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 70주년, 6.25때 남북한 무기 비교ㅡ 남침인가 북침인가?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미국과 남한 군은
북한군의 사정은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 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대한민국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이와 같은 계획적인 사전조치를 취함으로써
제대로 대항을 못하게 하고 후퇴하도록 명령까지 내렸다,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쪽≫
6월 20일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한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해 내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맡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 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 되었다.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북한군이 남한군으로부터 대대적인 불의의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 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23일 밤10시부터
중화기를 동원하여
무수히 많은 포탄 세례를 퍼붓는 공격에만 집중하였고
정작 중요한 방어에는 얼마나 준비를 안 했는가를 알 수 있다.
24일에는 38선을 넘어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공격하였었다.
또한 다음의 사실들을 통하여
국군이 장비가 없어
총 한발 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북침전쟁의 길로 내몰기 위해 1949년 한 해에만도
10만5000정 이상의 각종 최신보병총과
2000정 이상의 중기관총과 경기관총
그리고 5000만발 이상의 탄약 수많은 각종 포들과
그에 따르는 막대한 양의 포탄들,
5000대의 군용차들과 79척의 함정과 20대의 비행기를 제공하였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두고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는
남한의 한개 연대는
북한의 한개 여단에 대항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맥아더의 수수께끼> 일문,1951년판 258쪽
무기를 공급한 것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지원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전쟁의 불 집을 안심하고 터뜨리라고 공급한 것이다.
한국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1950년 1월에
“북벌계획은 결정된 문제이다.
이것을 실현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북진통일을 간청하는 이승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침공을 개시한다 할지라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기 위한 여러 조건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미국은 코리아 전쟁을 사전 준비하면서
내외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작업을 해 온 것으로 밝혀져 왔다
“유엔담당 미 국무차관보 존 d. 히카슨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북침을 감추고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날조시키기 위한
‘유엔결의초안’까지 전쟁 전에 제 마음대로 조작해 완비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 상원세출위원회의 국무성 예산에 관한 실무적인 청문회에서
죤 디 히카슨은 코리아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유엔에 제출할 <결의안>이 전쟁 전에 작성되었다 고 증언하였다.
이는 ‘nsc-68’에
따라 수립된 계획으로서 un군의 코리아 전쟁 참전이
전쟁 전 미국의 ‘nsc-68’에 따라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1950년 4월2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nsc-68’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이 단계 별로 명시되어 있다.
≪1964년 4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서≫
6.25때 남북한 무기 비교.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 유엔군 지상군의 50.3%,
해군의 85.9%, 공군의 93.4%를 담당하면서
연 병력 178만 9천 명을 파병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전쟁과 미국’ 항목)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월등했다.
“1950년 당시
북한군의 육군 병력은 1만 2,200명밖에 되지 않았고,
미국 육군 병력은 63만 명이었다.
미국 육군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6개월 동안
총 1,326대의 전차를 한반도 전선에 들이밀었는데,
북한이 보유한 탱크는 40대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 당시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 31척과 전투함선 약 1,200척을 보유했고,
잠수함 32척을 한반도 전선에 출동시켰다.
그에 비해, 조선인민군 해군은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을 생각하지 못했고,
소형 어뢰정과 소형 경비정 30척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1950년 당시 미국 공군은 전투기 6종, 폭격기 2종,
정찰기 8종, 수송기 5종, 훈련기 1종을 실전에 배치했다.
맥아더 휘하에 있는 각종 작전기만 해도 1,172대나 되었다.
그에 비해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이 보유한 작전기는 136대밖에 되지 않았다.”
미국은 또한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제외한
당시 최신의 살상 무기를 총동원해 북한을 공격했다.
미 극동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한국전쟁에서 쏟아부었다.
정전협정에 서명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1954년 출간한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서문에서
“이것(휴전협정에 조인한 것)은 사상 처음으로
승리 없는 전쟁의 휴전협정에 조인한 미군 사령관을 탄생시킨 것”이라며
한국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또한 한국전쟁 초기 미국 국방부 장관이었던 조지 마셜은
“신화는 깨지고 말았다.
우리는 남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강대한 나라가 아니었다”라고 말했고,
오마 넬슨 브래들리 미국 초대 합참의장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진행한 잘못된 전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북한은 정규군을 창건한 지 2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한국전쟁을 치렀다.
