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와 사대의 사이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
김기덕(건국대 강사)
황제. 천자. 왕
왕조사회에서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칭호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흔히 ‘왕’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은 ‘황제’ 일본은 ‘천황’이라 했고, 그 밑에 각 지역의 통치자로 봉건제후인 여러 ‘왕’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황제’나‘천황’처럼‘왕’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대왕’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왕’이라 칭했다.
중국의 경우 원래 군주 칭호는 ‘왕’또는 ‘천자’였다. 왕은 ‘훌륭한 사람’, 천자는 ‘상제의 아들로서 천명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후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었다. 이후 중국의 최고책임자는 항상 황제라 했고, 이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할 때까지 2천여 년 계속되었다. 흔히 황제는 건설적인 중국의 임금인 삼황과 오제를 한 단어로 줄여서 만든 칭호라고 한다. 그러나 황제의 ‘황’은‘빛이 난다’‘위대하다’‘크다’는 뜻이고, ‘제’는 상제 즉 천계에 살면서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최고의 절대 신을 뜻한다. 따라서 황제는 ‘빛나는 우주의 주재자’라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왕’또는‘천자’대신, 보다 초월적인 절대 신의 의미를 갖는 ‘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는 자신을 지상에 출현한 상제 그 자체로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의 황제는 원칙적으로 천하에 단 한 명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진시황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 조, 짐 등의 각종 용어를 제정하였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중국은 여러 왕조로 이어지며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였다. 중국왕조와 우리나라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왕조는 서로 교류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는 외형적으로 책봉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 졌다. 책봉은 중국이 황제국의 입장에서 우리를 제후왕으로 봉작해 주는 외교적인 의례행위였다.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중국의 왕조는 송, 요(거란), 금, 원, 명이였다. 고려는 국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 형식상 승인을 요청하였고, 중국은 ‘고려국왕’이라 책봉해 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는 중국이라는 황제국에 제후국으로 신속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단지 외교적이고 의례적인 관계였을 뿐 실제적인 구속력은 거의 없었다.
제왕과 왕작의 수여
고려국가는 실제 여러 면에서 황제국체제로 운영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형식적인 국제질서를 인정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하였다. 무엇보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은 ‘제왕’의 존재였다.
고려는 가까운 왕족이나 공훈이 있는 신하에게 봉작 즉 작위를 수여해 주었다. 작위는 공, 후, 백, 자, 남의 5등작이 있었다. 왕족은 5등작에서 상위의 공작, 후작, 백작 3단계까지를 수여해주었다. 그리고 수여된 작위는 다른 나라와 달리 상속되지 않고 자신의 당대에서 그 혜택이 끝났나. 단 왕족의 경우 작위를 가진 자의 자식(아들 및 사위)에게 사도 혹은 사공의 최고관직을 명예직으로 수여하였다.
그런데 고려는 공작, 후작, 백작을 수여받은 왕족과 그들의 다음 대(아들 및 사위) 사도, 사공을 수여받은 자를 총칭하여 제왕이라고 했다. 제왕은 본래 왕작을 수여받은 사람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중국은 황제국이어서 실제 왕작이 수여되었는데, 왕작에는 친왕, 사왕, 군왕의 등급이 있었고 이들을 모두 제왕이라 했다.
그러면 고려는 중국처럼 왕으로 봉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제왕이라 했을까? 고려는 건국 초기에 항복해 온 신라 경순왕에게 낙랑왕을 봉해주고 일부 왕족에게 대왕을 봉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황제만이 수여할 수 있는 왕작을 직접 수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려는 왕족으로 봉작 받은 자와 다음대의 사도, 사공을 총칭하여 제왕이라 함으로써, 실제 왕작은 없었으나 왕작을 수여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냈던 것이다.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제왕’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다. 아울러 ‘친왕’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또 후작을 받은 자를 후왕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봉작제는 황제가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점은 작위와 함께 주어진 식읍에서도 나타난다. 식읍의 구체적인 내용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식읍의 규모와 형식은 중국과 거의 같았다.
이처럼 고려는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제후국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국내에서는 황제국의 제도와 형식을 취한 이중체제로 운영하였다. 이는 당시의 세계국가인 중국과 가장 근접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염두에 둔 외교적 방안의 하나로 이해된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적 위급성이 적었으므로 중국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굳이 고려처럼 이중 체제를 취하지 않고 바로 천황을 칭하였다.
왕실 용어에 반영된 황제국체재
고려의 국가체제는 황제국체제였으며, 고려의 국왕은 실제로는 황제였다. 이 점은 왕실관계 용어가 황제국이었던 중국과 같았던 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국왕의 명령은 성지, 조, 칙, 제라 하였다. 왕위계승자를 태자라 하고 국왕의 어머니를 태후라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진시황이 황제칭호를 제정하면서 황제국만이 사용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기타 복장이나 의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대등하게 하였다. 한편 국왕을 공식적으로 황제라 부르지 않았고, 왕비 또한 황후라 하지 않고 왕후라하였다. 다른 왕실 용어들은 전부 황제국 용어로 하면서, 최고 통치자와 그 부인은 왕과 왕후라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왕과 왕비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쓰고, 역시 황제만이 사용하는 당시 국제적인 연대표기인 연호는 중국연호를 썼다. 그러나 그 외의 왕실 용어는 전부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 묘지명이나 금석문을 보면 돌아가신 왕을 ‘선황’이라고 표현하거나, 당시의 국왕에게‘황제가 만세토록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고려의 백성들은 실제로 고려국왕을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려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칭제건원 즉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한 시도가 두 번 있었다. 제4대 광종은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17대 인종 때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과 칭제건원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킨 묘청은 국호를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황제국을 지향했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제후국을 인정한 고려의‘이중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명실상부하게 황제국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왕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는 것이다. 묘호는 왕이 죽은 뒤 신위를 모시는 종묘의 각 현실에 붙이는 이름이다. 고려의‘태조, 혜종, 정종, 광종...’이나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가 다 묘호이다. 묘호는 첫 글자 다음에‘조’나 ‘종’을 붙이는데, 이러한 조나 종의 묘호 또한 사실은 황제의 묘호인 것이다. ‘조’는 창업한 왕이나 공이 큰 왕에게만 붙이고, 보통은 ‘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창업한 왕인 태조(이성계)외에도 ‘조’가 붙는 왕이 일곱 명이나 되어 어떤 이유로 ‘조’가 붙었는지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창업한 왕인 태조(왕건)외에는 ‘조’를 붙인 왕은 없었다. 뒤에 설명되겠지만 원 간섭기에 제후국체제가 되면 이러한 황제식 묘호인 ‘조’나 ‘종’은 쓰지 않게 되었다.
