 넣은 데다 경비대에도 이십여 명의 간부들을 채용하도록 만들었소. 지도자 동지께선 위대한 승리라고까지 말씀하셨소.」
「그건 압니다, 하지만.」
「듣기 싫소. 아무래도 이동무는 근대리아에 오래 있다 보니까 남조선의 자본주의 물이 든 것 같소.」
이금철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가 내렸다. 홍석규와 오철진이 주도한 친한(親韓) 쿠데타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북한의 조직이다. 방일산을 주축으로 한 북한의 무장세력 1,000명은 경비대원 제복으로 갈아입고 제각기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그 대가로 북한 세력은 행정청과 경비본부의 요직에 자리잡았다. 물론 이것은 미국 측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넘은 오후 2시 경이다. 눈송이가 한두 점씩 떨어지고 있었으므로 운전사는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도망자가 아직도 줄어들지 않고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제는 체포 즉시 사살을 해도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실정이라서.」
「세포조직을 더 철저하게 관리해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것이 동무의 책임 아니오?」
세포조직의 관리는 이금철이 맡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2만 명씩이나 이주민이 도착하고 있어서 숙소가 모자라 공장과 창고에서 합숙을 시키는 상황이다. 근대리아 정부는 수용시설에 맞춰 하루에 5천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지만 북한 정부는 듣지 않았다. 엊그제 근대리아 정부가 승인한 100만 명의 이주민을 최단시간 내에 처리할 작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금철이 북한계 근로자의 성금을 지도자가 약속한 대로 3할로 내려야 할 것 아니냐는 제의를 한 것이다. 방일산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이동무, 기운내시오. 어쨌든 내가 평양에 다시 건의를 해볼 테니까.」
마음이 변한 평양에서 응락할 이유가 없다. 쿠데타 이전만 해도 성금 6할을 3할로 내리겠다던 평양은 갑작스런 쿠데타로 북한의 입지가 일시에 굳어지자 약속을 취소한 것이다. 만일 북한 노동자의 반발이 생긴다면 감찰대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경비대가 동원될 것이다. 경비대 간부 중에 이제 북한계가 여럿인 때문이다.
타운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이금철에게 조덕산이 다가왔다. 그는 이금철의 오랜 부하로 최태호와 같이 근대리아의 개척에 참여했었다.
「위원장님, 오늘 낮에 시내에서 다섯 명을 사살했습니다.」
사무실의 소파에 앉은 조덕산이 대뜸 말했다.
「그런데 놈들이 총을 쏘는 바람에 감찰대도 셋이 죽고 둘이 다쳤다고 합니다.」
입맛을 다신 이금철이 앞자리에 앉았다. 요즘은 저항을 하는 것이다.
「감찰대가 올해 안으로 오천 명으로 늘어날 거야. 스무 명에 한 명씩 감찰대가 붙는다.」
거기에다 세포조직이 있다. 조직위원장인 이금철은 사업장의 세포조직을 총괄하는 위치였다. 이금철이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쥐더니 잔에 술을 채웠다. 낮술이었지만 서너 잔쯤으로는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근대리아 내부의 행정요원과 감찰대의 운영경비가 엄청나게 들 것이다. 그래서 성금은 낮출 수가 없어.」
「그렇습니까?」
조덕산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는 갑니다만 성금이 낮아진다는 소문이 나 있어서 ‥‥」
「하나같이 조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들어온 놈들이야. 4할의 급료만 받아도 북조선의 생활수준보다는 몇 배나 나은데도 불만을 품다니, 그런 놈들은 가차 없이 총살시켜야 돼.」
자신은 방일산에게 건의했다가 무안을 당했지만 수동적인 태도를 부하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금철은 권한과 책임의 상관관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부하들도 책임을 질 줄 아는 상관이어야 그의 권한을 인정하고 따른다.
조덕산이 생각난 듯 말했다.
「근대시의 보카치오 클럽에서 총격전이 있었는데 두 명이 죽었습니다. 김상철의 부하가 반발하다가.」
「바보 같은 놈이군.」
「조선족들이라는데 갑자기 경비대를 향해 쏘았답니다.」
김상철의 사업장은 거의 행정청에 의해 몰수되어 있었다. 북부 지방의 몇 개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관리자가 모두 바뀌었고 조직원 대부분은 산산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김상철의 조직이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했다는 행정청의 발표에 반발하는 세력은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김상철이 재기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러시아는 침묵을 지키고 마피아와 일본의 야쿠자, 그리고 중국의 삼합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자국(自國)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조덕산이 말을 이었다.
「이한이 북쪽 지방을 헤매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이리떼처럼 돌아다닌다는군요.」
그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김상철은 운이 좋은 놈입니다. 자식 데리러 간 사이에 이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김상철은 올 것이다.」
이금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므로 조덕산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김상철이는 돌아온다고 했어.」
「이곳에 말입니까?」
「그렇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무모한 놈입니까?」
「글쎄.」
이금철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가 그 자를 알지. 어쨌든 그 자는 온다. 하다못해 이곳에서 죽을 생각으로라도.」
비행기가 갑자기 고도를 떨어뜨렸으므로 기내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인 데다가 엔진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다시 기체가 쑤욱 떨어지자 승객들의 얼굴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근대공항까지는 아직도 삼십 분이 남아 있었고 이곳은 대평원의 상공이다. 그때 기장의 기내방송이 들렸다.
「승객 여러분. 본 비행기는 기체 점검차 타치스크 임시공항에 오 분 후 착륙합니다.」
비행 스케줄에는 없는 착륙이었지만 기체 점검이라니 가타부타 입을 열 입장들이 아니다. 대한항공 K889편은 이제 평원을 스치듯이 날고 있었다. 앞쪽에서 세 번째인 A-3 좌석에 앉아 있는 김상철에게 남승무원이 다가왔다.
「저를 따라 내리십시오.」
옆에 선 그가 낮게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K899편이 타치스크에 임시착륙을 한 것은 그의 일행을 내려주기 위해서였다. 안기부에서 만들어 준 한국 여권으로 김포공항은 문제없이 나올 수 있었지만 근대공항에는 철벽같은 보안장치와 감시가 깔려 있을 것이다. 아무리 위장에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비행기는 눈에 덮인 활주로를 들어서더니 부드럽게 착륙을 했다. 근대리아에 착륙한 것이다. 근대시는 300킬로 북방이었다.