북한은 세계최강이라 하는 미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
김일성 주석의 군사적 ‘예지’와 전략 전술,
군사 전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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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무기상황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북이 남침했다는거 말이 되나?
전쟁을 할려면 적어도 상대보다 무기와 인원이 3배는 되야 승리가능?
누가 6.25를 일으켰는지 알아야 조폭 미국의 실체를 알수있음?
누가 78년간 통일을 방해했는지는 바로 위 사실이 확인?
통일이 되면 무기도 팔아 먹을수없고
남조선을 식민지로 부릴수 없는 나라가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알수있음?
그리고 북이 왜 남조선 괴뢰정부라고 하는지 알아야 함?
괴뢰정부라는 말은 식민지라는 의미?
괴뢰정부라서 전시작전권도 없는것?
실제 120년간 미국과 일본의 하수인 친일파 식민지가 남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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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이 참전해서 51년 1.4후퇴.
전쟁나고 5개월 남짓 후에 참전.
중공 무기는 미국에 비하면 형편 없엇다고 함.
북한무기 숫자는 말할것도없고,
그런데 북한 지역은 산악지역이고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경력이 있어
무기 숫자가 10배 정도 차이나도 전술이 뛰어나서 이겼다고 봄.
물론 중공군이 총격전이던 인해전술이던 20만명인가 사망한 덕도 있겠지요.
6.25때 남한 인구 2000만명 정도.
북한인구 900만명.
남한 피난민 650 만명.
북한 피난민 250 만명
북한군은 30만명 사망
북한 민간인 사망자 2백만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250만명 희생.
북한 제외 남한 총 사망자 약 380만명.
북한 포함 총 사망자는 630만명.
중공군 20만명 사망.
유엔군 15만명 사망.
중국의 대규모 병력, 인해전술로 일시적으로 밀렸지만..
어디까지나 인구빨 뿐이였고..
전쟁 기간 중공군 사망자가 20만명, 부상 39만명, 실종 포로 합계 60만명.
유대인 모택동은
중공이 조선땅이었던 사실을 아는 조선족을 앞장세워 총알받이로 학살시킴.
미국의 전사자 합은 약 36,000명 부상자는 약 10만명이였는데..
중공군과 비교시... 중국의 머리수로만 밀고 내려온 무식한 생명경시..
인해 전술의 실체를 알수 있다.
심지어 중공군은 전쟁에 뒤늦게 참전 했는데도
전쟁에서 미군이 1명 사망시 중공군은 5명이 죽어 나갔단.. 이야기다..
즉, 1 : 5의 교환비를 가진 한심한 오합지졸 군대가 중공군이였다. ㅡ 건국 1년만에 참전
평양인구가 40만명인데 폭탄 40만개 투하.
731부대 책임자 입회하에 탄저균.소이탄도 투하하여 수십만명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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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2월 얄타에서
미영소가 한반도 분단시키고 전쟁하기로 약속.
유대인 대통 4명이 짜고친 고수돕이 6.25?
전쟁 일으킨 목적은,
1900년대 초까지 전세계를 다스린 조선의 역사를 세탁하고,
2차대전 일으켜 떼돈 번후,
바지사장 히틀러 퇴출시키고,
남은 엄청난 재고 무기를 미영 정부에 납품하여 또 돈벌기위해
딥스 두목이 지시하여,
가짜 유대인 미영소중 대통이 짜고 친 고수돕이 6.25.
북진통일 한다고 속여 3000회 북침으로 남침을 유도하여
일부러 후퇴하여 3일만에 서울 점령당한후,
3개월만에 부산제외 점령 당함.
소련은 약속대로 거부권 행사 안해 맥아더가 유엔군을 끌고 참전하여
압도적인 무기로
압록강 까지 밀고 올라가자 유대인 모택동한테 연락하여 참전시켜
다시 밀러내려와서 김일성을 설득해서 3년만에 휴전협정 체결.
김일성은 유엔군이 참전하자 스탈린한테 속았다고 깨달음?
이후 6.25 원인을 남침으로 조작하여
60여년간 가르쳐서
120년 원수 미국을 우방으로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 세뇌당해
우리가 전세계를 다스린 천자국인줄 모르고
사대주의 노예근성이 몸에 배여 선진국이 안되는것?
