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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적 진보의 길>을 연재하며
오래 전부터 나는, 내 안에 낙엽처럼 쌓여 있는 시간의 갈피를 들춰볼 기회를 갖고자 했으나 상황에
떠밀려 흔들거리느라 그리 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차분하게 돌아보고자 결심했으나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성찰의 시간 속에서 길 위를 떠돌고자 한다.
2012년 5월 18일
성찰적 진보의 길
오월이다.
오월에 나는 광주에 왔다.
"오월”과 “광주”를 발음할 때마다 아득한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1980년 5월에 나는 광주에도
서울에도 없었다.
내 육체의 기억 속에는 80년 5월의 대한민국이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 나는 영국 런던에
학생 신분으로 있었다. 세계교회협의회 (WCC) 장학 프로그램으로 영국에 가서 본격적인 유학에
앞서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받고있던 때였다. 1979년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끝나고 ‘서울의 봄’
이 한창일 때, 나는 이제 독재는 끝났으니 바깥
세상을 보겠다고 유학길에 나선 것이다.
서울은 ‘봄’이지만, 아직도 계절적으로는 ‘겨울’인 영국의 찬 바람이 가로수를 흔들고 지나
가던 5월 어느 밤, 나는 BBC에서 오월 광주를 만났다.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 안에서 광주의 봉기와
진압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나는, 뉴스 속의 저 도시가 코리아의 광주가 아니기를, 내가 잘못
들었기를 간절히 소망했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뉴스는 이어졌고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지명들이 내 영혼을 흔들었다. 코리아, 광주, 계엄, 공수부대, 시민군……
그 당시 영국에 한국 유학생은 많지 않았고, 특히 유신을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하였다. 광주가 고립된 섬처럼 갇혀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나는 영국 교회를
다니며 광주에서의 항쟁과 학살에 대해 영국인들에게 설명했고 그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교회 집회에 가서, 영어도 제대로 되지 않는데 광주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말보다 눈물이 먼저
앞을 가려 그나마 말을 잇지 못했다. 실제 몇백명이 죽었는지, 몇천명이 죽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그냥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그 열흘 동안 나는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뉴스에 집중했었다. 비록 육체는 멀리 있으나 내
영혼은 광주의 금남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월의 ‘그 열흘’ 이후였다.
광주는 그 열흘 동안 숭고한 감동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패배가 분명한데도 끝까지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1980년 5월27일
새벽의 전남도청이었다.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남아 저항을 했을 때의 역사와 패배가 너무나
명백하기에 그냥 백기를 들고 계엄군에게 접수되었을 때의 역사를 도청의 시민군은 선택했어야 했다.
그 선택 앞에서 고뇌했을 시민군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그 새벽, 전남도청의 시민군들은 총을 든 죽음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 새벽 광주는 패배했다. 하지만 내용과 깊이를 가진 패배였기에 진정한 패배는
아니었다. 시인들이 그들의 죽음을 ‘화엄’이라고 노래한 데에는 바로 그런 까닭이 있다.
얼마 전, 유럽을 다녀왔다.
비행기가 조국의 대지를 박차고 오를 때, 나의 먼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수없이 많은 길들로 이루어진 내 안에 쌓인 시간들. 그 시간의 두툼한 부피를 생각하며
나는 어디로, 무엇을 위해 떠나는 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매 순간 지구의 하늘 위에는 십여만 명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이다. 어느 한 군데 정착하던 시대는 이제 저물었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디지털 유목민의 시대가 와 있다
스마트폰, 아이패드를 들고 지구의 이편에서 저 편으로 마음껏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촌 시대라는 낡은 수사가 아니더라도 이미 지구는 좁아졌고, 하나의 국가를 영역으로
삼았던 경제도 새로운 시장과 생산지와 일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유목하는 시대로 벌써
전환되었다. 유럽의 비행기 안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앉아 있었다. 영국에서 유학할 때, 아프리카계의 사람들, 아랍계 사람들, 유스호스텔을
꽉 채우며 떠돌고 있는 중국계 사람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이동은 인류의 숙명이 되었다.
게르만 민족주의로 상징되던 독일 축구대표팀에도 어느덧 폴란드 태생의 선수와 아프리카
태생의 흑인선수가 함께 뛰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는 이미 일국주의를 넘어섰다. 하나의
국가 안에서 영위되던 문화와 노동의 영향력은 이미 국가의 경계를 넘어 지구촌으로 확대
되었고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와 문화 또한 세계성을 획득하고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는 여전히 반국적 상황에 놓여 있다. 한반도 전체를
상상하지 않고, 한반도 남쪽만 상상하는 정치의 시대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이다. 이분법적
으로 좌우를 가르고, 오직 내 편이 아니면 적만 존재하는 정치.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옳은
생각도 좌우의 이분법적 프레임 안에서는 허탈해지고 마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1+1=2>는 진리에 가까운 수학적 명제이다. 그러나 반국적 정치상황에서는 누가 그 명제를
제시했느냐에 따라 1+1=2는 좌가 되기도 하고 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맹렬하게 공격당한다
온갖 해석이 붙으며 이데올로기의 지향에 따라 1+1=2 조차도 너덜너덜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반국적 정치상황에서 자유로운가?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5월, 광주에서 나는 “가지 않은 길” 앞에 서 있다. 가지 않은 길의 입구에
<성찰적 진보의 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광주 영령 앞에서 <성찰적 진보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진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고정된 가치도 아니다. 절대적 진리도 아니며 위대한
명제도 아니다. 진보는 매순간 스스로를 혁신하며 새로운 가치를 지향할 때야 겨우 획득된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하루 스물 네 시간 동안 온전히 진보일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진보적
판단을 내리고 어떤 경우에는 보수적 판단을 내리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자연인으로서 개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라면 문제는 약간 달라진다. 적어도 진보적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의 생을 담보하는 진정성의 바탕이 있어야 한다.
성찰적 진보의 길은 좌우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생명 평화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 길의 대부분을 나는 가지 못했다. 인생에는 수많은 오솔길이
있고, 오솔길마다 지나온 자취가 오롯이 담겨 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을 바라보면서 오솔길을
더듬으려 한다. 지나온 시간의 자취가 찍힌 그 오솔길들의 풍경을 개인 블로그에 연재하고자 한다.
성찰적 진보의 길이 부디 새로운 길이기를 소망하면서……
연재 2 : <책임면제철>
2012년 5월 21일
지난 4.11 총선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원래는 이기는 선거였다. 작년 말 우여곡절 끝에 야권
통합을 이룬 뒤, 민주통합당에 대한 기대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지지율이 한나라당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러나 선거국면이 시작되면서, 특히 공천이 진행되면서,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심정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지원유세를 했다. 그리고
패배했다. 정치에서의 패배는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총선의 결과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백의종군의 자세로 최선을 다했으니 아무런 책임도 없는가?
선거국면에서 민주통합당이 보여준 행태는 한마디로 교만이었다.여론조사 지지율의 상승을 승리로
착각한 것이었다, 국민이 뭘 바라는지는 머리 속에 없었고, 껍데기 뿐인 가짜진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당론도 아닌 FTA폐기를 공론화했고, 복수다, 한풀이다, 막말을 해댔다. 공천과정에서
나타난 강자의 횡포는 도를 지나쳤다. 국민은 아직 권력을 주지도 않았는데 마치 권력이 손 안에
들어 온 것처럼 오만방자해진 것이었다.
