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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철학 강의들이 교수가 알고 있는 외국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쏟아 놓는 것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외워 답안지를 작성하고, 문을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한 학기 철학 강좌는 그것으로 끝이 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몇 명의 유명한 철학자의 이름만 남는다. 대학에 들어와 만학의 왕이라는 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가졌던 기대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대신 철학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당혹감, 아니면 실망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상황을 익히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10여 년 가까이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해 오면서 매학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학기 새로운 강의 프로그램과 형식을 시도해 보았지만, 강의를 마치면서 학생들의 강의 평가서를 받아 본 결과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평가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철학의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철학이 현실적 문제들과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대부분의 학생들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흔히들 철학을 평이(平易)한 용어로 쉽게 가르치는 것이 철학의 대중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철학 강좌가 현실을 포착하고 전유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철학적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철학이 어떻게 현실성을 지니느냐?'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의 현실을 포착하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적 대안을 제시하는 이론서라기보다는, 현실을 소재로 어떻게 철학적 사유가 가능한지, 그리고 철학이 현실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하는 철학 교양서이다. 철학 교육은 철학적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 즉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에 목표가 있다. 이 책을 펴내게 된 동기도 바로 이러한 철학 교육의 목적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까 하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고를 훈련할 수 있는 현실적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에 선택된 주제들은 토론으로 진행된 필자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이 많이 선택했던 것들이다. 매학기 시작마다 수강생들로부터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토론 주제를 선정하고 발표자를 정해 일 주일에 한 주제씩 토론식 수업을 진행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토론식 수업이 철학적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강의식 수업보다 철학적 사고를 훈련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교양 철학을 수강하는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대학교 1학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적 쟁점들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현재 중앙일보에서 '논술 길잡이'를 연재하는 데 필요해 고등학교 교과서를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연재를 진행하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논술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것도 이 책을 만든 간접적 이유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차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철학적 주제를 추상화해 내고,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주장과 사유가 가능한지 보여 주고자 했다. 19개 주제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에서 등장했던 쟁점들이다. 이 책은 그 쟁점들에서 등장한 여러 입장들의 철학적 근거를 소개하고 있다. 아마 어떤 독자들은 과학, 환경, 여성, 문화 등과 같은 주제가 어떻게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문제가 없는 곳에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할 수 없으며, 철학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소재도 당연히 우리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소재를 다른 방식이 아닌 철학적으로 어떻게 주제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실을 철학적으로 주제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갖는 첩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논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특정 주제에 대한 여러 입장을 논쟁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물론, 몇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을 취한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를 붙여 각 주제에 대해 철학적 토론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자 했다. 토론은 철학적 사고를 길러 내는 가장 좋은 학교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강의를 하면서 느낀 점 중의 하나가 학생들이 도무지 토론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논쟁을 시켜 보면 대부분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는 데 전혀 훈련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이 책의 본문은 여러 명의 대학 교수 및 강사들이 쓴 글이다.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이나 자연 과학에서 제기된 철학적 문제, 심지어는 환경, 여성 등을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본인 한 사람이 이 책을 썼을 때의 장점도 없지 않으나, 그 분야의 전공자들이 집필할 경우 해당 분야에 대해 보다 정확한 지식을 쉽게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는 그 형식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본인이 썼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에 불충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혹시나 해당 필자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장 인식론
진리란 무엇인가
한전숙: 믿는다고 해서 진리인 것은 아니다. 감각적으로 입증할 수 없거나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진리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진리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네 말이 맞다.“ 또는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이다.“하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생활, 특히 학문적 활동에서 직접, 간접으로 추구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
우선 믿음이 가는 것, 확신이 가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말이 있다. 원시 기독교 시대에, 신생 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들 속에서 제 자리를 잡아 나가려는 어려운 노력들을 하던 시절, 경건한 신앙생활보다는 교리의 철학적 해석에만 골몰하는 일파를 보다 못해 외친 소리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는 죽은 후에 부활하였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하다.“라고 이어진다. '합리적'이란 이성에 합당하고 논리에 합당한 것, 즉 이치에 맞고 논리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이치에 맞는 것이라야 믿는다. 사실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란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귀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요, 이때 믿음이란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설명을 초월한 세계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인 믿음 말고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 즉 확신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솟아올라 낮에는 중천으로 올라가고 저녁이면 서쪽으로 진다'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믿어 왔다. 이것은 매일매일 거듭되는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해가 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요, 사실은 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지구가 그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라고 배워 알고 있다. 또, 나는 어렸을 적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신다.“든가 또는 “뱀은 몇 십 년 몇 백 년 묵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굳게 믿고 있었다. 이것은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말, 결국 남의 말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나면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나 용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다. 내 눈으로 똑바로 본 것도 믿을 수 없고 내가 믿는 다른 사람들의 말도 믿을 수 없다. 그러면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믿음이란 주관적인 확신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견해이지만 엄연히 진리인 것도 있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을 때 그 당시의 사람들은 다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진리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겠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지식은 어떤 조건,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의 세 가지 학설이 있어 왔다.