해방후 한국인으로 개명한 왜놈 130만명과(현재 수백만명) 후손들이,
1% 지배층을 차지해서
국민을 반으로 나눠 싸움붙이고
여야합작으로 매년 예산 70%를,
친일파 후손 재벌과 1% 한테 밀어주고 돈챙기며,
룰루랄라 해온 세월이 78년?
이승만 부터 윤까지 전부 미국이 임명해서
북에서 남조선 괴뢰정부라고 하는것?
괴뢰정부라서 전시작전권도 없음?
여야는 같은부모가 키우는 아들 ㅡ 한편?
가짜왕과 가짜의원 150명.
가짜 시장도지사.가짜 교육감이 절반 이상?
이게 나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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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몰락은 2018년부터 시작됨?
25년 되면 눈에 확 보일거라고 봄.
작년 미국이 우크라 전쟁 일으키고 무기팔아 돈벌고,
석유,가스 식량 폭등시켜 정치인 군부 기업만 돈 벌었지만,
정부는 부채가 4경원으로 부도상태?
미국 대통은 미국땅 주인이 임명하는 바지사장.
그래서 정규직 국민 10%.
비정규직 국민 90%.
우리도 미국과 동일?
한국 일본 대통도 미국이 임명?
미국은 국민소득 80.000달러로 선진국이라서,
방산업체 ,석유.가스. 식량기업은 돈이 엄청 많아도
주요언론.위 재벌들은 미국땅 주인의 계열사?
정부와 국민들 삶에 아무 상관없음?
중국 대만 전쟁 일으켜 또 이익 챙길려고 하다가 안되서
한반도 전쟁 일으킬려고 하지만,
북이 강력해서 일으키는 순간 주한미군 3분이면 초토화?
확대되면 주일미군.괌.하와이 본토까지 잿더미?
그래서 지금 우크라 전쟁 끝내고 이란과 전쟁 할려고 하는데
이란과 붙어도 미국 승리 못함?
아님 중동국가와 전쟁할려고 진행중.
미국은 전쟁으로 먹고 사는나라?
주식회사 미국 설립후 250년간 220년간 전쟁?
미국은 국가가 아닌 주식회사라는거 알아야 함?
그리고 우방이 아니고
38선으로 분단시킨후 북침으로 6.25를 일으킨
120년 원수라는거 알아야 함?
미국 하수인 친일파가 지배하는 세상을 끝내야,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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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아닌 전쟁 상태 유지 강조한 미국
박명훈
2023.7.26
▲ 2013년 7월 27일,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으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전협정 체결 70년째인 올해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 상태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전쟁은 멈췄지만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부는 2021년에 펴낸 『한반도 평화 이해』에서
한반도는 “아직도 여전히 미완의 평화 지대로 존속하고 있다”라면서
“전쟁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는 분단된 한반도를 조망할 때
평화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라고 짚었다.
이와 관련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문제는 ‘군사 문제’,
즉 한반도에서 군사적 무력 충돌과 전쟁의 억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민족 문제’ 차원에서 민족 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제를 의미”한다는 분석이 있다
. (박순성,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천 구상: 정전체제, 분단체제, 평화체제」,
『사회과학연구』 25권 1호, 동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8, 30쪽.)
김강녕 조화정치연구원장 역시
평화의 의미를 한국과 북한이 분단 상태를 극복해
하나로 통일된 민족 공동체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강녕,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과제와 전망」,
『통일전략』 3권 2호, 한국통일전략학회, 2003, 133쪽.)
이처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분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통일을 방해하는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방해하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지금까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이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라면서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을 제안했지만,
한미는 이에 묵묵부답이었거나 매우 소극적이었다”라고 짚었다.
(정욱식, 「[정욱식 칼럼] 정전 70년, 평화협정 협상의 원년으로」,
한겨레, 2023.1.2.)
정전협정은 전쟁을 치르던 국가 간 전쟁을 일시 중단,
평화협정은 전쟁을 치르던 국가 간 전쟁을 완전히 종료시킨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북한, 중국,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3년여 만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정전협정은 전쟁이 멈춘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든 군사 충돌이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한반도의 휴전선-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70여 년 동안 계속되는 군사 충돌이 대표 사례다.
반면 평화협정은 전쟁을 치른 국가 간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협정이다.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서 70여 년째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대치하는 상황이 끝나게 된다.