타치스크는 인구 500명 정도의 조그만 마을이다. 대평원 한복판에 세워진 마을 옆으로 남북횡단 고속도로와 철도가 나란히 지났고 철도역이 있다. 본래 근대리아 정부가 근대시 남쪽의 위성도시로 개발할 작정으로 역을 만들고 공항을 닦았으나 주변에 뚜렷한 산업시설이 없어서 인구가 모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타치스크 공항의 관제탑은 비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 갑자기 통신도 없이 여객기 한 대가 내려앉아 버리는 통에 혼비백산을 했다. 타치스크 마을 안의 경비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부라부라 순찰차를 몰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나름대로 빨리 도착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차에서 내린 경비지서장 민동팔이 활주로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거대한 동체의 에어버스기는 슬슬 머리를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륙하려는 것이다
그는 스무 평쯤 되는 공항 안을 둘러보았다. 유리창은 깨졌고 빈 박스만 어지럽게 쌓인 공항은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올라갈 모양인데요.」
옆에 선 부하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싱거운 자식들입니다.」
입맛을 다신 민동팔이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속도로의 진입로를 대여섯 대의 승용차가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쪽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형님, 북한 놈들이 놈들을 도왔습니다.」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이한이 옆에 앉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북한 놈들은 행정청과 경비대의 간부직에 임명되어 있어요. 한국 놈들과 손을 잡은 겁니다.」
그러자 김상철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한국 놈들이 아니다, 그놈들은.」
「그게 무슨 말씀이오?」
「지금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한국인이야. 이곳에 있는 놈들은 잡종이다.」
이한이 골치가 아픈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형님, 이제 우리만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보다도 못했다.」
「마피아도, 야쿠자도, 삼합회도 모두 등을 돌렸단 말이오.」
「알고 있어.」
김상철이 앞뒤를 둘러보았다. 다섯 대의 차량이 일렬로 늘어서서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중이었다.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인 것이다. 그중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최태호도 있었고 정보와 조직관리의 책임을 맡았던 양성훈도 끼여 있었다. 김상철의 귀국 소식을 안기부로부터 전해 듣자 이한이 모두 모아 영접을 나온 것이다. 차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맹렬히 달려 나가는 차의 엔진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어제는 열차의 정원이 초과되어 이만 오천 명이나 도착했습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행정청장 흥석규가 말을 이었다.
「보름도 안 된 기간 동안에 삼십 오만 명이나 들어왔어요. 이젠 숙소로 사용할 창고건물도 없어요. 내일부터 당분간 이주를 금지시켜 주시오.」
「자재만 대주시면 가건물은 모두 우리 인력으로 짓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방일산이다.
「조립식 건물이니 우리 일꾼들이 나서면 하루에도 수백 동씩 지을 수 있습니다.」
「인력 고용문제도 있어요. 기능별 구분도 아직 덜 끝났고 대뜸 생산사업장에 투입시킬 수도 없단 말이오. 직업훈련원에 보내야 할 사람도 많은데.」
홍석규가 짜증을 냈다.
「서로 협조적으로 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오만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달 말까지 오십만을 채우고 잠시 이주를 대기시켜 두지요. 우린 이미 오십만 명의 준비를 끝낸 상태라.」
오늘이 11윌 20일이니 열흘 동안 다시 15만을 보낸다는 것이다. 흥석규가 옆에 앉은 내무 국장 박태현을 바라보았다.
「국장, 숙사는 어떻게 되겠어?」
「이쪽 말씀대로 조립식 건물은 자재만 대면 금방 지을 수 있습니다만.」
「맡겨주시오. 일꾼 몇 만 명은 금방 동원할 수가 있으니 자재만 대주시오.」
방일산이 다시 나섰다.
「하지만 일당은 주셔야 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이 방을 나가자 홍석규가 문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박태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북한에선 근대리아에 오려고 온통 난리가 났다던데, 높은 놈한테 뇌물을 바치면서까지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상공 국장 이야기를 들으니 사십 대, 오십 대의 가족들도 있다는 거야.」
「인민군 제대자를 우선으로 보내는 모양입니다만, 서두르는 건 아마 식량사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의 앞자리에 앉은 박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조립식 숙소를 짓는데 일손이 달려 이번에 이주해 온 북한 노동자를 몇 천 명씩 일당을 주고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당은 대표부에서 사람이 와서 한꺼번에 받아갑니다.」
「알고 보니 일한 사람들에게 임금을 나눠주지 않고 있더군요.」
「하긴 먹이고 재워주긴 하니까.」
「그것도 우리가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여튼 철저하게 착취합니다.」
총독의 정권을 전복시킨 지 한 달이 되었다. 근대리아의 정정(政情)은 이미 정상 궤도에 올라 있었다. 관광객은 여전히 몰려들었고 밤거리는 활기에 찼다. 4강의 대국이 뒤를 받쳐주는 안정된 정권이다. 외국 자본의 투자는 계속되었으며 사업장도 증가일로에 있었다. 다만 한국으로부터의 투자이민이 한국의 군부 쿠데타 이후로 주춤하더니 근대리아에 정변이 발생하자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유일한 외부 변화였다.
경비본부장 오철진이 방에 들어서자 혼자 앉아 있던 이금철이 예의바르게 일어섰다. 유서 깊은 코즈모프 클럽의 밀실이었다.
「기다리셨습니까?」
자리에 앉은 오철진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오만규와 방일산 등과는 업무상 자주 만나고 있었는데 이금철과는 지금이 두 번째이다. 조금 전에 갑자기 연락을 해온 오철진은 지나는 길에 들르겠다고만 했던 것이다. 이미 탁자 위에 술상이 차려져 있었으므로 그들은 한 잔씩을 마셨다. 오철진은 이금철이 북한계 주민의 세포조직 책임자인 것을 안다. 서열은 근대리아의 최고 간부 중 5위로 제일 낮지만 실무책임자인 것이다. 오만규가 감찰업무로 통제를 하고 방일산이 이주민 수송을 총괄하며 위세를 부리지만 이금철은 빛나지 않는 자리였다. 술잔을 내려놓은 오철진이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어제 오만규 비서가 나한테 이번에 이주해 온 삼십오만 명을 기존의 북한 이주민과 격리시켜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겁니다.」
그는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마 위의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가 말을 이었다.
「근대시와 타운의 외곽에 설치중인 이주민 지역의 규모가 원체 큰데다가 그 일에 쪼갤 병력이 없어요. 그래서 이위원장께서 스스로 해결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하지요.」
그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오만규는 신입 이주민이 기존의 이주민으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다시 술잔을 든 오철진이 보드카를 한 모금에 삼켰다.