각종 제도에 반영된 황제국체제
왕조국가의 제도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종묘와 사직이다. 특히 종묘는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으로, 조상숭배와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종묘에서 제사를 모시는 역대 왕들의 수는 황제의 경우 7대조까지 모시는 7묘제, 제후는 5묘제였다. 고려는 성종 때 처음 종묘를 세우면서 5묘를 택하고 있어 제후국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이나,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의종 때 7묘제가 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종묘제도가 다시 정비되는데, 불천지주(영원히 옮기지 않는 신주)와 좌우 각각 2묘씩을 두어 언뜻 보면 5묘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태조만이 아니라 혜종과 현종의 신주도 불천지주였다. 따라서 결국 자연히 7묘제가 되었던 것이다. 황제국체제는 제천 즉 하늘에 대한 제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본래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존재는 황제만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왕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는데, 그것을 원구제라 하였다. 원구는 제천을 하기 위한 제단의 모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늘의 형상이 둥근 것과 제단을 높게 쌓아 하늘에 가깝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려국왕이 제천한다는 것은 고려왕실이 천명을 받았다는 정치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며, 하늘의 신인 상제를 대리하여 백성과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위이다. 뒤에 제후국체제를 취한 조선에서는 무례하다 하여 없앴으나, 고려는 일찍부터 원구제를 거행하였다.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중앙정치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려의 중앙관제는 당제를 받아들여 황제국체제하의 3성6부체제로 운용되었다. 3성이란 조칙을 작성하는 중서성, 그것을 심의하는 문하성, 그리고 이를 집행하는 상서성을 말한다. 6부는 상서성 밑의 6개 부서로 국가행정의 주무 부서였다.
이 외에도 군대가 적과 전투를 하기 위해 출정할 때의 군대편제를 제후국체제의 3군편성이 아닌 황제국체제의 5군편성으로 한 점이나, 수도인 개경을 황도라고도 하고 개경의 내성을 황성이라고 표현한 점등 은 다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각종 제도가 실제에 있어서는 다분히 형식적인 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제국인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하여 있으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외교적 측면에서 제후국으로, 국내에서는 실제로 황제국이라는 이중체제로 운영한 고려의 국가체제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원 간섭기, 제후국체제로의 변화
고려의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후기에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변하였다. 충렬왕 때에 원나라는 자기들과 같은 황제국 수준의 제도와 칭호를 무례하다고 하여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원과 유사한 것은 모두 고쳤다. 당연히 3성체제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왕실 용어도 선지를 왕지로 짐을 고로 사를 유로하는 등 여러 칭호를 바꾸었다. 태자도 세자라 하였으며, 묘호 또한 종을 칭하지 않고 충선왕, 충혜왕처럼 제후왕의 묘호로 강등되었다. 더구나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왕의 이름에 ‘충’이라는 글자를 돌림자로 넣었다.
이와 함께 황제의 입장에서 제후왕을 봉해 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던 봉작제는 폐지되었다. 아울러 봉작에 따른 식읍의 수여 또한 없어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원 간섭기에 와서 고려의 체제가 황제국체제에서 제후국체제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원의 지배를 받는 한 제후국체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 간섭기나 조선의 제후국체제를 사대적인 것으로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 간섭기 때에도 나름대로 고려왕조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지키려고 줄기찬 노력을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오히려 세계제국인 원의 지배 하에서 제후국체제일 망정 독립국가를 유지한 점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의 위상을 제후국체제로 하느냐 고려처럼 실질적인 황제국체제로 유지하느냐는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제후국체제로 정리되었다. 그 결과 비록 묘호는 조와 종의 황제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원칙적으로 제후국체제로 운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점은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명분론과 그 연장으로서의 화이론(중국은 황제국‘화’, 주변국가는 제후국‘이’)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제후국체제라 할지라도 역시 현실적인 구속력은 거의 수반되지 않았다.
과거 식민사관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 즉 황제국과 제후국관계를 전부 우리 민족의‘사대성’으로 설명하였고, 한국사의 굴욕적인 상징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이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외교관계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중국 주변의 수많은 민족들이 사라진 지금, 중국이라는 세계제국 바로 옆에서 항상 독립국가를 유지해 온 우리 민족의 역사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인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새로 만든 원구단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우리도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당시 내용이 수반되지 않는 명분만의 조치였지만, 왕조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황제국 중국과 제후국 조선의 형식적인 관계마저 부정하고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자 한 것이었다. 실로 우리 역사상 고려시대 광종의 칭제건원 이후 처음 나타난 황제체제의 공직적인 선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