(「정전·휴전·종전의 차이점?」,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TV, 2018.9.20.)
지난 2018년 남북·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높았지만,
미국이 어깃장을 놓으면서 끝내 불발됐다.
2. 남북 평화협정 체결 요구한 북한
북한, 중국, 미국이 체결한 정전협정은
전쟁을 끝내지 않은 불완전한 협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했다.
이 때문에 정전협정 체결 뒤
한국과 북한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열린 제네바회담에서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소련 등
국제사회 19개국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에 관한 논의가 오갔다.
제네바회담에서 가장 쟁점이 된 것은
유엔의 권위 인정 여부와 외국군 철군 문제였다.
중국 측 대표인 저우언라이 총리는
1954년 5월 22일, 중립국감시위원단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감시를 제안하며
한반도에서 유엔의 역할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측 대표인 남일 외무상도
유엔이 미국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다며
유엔은 한국의 편을 든 교전국의 일방이므로
한반도 문제에서 공정한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김보영, 「위기의 한반도, 평화의 길을 묻다 - 정전협정의 쟁점과 그 유산」,
『역사비평』 2013년 가을호, 2013, 193~203쪽.)
제네바회담 당시 북한과 중국뿐만 아니라
, 유엔군 측인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도
한반도에 있는 외국군을 동시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부 장관은
중국 인민지원군을 우선 철수시키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이 평양에 주둔해야 한다면서 논의를 결렬시켰다.
이는 북한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김연철,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창비, 49~52쪽.)
제네바회담 마지막 날인 1954년 6월 15일
남일 외무상은 우선 평화유지에 관한 합의라도 봐야 한다며
‘냉전의 공고화와 정전상태로부터 공고한
평화에로의 점진적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6개 항을 제안했다.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한국정치연구』 제18집 제2호,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09, 55쪽.)
6개 항에는 남북 병력 10만 이하 감축,
남북 정부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위원회 구성 등의 제안이 담겼는데
이는 ‘한반도 최초의 평화정착 방안’으로 평가된다.
(김연철, 앞의 책, 54쪽.)
북한은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끝낼 해법으로
한국을 향해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제적으로 북한에 주둔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를 주도했다.
제네바회담이 끝난 뒤 북한은 1955~1958년 동안
중국 인민지원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김일성 주석이 적극 나서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철수를 주도했으며,
중국 인민지원군의 철수를 계기로
북한이 중국과 거의 정치적으로 대등한 동맹관계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짚었다.
(이종석, 「북한 주둔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에 관한 연구」,
『세종정책연구』 2014-19, 세종연구소, 2014, 37쪽.)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뒤,
김일성 주석은 1962년 10월 23일
남북 군축과 미군 철수를 담보할 평화협정(불가침협정) 체결을 한국에 제안했다.
김일성 주석은 1972년 1월에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대담을 통해
‘정전협정을 대체할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국제사회에 공론화했다.
북한은 1955년 8월 14일부터 1973년 4월 5일까지,
무려 130여 차례나
남북 군축과 주한미군 철수를 담보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한국에 제안했다
. (임수호, 위의 글.)
반면 한국은 평화협정 체결을 반대했다.
정전협정을 반대한 이승만 정권은 휴전을 끝내고,
한국·미국·대만군이 힘을 모아
북한과 중국을 공격하자며 북진통일론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반공을 바탕으로 한 독재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강했고,
이에 따라 반북 공세를 강화했다.
북한과 대결을 강조한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남북 평화협정 체결은 관심 밖이었다.
이에 미국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며
남북 간 충돌 수위를 조절하려 했다.
미국은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을 바라지 않았지만,
한반도에 또다시 군사를 들여
북한과 전면전을 치르게 될 상황 역시 꺼렸기 때문이다
. (김연철, 위의 책.)
3. 북미 평화협정 체결 요구한 북한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이 가로막히자 북한은 미국과 직접 담판에 나섰다.
북한은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인 미국을 향해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촉구했다.
1975년 10월 24일,
제30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북한 측 리종목 대표는
평화협정 체결 문제에 관해
“미국과 해결할 문제가 따로 있고
남조선[한국]과 해결할 문제가 따로 있다”라면서
평화협정은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철수한 다음
조선[한반도]에서 공고한 평화를 달성하는 문제는
미국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남조선 사이에 해결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 (임수호, 위의 글.)