「그리고 참, 오늘 새벽에 마카인 경비서에서 불심검문으로 체포한 도망자 75명은 받았습니까?」
「아아, 예.」
「마카인 시가 부촌(富材)이라 도망자들이 그곳 저택의 고용원으로 몰린 모양이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아시오? 한국계 주민들은 북한계 도망자를 고용하려고 한답니다. 중국계나 러시아계보다 두 배나 더 일을 잘한다고 해요. 조선족이나 고려인보다도 낫고.」
「‥‥‥‥」
「그리고 참.」
오철진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김상철이 재기를 노린다는 소문이 떠돌던데. 이십 일쯤 전에 남쪽의 타치스크 시에 대한항공 한 대가 불시착한 적이 있어요. 엔진의 이상 때문에 내렸다가 곧장 올라갔는데 …….」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근대시에 내린 승객과 김포에서 떠난 승객의 머릿수는 맞았어요. 하지만 난 아무래도 꺼림칙해서. 한국 안기부를 내가 잘 알거든.」
「어쨌든 이위원장께서도 조직을 가동시켜서 그놈들의 정보를 모아주시오. 어쨌든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입장 아닙니까?」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보가 있는 대로 바로 전해 드리지요.」
그 동안에 서울에서 강용식 회장과 강미현의 오빠인 강재원이 찾아와 일주일쯤 묵고 떠났고 행정청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유장석도 찾아와 이틀간을 머물다 갔다. 행정청에서는 총독 관저에 총독을 연금시키기는 했지만 이젠 전화도 다시 놓아주었고 우편물도 받도록 했는데 모두 검열과 도청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총독은 날이 갈수록 말수가 없어져 갔고 여위었다. 강용식이 총독을 한국으로 모셔다가 얼마쯤 요양을 시키겠다고 행정청장 홍석규에게 부탁을 했는데 의외로 빨리 허가가 났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총독이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바람에 강용식은 질색을 하고는 두 번 다시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미현은 홍석규의 허가가 빨리 떨어진 것에 총독의 낙담이 더 컸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내보내어 제 아무리 백악관과 크렘린의 문을 두드려도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자신감을 그녀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열한 시가 다 되도록 총독과 강미현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총독은 강용식이 가져온 역사책을 들고 있었지만 책장 넘기는 소리는 오랫동안 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앉은 강미현은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전에는 식사 때마다 한두 잔씩 반주를 즐기던 총독이 반란 이후로는 반주도 뚝 끊었다. 그것도 강미현은 알고 있었다. 총독은 술기운을 빌려 자신의 고통을 덜려 하지 않는 것이다. 철저하게 분노를 씹으며, 뼈를 깎는 듯한 스스로의 고통을 견디다가 할아버지는 쓰러진다. 그것이 할 아버지의 성격이다. 이미 모든 수단과 방법은 강구해 보았고 시도를 해본 터였다. 그리고 이제는 절망이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맺혔으므로 강미현은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응접실 문으로 한씨 아줌마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조선족으로 음식 솜씨가 빼어났다. 50대 중반인 그녀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근대시에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게 되자 가장 찬란한 인생을 보내는 중이었다. 일여 년 동안 관저에서 일한 돈으로 자식에게 가게를 차려준 것이다. 그녀가 다가오자 강미현은 커피잔을 밀어 놓았다.
「가져가세요, 아줌마.」
「저어.」
소파 옆에 우뚝 선 한씨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저, 저녁때 아들놈한테 다녀왔시요.」
「알고 있어요.」
「이걸 가져 왔시요.」
한씨가 치맛단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봉투 한 개를 꺼내었다.
「아가씨께 전해 드리라고.」
「누가요?」
이제는 총독도 책에서 눈을 떼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읽어보면 안다고 했시요.」
강미현은 봉투 안의 흰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금방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섰다.
「할아버지.」
한걸음에 다가간 그녀가 종이를 내밀자 총독이 머리를 뒤로 조금 젖히고는 그것을 읽었다. 다 읽을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머리를 들지 않던 총독이 이윽고 편지에서 시선을 떼었다
「이놈, 김상철이.」
눈을 부릅뜬 총독이 잇새로 말했다.
「이놈이 나를.」
그가 머리를 들어 앞에 서 있는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술을 한 잔 가져 오너라.」
「예, 할아버지.」
숨을 헉 들이켜며 돌아선 강미현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독한 것으로.」
「예, 할아버지.」
12월 20일, 한국의 대통령으로 야당후보인 이대현이 당선되었다. 투표율 78퍼센트에 득표율 61퍼센트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된 것이다. 뒤늦게 선거전에 뛰어든 여당의 대선후보 김종하의 득표율은 20퍼센트 정도였고 나머지 세 명의 후보가 20퍼센트를 나눠 득표했으니 이대현은 한국 역사상 최다득표를 한 셈이었다.
당선발표를 한 다음 날 아침 10시, 과천의 혁명위원회 대회의장에서 혁명위원회 위원장 한기영과 부위원장 최무섭, 함종일 등 간부진 이십여 명이 늘어앉은 가운데 기자회견이 열렸다. 위원장 명의의 중대발표를 하는 것이다. 단하(壇下)에는 내외신기자 이백여 명이 운집해 있었고 TV방송의 카메라가 어지럽게 늘어서 있다. 한기영은 육군 대장의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원고도 준비하지 않았다. 이미 발표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긴장으로 물벼락을 맞은 듯이 조용해진 실내를 둘러보던 그가 뚜벅 말했다.
「오늘 낮 열두 시를 기하여 혁명위원회를 해산하고 정국운영을 대통령 당선자가 구성한 거국내각에 맡깁니다.」
그는 어깨를 펴고 TV카메라를 쏘아보았다.
「본인을 비롯한 혁명위원회 전원은 오늘자로 예편함과 동시에 혁명위원회를 대표하여 본인은 즉시 검찰에 자수, 법의 심판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으므로 기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그를 막았다. 그러자 한기영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것이 TV 화면에 다 잡혔다.
「금방 거기서, 하고 반말한 놈이 누구냐?」
그러자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찍소리 못하는 걸 보니 비겁한 놈이기도 하군.」
그리고는 몸을 돌렸으므로 기자 몇 사람이 뒷모습에 대고 손만 몇 번 저었을 뿐 그는 사라졌다.
짧고 인상적인 혁명위원회 해체성명이 끝나자 최무섭과 함종일은 기자들을 피해 근처의 한적한 일식집에 들어가 마주앉았다.
이미 위원회의 사무실은 어젯밤에 정리를 마쳤고 전역신청서도 부관을 시켜 제출해 놓은 것이다. 두어 번 입맛을 다신 최무섭이 입을 열었다.
