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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전(1758~1816) 답②
‘흑산도 근해의 수산 생물을 기록’한 책이라는 내용이 결정적인 힌트네요. 그리고 '玆山魚譜(자산어보)'라는 한자 책이름을 읽을 수 있으면 바로 정약전을 떠올릴 수 있겠네요.
남인 집안이었던 정약전 형제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로, 신유박해(1801) 때 큰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남동생 정약종, 매형 이승훈은 처형되었고(이승훈의 외숙부 이가환도 처형), 자신은 흑산도, 동생 정약용은 포항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각각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카 사위인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전말을 베이징에 있는 서양인 주교에게 보고하고 군대를 보내 조선을 위협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습니다(황사영 백서 사건, 1801).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시기에 현지 섬사람이었던 장덕순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저술하였습니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 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여, 이를 어류·패류·잡류 등으로 분류,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에 관한 것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많이 인용되는 수산물 책입니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은 인류(鱗類, 비늘이 있는 물고기), 제2권은 무인류(無鱗類, 비늘이 없는 물고기) 및 개류(介類, 딱딱한 껍질을 가진 종류, 조개 등), 제3권은 잡류(雜類, 기타 바다 생물과 해초)를 다루고 있어요. 정약전은 서두에서 책이름을 “흑산어보”라고 하지 않고 “자산어보”라고 한 이유를 “‘자(玆)’는 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으므로 자산은 곧 흑산과 같은 말이나,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어두워 두려운 데다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흑산 대신에 자산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자산이라는 말을 제명에 사용하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① 이승훈(1756~1801)에 대한 설명입니다.
천주교와 관련하여 최초의 순교자는 윤지충(진산 사건, 신유박해, 1791), 최초의 세례 교인은 이승훈, 최초의 신부는
김대건입니다.
② 정약전은 신유박해(1801)에 연루되어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형 정약종은 처형되고 동생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③ 연행록(燕行錄)은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이나 수행원(연행사)이 남긴 기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청에 다녀온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은 많습니다. 홍대용의 담헌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연행록의 하나죠.
④ 정상기(1678~1752는 우리나라 최초로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하였습니다(1740).
⑤ 김육(1580~1658)의 노력으로 효종 때 청으로부터 서양 역법인 시헌력을 도입하였어요(1653).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유사 기출문제
24회 고급 29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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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학(천주교)의 수용 답⑤
'윤지충'이라는 인물, '제사 폐지(사당에 모셔진 조상의 신주를 태워버렸어요.), 조문 거절' 등의 내용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은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에 의하여 자체적으로 서학, 즉 서양의 학문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입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처음에는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어요.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조 때에는 윤지충이 어머니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다가 발각된 사건(진산 사건, 1791)을 계기로 윤지충을 비롯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신해박해, 1791)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에 대탄압이 가해졌어요(신유박해, 1801). 이후 몇 차례 크고 작은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① 정여립 모반 사건(1589)은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 사람을 모으고, ‘목자망존읍흥(木子亡奠邑興,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세상을 현혹하며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입니다.
② 18세기 초에 정제두는 소론 학자들 위주로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강화학파를 이루었죠.
③ 이기론은 성리학과 관련 있습니다.
④ 동학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천주교는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천주교 박해
박해 | 내용 |
신해박해 (정조 15년, 1791) | 신해박해(진산 사건, 모친의 신주 소각) → 윤지충·권상연 처형 |
신유박해 (순조 1년, 1801) | ◦ 벽파(僻派)가 득세하면서 남인 시파(時派) 제거 ◦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초기 교회의 지도자인 이승훈·정약종 등 처형 ◦ 남인이었던 정약용(강진)·정약전(흑산도) 형제 유배 ◦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를 서양인 주교에게 보고하고 군대를 보내 조선을 위협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려다 발각 |
기해박해(헌종 5년, 1839) | 벽파의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 김씨 공격, 프랑스 선교사 3명 처형 |
병오박해 (헌종 12년, 1846) |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순교 |
병인박해 (고종 3년, 1866) | ◦ 1866년~1871년까지 계속된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 배경 : 러시아를 막기 위해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하려 하였으나 실패 ◦ 과정 : 천주교 신자 수천 명과 9명의 프랑스 신부 처형 → 신부 리델이 조선을 탈출, 톈진에서 프랑스 동양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구원 요청 → 로즈가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병인양요) |
1886년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 체결, 천주교 선교의 자유가 인정 |
7회 고급 30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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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주교 답②
(가)에 들어갈 종교는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 즉 제사를 금지하는 종교'라고 하였으니, 천주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서학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입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어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조선 최초의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어요.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조 때에는 윤지충이 어머니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다가 발각된 사건(진산 사건, 1791)을 계기로 처음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신해박해, 1791)가 일어났어요. 이후 순조 즉위 직후에도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습니다(신유박해, 1801). 이 사건으로 주문모 신부, 이승훈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 등 실학자 및 많은 신자들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면서 백성들에게 활발히 전파되었어요.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신부가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프랑스와 수교 조약을 맺으면서 포교의 자유를 인정 받게 되었습니다.
① 이승훈(1756~1801)은 동지사로 파견되는 부친을 따라 청에 가 교리 공부 후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았어요(1784).
귀국하여 관직 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쓰다 여러 차례 탄핵, 투옥되었으며, 결국 신해박해(1801) 때 처형되었어요.
참고로, 조선인 최초의 신부는 김대건입니다.
② 천학문답은 문답 형식으로 천학(천주교)이 사학임을 비판하였던 저술입니다.
안정복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전면 배격하였던 인물입니다. 남인 중 천주교를 전면 배격한 인물은 이익,
안정복, 신후담이었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수용한 인물은 이벽, 권철신, 이가환, 정약용 형제입니다.
③ 천주교는 청을 방문한 사신들에 의해 조선에 서양의 학문(서학)으로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④ 세도 정치기에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어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이때 정하상의 노력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조선 교구가 정식 승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⑤ 천주교는 서학을 연구하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점차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6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엄청 어렵네요ㅠㅠ 이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기죽고 있어요ㅠㅠ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해서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려고합니다. 감사해요!
아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와우~ 이렇게 어려운줄... 몰랐어요. 공부 단디 해야겠네요
자세한 설명감사합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하네요 어렵 ㅠㅠ
헉 겉햝기로 공부하고 풀려니까 어렵네요
ㅠㅠ 한국사 중급해야겠어요
해설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공부가되네요 감사해요 ㅎㅎ
열심히 해야겠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이팅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합시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
천주교관련내용 정리가 되는듯합니다.
보고 또익혀야겠지만...
어렵네요 ㅠㅠ
완전초보라 어렵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