국민들의 눈은 무섭다. 아직 권력을 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던 것이다. 자기들 욕망을 챙기기에 급급했던 공천과정에서 국민들은 민주당의 욕망이
새누리당의 욕망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관악구 야권단일후보
경선에서 보여준 통합진보당의 여론조작에서는 그 추잡한 욕망의 극치를 보았다. 보수냐 진보냐의
지향만 달랐을 뿐, 욕망의 형태는 보수나 진보할 것 없이 철저하게 같았다는 데 국민들은
그만 질겁하고 말았다. 더구나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의 부정과 순위조작에 관한 의혹을
보면서 <진보행세주의자>들에 대해 깊은 절망을 느꼈다. 진보의 가치와 내용은 우리 사회를
혁신하고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진보 행세의 ‘좌파수구’적 행위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소위 진보진영은 정권심판과 민간인불법사찰에만 매달린 나머지 자기 안의
부정과 오류에 대해서는 눈 감아 버렸다. 이제라도 부정과 오류에 대해 철저한 반성과 동시에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실패는 스스로 자초한 면이 많다. 노무현의 위기 때에
범진보진영은 서둘러 분열하고 절망해버렸다면, 이명박의 위기에 범보수진영은 일치단결하여
위기에 맞섰다. 민주당을 말 바꾸는 정당으로 몰아붙였고 자기네들이 민생을 챙긴다고 선전했다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고, 남의 둥지에 알을 깐 뻐꾸기같은 행태였지만 어쨌든
그 전략은 성공했고 총선에서 승리를 가져갔다. 그 책임을 나부터 통감하고 스스로를 혁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내 잘못이요” 라고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이다.
패배에도 깊이와 내용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책임을 통감하는 것은, 이번 패배는 깊이와
내용마저도 없는 패배였다는 사실이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가짜 진보,
좌파수구적 진보에 깊은 절망을 느낀다. 신동엽의 시처럼 껍데기만 남은 진보는 이제
깃발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알맹이만 제대로 남아 국민들과 함께 성찰적 진보의 길을 가야 한다.
군대 시절 어느 날이 떠오른다.
인사장교가 나를 불렀다. 박스로 포장된 뭔가를 내밀면서 부대 밖에 있는 자기 집에 갖다 주라고
지시했다.박스 안에는 분명 부대에서 빼돌린 물품이 들어 있었다. 열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나는 당시 전방 병기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육군 사병으로, 계급은 상병이었지만 직책은 병기
보급계로 부대 내의 웬만한 사정은 환히 꿰뚫고 있었다. 당시 군 부대에서는 보급품을 빼 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우리 부대는 병기부대로 자동차 부품 등, 돈 되는 보급품이 많은 편이었다.
“못하겠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인사장교의 얼굴이 붉어
지더니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쳤다. “너 반항이야?” 나는 꼼짝 안했다. 인사장교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쥔 비망록을 팽개치고 두 손으로 힘을 모아 내 가슴을 밀쳤다. 나는 뒤로 밀려났다가
다시 제 자리에 다가섰다. 이번에는 손으로 뺨을 때렸다. 나는 꼼짝 안하고 서 있었다. 인사장교
는 분을 참지 못하며 두 손으로 계속 뺨을 쳤다. “이 새끼 서울대 나오면 다야? 니가 뭔데 상사의
명을 어겨, 이 건방진 새끼!” 드디어 ‘쪼인트’가 날라 왔다. 연거푸 날라오는 ‘쪼인트’에 나는 주저앉았다
주저앉아 고통을 참고 있는데 인사장교가 던져버린 비망록이 보였다. 내 눈에 들어온 비망록의
표지은 그것은<책임면제철>이었다. 인사장교는 그 <책임면제철>을 집어 들고 나를 한참 노려보더
니 거리며 나가버렸다.
그 인사장교의 모든 업무의 목표와 기준은 자기책임을 면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점호하는 것도,
인원에 문제가 생기면 징계를 받으니까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고, 훈련을 시키는 것도 나중
에 감찰지적을 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병영내 시설을 보수하는 것도 유지보수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고, 비망록은 나중에 책임추궁 당할 일이 없도록 사전 사후 점검을 위한 기록이었다.
사람은 모순투성이의 존재다. 대개의 사람들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대충 넘기려고 든다. 그러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평가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이
번 총선에서 나 자신도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뭔가 잘못 돼가고 있다고 느끼면
서도 ‘그래도 잘 되겠지’ 하는 안일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으면 미리
처방전을 내놓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작년말 야권통합후 국민의 지지가 올라갔으면
그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우리가 더욱 겸손했어야 하는데, 우리 당이 연이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도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도부에 속하지 않고 있으니 내 책임이
아니라고 피해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대개 삶에서 자기 책임을 면하려는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앞에서 언급한 인사장교처럼
책임면제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 인사장교의 경우에는
오히려 사회적 약자가 자기생존을 위해서 예방적인 조치를 취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는, 약자가 자기방어를 위해 취하는 책임면제가 아니라, 강자의 위치,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잘못을 저지르고도 후안무치하고 뻔뻔하게 자기책임을 외면하는 경우를 적잖게
본다. 책임회피는 둘째 치고,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행위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는 진심으로 상식과 교양이 필요하다. 위선으로 포장된 원칙과 신뢰가 아니
라,누가 보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상식과 교양이야말로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내면의
통제장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상식과 교양으로 볼 때
무한책임을 져야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다. 이번 기회에 나도, 내면에 만들어져 있을지 모를
<책임면제철>을 버려야 한다. 내가 아무리 책임을 면하겠다고 이불 속에 머리를 틀어박고 “나 숨
었다”해도 사람들은 밖에 드러나 있는 내 몸통을 쓴 웃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의
모습은 더욱 그렇다. 나는 나를 보지 못해도 세상은 나를 본다.
이미지는 결코 스스로 깊어지지 않는다.
그냥 이미지일 뿐이다.
성찰적 진보의 길 제3화 <내 마음의 책임면제철>
2012.5.23
스스로에게 아픈 질문 하나를 던진다. 내게는 <책임면제철>이 없는가? 이번
총선의 패배에 대한 나의 책임면제철은 ‘나는 지도부가 아니었다’ 라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당 대표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내 책임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역시 책임면제철을 사용한 적이 꽤 있었다.
‘내 탓이오’가 아닌 ‘네 탓이오’ 라고 미루고 책임을 회피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나는 민자당 소속으로 국회에 들어가서 당명이 바뀌는 데 따라 신한국당
, 한나라당에 있다가, 지난 2007년에 탈당하여 잠시 “선평연”을 조직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만들다가 지금의 민주당에 합류했다. 한나라당 전력이
지금에 와서는 ‘주홍글씨’가 되어 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그 ‘주홍글씨’가
자주 나를 아프게 만들었다.
유신체제가 끝날 때까지 나의 삶은 온통 박정희 독재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고난
의 길이었다. 감옥 가고, 고문당하고, 수배 생활 속에 위궤양에다,
허리, 목 디스크까지 얻고…… 정보부와 시경, 치안국 분실, 동대문 경찰서를
옆집처럼 드나들었다. 20대와 30대의 모든 청춘을 오직 민주주의에 바쳤는데
어쩌다 ‘한나라당’이라고 하는 원죄에 갇혀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지나온 삶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한다고 해서 지나온 시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직선적이고 성찰은 곡선적이다. 아무리 성찰을
통해 과거를 돌아본다고 해도 이미 흘러간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짚고 지나가기는 해야 한다.