대응설:“백문이 불여일견“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네가 직접 가 보렴.“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느니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 가 보아서 사실과 들어맞으면 내 말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각이나 판단이 사실이나 대상에 들어맞을 때 진리라고 한다. '들어맞는다'는 말 대신 '일치한다' 또는 '대응한다'는 말도 쓴다. 그런데 판단과 사실은 하나는 관념적. 추상적 존재이고, 또 하나는 감각적, 구체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두 삼각형이 합동이라고 할 때와 같은 경우라면 모르되 이렇게 존재 방식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들어맞는다'든가 '일치한다'는 말보다는 '대응한다'는 말이 좀 더 적합할 것이다.
이렇듯 '판단이 사실에 일치, 대응할 때 진리'라고 하는 견해를 대응설이라고 한다. 대응설은 일상적으로는 모사설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믿고 있다. 가령 앞에 있는 책상이 모나고 노란 색깔이라고 할 때 우리의 시각으로 파악된 표상 또는 관념(觀念, 모나다, 노랗다)은 앞에 있는 대상(對象, 책상)이 사실상 지니고 있는 성질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그 책상은 우리가 지금 시각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모양(모남)과 색깔(노랑)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그 책상을 모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책상이 실제로 모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이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아서 밖에 있는 대상이 조금도 왜곡됨이 없이 그대로 비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식 능력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주장을 모사설이라고 한다.
우리가 마음에 가지는 표상이나 관념은 바깥 대상의 모사라는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대상은 우리의 관념과 일치, 대응한다는 주장이다.
비판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정말 거울과 같이 대상을 언제나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일까?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너무도 무비판적으로 감각적 모사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만 반성해 보아도 우리의 감각이 늘 거울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물론 대상을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하에서라는 단서야 붙겠지만, 그러나 내 감각 기관의 생리적 상태, 조명, 대상의 위치 등등 모든 것이 아무리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인간의 감각 기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인간은 냄새 맡는 데 있어서 개에 비해 뒤떨어진다.
소리를 듣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현미경이나 망원경, 보청기 등 여러 보조 기구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래도 우리 감각의 파악 기능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우리의 감각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모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사설 또는 대응설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사설의 성립 여부는 인간의 감각 기관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고, 감각 기관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는 모사설이 성립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모사설은 순수 이론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모사설이 올바른 주장이려면 관념과 대상의 일치 내지 대응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념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알려면 이 둘이 서로 비교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책상이 노랗다는 나의 관념이 사실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려면 나는 그 책상을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그 책상에 관한 또 하나의 관념을 가질 뿐이요, 책상 자체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 가졌던 '모나다'는 관념과 지금 다시 한 번 직접 보면서 가지는 '모나다'는 새 관념뿐이다. 나는 아까의 '모나다'와 지금의 '모나다'는 두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 관념과 대상 자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적 모사설이 원칙상 성립하지 못함을 밝혀 준다. 우리의 감각은 마치 거울과도 같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므로 관념은 대상과 일치, 대응한다는 모사설의 주장은 이 양자의 일치 여부를 확인할 도리가 없으므로 철학적 이설로 성립하기에는 너무도 소박한 견해라고 하겠다.