북한은 중국, 소련 등과 함께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 내용은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의 모든 권한 박탈,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이었다.
유엔 무대에서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제기된 건
제30차 유엔총회가 처음이었다. (임수호, 위의 글.)
반면 미국은
남·북·미 3자회담, 4자회담(한국, 북한, 미국, 중국)을 제안하는 등
북한과의 양자 대화를 거부했다.
4자회담 의제와 관련해 한미 양국은 남북 간 긴장 완화나
신뢰 구축 문제부터 먼저 논의하고
합의가 어려운 평화협정이나 주한미군 문제 등은
천천히 논의하자며 시간을 끌었다.
북한은 근본 문제인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문제 등이 아니라
남북 군사당국자 직통전화 운영 등
긴장 완화 문제를 논의하자는 건 문제 해결을 피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박영호, 「4자회담의 전개과정과 평가」,
『한반도 평화전략 연구총서』 2000-33, 통일연구원, 2000, 153~154쪽.)
평화협정을 거부한 미국은
1990년대 들어서도
한미연합훈련, 전략무기 전개 등으로 북한을 자극해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북한은
미국을 향해 꾸준히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한 외교부 성명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도입하면서
기능하지 않는 정전협정의 비정상 상태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현 정전기구를 대신하는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의 구상은 1996년 2월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한 북한 외교부 대변인 성명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에 앞서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이행을 검증하기 위한 북미공동군사기구를 설치하자는 것이 북한의 제안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8월 말,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1호를 발사했다.
북한은 주권국가가 가진 정당한 권리로 인공위성을 발사했다고 밝혔지만,
미국은 사거리가 2,500킬로미터로 알려진 인공위성 발사 로켓을
이른바 대포동-1호로 부르며 경계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전대미문의 국가 재난에 빠져 곧 붕괴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거꾸로
북한이 선진국의 상징이던 인공위성 발사를 자력으로 해낸 것을 보며
자신들의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는
대북 정책을 원점에서 검토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 특별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 정책의 재검토를 맡겼다.
이후 페리는 1999년 5월 평양을 방문하는 등
북한 측과 한 논의도 담아 1999년 10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를 일명 페리 보고서라고 한다.
페리 보고서의 핵심은
미국이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한 것이다.
(박종철, 「페리프로세스와 한·미·일 협력방안」
, 『연구총서』 2000-05, 통일연구원, 2000, 2쪽.)
페리 보고서 채택 이후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북미 사이에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미국은 같은 해 10월 9~12일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대표단을 이끌고 방미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
윌리엄 코헨 국방부 장관 등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북미정상회담과 평화협정이 처음으로 명시된 외교 공동성명인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채택됐다.
북미 양국의 고위 인사가 공개 석상에서 마주 앉아 성명을 채택한 건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이었다.
4. 종전선언을 제안하고도 평화협정을 거부한 미국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논의는
조지 부시 정부에 의해 가로막혀 고작 몇 달도 가지 못했다.
2001년 1월 출범한 부시 정부는
북미 공동코뮤니케 합의를 걷어차며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로써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무산됐고,
북한 붕괴를 강조하는 미국의 공세도 나날이 심각해졌다.
그런데 북한이 2005년 2월 10일 ‘핵보유 선언’을 하고,
2006년 10월 9일에는 풍계리 핵시험장에서 지하 핵시험을 성공시키자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바뀌었다.
같은 해 11월 18일,
부시 대통령은 베트남 하노이 아펙(APEC) 정상회의 과정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 종전선언,
평화협정을 체결할 뜻이 있다고 밝혔다.
비록 북한의 핵폐기라는 전제 조건을 들었으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북한의 핵보유 선언이 평화협정을 거부하던 미국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후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 정상은 10.4공동선언 4조를 통해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을 폐기하면 평화협정을 논의할 수 있다고만 했을 뿐,
관련한 행동이나 협상을 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대북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큰 틀에서 유지됐다.
부시 정부에 이은 버락 오바마 정부는
대북 정책으로 이른바 ‘전략적 인내’를 표방했다.
이는 북한이 핵개발을 알아서 포기할 때까지
대북 제재로 봉쇄하며 북한이 항복하거나,
또는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겠다는 의도였다.
(김준형,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
무시와 활용」, 『한반도포커스』 제31호, 2015, 1~7쪽.)