맨발로 가야만 하는 길이더라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이기에……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1993년 봄, 광명에서 보궐선거가 있었다. 광명시는 과거
경기도 시흥군 서면으로, 내가 태어난 동면의 옆 동네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서면
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셔서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 당선 직후부터 안가 철폐다, 청와대 앞길을 개방한다,
인왕산을 개방한다, 하나회 척결이다, 부패 정치인 구속이다, 토사구팽이다 등등 개혁의
열풍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였다. 뒤이어 시행된 금융실명제도 이미 예견되고
있던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90%를 넘기고 있었다. 내 마음은 설렜다.
나도 정치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꿈틀댔다. ‘개혁’이라는 명분이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망을 자극한 것이었다.
주저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가 아무리 최초의 ‘문민’정부이고, YS가 DJ와
함께 민주화의 양대 산맥이라고는 하지만, YS정부는 군사독재의 산물인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민주공화당과의 3당합당으로 태어난 민자당 정권이 아닌가? 더구나 개인적으로는
서강대 재직 당시 김대중 후보를 강의에 초청해 통일에 관한 특강을 청해 들은 일까지 있었다.
김대중 총재는 대선 패배 후 나를 동교동 자택으로 초청하여 조찬을 나누며 강의 초청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고, 나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총재에게 그동안 닦아온 뜻과
경륜을 펴지 못하게 된데 대해 아쉬움을 표해 경의를 다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빨랐다. 그동안 내가 고민하고 투쟁해 온 뜻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싶었다. 당시 운동권 선후배들이 13대, 14대 국회에 이미 진출해 있었지만,
솔직히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청춘의 날들을 오직 투쟁의 시간으로
채웠고,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민주주의는 왔으니 더 넓은 세계를 보겠다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 포부를 펼쳐 보이고도 싶었다.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망이 보궐선거를 계기로, 개혁을 명분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김대중 총재의 정계은퇴
선언이 민자당으로 가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스스로 덜어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욕망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여, 욕망을 악의 영역으로만 분류해버린다면 세상에는
마하트마 간디 같은 성인만 존재해야 마땅하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은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다. 욕망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고, 욕망의 내용과 목표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만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의 내 욕망이 선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또 하나의 욕망이 있다. 이제는 제발 그 ‘주홍글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말이다. YS 정권 초기의 개혁 열풍 속에서 민자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대통령으로서 지난 정권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차별성은 희석되었다. 특히 YS가 힘이 빠지고 구 민정계 세력이 당의 중심이 되면서 개혁은
퇴색하고,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수구적, 권위주의적 행태가 되살아나면서, “개혁 위해 나섰다”는
나의 선거 구호는 빛바랜 휴지 조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도 한참 건넌 뒤였다. 나는 이미 진영논리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고, 그 진영 내에서 생존하고 성장하기에 급급했다. 한나라당의 모든 것은 선이었고 대선
출마를 다시 선언한 DJ는 악이었다. 정치는 여야 대결구도라는 논리 속에, 내가 처한 상황에
충실한 것이 나의 정치적 언행의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었다. 대변인으로서의 손학규는 김대중과
야당을 갖은 논리로 공격하는데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상황논리 속에서 나
자신의 합리화에 급급할 뿐 만 아니라, 스스로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나갔다.
진영논리나 상황논리는 성찰을 가로막고 책임을 변명으로 돌리기에 가장 쉬운 논리적 근거로
작용한다. 진영과 상황에 갇혀 있으면 다른 게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최면술에 홀린 것처럼
자기정당성만 강조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보면 분명히 부당한데 본인은 자기정당성의 논리
안에 갇혀 책임을 면제받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스스로를 보수 안의 진보라고 규정하고, 한두 가지 진보적, 개혁적 언행을 방패로 내
안에 자기정당성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었다. 한나라당에 있으면서도 제왕적 총재에 반대해
당내민주화를 앞서 주장하여 당의 주류로부터는 왕따를 당했고 지도부로부터는 핍박을
받았으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경기도지사의 위치에 있으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찬성하고, ‘햇볕정책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만으로
나는 내 마음 속에 책임면제철을 쓰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는 2007년, 내가 걸어왔고 걸으려했던 본래의 나의 길을 가기 위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지금의 민주당에 합류했다. 그것으로 그때까지, 아니, 지금까지 써 온 책임면제철이 깨끗이
지워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나는 책임면제철과 상관없이 내가 걸어온 길을 성찰하며 앞으로 걸어갈 길을 무겁게
응시해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걸어왔던 길을 지금의 상황논리에 묶여 억지로 부정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또 다른 책임면제철을 쓰는 위선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책임면제철이라는 내면의 자기옹호를 버리겠지만 과거의 선택을 모조리 부정하는 위선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에는 자기희생과 헌신의 구간이 분명이 존재한다. 그 구간은
내 청춘의 전부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또 나는 앞을 본다. 내가 가야할 길이 비록 가시밭길을
성찰적 진보의 길 제 4화
헌법과 교육
2012. 5. 27
헌법 제31조 ①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어떤 소설가가 일 년에 한 번쯤은 대한민국 헌법을 차분하게 읽어본다는 말을 했었다.
‘간결한 표현들로 채워진 헌법의 언어들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라는 소설가의 말
을 듣고, 그 후로 나도 가끔 생각이 막히면 헌법을 들춰 보곤 한다. 헌법을 읽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진보의 내용과 가치가 모두 담겨 있다는 그 소설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지난 4월 25일 늦은 밤 나는 핀란드 헬싱키에 도착했다. 착륙 전 헬싱키 상공을 선회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헌법을 찾아 교육에 관한 제31조를 다시 읽었다. 이번 핀란드의 방문
목적이 교육현장을 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교육이 우리 헌법에서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를 먼저 보고자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교육이란 국민의 권리임을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 교육은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라는 헌법의 조문이 새삼스러웠다. 교육에 대한 우리 헌법의 정신은
분명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헬싱키의 라또까르따논 학교. 1학년부터 9학년까지 함께 하는 기초학교인데 각 교실마다
각양각색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놀이터 같았다.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저학년 아이들, 온 몸을 물감으로 뒤집어 쓰고 열심히 그림 그리고 있는 아이들,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둥그렇게 둘러 앉아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는 아이들,
공작실에서는 대패질하는 아이들, 콜라 캔을 바퀴로 하고 밧데리를 달아 자동차를 굴리는
아이들, 음악실에서 드럼치는 아이들, 부엌에서 케익 만드는 아이들, 가사실에서 재봉틀에
앉아 자기가 입을 옷을 만드는 아이들…… 선생님은 아이들 속에 섞여 있어서 누가 선생
이고 누가 학생인지 언뜻 구분이 안 되었다. 학교 전체가 귀신들의 잔치집 같았다. 이
아이들이 전세계 학습능력 1위라니! 혼돈 속에 존재하는 정돈된 질서, 자율과 창의성을
나는 핀란드의 학교에서 보았다.