「그 양반이 영웅심이 조금 있어.」
그러자 함종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자놈들, 그런 꼴은 처음 당했을 거요. 아주 인상적이었소.」
「어쨌든 혼자 들어가 앉겠다니 남은 사람들 입장도 생각을 해 줘야지.」
「그만해도 다행이지. 어젯밤에 그렇게라도 합의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성명 발표 마치고 총을 뽑았을 거요.」
어젯밤의 회의에서 한기영은 군인의 장렬한 기개를 보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심 없이 일어섰다는 것을 혁명위원회 해체발표 때 꼭 보여줘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회의에 참석한 장군들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다. 그래서 함종일이 제의한 것이 예편과 동시에 혁명위원회 전원이 검찰에 자수하자는 의견이었다. 한기영의 기세로 짐작컨대 TV 앞에서 자살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기영은 자신이 대표로 혼자 자수하겠다고 결심을 바꾸었다. 함종일의 작전에 그가 넘어간 모양이 되었지만 아무도 그 성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엄숙했던 것이다. 함종일이 머리를 들었다.
「최 선배는 앞으로 뭐할 거요?」
「글쎄, 배운 것이 전쟁이고 전술이라.」
쓴웃음을 지은 최무섭이 입맛을 다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일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젠 허탈해. 위원장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니까.」
문득 함종일은 그가 한기영의 자리에 있었다면 TV 앞에서 권총을 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정청장 홍석규는 TV의 스위치를 끄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무식하구만, 저 친구.」
「그러니까 군인이죠.」
오철진이 따라 웃었다.
「약속은 지켰지만 미련이 많을 겁니다.」
「검찰에 자수하겠다니. 뭐, 뒤가 구린 것이라도 있나?」
「글쎄요. 미리 손발을 맞춰 두었을 겁니다.」
그들은 재방송된 한국의 혁명위원회 위원장 한기영의 짧은 성명발표를 보고 난 참이었다.
연말이 다가오는 한겨울이다. 청장실의 창밖으로 무거워 보이는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홍석규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브라운과 이토는 헬기 편대 외에 전투기는 들여오면 안 된다는 거야. 정부에서 강력히 반대한다는군.」
그는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없지. 헬기 편대로 만족하는 수밖에.」
경비대의 항공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총독은 이미 6개월 전에 러시아 공군의 가변익 전투기 MIG-27D 10대와 Ml-24하인드형 공격용 헬기 50대를 구입하는 계약을 했던 것이다. MIG-27D는 지상공격용 전투기로 공대지 미사일과 6총신 23밀리 개토링 기총으로 무장된 최신형이었기에 미국과 일본이 견제하는 것이다. 오철진이 입을 열었다.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하지만 러시아가 언짢아 하겠군요. 전투기를 못 팔게 되었으니.」
「다른 보상이 있겠지. 아마 우리더러 헬기 구매량을 늘리라고 할지도 몰라.」
머리를 끄덕인 오철진이 정색을 했다.
「어젯밤에 마카인 근교의 벌판에서 또 총살형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숫자가 꽤 많습니다. 140여 명이나 돼요.」
「빌어먹을.」
홍석규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예 몰살을 시키지 그래.」
북한의 이주민은 이제 70만 명이 넘는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세포조직의 틀 안에서 기율을 지키며 생활해 가고 있었지만 도망자는 이주민의 증가에 비례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어젯밤의 총살도 감찰대가 도망자를 집단으로 처형한 것이다.
「조필상이를 불러서 단단히 경고를 해. 처형을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고 말이야.」
「이미 그렇게 말했습니다.」
조필상은 경비본부의 보안과장으로 지난번에 북한 측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 사내였다. 홍석규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하긴 북한식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요즘 정부정책에 항의하고 비판하는 것은 모두 남한 놈들이야.」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그런 놈들은 한국으로 추방시켜 버려야 될 것 같아.」
새 대통령이 당선된 한국은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이 격감되어 있다는 것도 그 증거였다. 이제 근대리아는 더 이상 그들에게 희망의 땅이 아닌 것이다.
한 모금에 보드카를 삼킨 천경만은 입을 벌려 더운 숨을 뱉었다. 머리는 헝클어진 데다 씻지 않아서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타운 서쪽의 공장지대 안에 있는 2층 건물 안이다. 본래 행정청의 자재창고로 쓰였던 이 건물은 곧 헐리고 공장을 지을 계획이었으므로 비어져 있었다. 다시 보드카를 한 모금 삼킨 천경만이 앞에 않은 이영복을 바라보았다.
「다 죽었지?」
이영복은 그와 비슷한 30대 초반의 사내였다. 그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천경만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묻은 곳을 알아. 놈들이 매장하는 장소를 보아두었어.」
「곧 다시 파내어서 장사지내자.」
천경만이 흐린 시선으로 이영복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그의 아내 조을순이 감찰대에 총살을 당한 것이다.
「이봐, 기운을 내라우.」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며 천경만이 머리를 떨구었다.
「내가 눈치만 빨랐더라면‥‥」
감찰대의 검색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그는 차고에서 차를 닦고 있다가 들이닥치는 경비대를 보았다. 경비대와 감찰대의 합동수색이었다. 그는 차 밑에 엎드려 있다가 도망쳐 나왔지만 집 안에 있던 조을순은 꼼짝없이 잡혔던 것이다. 이영복은 그의 앞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사내였으나 도망 경력이 천경만보다는 길다.
천경만이 다시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저녁 무렵이었다.
근대리아에 이주온 지 이제 겨우 석 달이 넘었지만 삼 년 같은 세월이었다. 이주올 때만 해도, 그리고 첫 월급을 타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 부부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가방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받은 첫 월급 250달러는 거금이었다. 부부가 합해 500달러를 받았으니 금방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성금 3할을 제해도 350달러면 저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포조직에서 대표부 운영비, 방위성금, 유정호텔 건립비, 김일성 동상 제작비 등의 명목으로 다시 떼간 몫이 4할이 넘었다. 두 부부가 달랑 백여 달러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같이 일하던 중국인과 고려인, 또는 조선족이 월급 그대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을 보자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고 두 달째 월급을 떼인 날 아내의 손을 쥐고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 부부를 마카인의 한국인 저택에 소개시켜 준 사람이 같은 도망자인 이영복이었고 그와는 같은 열차를 타고 이주해 온 인연이 있었다. 한 달 먼저 도망자가 된 이영복이 그를 유혹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영복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 명도 넘는 인민들을 그 자리에서 쏘아죽였어. 그리고는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고 묻었어.」
「‥‥‥‥」
「경비대도 한통속이야. 감찰대에 넘기고 돌아가 버렸어.」
천경만이 문득 머리를 들었으므로 그는 말을 멈췄다.
