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년3월5일 목요일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에있는 신라적성비 국보 제198호로 높이 93㎝, 윗너비 107㎝, 아랫너비 53㎝. 국보 제198호. 545(진흥왕 6)∼550년(진흥왕 1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8년 1월 6일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 적성(赤城) 내에서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출토상태는 표면이 위를 향하고 뿌리가 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어 깊게는 30㎝ 정도가 묻혀 있었다. 비문은 화강암 자연석의 곱고 판판한 면에 새겼는데, 얕게 음각했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 비면이 깨끗하고 자획(字劃)이 생생하다.비의 형태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밑으로 내려오면서 좁아들고 얇아져 22㎝, 14㎝, 5㎝의 두께이다. 개석(蓋石 : 뚜껑돌)과 대좌석(臺座石)이 없이 발견되었으나, 비의 모양을 보아 뚜껑돌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 같고, 밑부분이 좁은 것을 보면 꼽는 형식의 대석(臺石)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현재 비의 윗부분이 절단,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쪽 측면은 거의 완형이고, 특히 비 표면은 양쪽이 완전해 22행의 비문이 분명하다.각 행의 명문은 20자씩으로 짐작되어 19행까지는 20자씩 모두 380자이고, 20행과 21행은 19자씩으로 38자이며, 끝 행은 12자로 전체의 명문은 도합 430자로 추산된다.지금 남아 있는 글자는 284자로서 판독이 가능하다. 글자는 자경 1.5㎝, 2㎝, 3㎝ 크기로 각 행의 명문은 가로와 세로의 줄을 잘 맞추고 있는데, 예서풍(隷書風)의 해서(楷書)로서 서예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결국, 결락된 글자는 146자인데, 파손된 윗부분을 보면 첫머리인 제1행부터 제4행까지와 제8행부터 제10행까지, 그리고 제13행부터 제16행까지가 큰 덩어리로 파손된 것 같고, 다른 부분은 얇게 격지로 깨지면서 조각이 난 것으로 짐작된다.큼직한 덩어리로 떨어져나간 것 같이 보이는 부분은 돌 색깔이 검게 죽어 있고, 바위이끼의 흔적까지 있어 파손된 시기는 상당히 오래 전인 것으로 추측된다.특히 발견 당시 노출되어 있던 석비의 첫머리 부분은 비바람에 씻기고 등산객들의 발길에 시달려 마손된 부분도 있다. 그 뒤 3, 4개월에 걸쳐 석비 주변 일대를 발굴해 동서 12m, 남북 9m 범위의 장방형 발굴구역 내에서 옛 건물터 및 비편, 기와·토기조각·금속제 유품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을 수습, 조사하였다.석렬(石列)로써 추측해본 건물자리는 남면 길이 7.5m, 서쪽면 길이 7m인데, 비는 서쪽면 석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서편으로 또 다른 석렬 자리가 있어, 이들 석렬 사이에 3m 너비의 툇간이 있었고, 이 곳에 석비를 보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건물자리는 작은 냇돌[川石]을 평평하게 거의 전면에 깔아 다졌는데, 이 부분에서 약간의 삼국시대의 기와·토기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건물은 주변의 지세, 대지의 위치, 적성산성과의 관계 등으로 보아, 적성을 축성하고 건립한 건축물로서 당시의 지휘본부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수습된 유물을 비편부터 살펴보면, ‘성재(城在)·아간(阿干)’,‘주(主)·제차(第次)’,‘사(舍)·추문(추文)’,‘십(十)·육가(六家)’,‘전사(佃舍)’,‘본(本)’,‘도(道)’,‘선(선)’,‘적(赤)’,‘성(城)’,‘물(勿)’ 등이 새겨진 11조각에서 21자를 판독하였다. 11조각 중에서 ‘성재·아간’,‘주·제차’,‘사·추문’,‘십·육가’ 등 4조각은 2행씩이고, 나머지 7조각은 1행 혹은 1자씩이다.이 밖에 글자를 알 수 없는 비편 6조각, 글자가 없는 비편 23조각이 발견되었다. 23조각 가운데는 둥근 부분이 9조각이나 있어 석비의 윗부분이 둥근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굴된 21자를 더해 이제까지 판명된 비문은 총 305자가 된다.기왓장은 불[火]에 맞아서인지 붉은색 평와편[赤色平瓦片]이 많고, 얇고 단단한 회청색(灰靑色)의 전형적인 삼국시대 평기와도 드물게 보이며, 평행선이나 사선이 그려진 기와도 있었다.토기는 삼국시대 신라의 붉은색 연질토기편[赤色軟質土器片]과 고배편(高杯片)을 비롯해 그릇의 입구 둘레편과 손잡이 등의 토기조각들이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유물로 출토되었다. 금속류의 유물로는 철지은피교구(鐵地銀被鉸具) 1점, 철로 만든 칼·화살촉·둥근장식편·못 등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녹이 슬고 삭아서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다.비문의 자체(字體)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것과 일치하며, 굴곡을 지닌 율동적인 글씨로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이 나타난 운필법(運筆法)이다. 