핀란드 교육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교사들의 위상이었다. 어떤 아이가 우리를
안내하는 교감선생 팔에 안기면서 몸이 아파 집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 선생님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저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서 저런다고 내게 귀띔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 말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겨있다.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에게는
다른 놀이를 시키는 프로그램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핀란드에서 학교 교사는 가장 인기가 있는 직업이라고 한다. 대학원을 나와야 교사 자격이
주어지는데,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지망하는 직업이다. 대우가 최고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고,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생각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 입학원서를 쓰는데 어머니가 사범학교에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형과 누나가 ‘사범학교는 고등학교 과정’이라고 말하니
어머니가 물러나셨다. 삼 년이 지나 고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가 또 ‘사범학교에 안
가느냐?’고 물으셨다. 형과 누나가 ‘사범학교는 옛날 얘기’라고 하면서 그냥 경기고등학교로
원서를 썼다.색은 크게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못내 뭔가 서운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선생님이 최고였다. ‘조금 먹고 가는 똥 싸라’고 하면서 내가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두 분 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분명 어머니에게는 교사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자랑스럽고 보람있는 직업이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에 갈 실력이 충분히 되는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사랑하는 막내가
사범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되는 게 더 좋았던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시흥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받고 안양에
있는 교육청에 가시다가 구름다리에서 차가 굴러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는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아침에는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 오고, 낮에는 밭에 나가 김매고, 저녁나절에는 밭에서 나온 채소 등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우리도 가끔 옥수수를 쪄서 길에 나가 팔았다.
젊어서 아버지와 같이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어머니는 아이 열 명을
낳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을 하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서운 생활력을
보였다.
당시는 밭농사를 짓는데 거름으로 인분을 쓰던 때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인분을 얻어 똥지게를 지고며
농사를 지었다. 손발에 똥독이 올라 퉁퉁 부르터 있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동네 어른들은 이런
‘사모님’을 직접 대면하기가 면구스러워 어머니가 밭일을 하고 있을 때는 멀리서부터 길을 피해돌아
가곤 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교장 선생님 사모님이 똥거름 주는 것을 직접 대면하기 어려워 길을 돌아가던 동네 어른
들의 마음 가짐. 이것이 교육자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모습이었다. 뭇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경기중·
고등학교를 마다하고 사범학교 가서 선생님이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 이것이 교사들의 긍지와
자부심이었다.
요즘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겠지만 학생이 선생님에게 폭언을 하고 폭행까지 가하는 경우를 본다.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일까지도 생기고 있다. 선생님이 자식에게 벌을 주었다고 학교에 찾아가
항의하는 학부모를 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나? 한마디로 교육의 상품화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분명히 교육은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임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것인데
오늘 우리 교육은 자꾸 성적이 좋은 ‘상품’을 만드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학교에
가면 우리 아이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선생님을 고마워하고 존경했는데, 요즘은
선생님을 성적 좋은 입학기계, 출세 기계를 만들어 내는 보조도구 쯤으로 보니까 선생님을 우습게
보는 사회가 된것이다.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교사가 자리잡게 된 것도 교육을 국민의 권리,
국가의 의무로 삼아서 교육을 시장에 내놓지 않고 국가가 책임을 지는 철학과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경쟁, 성적제일주의의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도 선생님도 행복하지 않다.
대신에 사람과 자연을 중시하고 생활 속에서 협동과 실험을 위주로 하는 교육과정이 학생들과
선생님에게 함께 행복을 주고 있다는 것을 나는 핀란드에서 보았다. 교육이 욕망의 세습 혹은
재생산에 불과하고 공교육이 사교육의 보조수단 쯤으로 인식되는데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
생길 수 있을까?
나는 젊어서부터 ‘선생님이 존경받는 사회’가 선진국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해 왔다. 국민이 모두
사람대접 받는 사회가 되면 선생님이 존경받는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선생님들 몇 분을 초청해 점심을 대접하는데 나 자신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 무한경쟁 대신에 협동교육,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로 교육이 바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철학이 우선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헌법제31조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성찰적 진보의 길 제 5화
행복한 학교 만들기
2012. 6. 4
우리나라에 “놀이학원”이 생겼다고 한다. 어린이들을 놀려주는 학원이다. 어린이들이 놀
기회가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 시간이 없으니까 학원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노는 법도 가르쳐준다고 한다. ‘학원천국 대한민국’다운 발상이다. 아이들이 성적
의 노예가 되고,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공부만 강요하는 환경에서 아이들의 정서발달을 걱정
하는 학부모들의 틈새시장을 학원이 고 든 것이다.
사실 아이들 생활은 노는 데서 시작해서 노는 것으로 끝나야 정상이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여름이면 나는 학교에 갔다오자마자 책보를 내 던지고 지금의 안양천인
‘한내’로 달려가 멱을 감고 고동을 줍곤 했다. 겨울이면 썰매 지치고 팽이 친다고 손이 터서 손 등은
꼭 부르튼 보리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같았다. 누나는 우리들의 터진 손등을 수세미로 비벼대며
씻고 글리세린을 발라 주었다. 그때는 꼭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이 아팠다. 안 하겠다고 손을 빼면
등판을 때리며 손을 꽉 잡고 기어코 때를 밀어주었다.
(안양천 옛 모습)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따뜻하면서도 아직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봄날,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갔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와! 도롱뇽 알이 보이지 않는가? 얼마 전에
나이든 형들한테서 도롱뇽 알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 나는 누가 볼까봐 허겁지겁
‘도롱뇽 알’을 집어삼켰다. 그 어린 나이에 ‘몸에 좋다는 것’을 챙겼으니, 나 원 참.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좀 더 올라가다 보니 '도롱뇽 알'이 널려있다. “형, 여기 도롱뇽 알 많네?
” “야 임마, 그거 개구리 알이야” 동네 형이 핀잔을 준다. 아이쿠 야단났다. 내가 조금 아까
집어먹은 게 개구리 알이라니! 그때부터 걱정이 시작되었다. 아무한테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은 것이다. 뱃속에서 알을 까고 올챙이가 나오면 어쩌나? 어린 맘에도 창피해서
형한테도 어머니한테도 말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이렇게 우리는
어려서 놀면서 자랐다. “동무야 나와서 놀자”하며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고 함께 뒹굴며 자랐다.
내가 본 핀란드의 학교는 그 자체가 커다란 놀이터였다. 수업과 놀이가 구분이 안 되어 보였다
수업이 놀이에 녹아 있었고 놀이의 과정이 곧 수업이고 토론이었다. 또한 핀란드 학교는
가정이기도 했다.
헬싱키의 라또까르따논 학교에서 만난 1~9학년 아이들은 모두 학년 구분 없이 커다란
아파트 구조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각 교실은 아파트의 각 방과 같았다.
거실격인 중앙 로비에서는 전담교사가 각 방에서 튕겨 나온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마법학교의 기본 모델이 아마 이곳 핀란드 학교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이들에게 이곳은 행복한 학교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교실이 공작실,
가정실이었다. 공작실에는 선반 같은 커다란 기계도 있었다. 뭘 만들려는지 열심히 대패질을
하고 있는 아이는 혼이 나간 듯 같았다. 아이들 몇 명은 음료수 캔을 바퀴로 만들어 단 자동차에
매달려 있는데, 밧데리까지 달아서 제법 굴러간다. 납 용접을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꼭 생산공장의 조립공처럼 보였다. 재봉실에서는 아이들이 열심히 옷을 만드는데,
자기가 입을 것이라며 몸에 걸쳐 보인다. 가정실에서는 아이들이 온 몸이 밀가루 범벅이 되어
피자를 만든다. 물론 남녀학생 구별이 없이…… 학교 전체가 어수선하고 산만해 보이는데
그래도 뭔가 정돈되고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온다.