2010년 1월 11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조선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올해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조속히 시작할 것을 정전협정 당사국들에게 정중히 제의한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정전협정 당사국들은 정전협정에 서명한 미국, 중국을 말한다.
(이중구, 「한반도 안보구조와 북한 평화협정 구상의 변천」
, 『대외학술활동시리즈』 2018-73, 대한정치학회, 2018.10.26, 8쪽.)
이에 미국 백악관은 발표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가 선행되어야 평화협정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혀
사실상 논의를 거부했다.
오바마 정부 임기 만료가 6개월여 남은 2016년 6월 20일,
북한 관료들은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참석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북한 관료들은 “비핵화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선
미국이 먼저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 직후 월스트리트저널 취재진과 만난 북한 외무성 관료는
“힐러리(미 국무부 장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하여금
핵억지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라고 미국에 책임을 돌렸다.
또 다른 북한 외무성 관료는
“우리 조국은 대북 제재가 얼마나 강해지든
절대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박의명, 「北 외무성 관료, “힐러리의 ‘전략적 인내’, 핵개발 가능케해”」,
매일경제, 2016.6.22.)
이와 관련해 박형준 서강대 동아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 시험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원인이며,
미국은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논리라고 분석했다.
(박형준,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의 역사적 고찰과 쟁점」,
『동아연구』 제39권 2호,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2020, 130쪽.)
2017년 11월 29일,
북한은 미국 본토까지 닿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포-15형을 발사하며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미국 안팎에서도
북미 대결의 판도가 북한에 유리하게 뒤집혔다는 평가와 분석이 잇따랐다.
이런 분위기에서
북한은 2018년 2월 한국에서 열린 평창겨울올림픽에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보냈다.
그 뒤 남북 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실무, 고위급 회의가 뒤따랐다.
두 달 뒤인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남북 정상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임을 확인하면서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6월 12일 사상 처음으로 열린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미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영속적이며 안정적인 평화체제”를 한반도에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북한은 미국이 민생과 관련이 있는 제재를 해제하면,
영변에 있는 핵심 핵시설을 철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결렬시키면서 평화협정 논의를 무산시켰다.
미국이 결국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와 관련해 “미국의 입장은 명백하다.
정전협정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라면서
“정전협정은 유지하되(주한미군은 그대로 두되)
북한과는 관계 개선(수교)을 꾀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야말로
바로 미국이 원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흥환, 「‘평화협정’에 속 끊이는 미국」 , 시사저널, 1995.6.8.)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면
미국으로선 주한미군 철수뿐만 아니라
유엔군사령부(아래 유엔사)의 해체 가능성도 커진다.
유엔사의 역할(정전협정의 준수와 이행)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상근, 「한반도 평화체제의 쟁점과 구축방향」, 『INSS 연구보고서』
2019-16 국가안보전략연구원, 2019.12, 116~120쪽.)
이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과 이익을 유지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평화체제 구축에 소극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상근, 위의 글, 22쪽.)
중요한 사실은 평화협정을 아예 거부했던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은 필요하지만
북한이 먼저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꿨다는 점이다.
북한의 핵보유 선언과 핵무력 완성 선언이
평화협정을 달가워하지 않는 미국을 끌고 온 것이다.
2017년을 기점으로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으로선 자신의 생존을 위해 평화협정 체결이 필요해진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018년 싱가포르에서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후속 회담인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무산시키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평화·번영·통일을 바란 사람들의 기대감은
현실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는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가장 오랜 기간 정전협정이 유지 중인 지역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인 올해도 평화협정을 가로막는 미국 때문에
한반도의 전운은 가시지 않고 있다.
진짜 한반도는 아래.
일본 신문인 "도쿄 신문"(東京新聞)의 1895년 1월 10일자 기사와
일본의 역사학자인 "아베 노부요시"(阿部信能)가 1975년에 출간한 책인
"고려의 세계지도"(高麗の世界地図)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베 노부요시의 "고려의 세계지도"는
2006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번역자는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인 이경훈입니다.
민음사 (2006년)
혜안 (201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년)
1300년대 고려가 전세계를 장악한 증거.
천자라서 단군이 국가형태인 조선을 건국한후부터 전세게를 다스림..