「이곳이 어디야?」
그는 새삼스럽게 흐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도망자 본부인가?」
수화기를 귀에 댄 브라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웃음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긴 작년 말에도 거창한 망년파티를 했었지, 물론 우리는 주눅이 든 시늉을 했고 말이야.」
그러자 저쪽의 홍석규도 웃었다.
「브라운, 총독은 파티를 하려면 너희들끼리만 모여서 하라고 했다는 거야. 총독 관저에는 들어올 수 없다고.」
「당연하지. 눈에 보이는 모두가 원수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연례행사이고 텔레비전으로 중계가 돼요. 안정되어 있는 정정(政情)을 보여줄 기회도 됩니다.」
「그렇지. 나도 내키지는 않지만 망년파티는 밀어붙이도록 하시오. 총독이라고 하더라도 제가 이젠 어쩔 수 있나?」
수화기를 내려놓은 브라운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홍석규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총독의 춤추는 모습을 보지 않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 시간에 총독은 관저의 창가에 앉아 눈에 덮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여서 그늘이 진 평원 위를 바람에 휩쓸린 눈가루가 큰 파도처럼 지나갔다. 이윽고 머리를 든 총독이 옆에 선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그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다.」
그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눈 똑바로 뜨고 수모를 당할 테다.」
「요즘은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투자가 늘고 있어요.」
장호성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한국 기업들이 조금씩 꽁무니를 빼는 대신 미국과 일본이 들어오는 게지. 모두 상대적이오.」
이제 한 달의 송금총액이 1억 달러가 넘었고 내년 1월부터의 목표를 1억 5천만 달러로 잡고 있는 장호성이다. 이주민 고용자로부터 성금을 받는데다 각 사업장의 이익금, 거기에다 장호성이 별도조직을 운용하여 마약장사를 한다. 또한 위조달러를 들여와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이금철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지만 그것도 막대한 금액이다. 경비대 간부에 공식적으로 북한계가 임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장호성이 건배를 하자는 듯 술잔을 내밀었다.
「이동무,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고생 끝에 영화가 올 겁니다. 난 이 모든 것이 이동무의 공이라고 봅니다.」
「천만의 말씀을.」
이금철이 보드카를 한 모금에 삼키고는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모두 지도자 동지의 영명하신 지도 때문이지요. 저는 보람이 있습니다.」
코즈모프 클럽의 밀실 안이다. 장호성은 근대리아의 자금책으로 모든 자금은 일단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처리가 된다. 오만규가 감찰업무로 행정과 조직을 맡은 방일산과 이금철을 지휘하여 근대리아의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자금을 맡은 장호성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매일 지도자와 통화를 하는 32호실의 실세였다. 북한도 자금을 맡은 자가 지도자와 제일 가까운 것이다. 장호성이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이 동무, 연말도 되고 했는데 …….」
그는 탁자 위에 검정색 비닐가방 한 개를 내려놓았다.
「이건 우리끼리만 압시다. 여기 십만 달러가 들어 있어요.」
「가족도 데려왔겠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이 많을 거요. 연말에 쇼핑이나 하시라고.」
「부부장 동지.」
그러자 장호성이 손을 저었다.
「어허, 쑥스럽게 하지 마시오. 우리 술이나 듭시다.」
술잔을 내민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다 아는 일들이오. 마음 놓으시고.」
연말의 저녁,
크리스마스트리가 조금 후줄근한 모습으로 세워진 거리에 저녁 무렵이 되자 눈이 내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여서 기온은 영하 30도였지만 포근하게 느껴졌다. 장식이 떨어진 트리에 눈이 덮이자 모양이 되살아났다.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표정도 밝다.
김상철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가 얼굴에 떨어지면서 금방 얼어붙었으므로 그는 말아올린 방한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덮었다. 거리에는 행인의 왕래가 많아지고 있었다. 근대시 외곽의 식당이 밀집한 지역이어서 관광객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이윽고 시계를 내려다본 그는 발을 떼었다.
골든브리지는 해산물 전문 식당으로 식당 주인은 중국인이었다. 물론 삼합회와 끈이 닿는 사람이었는데 행정청 관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도 500평 규모의 넓은 홀은 만원이었고 2층의 특별홀에는 경비본부장 오철진이 주최하는 경비본부 간부들의 망년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상철은 골든브리지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사복 차림의 경비대원 서너 명이 현관 앞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대형 유리창 안으로 1층의 홀이 바라다보였는데 저녁 8시인데도 이미 좌석은 만원이었다. 현관으로 다가가던 김상철은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8시 정각이다. 경비대원 두 명이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한두 걸음 다가왔다. 바로 그 순간이다. 2층의 특별홀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리면서 부숴진 유리창과 가구의 파편이 현관 앞까지 날아와 떨어졌다. 이어서 다시 한 번 폭음이 들리자 1층의 대형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두 테이블을 박차고 한꺼번에 밀려나오는 바람에 현관의 유리창이 부숴졌다. 다시 한 번 폭음이 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비명을 질러대었다. 김상철은 정문의 기둥에 등을 붙이고 서서 도망치는 군중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폭발과 함께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던 경비대원 한 명이 문틈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에 밀려나온 모양이었다. 기를 쓰고 현관의 문짝을 잡고 있던 그가 문득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손님들은 아직도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는데 몇 사람은 현관 앞에 쓰러져서 밟히고 있다. 김상철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었다. 그리고는 선뜻 손을 올려 쥐고 있던 권총으로 경비대원을 쏘았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김상철은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제각기 현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도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때 이쪽으로 달려 나오는 사오 명의 경비대 간부가 보였다. 모두 제정신이 아닌 듯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타타타타타.」
부하들이 쏘아갈긴 기관총에 온몸이 뚫린 그들이 몸을 뒤틀면서 쓰러졌다. 김상철이 2층의 계단 밑에 다다르자 마악 아래로 내려오려는 세 명의 사내를 보았다.
「퍽, 퍽, 퍽 , 퍽 .」
연달아 쏘아갈긴 그의 총격을 받고 사내들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김상철은 두 팔을 휘저으며 2층으로 뛰어올랐다. 2층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동쪽과 북쪽의 양면에서 로켓포를 맞은 내부는 성한 부분이 없었고 이미 수십 명의 경비대 간부들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타타타타타.」
뒤쫓아 온 부하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기관총을 쏘아갈겼다.
「오철진을 찾아라!」
김상철이 소리치자 부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는 쉴 새 없이 총을 쏘아갈긴다.
「여기 있습니다!」
부하 한 명이 소리친 곳은 안쪽이다. 달려간 김상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경비본부장의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틀림없는 오철진이다.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고 위장할 이유도 없다.