학교에서 왜 공부는 시키지 않고 저렇게 일만 시키는가 의아해 했더니, 따라 다니는 선생님이
‘손을 많이 놀리면 두뇌의 움직임에 도움이 된다’고 귀띔해 준다. 하기는 피아노 치는 사람이
치매가 적다고 했던가? 인구 500만의 핀란드가 세계적 기업 노키아를 갖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하기는 우리도 어렸을 때 열심히 뚝딱 거리면서 뭘 만들며 자랐다. 6.25전란 직후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따로 없었다. 수수깡 끝을 꼬부려 땅바닥에 대고
밀면서 입으로 빵빵 소리를 내며 ‘자동차 지나가니 길 비켜라’고 떠들었으니……
그래도 우리 동네에는 미군 부대가 있어서 장난감 만들 재료가 꽤 있었다. 탄약상자에서 뜯은
각목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철사를 붙여 날을 만들고 역시 탄약상자에서 뜯은 나무판대기를
얹어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 나이가 좀 든 아이들은 각목에 톱으로 홈을 파서 강철 밴드를
갈아서 끼워 넣고 각목 양 옆으로 가느다란 못을 박아 거기에 끈을 매서 신발을 묶으면 근사한
'스케트'가 되기도 했다. 장난감을 만드는 우리는 목수가 되기도 하고, 인부가 되기도 한 것이다.
망치에 손을 으깨기 일쑤고, 손발은 항상 얼어 터져 있었다. 썰매 지치는 시간보다 썰매
만드는 데 시간이 훨씬 더 많이 들었고, 그게 힘든 줄도 몰랐다. 톱질하고 강철을 줄로
갈 때 서로 붙들어주고 사이좋게 돕다가도, 이내 싸우고 놀리고 도망가고 쫓고, 집에
오면 야단맞고 지냈다. 그것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었다. 공부보다는 노는 것이 생활
이었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일과였다.
핀란드 학교에서 아이들이 놀면서 공부하고 손으로 일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정말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생각을 했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교육에 전력투구한
핀란드가 아이들에게 공부만 강요하지 않고 실생활 속에서 교육을 찾는 뜻을 알 것 같았다.
핀란드도 우리나라도 중고등 학생의 학습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핀란드는 아이들이
놀면서 공부하는데도 세계 최고, 우리는 노예생활과 같은 입시지옥을 통해서 세계최고.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명확하다.
자율적인 학습 분위기가 창의성을 한껏 높이는 것으로 보인다. 주입식 입시교육으로 찌든
우리 학생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급격히 수업능력이 떨어져 심지어는 서울대학교에도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이 꽤 있다고 하는 정도다. 더구나 핀란드에서는
학습과정이 거의 모두 공동작업으로 되어 있어서 어려서부터 협동이 몸에 밸 수밖에 없어
보인다. 공동체 문화가 학교에서부터 터득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립과 공동체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줄 수 있는지, 그런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줄 수 없을지에 대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도 얼마 전부터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교육을 위해 대안학교가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자연 친화적인 학업분위기를 위해 농촌이나 산골에 학교가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혁신학교를 지정해 창의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좋은 일이다.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입시제도의 제약 속에서도 꾸준히 사람 만드는 교육, 함께
어울리는 교육, 책에만 매달리지 않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사구시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면서 하는 교육 속에 더 높은 교육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성적지존'의 극성 엄마들도 이제는 터득한 것일까? 놀려야 공부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놀아야 ‘지속가능한 학습능력’이 보장된다는 것을! ‘놀이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 ‘노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핵심적 과제다.
이를 통해 자율교육, 창의교육을 세워야 한다.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가 살기 좋은 나라의 첫
번째 집이다.
성찰적 진보의 길 제 6화
이거 빨갱이 돈 아니니?
- 색깔론에 대한 소회
2012. 6. 10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때 아닌 색깔론이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이 종북주의 논란으로 번지더니 국가관 논란에 이어 국회의원
자격검증 시비까지 비약하고 있다. 색깔론이 통합진보당 뿐 아니라 민주통합당을 겨냥한
정치공세로 비쳐지자 야당에서도 강력 반발하며 신매카시즘이라고 여당을 공격하고 있다.
국민들은 먹고 살기 바쁘고 서민경제는 나날이 악화일로에 놓여 있다. 심지어 세계경제는
‘퍼펙트 스톰’이라고 하는 복합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 경제도 따라서 수출과 수입이
모두 감소하고 내수가 위축되어 물가가 오르는 등 경제가 앞이 보이지 않는 미궁
속으로 빠질 조짐이 보이는데…… 소모적이고 구태의연한 이념논쟁을 하고 있는
정치권을 보는 국민의 마음은 어떠할까?
색깔론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면서 나의 젊은 시절 몇 장면이 떠오른다.
유신시절, 나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2년간 피신생활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선봉장이었던 박형규, 김관석, 조승혁
, 권호경 목사를 선교자금횡령 혐의로 구속하고, 판자촌 빈민선교단체인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위원장 박형규 목사)에서 총무로 일하던 나를 잡아서
그럴듯한 조직사건을 꾸미고자 했었다. 처음에는 1계급 특진에 100만원
현상금이던 것이 나중에는 2계급 특진에 200만원으로 올라, 정보부를 비롯해
온갖 관련기관이 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1975년에 200만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1975년 4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선교자금을 횡령했다는
엉터리 죄목으로 구속된 박형규 목사가 재판에 출석한 뒤
서대문구치소로 돌아오고 있다.)
(이후 박형규 수도권 선교위원장(가운데)이 언론과 인터뷰하는 모습.
오른쪽 어깨 너머의 청년이 젊은 시절의 손학규)
처음에는 원주로 가서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 등의 보호아래 사과 과수원에서
‘머슴’으로 반년 쯤 일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합정동에 있는 철공소에서 막일을 하면서
1년 반쯤 일했다. 그 때 용접도 조금 배웠다.
철공소에서 일한지 1년쯤 되었을 때, 어머니가 간암 판정을 받고 앞으로 얼마 못 사실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연락은 후에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송태호 당시 경향신문
기자가 해 주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도망다니기 시작하고 나서 1달쯤 지났을 때였다. 어린이날 언저리에 이제 갓 백일이
되었을까 말까 했던 첫딸 원정이와 함께 비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가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감시가 비교적
허술해서 아내가 형사들을 따돌리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얼마 전 작고한 김근태
의장이 그때는 아직 수배자가 되기 전의 자유로운 몸이어서, 밤에 아내가 하는
약국에 들러 덧문을 닫아주고 가곤 했었다. 어느 날은 연탄불을 가는데 연탄이
떼어지지 않아 쩔쩔 매고 있는데, 근태가 식칼로 연탄을 잘라줬다며 아내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고마워했다. 비원에서 자리를 깔아놓고 원정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와 함께 도시락을 먹던 시간은 지금도 눈에 선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게 벌써 1년이 훌쩍 넘어 원정이는 벌써 여러 달 전에 제
돌떡을 들고 이웃집에 돌렸다고 들었다.