1902년 6월 14일
뉴욕 타임즈의 고종황제는 월가 대주주 큰손보도 처럼
이때까지는 대한제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
이성계가 고려를 존중해서
그대로 물러받아 나라이름도 고려라고 했다. ㅡ 조선왕조실록
이성계때 그린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별자리를 보완하여
세계를 12개로 나누고,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나라가 조선이다. 우리나라다.
본문 북이 말한 혼천전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말하는것.
1405년 이성계때 천자국 고려 신하국 전세계를
고구려때 별자리를 참조로 12개 별자리로 나눈것?
전세계가 조선
1763년 천하전여총도에 기록된 일본국은 왜노였다.
이 왜노국이.. 원조 일본 영국과 미국에 의해
일본국으로 역사와 문화가 이식되여 다시 신일본으로 태어나
한민족 말살정책에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원조 일본 영국과 미국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며 문명국인냥
전세계인을 속이고 살고있는 것이다.
가짜 일본을 왜 만든 것을까?
지구 황제국을 배신한 댓가가 후세에 알려질 경우,
너무 두려웠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대조선인들을 죽이고
고려인들까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유태인이 독일에게 당한 것 보다 수십 배는 더 클 것이다.
(원조 일본은 어디에 있었을까? ㅡ 네들란드, 스페인이 일본.ㅡ 조선 신하국.
기모노 스시의 원조는 네들란드.
나중에 스페인 무적함대 펠리페 2세(토요토미 히데요시) 가,
유럽과 중남미 일부를 통이라여
대조선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쳐들어 온것이 임진란의 한산대첩.)
1418년 그린 천하전여총도 지도를 1763년 모사한 지도에는
열도 일본은 왜노 라고 나옴.
고로 혼일강리도의 열도 일본한자는 조작..
그리고 한반도는 고려라고 되있고
중국 한반도 열도 왜노는 같은색상.
이것은 중국은 천자국 조선황제가 계신곳의 글 처럼
조선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끔찍한 미국은 만행 ㅡ 참조
왓슨 연구소 ㅡ 참조
38선은 누가 그엇나 ㅡ 참조
실제 120년간 미국과 일본 친일파 식민지가 남조선?
미국은 1904년부터 타국은 ㅡ 참조
2009년 친일 인명사전 4776명 ㅡ 참조
매년 550조가 블랙홀로 사라지고있다 ㅡ 참조
좋은세상 올거야 북행열차 박찬종 ㅡ 참조
이진석
https://blog.naver.com/bmss4050/222883092255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과 반민특위 해체?
첫댓글 https://youtu.be/tp4iwsPYTZg
홍범도장군 흉상철거와 쏘련군의 625전쟁 개입의 연관성
PLAY
https://blog.naver.com/bmss4050/222854947662
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 전문을 게제한다.
미영소중이 짜고친 고수돕이 6.25.
https://blog.naver.com/bmss4050/222854952142
코리아 국제 전범 재판 최종 판결문 - 6.25 배상금 판결문
딥스들이 6ㆍ25도 조장한것이라고 들었어요 ㆍ한국인들 서로 싸워서 몰살시키려고요
천자국의 나라이니요
네 그래요.
그런데 90% 이상은 먼저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알고있다고 봅니다.
@작설차 남침ㆍ북침 중요할까요?
딥스들이 서로 이간질시키고 작전을 짠거고
그 놀음에 놀아난거고
국민만 다치고 미군들이 서민들을 골로 끌고가서 무자비하게 죽임당해서 골로간다라는 말도 생겼다는데요?
딥스들이 한짓은 전쟁 ㆍ학살 ㆍ역사 속이기 세월호 사건 ㆍ이태원사건도
말도 못하지요ㆍ언제나 끝이나려나! 지긋지긋 합니다
@그라시스 김 종옥 이태원 참사는 윤완용 지시로 미리 경찰투입 안해서 일어난일이라고 봅니다
3~4년 안에 정상적인 대통이 당선되면 끝날거라고 봅니다.
@작설차 이 나라는 아직도 딥스의 나라 ㆍ경찰투입안한것도 딥스의 지령
@그라시스 김 종옥 맨날 딥스 청소 한다고 하는데
왜 남한은 딥스 청소 안할까요
@작설차 남침.북침 다부질없다요 지구상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은 딥스의 사기극 !