「철수한다!」
짧게 소리친 김상철은 몸을 돌렸다.
그 시간에 총독 관저에서도 송년파티가 마악 시작되고 있었다.
대연회장에 마련된 일자형 테이블에는 총독과 행정청장이 나란히 앉았고 그들의 양쪽으로 행정청의 16개 국장이 벌여 앉았다. 그리고 앞쪽에 앉은 것이 4강(四强)의 대표를 중심으로 남북한의 대표, 각국의 외교사절들이다. 강미현은 총독의 왼쪽 자리였는데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총독이 걱정되어 참석한 것이다.
건배가 끝나고 총독의 간단한 치하의 말이 있을 때까지 3개의 TV 방송은 생중계를 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미현은 총독이 안간힘을 써가며 자신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씩 총독은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주먹을 쥐기도 했고 입술을 떨기도 했지만 눈치 챈 사람은 없다. 총독이 치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행정청장 흥석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총독이 머리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고 강미현은 놀라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제까지 청장이 치사를 한 적은 없다. 그러나 홍석규는 태연했다. 기자들도 이미 계획되어 있는 듯 카메라를 그에게 맞추었다. 홍석규는 큰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듯 근대리아의 업적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강미현이 시선을 돌려 앞쪽의 외교사절들을 바라보았다. 4강은 모두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북한 대표 서일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대표대리 김달중은 아직 익숙지 못한 듯 굳은 표정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귀청이 터질 것 같은 폭음이 울리더니 테이블 위의 집기들이 넘어졌다.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흔들거렸고 부연 먼지들이 떨어져 내렸다. 좌중이 술렁거렸고 벽 쪽에 붙어 서 있던 관저 경호원들이 우왕좌왕하더니 몇 사람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홍석규는 연설을 그치고는 멍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시선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시 한 번 폭음이 나면서 유리창이 부숴져 내리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연회실의 옆방인 무도실이 폭발한 것이다. 그 순간 이제는 요란한 기관총소리가 났다. 한두 정이 아닌 수십 정이 한꺼번에 쏘아대는 소리였다. 이제 사람들은 서둘러 앞뒤쪽 문으로 달려 나갔고 홍석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반대쪽으로 도망쳐 나갔다.
「할아버지.」
강미현이 총독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아직도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경호원들은 한 명도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행정청의 국장들도, 외교사절들도 마찬가지였다. 총성은 더욱 요란해졌고 이제 넓은 대연회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들 둘 뿐이었다. 다시 폭음이 나더니 부연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총독이 나무토막같이 딱딱한 손으로 강미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김상철이가 온 것이여.」
「예, 할아버지.」
그리고 이곳은 그들의 관저였다.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치라이트를 맞춰!」
기관총을 움켜쥔 이한이 벌떡 일어서 소리치자 총탄이 귀 옆을 스치고 지났다. 관저와의 거리는 150미터 정도였고 차량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관저의 2층에서 비추는 서치라이트가 미친 듯이 이리저리 돌려지면서 총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관저의 정문초소 병력을 전멸시켰으니 관저 안의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이한의 옆쪽에서 흰 빛줄기를 뿜으며 로켓탄이 날아가더니 2층의 서치라이트를 보기 좋게 폭파시켰다. 이제 관저의 무전실과 경비원 숙소, 그리고 경비병이 대기하고 있던 무도장을 모두 박살낸 것이다.
「자, 가자!」
이한은 앞장서 달려가며 소리쳤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근대시 외곽에 있는 북한의 감찰대 본부가 습격을 받은 것도 같은 시간이다. 감찰대는 총독이 집정하던 때만 해도 건물에 '대동강무역주식회사'라는 간판을 붙이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감찰대'라고 바꿔달았다. 무소불위의 위세를 떨치는 감찰대이다. 따라서 그만큼 오만하기도 했던 때문에 정문에는 대여섯 명의 경비병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습격 즉시 사살되었고 최태호가 앞장선 백여 명의 습격대는 기세 좋게 건물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건물은 6층 빌딩이었는데 최태호는 애초 아래층부터 쓸어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가져온 다이너마이트 뭉치와 소이탄을 아래층의 구석구석에 매달아 놓더니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는 밖으로 뛰어나왔다. 잠시 후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아래층이 박살나면서 건물이 털썩 주저앉았다. 금방 6층 건물이 4층쯤의 높이가 된 것이다. 그러자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감찰대원은 몽땅 통닭구이가 될 판이었다.
오만규와 이금철 등이 사건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5분쯤 후였으니 건물이 타오르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들은 타운의 코즈모프 클럽 특실에 모여앉아 망년파티를 하는 중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오만규가 어금니를 물었다.
「건물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건물 안에는 당직근무자 백여 명 정도가 있을 뿐이야.」
그가 부하에게 소리쳤다.
「각 지구에 있는 대원들을 모두 모아라! 모아서 본부로 보내! 경비본부에 연락을 하고.」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부하 한 명이 들어섰다. 뻣뻣하게 굳어진 표정이다.
「비서 동지, 골든브리지에서 회식을 하던 경비본부장과 간부급 전원이 습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무엇이?」
이제는 장호성은 물론이고 방일산과 이금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대체 누가?」
「김상철이랍니다.」
그때였다. 다른 부하가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동지.」
방 안에 있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총독 관저가 습격당했습니다. 경비대가 몰사했다고 합니다.」
이제 사내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김상철이.」
오만규가 잇새로 앓는 소리처럼 말했다.
「그놈이, 기어코.」
「전쟁이야!」
방일산이 자르듯 말하고는 어깨를 폈다. 그는 현역 인민군 중장이어서인지 충격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제일 빨랐다.
「감찰대를 모읍시다. 별거 아니오.」
「너희들은 나가 있어. 그리고 조덕산 동무를 들어오라고 해.」
이금철이 문 앞에 몰려 서 있는 서너 명의 부하들을 돌려보내자 안의 분위기는 조금 진정이 되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한 것 같소.」
장호성이 말했다.
「섣불리 움직이다가 당할지 모릅니다.」
「이것 보십시오. 우린 팔십만 동포에 감찰대만 오천이오. 거기에다 세포조직이 ‥‥」
방일산이 더 말을 이으려는 순간 문이 열리더니 조덕산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도 벽돌색이 되어 있었다.
「동지들 야단났습니다.」
선 채로 그가 말하자 오만규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미 들었어. 호들갑 떨지 말라우.」
「반란이오, 동지.」
「글쎄, 들었다니까!」
「우리 공화국 주민들의 반란이란 말이오!」
조덕산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러자 방 안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무슨 소리야?」
곧 침묵을 깨고 이번에도 방일산이 먼저 물었다.