송태호 형이 가고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그리고 송태호 형에게 다시
좀 와달라고 전화를 했다. 나는 태호형에게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어린 자식들
키우느라고 고생고생하신 것도 모자라, 동생 잘못 둔 죄로 갖은 고생
다하고 사는 다른 아들들에게도 막내아들 때문에 ‘죄’를 짓고 사신
어머니가 한없이 가여웠다. 그저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송태호 형과 셋째 형의 ‘작전’으로 어머니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어머니가
마침 큰 병원으로 옮기게 되어서, 옮기자마자 형사들이 미처 눈치를 채기 전에
병실에 잠입하는 작전이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물론 비밀이었다. 셋째 형도
잔뜩 긴장하고, 그러나 더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병실 문을 열었다. 눈을 감고
누워계시던 어머니 머리맡으로 다가가서, “어머니 저예요, 학규에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눈을 번쩍 뜨신 어머니가 다짜고짜 “니가 여기 왜 왔니?
어떻게 왔어? 어서 가! 니 형들 다 망치려고 여기 왔어? 빨리 가!”라고 말했다.
청천의 벼락이었다. 그동안 형제들이 정보부로부터 얼마나 시달렸으면
1년반 만에 나타난 막내아들, 그렇게 보고 싶어했을 막내아들에게,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을까?
“네 갈께요, 갈께요 어머니.” 나는 북받치는 설움을 속에 파묻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내가 당황해서 엉거주춤 나갈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저기 옷장에 내 빽 좀 가져와라” 라고 말하며 가방을 찾는 것이 아닌가.
보나마나 뻔 했다. 도망자의 신세가 된 막내아들, 돈이 궁할 테니 용돈이나
좀 쥐어 보내겠다는 어미의 마음이 느껴졌다.
“돈 주실라고요? 어머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어머니, 제가 어머니한테 돈
좀 드릴게요. 손주들 오면 사탕이라도 사먹으라고 주세요.” 라고 말하며
주머니에 있던 구겨진 돈을 어머니께 드렸다.
“이게 무슨 돈이니? 니가 무슨 돈이 있어? 이거 빨갱이 돈 아니냐?” 어머니는
정색을 하고 거절하셨다. 나는 순간 어쩔 줄 몰랐다.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녜요, 어머니. 빨갱이 돈 아녜요. 걱정 마세요.” 나는
가슴이 울컥거리는 것을 참으며 돈을 어머니 손에 쥐어드리고 병실을 나섰다.
어머니는 애써 나가는 나의 모습을 외면하셨다. 병실 문을 닫으며 “어머니,
저 가요. 건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입에서는 그렇게 인사했지만
내 마음은 “어머니 죽지 마세요.” 였는지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이 어머니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돈은 사실, 어머니의 돈이었다. 그 돈은 어머니가 막내며느리에게 용돈으로
쓰라고 그 전날 주신 바로 그 돈이었다. 남편 복이 없어서 시집오기 전부터
옥바라지에, 시집와서는 도망간 남편 찾아내라고 노상 경찰서, 정보부에
끌려 다니고, 형사를 데리고 사는 막내며느리가 딱해 간병을 가면 가끔
용돈을 주셨다고 한다. 나는 일생을 돈 고생으로 지내신 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아내한테 돈 좀 달라고 했다. 아내가 나한테 준 돈은 어머니가
그 전 날 막내며느리에게 준 용돈에 더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그 지폐
그대로 3만원이었다.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와 막내며느리에게 갔다가,
며느리가 남편에게 주었고, 막내아들이 다시 어머니에게로 드린, 뱅글
뱅글 돌고 돈 그 돈.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막내아들이 ‘빨갱이’가 되어있는 걸 못내 가슴
아파하며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셨을 것 같아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멍해진다. 막내아들이 빨갱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다른 형제들
보호하려고 다급하게 쫓아버리시며 고개 돌려 눈물을 지으셨을 어머니.
막내아들이 준 돈을 아들 만지듯 꼭 쥐고 눈을 감으셨을 어머니.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우리 어머니처럼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빨갱이 굴레가 씌워지는 것을 보며 피눈물 토하며 눈을 감으셨을까?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조작했고 또 억울한 사람들을 사형장의
이슬로 보냈던가? 이제 다시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이 땅에 행여나 다시는
이렇게 아들을 빨갱이로 의심하며 눈을 감지 못하는 어머니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1975년 4월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인혁당 희생자들에게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인혁당 사형 집행일에 대한민국 사법부도 같이 죽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사람에게 색깔을 칠하는
풍토가 엄연히 살아있다. 색깔론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거나
정치적 과오를 호도하고 반격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가 아직도
맹위를 떨치며 살아있다.
작금의 색깔논쟁은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과정에서 자행된 부정행위에서
비롯되었다. 통합진보당의 문제는 민주주의 일반 원칙에 대한 문제였다.
당권파들은 심각한 부정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소한 부정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이다. 국민들의 실망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것을 위반하고도 심각하지 않다는 등의 뻔뻔한 주장으로 일관하다가
‘종북’이라는 색깔론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혁신과 성찰로
나가지 못했고 당권에 대한 기회주의적 맹종만 드러냈다.
우리는 통합진보당의 민주주의 절차위반과 선거부정행위를 민주진영 전체에
대한 색깔론으로 비화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소위 국가관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정치적 반대진영을 ‘종북’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하고 이 땅을 온통 케케묵은 색깔론으로 물들이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 “북한 주장도 문제지만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우리 내부의
종북세력이 더 큰 문제”라고 종북논쟁을 부추기고 있다. 집권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가 “국가관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의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국가관에 의한 사상검증을 부추기고 있다. 여당 대표는 “헌법을
수호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을 갖췄느냐에 대한 자격을 심사하는 데까지
이를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고 있다.
이제 냉정을 찾아야한다.
색깔론은 거두어야 한다. 더 이상 종북주의를 무차별로 확대해서 정치적
상대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거나, 국가관이나 사상검증과 같이 민주주의의
기본을 망각하고 훼손하는 언동은 없어야 한다. 이는 오직 나라의 분열만
가져오고 갈등만 키울 것이다. 증오의 정치를 끝내고 화해와 통합의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국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고 증오를 부추겨서 갈등을
조장하여 정권을 장악하겠다면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나라를 망치기
위해 집권하겠다는 것은 죄악이다.
통합진보당 사건은 민주적 절차를 위반한 만큼 부정선거에 대해서 당사자들은
책임을 져야한다. 종파주의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진보정치를 시작할 때의 초심,
사회적 약자를 일어서게 하고,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실현하겠다는 참된 진보의
이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석기, 김재연의원은 ‘나’를 버려서 진보를 살리는
성찰적 진보의 길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민주당도 새로 지도부가 구성된 만큼 심기일전하여 색깔론의 프레임에서
탈피하여 민생의 바다에 과감히 더 깊숙이 들어가기를 바란다. 임수경의원은
설혹 발언이 잘못 전해진 점이 있어도 자신의 처신에 이미 깊이 사과한 만큼,
더욱 진중하고 진솔하게 처신할 것으로 믿는다. 국민을 섬기고,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치, 수준 높은 정책으로 의정활동에 집중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은 6월항쟁 2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땅에 본격적으로 민주주의가
전개되기 시작한 날이다. 오늘은 국민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날이다.