@작설차 아직 시간이 아닌거죠 ㆍ몇백년동안 이어온 딥스들이 호락호락 청소가 된다는것이 어려운일이죠ㆍ시간이 걸리니 다들 기다리는거고 딥스의 존재를 모르는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니 딥스들은 국민들이 자신의 존재를 아는게 제일 무서운거죠
깨어있는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힘들이 그 기운들이 모여
딥스를 무너트리기 쉬운데
거의
대부분이 정부를 믿고 신뢰하고
코비드 19도 90프로나 넘게 맞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깨어나야 하는데
다들
너무나 정부를 신뢰하니요
작설차님도
허경영 기사를 보고
혹 하시니요
허경영 그 사람은 키미님도
제대로 옳바른 정신을 가진자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국민이 딥스라는 존재를 많이 많이 알아야 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딥스도 물러나지요
@그라시스 김 종옥 세계에 신경쓸게 아니고
국내에 있는 딥스 청산할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봄.
https://blog.naver.com/bmss4050/222855886183
국가 지도자 정신 교육대 이광요
우유를 2년간 썩지않게하는 인간이 지금 세게에 있나요?
허경영이 올바른 정신이 아닌데.
18년 트럼프가 초대하여 백악관에서 만찬?
그럼 트럼프도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군요.
@작설차 님. 이카페 주인장이신 키미님이 이 저에대해 정확하게 알고계십니다 그래도 부정하실건가여 그렇게되면 카페에서 퇴출당하십니다 혼자만 맹신하세여
@민지연 눈에 보여줘도 안믿는 사람은 세뇌를 당해서 그런 모양.
https://cafe.daum.net/trumpandtheknight/nCMB
허경영 트럼프와 만찬?
이승만의 실체와
6.25 진실..
천안함 폭침 진실
3가지만 알면,
국민들이 금방 깨어날거라고 봅니다.
https://blog.naver.com/bmss4050/222941092822
이승만은 누구인가?
https://blog.naver.com/bmss4050/222860293392
천안함 사건 자작극 폭로
고맙습니다
이승만은 조선을 무너트린 서인 노론세력
자신의 본적도 japan이라고 썻습니다
여기서 일본은 한반도 옆에있는 일본이 아닙니다
일본은 미국ㆍ영국 ㆍ프랑스 ㆍ독일 ㆍ러시아세력입니다
조선의 마지막왕비는 민비라고 하지요 러시아 사람입니다 ㆍ민비시해이후 미국사람 에일리와 결혼합니다
왕은 사실 허수아비이고
왕비가 실세여서 외척세력이
왕권을 쥐고 흔들었죠
결국 미국이 최후로 이긴거죠
일본은 미국을 말하는거라네요
러일전쟁도
러시아와 미국싸움인거죠
이승만도 머리검은 미국 곧 일본의 앞잡이 세력
일본이라는 이름을 한반도 옆으로 옮겨버린거죠
한반도 옆의 일본은 딥스의 막대한 후원아래 미국 다음으로 세계 경제대국 2위로 발전시켜준거죠
https://blog.naver.com/bmss4050/223213949958
정상국가가 될려면 진짜 우리역사를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94년 김일성 사망.
95년 동시에 남북한 삼키기위해
소련붕괴후 축소되서 힘이약한 러시아와
아직 후진국 중공한테 압력넣어 끌어들여,
식량지원 중단해서 김정일이 무너지면
미일중러 남한 친일파가 북을 나눠먹기 밀약후
통보도 없이 갑자기 식량지원 중단.
4년간 고난의 행군늘 겪음.
몇십만이 굶어 죽었다고 봄.
2000년부터 식량 자급자족.
석유도 자급자족.
지하자원도 자급 자족.
이후 중러가 유엔에서 미국편들면 대놓고 비판.
김일성이 살아생전 중러와 협력은 하되 믿지는마라.
남북한이 전쟁하면 한민족은 100년간 후퇴한다.
남녘동포는 언젠가는 함께 살아야 할 민족이다 유훈.
그래서 2010년 김정일이
6.25 배상금과 60년간 대북제재 배상금.
북한만 65조 달러 요구.
남북한 합쳐 107조 달러 배상 요구 발언.
15년 정은이가 물가인상 이유로 남북합쳐 116조 달러(12경원) 요구.
석유 비공식 사우디 2배?
이런데 세뇌를 당해 북을 적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90%?
https://blog.naver.com/bmss4050/223121672942
세뇌당한 멍충이 국민이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