「주민들의 반란이라니?」
「도망자들이 주동이 되어서 감찰대의 각 지소를 습격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반란에 가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미 대부분의 감찰대 지소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 반동들도 최태호가 지휘하고 있단 말인가?」
오만규가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지휘자는 나야, 동무.」
그러자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모아졌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이금철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북조선 쪽의 작전은 내가 지휘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따라 일어서려던 방일산이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새 권총을 빼든 조덕산이 그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마라, 이 간나 새끼야.」
조덕산이 독기를 띄운 시선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 거머리 같은 놈들.」
조덕산의 옆에 선 이금철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 팔십만 북조선 인민은 근대리아 주민이 된다.」
어깨를 편 그의 목소리는 컸다.
「앞으로는 더 이상 종노릇을 안 하게 될 것이다.」
「이것 봐요, 동지.」
장호성이 불렀으나 이금철은 조덕산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자, 북조선과 당장 인연을 끊자.」
그 순간 조덕산의 권총에서 불꽃이 튀었다. 첫발에 방일산이 맞고 두 번째가 오만규이다. 조덕산은 탄창이다 비도록 쏘아갈기더니 서둘러 새 탄창을 갈아 끼웠다. 앞으로 할 일이 더 있다는 표시였다.
대연회장에 제일 먼저 뛰어든 것이 미친 사람 형상이 된 이한이다. 그는 흰 창이 더욱 커진 눈으로 팅 빈 연회장을 휘둘러보다가 중앙의 좌석에 앉아 있는 총독과 강미현을 보았다. 그 순간 그의 뒤로 십여 명의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섰다. 두 손으로 AKS 74U 기관총을 움켜쥔 채 이한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각하,」
그의 목소리는 커서 연회장을 울렸다.
「저는 김상철의 동생으로 이한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경비병은 거의 몰살시켰습니다. 행정청장 놈도 잡았고 국장 놈들도 모두 잡았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각하.」
건물 안에서는 아직도 총소리가 나고 있었으므로 강미현은 아직 안심이 덜 되었다. 그러나 총독은 머리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이한이 부하들에게 이곳을 지키라고 소리쳐 지시하더니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궁금하군.」
혼잣소리처럼 말한 총독이 샴페인 잔을 들더니 먼지가 술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자 앞쪽으로 버렸다. 강미현이 술병을 들어 그의 잔에 채웠다. 아직도 관저 내에서는 총성이 울리고 있었지만 전보다 부쩍 줄어들어 있었다.
총독이 샴페인 한 모금을 삼키더니 입맛을 다셨다.
「김상철이의 정권탈취 작전이 궁금하단 말이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걸었는지 그것도 알고 싶다.」
「할아버지, 그것은.」
「너, 그놈을 좋아하느냐?」
「예, 할아버지.」
「‥‥‥‥」
「처음부터요. 지금까지.」
그 사이에 어느덧 총성은 그쳐져 있었다.
밤 10시 정각, 정규방송을 중단한 근대리아의 3개 TV 방송국은 일제히 총독의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TV 화면에 나온 총독은 두 시간 전 파티석상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근대리아의 대개혁을 발표했는데 그의 성격대로 간단하고 명료한 내용이다.
그것은,
첫째, 북한 이주민의 해방, 북한 이주민은 근대리아 시민이다, 성금을 낼 의무가 없다, 그리고 감찰대를 해체한다는 것과,
둘째, 반란세력을 일소하고,
셋째, 자주국(自主國)을 고수한다는 것이었다.
발표를 마친 총독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구속에서 풀려난 이남호가 따라 들어섰다.
「각하, 근대리아 전역의 북한계 이주민이 밖으로 뛰쳐나와 환호하고 있답니다.」
이남호가 말했다.
「요점을 잘 짚으셨습니다.」
「모두가 김상철이가 적어준 것이다.」
총독이 메모지를 흔들어 보였다.
「북한계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이 성공한 것이여.」
「그렇습니다.」
「모두 김상철의 작전이다.」
김상철은 근대시의 고구려호텔 특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에 앉은 사내는 전직 수경사령관 최무섭 중장이다. 최무섭이 말을 했다.
「작전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밤 안으로 마무리를 합시다. 적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면 안 됩니다.」
최무섭이 옆자리의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이선생께서는 지원자를 모아 자경단을 조직해 주시오. 현 상황에서 군사조직을 만들 수 있는 조직은 이선생밖에 없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자리를 차고 일어선 이금철이 방을 나가자 최무섭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물론 정국이 안정되면 경비대를 키우고 자경단을 해체해야 됩니다. 자경단은 현재 기능을 발휘시키기 힘든 경비대의 대용일 뿐이오.」
지금 경비대에는 전(前)기무사 참모장 현창복이 풀려난 지 얼마 안 되는 이대각과 장동택을 도와 조직을 재편하고 있는 중이다. 최무섭은 예편 직후 십여 명의 지원자를 모아 비밀리에 근대리아에 왔던 것이다. 갑자기 최무섭이 김상철을 바라보며 웃었다.
「난 아무래도 쿠데타 전문인 모양이오, 김사장님.」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러시아 극동군이 움직이면 야단인데요. 장군님, 그렇지 않습니까?」
머리를 끄덕인 최무섭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 싸움이오, 이제는. 정국이 안정되면 선뜻 군대를 투입시킬 수 없을 겁니다.」
다음 날 아침, 하바로프스크 근교의 러시아 극동군 사령부 안이다. 사령관실에 앉은 로스토프 대장은 볼코프 소장의 보고가 끝나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볼코프, 러시아 대통령이 누구냐?」
난데없는 질문이었으므로 볼코프가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옐친이야, 아니면 프랜든이야?」
프랜든은 미국 대통령이다. 로스토프가 그를 노려보았다.
「공수사단을 대기시키라니, 옐친 그 자는 틀림없이 프랜든의 부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각하.」
볼코프가 한 걸음 다가가 섰다.
「근대리아를 사강의 지배하에 둔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난 몇 달 동안 미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아마 우리는 돈 몇 푼을 얻어먹었을 것이다. 거지 같은 크렘린 놈들.」
「지난번 총독이 우리 MIG-27D 열 대를 계약까지 했는데 이번에 미, 일이 틀어서 취소되었습니다. 그놈들은 철저히 전략적입니다.」
로스토프가 한동안 물끄러미 볼코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볼코프, 우리 공수사단의 출동은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늦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예, 각하. 수송기 문제에서부터 장비 점검, 기상상태 등이 문제가 될 겁니다.」
「근대리아는 언제 안정이 되나?」
「정보원의 보고로는 일주일이면 충분히.」
「일주일 동안 우리 공수사단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길 것 같군.」
「그렇습니다, 각하.」
「그동안 난 체르낸코 국방과 타시르 정보국장하고 이야기를 해보겠다.」
「예, 각하.」
볼코프가 나가자 로스토프는 문득 김상철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난번에는 그를 위해 공수사단을 떨어뜨려 주었던 것이다.