오늘 나는 시청광장에서 610시민대합창에 참여하여 ‘우리 승리 하리라’
를 힘차게 불렀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가슴에 담고 민주주의 승리를 노래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610 시민대합창, "우리 승리하리라.")
성찰적 진보의 길 제 7화
행복한 학교 만들기(2)
2012. 6. 22
어제 시흥초등학교를 방문했다. 나의 모교다. 그래서 그런지 시흥초등학교를
방문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운동장에서 멀리뛰기를 하고 있는 2학년
아이들을 만나 ‘몇 회냐’고 물으니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 당연하다. 옆에 있던 한인수 전 금천구청장이 재빨리 “너희 몇 년생
이지?”라고 물었다. 아이들이 2005년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너희는
105회야.”시흥초등학교는 졸업횟수를 계산하기가 참 편하다. 함께 나와 있는
차성수 금천구청장은 56회, 1956년생이다. 친구가 온다고 일부러 나온 한인수 전
구청장과 박성철 전 교장 등 우리 동기는 46회, 1946년생들이다. 나는 47년생
이지만 그들보다 한 해 일찍 입학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용변을 보지 못하고 집에 갈 때까지 참았다가, 집에
가서야 엄마를 부르며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는 세태를 그린
언론보도가 다. 좌변기가 없어 쪼그리고 앉아서 용변을 봐야하고, 냄새나고
더럽고, 화장지도 부족하고…… 비데까지 설치되어 있는 깨끗한 양변기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겐 지옥이 달리 없을 것이다.
시흥초등학교는 그래도 나은 편, 화장실이 비교적 깨끗했다. 그래도 좌변기는
다섯 개중 하나 정도였고 세면대도 몇 개 없었다. 시설이 오래 되어서 개수도
쉽지 않고,무엇보다 예산이 없어서 고칠 여력이 없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보니,
밥통과 국통을 옮겨와 교실 안에서 배식을 하고 어린이들은 책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영양과 칼로리는 충분하나 친환경 농산품을 60% 이상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식자재 구매 비용에 많은 압박을 느낀다고 영양교사가 말한다.
옛날 생각이 났다. 전쟁 직후에 우리는 학교를 다녔다. 우리는 학교에 갈 때 삽이나
곡괭이를 하나씩 들고 갔다. 전쟁 중에 학교 교사는 미군부대에게 내주고 우리는
산과 들판에서 그늘을 찾아 칠판을 들고 다니며 수업을 했다.
겨울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시흥교회에 들어갔는데 학생들로 북적거리니 수업을
하는둥 마는 둥 했다. 아침에 등교하면 두어 시간 동산이나 묘지 앞에서 공부를
하고는
모두들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산을 깎아 학교 부지를 고르는 일에 매달렸다. 요새
같으면 중장비로 한 두어 시간 갈아엎으면 그만일 것을, 일곱 살에서 열두 살
까지의 어린아이들이 삽질하고 곡괭이질하며 몇 달에 걸쳐 산을 골라 평평한
학교 부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땅을 골라 놓고는 건물을 올릴 돈이 없어서, 전교생이 교장 선생님
인솔 하에 마을마다 다니며 모금을 호소했다. 김군삼 교장선생님,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디서 났는지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썼음직한 그런 모자를 쓰고,
당시는 귀했던 핸드마이크를 용케도 구해 들고 다니며 아이들 앞세우고 ‘관제
데모’를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극성이었다. 그렇게 해서 학교 건물을 갖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 학교
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공부를 할 때 그 기분! 학교가 그냥 천당 그 자체였다.
학교는 동네의 중심이었다. 가을에 대운동회가 열리면 그날은 온동네
잔치날이었다. 운동장에 만국기가 날리고, 집집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가져와서
좋은 것은 선생님들 식사자리에 갖다 드리고…… 사실 싸 온 것이라야 기껏
고구마 찌고 밤 삶은 것이 고작이었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사 오고 계란이라도
삶아 온 집은 그래도 여유가 있는 집이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농사일에 매달려 사는 엄마 아버지들도 나와서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이인삼각으로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곤 했다. 웃음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려 퍼졌다.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다.
나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 누나는 입만 열면 나에게
“우리 막내 불쌍도 하지…… 아버지 덕도 못보고,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귀여워했을까?” 라곤 말했다.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큰 누나는 막내인
나를 항상 측은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40년 만에 나타나서 막내아들에게 큰 덕을 베푸셨다.
1993년 광명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 상대후보들은 일제히 나를 ‘낙하산’
으로 낙인찍고 ‘반손연대’를 결성했다. 광명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위에서
낙점을 받아 출마 했으니 ‘낙하산’이라는 것이다.
그 때만 해도 합동유세가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저는 오늘 이 곳
서면초등학교에 오면서 깊은 감회에 빠졌습니다. 저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어려서 희미하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 손을 잡고 이 곳 서면초등
학교에 놀러왔던 것이 어슴푸레 기억납니다.
저희 아버지가 이 곳 서면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거든요. 시흥에서 이리 오려면
솔밭을 지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딘지 기억이 안 나는군요.
이곳에서 면장을 지내신 노재철 면장님이 아직도 살아계신데,
그 분이 아버지 친구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집에 쌀이 떨어지면
둘째 형이 이곳 소하리에 사시는 노면장님 댁에 가서 쌀을 얻어오곤 했습니다.”
뒤에 서있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이곳저곳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손 교장 아들이래?” “아이고 저 사람이 그 때 그 코찔찔이여? 데모하다가
감옥에 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 사람이 손 교장 막낸가?” “맞아, 솔밭이
저 쪽에 있었어.” 라는 웅성거림에 그 날로 낙하산 얘기는 쑥 들어갔다.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나도 아버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주눅이 들어 살던 막내에게 아버지가 40년 만에 환생해 덕을 베푼
것이다. 그것도 한꺼번에 화끈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광명 사람들은 아버지를 회상하며 “손 교장 선생님, 엄하고
약주를 좋아하셨지요” 하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노온사리에 사시는 어느
할머니는 “어느 날 퇴근하시다가 우리 영감이 청해서 약주를 하시고는, 우리
영감이 ‘교장 선생님이 어떻게 혼자 가시겠느냐’고 하며 시흥(동면)까지 바래다
주셨지요.
시흥에 도착해서 이번에는 교장 선생님이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그냥 가겠느냐’고
권해 약주를 같이 드시고는 ‘어떻게 이 늦은 시간에 그 먼 길을 혼자 가겠느냐’고
하며 기까지 같이 오셔서는 또 한잔을 하시고, 우리 영감이 또 바래다 드리고 한
일이 있었지요” 라고 회고를 했다.
그 학교가 지금의 광명시 학온동에 있는 온신초등학교다. 온신초등학교는 아버지가
2년제 간이학교부터 시작해서 분교로 만들고, 나중에 4년제로, 뒤에 6년제로 발전해
온 학교다. 아버지는 시흥초등학교와 서면초등학교에 재직할 때 분교를 세 개나
세우고 직접 다니며 가르쳤다고 한다. 어른이 가서 가르쳐야지 어떻게 어린아이들을
먼 길 다니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는 것이었다.