정합설:“기존의 지식 체계에 들어맞으면 진리“
대응설은 관념과 대상의 일치를 진리라고 하지만 그 일치, 대응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결국 그전에 가졌던 관념과 지금 가지는 새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 아닌가? 즉, 관념과 대상의 일치를 노리면서도 실제로는 관념과 관념의 일치를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대응설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대응설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이미 본 바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판은 우리의 자식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관념, 지식을 갖는다는 것이요, 우리는 언제나 관념들만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결국 관념의 세계를 뚫고 대상, 실제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경험,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때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가려 낼 수 있을까? 대상, 실재에 비추어 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 더구나 가능하면 옳다고 판별된 체계에 비추어 볼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카메라로 사진 찍듯이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 대상을 책상이 아니라 걸상이라고 안다는 것은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즉, 지금 가지는 지각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과거의 경험의 그물에 비추어서 걸상이면 걸상이라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것이다. 이 과거의 경험의 그물이란 우리가 그 속에서 생활해온, 그래서 이미 통용되어 온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안다, 새로운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무엇이 기존의 지식 체계로 설명이 된다, 이 체계와 부합한다, 거기에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새로 가진 지식이 기존의 지식 체계에 모순됨이 없이 들어맞는가? 어떤가에 의해서 지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주장을 정합설이라고 한다. 정합 적이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순 없이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대응설은 일상생활이나 대부분의 실증 과학에서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진리론 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사실과 일치할 때 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책상은 모나다'든가 '지금 비가 내린다'든가 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지식의 진위를 사실 계에 비추어 보아서 확인할 수 있을 때에만 통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감각적 실증이 가능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옳다고 믿고 있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이 책상은 모나다'와 같이 감각적 검증이 가능한 판단이 아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내 경험이나 내가 믿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의 경험도 미치지 못하는 먼 과거나 먼 미래의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결코 감각적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칭(全稱)판단이나 또는 추상에 추상을 거듭한 고차적인 과학적 판단들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 낼 수 있을까? 정합설은 바로 여기에 적합한 이론이다. 더구나 수학이나 논리학같이 감각적 현실계와 아무 상관도 없는 형식과학(型式科學)에 있어서는 경험적 관찰에 의한 검증은 생각할 수도 없고 오로지 새 이론이 기존의 이론 체계와 정합 하는가에 따라서 그 진위를 가릴 수 있을 따름이다.
비판
정합설은 감각적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형식 과학에만 적용되고 사실 과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제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우선 판단이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적합할 때 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기존의 판단 체계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또 그보다 앞선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정합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히 소급되어 필경은 그 이상 소급할 수 없는 제 일의 판단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이 제 일의 판단의 진리성은 그 이전의 기존 판단 체계와의 정합에서 구해질 수 없고, 이와는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 그 진리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정합설은 그 안에 정합설이 아닌 다른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 된다.
또, 정합이란 두 판단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말하는데, 그러면 정합설은 논리학의 기본 원칙인 모순율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모순율 자체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을까? 물론 복잡한 과학 이론에서 직접적인 관찰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때에는 이미 진리라고 인정되고 있는 기존의 이론 체계와의 정합 여부가 새로운 이론의 진위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순율 자체의 진위가 문제일 때 이것도 정합 여부로 가름할 것인가? 역시 정합설은 다른 어떤 원리의 토대 위에 있다고 하겠다.
실용설:“소 발자국을 따라가니 인가가 나오더라”
미국의 실용주의는 이제까지의 대응설이나 정합설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진리를 고찰한다. 실용주의에서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본다. 그리하여 실용설에서는 지식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거나 실제로 유용할 때 참이라고 한다. 원래 실용주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실험 과학의 방법을 논리적 사고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시킨 것이다.
실험 과학의 명제는 이론적으로 아무리 하자가 없더라도 실험의 결과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즉, 실험이라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명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다.
가령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 생각하고 따라갔더니 과연 인가가 나왔다고 하자. 이때 이 사람의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 하는 생각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져 예상한 결과에 도달함으로써 진리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념,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생각에 그치고, 즉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행동을 통해서 실제 생활에 적용되어 유용하면 그때 비로소 진리로 되고, 유용하지 못하면 거짓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진위가 실제 행동과의 관련에서 가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리를 오로지 이론적인 영역 내에서만 논의하고 있는 앞의 두 진리론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시각이라 하겠다. 즉, 실용주의는 진리론을 인간의 행동, 실천과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론을 현실 생활계에 밀착시킨다는 아주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동시에 실용주의 진리관은 각기 일면적이기만 한 대응설과 정합설을 자기 속에서 종합하기도 한다. 위에서 든 소 발자국의 예에서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는 관념은 실제로 우리를 그 발자국을 따라가는 행동으로 이끌어 간다. 이때 실용주의자들은 관념이 이렇게 행동을 인도해 가는 과정이 아무런 지장이나 모순도 없고 순탄하게 진행되면 그것을 '정합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인가가 발견되는 것은 '관념과 실재의 일치 내지 대응'이며, 이 일치가 바로 유용, 유효라고 한다. 이렇게 고전적인 두 진리론은 실용설에서 인간의 행동, 실천과의 관련에서 새로운 해석을 입으면서 종합되고 있다.