일주일 후 1월 ~일 오후 2시경, 햇빛이 하얗게 비치는 근대리아 공항의 활주로에 대한항공 소속 여객기 한 대가 착륙하더니 게이트로 들어섰다. 대합실에서 안내방송이 들렸다. 서울발 비행기가 도착한 것이다. 김상철이 담배를 입에서 빼고는 재떨이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김봉만이 받아들고는 기둥 옆의 재떨이로 다가갔다.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던 김상철이 주춤 눈을 크게 떴다. 검정색 털코트 차림의 강미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시선이 부딪치자 그녀는 입술을 조금 당겨올려 웃는 모양을 만들더니 그의 옆에 와 섰다. 담배를 버리고 온 김봉만이 당황한 듯 주춤대다가 조금 뒤쪽으로 물러났다.
「웬일이야?」
그가 묻자 강미현은 다시 얼굴에 웃음만 띄웠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코에 스미는 향기는 익숙해진 것이었다.
이윽고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더니 입국자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중에서 이한의 모습이 얼른 눈에 띄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한 여자를 겹겹이 호위하고 오는 중이었다. 여자는 담요에 싸인 아이를 소중하게 들고 있었는데 완이다. 어깨를 펴고 다가오던 이한은 김상철의 옆에 선 강미현을 알아보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들의 눈치를 본다. 박 씨가 김상철의 앞에 다가와 섰다. 그녀의 품에 안긴 완이는 자고 있었다.
그 순간 강미현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섰다.
「아이, 제가 안을게요.」
박씨와 김상철, 강미현 등 셋을 둥그렇게 둘러싼 사내들은 모두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박씨가 김상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강미현이 누군지도 모른다. 이윽고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박씨는 완이를 건네주었다. 익숙하게 완이를 받아 안은 강미현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김상철은 잠자코 머리만을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大尾
후기
애틀랜타 올림픽 창설 100주년이 되는 해에 올림픽을 개최한 미국의 도시, 미국 국기, 미국 대통령, 미국 관중들.
입장식이 시작되었다. 경사각이 심한 스탠드에 바닥을 깔아 선수들을 경기장으로 쏟아 붓고 있었다. 모두 다리를 휘청거렸고 휠체어를 탄 선수 하나는 부축을 받아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코카콜라를 잔에 붓듯이 선수들을 그라운드로 부은 것이다. 엉망인 진행, 올림픽 정신에 코웃음을 친 상술, 폭탄 테러, 그것을 보고 들으며 여러분은 무엇을 느꼈는가? 미국 선수의 우승 가능성이 없는 경기장에는 관중들이 가지 않았고 타국 선수가 우승하면 대부분의 그들은 냉담했다. 그것을 보고 들으며 우리는 서울 올림픽을 회상한다.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한 입장식, 정성을 다해 봉사한 자원봉사요원과 승용차 홀짝제 운행으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 시민들, 정연한 진행과 우승자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 실로 올림픽 정신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던 훌륭한 올림픽이었던 것이다.
미국 시민은 대체적으로 정직한 기풍이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 그래서 겸양의 기운이 조금 적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84년의 LA올림픽과 비교해 보더라도 1996년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 동안에 소련의 붕괴로 동서냉전이 끝이 났고 미국은 초강대국이 되었던 것이다. 정치가가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무능한 사람이다. 그들은 한껏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위상을 과시하여 미국 국민들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려고 했다. 그것이 애틀랜타의 모든 진행과정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제3세계나 공산권의 눈치를 볼 일이 없는데 미국 시민의 희생과 봉사를 요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애틀랜타는 철저히 미국 시민들만을 위한 과시용 올림픽이었고 코카콜라와 맥도널드가 기꺼이 그것을 받쳐 주었다.
한국은 4강(强)에 둘러싸인 분단국가이다. 그들의 이해에 따라 국가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고 더구나 북한은 거의 한 번도 동일민족의 이름으로 우리를 도운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땅, 시베리아의 광대한 땅에 한민족의 새로운 영토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러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일본의 조선인에다 남북한의 이주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근대리아는 한민족의 자존심과 능력을 한껏 충족시켜 줄 새로운 조국이다. 반도의 끝에 위치한 조국은 끊임없이 외세의 압박을 받아왔고 강제로, 혹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또는 국경이 갈리는 바람에 민족은 사분오열되었다. 민족을 지킬 수 없는 땅은 이미 조국이 아니다. 민족이 모인 땅이 조국인 것이다. 우리는 근대리아를 건설할 능력이 있는 민족이다
10권,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매일같이 격려해 준 한뜻출판사의 임명욱 사장, 그리고 여러 직원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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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나라 대통령 당선자도 이러한 위대한 꿈이 있는분이 당선되기를.
소설이라도 대리만족
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 들립니다
또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즐감요
감사합니다 ~~~
서둘러 끝을 내었을까 하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흥미 만점의 소설 즐감이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그동안 즐감하였습니다.
행복한 나날 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넘 잘읽었습니다 다음이기대가 되내요
너무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또 좋은글 기다려자는 글 부탁드립니다. 환절기 건강 하십십시요. 코로나19 무서운것 같습니다. 조심 또 조심! 😊
후련하게 읽었읍니다 한민족의 자존감 을
후련하게 읽었읍니다 한민족의 자존감 을
소설이긴 하였지만
참으로 속이 다 시원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즐겁게 잘봤습니다...
글 만으로도 고맙습니나!
즐독~~~~~~
재미나게 정말로 열독했습니다 새로운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참으로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선도끝나고 영웅시대도끝나고
대리만족을 충분히 채웠읍니다, 감동이었습니다!
기업 경영은 세계1위, 사회생활은 2위, 정치력은 3위의 후진성이네요.
즐감요~~~ !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속이 후련하네요
긴 시간 동안 연재 해 주신 영웅의 도시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그동안 수고하셨고요 다음편도 기대해볼께요
즐감
감사합니다
고조선 옛땅을 찿을수만 있다면 4대 강국과
어께를 나란히 할수있는 국력을 이룰수 있는 능력을
지금은 갖출수 있지 않을까요 ???
그동안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고생 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거대한 스케일과 박진감 높은 스토리 전개에 깊이 빠져 들었읍니다.
읽는 동안 행복했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