얕게 새겼음에도 붓을 움직인 선율의 감각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글씨의 특징은 약간 옆으로 퍼져 있어 진흥왕 때의 정방형체의 비문들과는 다른 취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 북조의 비가 대체로 방필(方筆)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남조의 영향을 받아 원필(圓筆)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모두루묘지 牟頭婁墓誌>나 <평양고구려고성각석 平壤高句麗古城刻石>의 방필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가로와 세로의 간격을 맞추어 썼는데도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맛을 풍기는 것도 더욱 높은 품격을 보여주며, 서예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비문의 이체자(異體字)들은 중국 남북조 초기의 비갈들의 글자와 일치해 시대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문장체는 신라고비(新羅古碑) 중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향찰식(鄕札式)도 아니며 그렇다고 한문체로도 통하지 않는다. ‘절(節)’·‘중(中)’·‘야(耶)’·‘여(如)’ 등 향찰에 쓰이는 글자가 없지 않으나 관계사가 거의 없어 향찰식의 연결이 불가능하다. 또한 한문식의 어기사(語氣詞)인 ‘야(也)’, ‘야(耶)’ 등이 있으나 한문식으로도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제6행의 “절교(節敎)이하에서 제17행까지 모두 11행이 문장에 해당되는데, 이 문장 가운데 ‘사문(師文)’·‘파진루(巴珍婁)’·‘도지(刀只)’·‘마례혜(馬禮兮)’·‘도두지(道豆只)’·‘열리파(悅利巴)’·‘도라혜(刀羅兮)’ 등 6인의 사람이름을 제외하면 모두가 연속되는 문장으로서 삼국시대 신라비로는 가장 긴 글이다.문장 첫머리에 왕교(王敎)를 받은 10인의 중앙고관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이간(伊干) 이하 급간(及干) 이상의 고관이고, 모두 탁부(喙部)·사탁부(沙喙部)의 출신부를 가진 점으로 보아 왕경인(王京人)임을 알 수 있다.인명 밑에 ‘지(智)’의 경칭이 있는 것은 진흥왕순수비와 같으나, 관등 밑에도 ‘지(支)’의 경칭이 붙은 것은 다르다. 출신부명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는데, 없는 경우는 앞사람의 부명과 같기 때문에 생략된 것이며, 황초령비(黃草嶺碑)나 마운령비(摩雲嶺碑)에서도 볼 수 있다.10인은 이사부(伊史夫:伊干)·두미(豆彌:彼珍干)·서부질(西夫叱:大阿干)·거칠부(居柒夫:大阿干)·내례부(內禮夫:大阿干)·고두림(高頭林:미상)·비차부(比次夫:阿干)·무력(武力:阿干)·도설(導設:及干)·조흑부(助黑夫:及干) 등이다. ‘이사부’는 ≪삼국사기≫의 이사부, ‘내례부’는 ≪삼국사기≫의 노리부(弩里夫), ‘비차부’는 ≪삼국사기≫의 비차부(比次夫), ‘무력’은 ≪삼국사기≫의 무력(武力), 즉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었다특히 이사부는 지증왕대부터 진흥왕대에 걸쳐 북방개척의 주역을 담당하고, 진흥왕 후반기에는 거칠부에게 임무를 넘겨준 최고사령관이었다.비차부는 551년(진흥왕 12) 거칠부를 따라 고구려의 10군을 탈취할 때 출정한 장군이었다. 무력은 553년 백제의 동북지방을 빼앗아 설치된 신주(新州)의 군주(軍主)가 된 장군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이사부’ 이하 8인은 북방개척의 군사령부의 수뇌들인 것이 확실하다.뒤에 명기된 두 사람의 당주(幢主) 역시 북방경략의 직접적인 담당자였음은 분명하다. 당주는 주(州)에 설치된 군주보다 하위단위의 군사 책임자로 촌이나 성에 설치되었음은 여기에 나오는 추문촌당주(0x978c文村幢主)’·‘물사벌성당주(勿思伐城幢主)’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추문촌당주와 물사벌성당주가 당시 적성지방의 공략에 참가한 사람인지, 적성 점령 후 그 지방에 설치한 당주인지는 확실지 않다.다만 비문의 ‘추문촌파진루하간지(0x978c文村巴珍婁下干支)’에서 적성 부근의 당주로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비문의 해독에 따라 오히려 적성지방 공략에 참가한 전진기지의 당주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여하튼 진흥왕의 왕교를 받은 이사부 이하의 왕경인 고관들은 북방경략의 중심인물로 적성지방의 공략과 관련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앞의 8인은 군사령부의 수뇌들이고, 2인의 당주는 현지 군지휘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런데 당주와 관련해 물사벌성은 525년(법흥왕 12) 상주(尙州)에 군주를 설치한 사벌주(沙伐州)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비문 첫줄에 보이는 대중등(大衆等)은 대등(大等)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연구과제 중의 하나이다.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인의 고관에게 하교해, 신라의 척경사업(拓境事業)을돕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다한 적성인 야이차(也爾次)의 공훈을 표창하고, 장차 야이차와 같이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인 것 같다.한민대족백과사전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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