학교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다. 아이들이 먼 길 다니는 것도 안쓰러운 일이지만,
학교가 있다가 없어지면 마을이 생기를 잃는다. 학교가 있으면 아이들 소풍만 가
도 온 동네가 들썩거린다. 선생님은 아이들만의 선생님이 아니라 마을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경기도지사가 되었을 때 교육지원사업을 꽤나 열심히 했다. 교육부에 특별히
요청을 해서 교육지원관을 파견받았다. 4년간 교육지원사업에 쓴 돈만 9,000억원이
넘었다. 제일 먼저 한 사업이 ‘소규모학교 살리기’였다. 도지사가 되기 전 경기도를
구석구석 돌아볼 때, 도민들이 ‘폐교’를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 때 결심했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생각해서 시골 마을의 소규모학교, 분교를
없애지 말자고, 학교가 없어지면 마을의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 교육에 절망하게 된다.
학교가 없으니 마을이 마을 구실을 못하는 법이다. 스쿨버스로 아이들을 학교로
실어 나른다고 하지만, 이것은 학교를 아이들의 수업장소로만 생각했지 학교가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마을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는 점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학교의 폐교와 더불어 근처의 마을도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을 나는
여러 곳에서 보았다.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학교가 있으면, 근처의 마을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고 긴 생명력을 이어갈 터였다.
‘소규모학교 살리기’사업은 농어촌학교의 교육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것을
목표로 100개 학교를 대상으로 학교당 약 7억원을 지원했다. 이 돈은 도서관,
다목적 교실 설립 등 시설 현대화에 쓰여졌고 교원 사택을 건립해 교사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통한 사기진작에도 힘썼다. 그러나 시설투자는 나의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교육프로그램이 새로워지고 활성화되기를 원했다. 대도시를 능가하는
최고수준의 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선 ‘소규모학교
살리기’에 선정된 모든 학교에 1명 이상의 원어민 교사를 배치했다. 이어 국악,
영재수학, 연극, 승마, 골프 등 총 77개 특기적성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모든 학생이 한 가지 이상의 특기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업은 좋은 성과를 냈다. 가평의 마장초등학교를 필두로 작은 학교의 열정적
노력으로 학생 수가 급증되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5년 6월을 기준으로
했을 때, 작은 학교 살리기에 선정된 초등학교의 학생 수 증가는 40%가 넘었고
중학교도 평균적으로 25%가 넘었다. 사업 실시 후 학교에 대한 학부모, 학생의
만족도가 크게 상승한 것은 물론이고, 농촌의 작은 학교에 대한 학부모의
의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대도시 학교로
전학하려하고 하는 학부모의 숫자도 크게 감소되었다.
폐교 위기에 내몰린 농어촌학교에서 학생들이 찾아오는 우수한 작은 학교로
변화되고, 농어촌에 있는 작은 학교지만 얼마든지 우수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매우 보람찬 교육사업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나는 농촌이나 도농복합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도 시, 군마다 한 개 내지 두
개의 학교를 지정하여 ‘농어촌 좋은학교 만들기’사업을 했다. 이 사업도 지역마다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지역거점학교를 지정하여 교육 때문에 서울이나 인근의
도시로 나가는 것을 억제하기 사업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도내 농어
촌지역이나 도농복합지역의 23개 학교에 학교 당 약 23억원 정도를 지원했다.
이 지원사업으로 각 학교는 필요에 따라 기숙사, 도서관을 짓거나 시청각
교육 기자재를 개선 하는 등 시설 현대화를 추진하고, 원어민 교사나 특별교사
를 채용해서 교육의 내용을 다양화하고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지역별로 거점 학교의 경쟁력을 높여, 이를테면 가평고등학교의
경우 (대입 실적이 교육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학생과 학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이 여기에 쏠려있는 현실에서), 이 사업 시행 2년만에 개교 이래 처음 서울대
입학생을 내고 다음 해에는 서울대를 비롯한 소위 SKY대와 주요 대학에 10명
이상 진학하여 지역의 교육 분위기가 한껏 고무되었다. 지역민이 교육 때문에
서울로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지역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킨
것은 물론이다.
경기도의 교육지원사업은 다양했다. 공업학교를 비롯한 실업계 고교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고, 애니메이션고등학교, 디지털고등학교와 같은 특성화 고
등학교나, 부천의 진영정보공고처럼 소위 문제학생들을 집중적으로 돌보거나
두레학교와 같이 결손가정 아이들을 주로 돌보는 대안학교, 또는 이우학교와
같이 중산층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대안학교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업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특목고 벨트 구축사업이었다.
나는 경기도를 8개 권역으로 나누어 과학, 외국어 분야 등에 특화된
‘특목고 벨트(Edu-Belt)’를 구축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과학고를 육성 지원한
것에는 후회가 없고 그 성과 또한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외국어고를 지원
하고 육성한 것은 수월성 교육에 대한 나의 안이한 판단에 기인한 바가 적지
않았다. 내가 지원한 외고 중에는 용인외고와 같이 톱을 달리는 학교도 있지만,
문제는 외고의 설립목적은 간데없고 결과적으로 ‘일류대학 입시학원’으로
전락한 현실에 있다.
핀란드에서 보았듯이 교육은 ‘사람’을 길러내는 인성교육이 되어야 하며,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학업성취도를 세계 최고로 유지하는 창의교육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고, 공교육 강화를 위한 교육재정의 확충이
핵심적 과제다. 결국은 투자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같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야말로 공교육 강화의 기본이다. 학교에서는 화장실
에 갈 수 없다면 학교는 더 이상 행복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다. 공포와 불행의
장소에서 어떻게 높은 학습능력이 나오겠는가? 급식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아니면 어떻게 학교생활에 마음을 붙이고 공부에 열중할 수 있겠는가? 동산이나
수풀은커녕 학교운동장이 코딱지만 해서 100m 달리기도 못하는 환경에서 어찌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겠는가?
‘소규모학교 살리기’도 투자였고, ‘농어촌 좋은학교 만들기’도 투자였다. 경기도의
시범사업은 교육부의 사업으로 확대 발전되었지만 예산의 태부족으로 제대로 발전
시키지 못하고 있다. 화장실 환경 개선을 통해 아이들이 학교에 마음을 붙이게
하고, 점심시간이 아이들에게 행복한 시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쾌적한 환경의 식당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교사에 대한 처우개선을
더욱 높이고 불필요한 문서작성 및 잡무에서 해방시켜 교사들이 더 높은
수준의 자부심을 갖고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핀란드가 스웨덴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빈곤에서 탈피하기 위한 길을 교육에서
찾고 1970년대 초부터 교육개혁을 시작하여 교육에 전 국력을 경주하여 과감히
투자함으로써 오늘의 교육강국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강소국을
이루었듯이, 우리도 교육으로 나라의 미래에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교육에 과감하게 투자를 늘려 지금 GDP의 3.5%에
지나지 않는 교육비를 OECD 수준인 6%로 상향 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학교에 가는 것이 행복하고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안심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사회, 2013체제의 또 하나의 핵심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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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 숨에 읽었습니다.다음 글이 기다려 집니다.고맙습니다
잘 쓰고 재밌습니다.
주변ㄴ에 많이 흩뿌려 주세요! 개인이 운영하는 블로그, 카페, 페북 등!
삶에 질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세요
눈이 아파도 열심히 읽었어요...좋은 글 또 올려주세요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
굿맨님.
수고에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