비판
실용설이 현실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만족스럽다'든가 '실제로 유용하다'든가 하는 개념은 아주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진위를 가리는 논리적 기준으로서는 매우 불명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동일한 문제 상황에서 서로 상반되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는데 둘 다 성공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상반되는 두 신념이 같이 참이 되는 것이다.
또, 진리가 이렇게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관념의 진위는 행동을 통한 실제적인 결과를 기다려야 비로소 판정된다는 뜻이다. 즉, 구체적으로 실행해 보아야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 본다(try, test)'는 과정을 밟고서 진위를 판가름 낸다는 것은 힘에 여유가 있다든가 또는 성공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든가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또 무엇이나 다 해 볼 수는 없다. 사실 죽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민족이 한번 망해 봐야 한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해 본다'라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 행동은 시험 삼아 한 번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확신의 기반 위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의 세 진리론은 이와 같이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문제되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그 때 그 때 적합한 진리론을 골라야 할 것이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낙하 법칙(S=1/2gt제곱, V=gt)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세 사람의 대화를 읽으면서, 이들이 진리론의 어떤 입장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지 생각해 보자.
진실: 낙하 법칙이 올바른 것은 그 법칙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만약 낙하 법칙이 실재 자연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의 규칙성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법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법칙이 될 거야.
석규: 글쎄, 낙하 법칙이 자연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을 꼭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갈릴레오가 아무리 수많은 실험을 해서 그 법칙을 만들려 했다 해도 그것은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또 실험에서 경험된 내용이 꼭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진실: 낙하 현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우리의 인식이 그것을 올바로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낙하 법칙은 진리인 거야.
석규: 그건 매우 소박한 사고야. 지식은 우리의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 활동인데, 그러한 지성의 작용을 존재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범주 착오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하자면, 실재 코끼리와 사진 속의 코끼리를 같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진실: 실재 코끼리와 사진 속의 코끼리는 물론 다르지만, 사진 속에 있는 코끼리가 사진의 모델인 그 코끼리인 건 분명하잖아. 인간의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을 개조하는 데 개입할 수 있다면, 과학적 지식이 객관적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네 주장대로라면 낙하 법칙은 물론 인간의 모든 지식이 믿을 수 없는 게 돼. 네가 이용하고 있는 모든 과학적 혜택도 믿을 수 없고.
석규: 아냐! 나는 낙하 법칙과 같은 자연 과학적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야. 내가 주장하는 건, 낙하 법칙이 진리인 것은 그것이 객관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야. 가령 갈릴레오의 낙하 법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결과가 아니라 수학적 계산의 결과라 할 수 있어,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소박한 생각이야. 오히려 기존의 자연 과학적 지식 체계에서 낙하 법칙이 무모순적으로 정합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진실: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만약 하나의 세계관을 독단적으로 상정해서 그것으로부터 인간 지식의 진리 여부를 확인하려 한다면 '독단론'에 빠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지 않아? 예를 들어, 중세에 신의 존재와 절대성을 자제한 세계관에 부합하는 지식만을 진리라 주장한 것은 독단론의 대표적인 사례야. 너는 아마 수학, 기하학, 논리학과 같이 엄밀한 추론의 지식 체계야말로 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말할 테지. 그러나 고대에 말의 이빨 수를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 기하학과 같은 이성적 추리로 알아내려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창민: 야! 너희들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냐? 복잡하게 말한다고 해서 유식한 게 아니야. 잘난 척하지 마! 뭐 그리 복잡할 게 있어? 자연 과학적 지식을 자연 현상에 적용해서 유용한 결과가 나타나면 그것이 진리 아냐? 좋은 게 좋은 거지!
석규: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령, 생체 실험이나 핵 실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유용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희생해야 하는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진리 여부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아.
진실: 그만, 창민이까지 끼어드니까 더 복잡해진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자.
토론해 봅시다
1. 상식도 일상생활에 유용한 지식이다. 그러나 진리와는 구별된다. 그렇다면 진리와 상식은 어떤 조건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2. 대응설과 정합설 중 하나의 입장을 택해 그것을 주변의 예를 들어 정당화해 보고, 상대의 진리론의 한계를 비판해 보자.
3. 실용주의 진리관을 정리해 보고 그것의 한계를 비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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