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고교야구 스타
2005. 3. 27. 23:33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의 김성한(金城漢) 총감독이 모교인 군산상고의 감독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70년대 뜨거웠던 고교야구의 열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김성한(金城漢) 감독은 1976년과 1977년, 투타에 모두 능한 한국 고교야구의 최고 인기스타중 한명이었지요.
70년대에는 고교야구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면, 서울시내 교통이 뜸해질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동대문야구장을 가득채운 재학생과 졸업생의 응원단이 펼치는 응원전도 볼만했지요. 그래서 당시 고교야구 선수들중에는 1년을 '꿉는'(1년을 같은 학년에 더 재학하는 것)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이 때가 사춘기 성장기 이지요...1년 차이로 아이가 성인으로 바뀝니다...힘이 잇써야 좋은 야구를 할 수 잇엇습니다..)사실 요즘 30대 중반 이하 사람들은 그 당시 고교야구의 열기를 잘 모르겠지만, 30대 중반 이상의 독자들은 그 시절의 향수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저의 기억을 되살려 뜨거웠던 70년대 고교야구 스타들을 나누어 리뷰해 보겠습니다.
▶1970년
경북고(대통령배 우승), 대구상고(청룡기 우승), 성남고(황금사자기 우승)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습니다.
당시 대구상고의 정기혁(鄭基赫) ((와.....다른소리 기억력 죽인다...이것을 정확히 기억해 냇네..)투수는 정확한 컨트롤의 기교파 투수로 청룡기 우승과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요즘 미국 프로야구에서 ‘컨트롤의 마법사’로 불리는 그렉 매덕스(Greg Maddux)와 투구 폼이나 구질이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는 한양대에 진학해서는 퍼팩트 게임을 기록하기도 했지요. 이후 기업은행에서 활동하며 국가대표에도 선발됐던 정기혁(鄭基赫)은 더이상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3년전 인터뷰를 위해 정기혁(鄭基赫) 투수를 만난 적이 있는데, 서울 강남에서 대형 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있더군요. 그의 아들 역시 당시 두산 베어즈에서 투수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했습니다.
▲ 아버지와 아들의 닮은 피칭폼. 1970년 청룡기를 대비해 연습하는 당시 대구상고 정기혁 투수(왼쪽)와 그의 아들인 두산 베어스 정진용 투수.">
<사진설명: 대구상고 3학년때 정기혁 투수의 연습투구 모습(왼쪽)과 그의 아들인 두산베어스 소속 정진용 투수의 투구모습. 외모와 투구폼이 닮았다.>
그해 투수 부문에서 성남고의 좌완 투수 노길상(盧佶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노길상(盧佶相)은 전국 규모 고교대회에서는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지요. 상대는 다름아닌 경북고였습니다. 노길상(盧吉相)은 대회 3일째인 9월25일 경북고를 상대로 1대0으로 노히트노런을 이끌어냈습니다. 빠른 공에 낙차가 큰 커브로 막강 경북고 타선을 완벽히 틀어막았고, 만일 4회와 5회 한차례씩 볼넷을 내주지 않았다면 퍼팩트게임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성남고는 결승전을 앞두고 박점도(朴点道) 감독이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불상사가 벌어졌지만, 감독없이 최종 결승전에서 대구상고를 4대2로 물리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황금사자기는 입원중이던 박 감독에게 바쳐졌지요.
<사진설명: 노길상 투수의 모습>
이밖에 1970년에는 배문고의 백창현(白昌鉉), 2학년 라이벌인 경북고의 남우식(南宇植)과 부산고의 김정수(金貞洙)가 투수 부문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타격에서는 대구상고의 포수인 김종우(金鍾佑)(( 야 이름도 비슷하게 맞췃네요)와 선린상고의 2학년 이해창(李海昌)이 슬러거로 꼽혔습니다..
--))다른소리 친구중에 성남중학교 출신이 잇엇습니다..그때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시작 한 때 엿지만...같은 중-고등학교라는 소속감은 여전햇을 때엿지요....
갸는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노길상...노길상 노길상...아조 달고 살앗써요.
남우식이 2 학년으로 나오는데...남우식은 이때도 하두 잘 던져 올 스타엿고....일본원정도 따라가고 그랫습니다.
이해창을 슬러거 라고 하지요?
이해창이 타격을 하면 방망이 소리 부터 달라요..
깡-깡- 소리만 듣고도..애들은 ....해창이 때린다...며 운동장으로 뛰어가 구경하곤 햇습니다..
10개중 3, 4개는 그냥 담장을 넘어갑니다.
당시에는 야구장이 드물어 ...실업팀(금융팀) 야구단도 선린상고에 와서 연습을 하고 갓습니다.
이들이 타격 할때도 ...이해창 만큼 슝슝 넘기는 선수들은 없엇습니다.
이들은 연습이 끝나고 나면 버릴만한 공을 주고 갓는데
가난한 시절의 고등학교 야구팀에겐 그런 공도 연습용 공으로 참 요긴하게 썻지요.
동대문 구장에서도...파올볼이 나오면...미리서 배치한 볼 보이들이 쫓아 가서 수거해 가곤 햇습니다.
프로야구 시작 하고 나서야...관중들이 파올볼을 갖게 햇을 겁니다...
그런 공을 지금은 동네 아이들도 가지고 놉니다..
다른소리가 버릇 처럼 조물닥 거리는 야구공..
▶1971년
경북고가 전무후무한 기록을 낳은 한해입니다. 대통령배·청룡기·황금사자기, 그리고 그해 신설된 봉황대기 등 서울에서 열린 4개 대회를 모두 우승했고 부산에서 열린 화랑대기 마저 휩쓸었습니다. 경북고는 운도 좋았습니다. 패자부활전이 있는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는 중앙고에 패배를 기록했다가 이후 기사회생, 결국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중앙고의 2학년 투수 윤몽룡(尹夢龍)에게 단단히 혼이 났지요.
당시 경북고의 타선은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1번 천보성(千普成) 2번 배대웅(裵大雄) 3번 김철(金徹) 4번 정현발(鄭鉉發) 5번 남우식(南宇植) 6번 박용훈(朴容勳) 7번 추경덕(秋京德) 8번 최광수(崔光秀) 9번 손상대(孫相大)로 이어지는 황금타선이었습니다. 이들중 천보성(千普成) 배대웅(裵大雄) 정현발(鄭鉉發) 선수는 프로야구 무대에까지 뛰었지요.
--)) 아마도 박노준 김건우 조형일이 뛰엇던 선린상고의 라이업이...이때의 경북고등학교를 연상하게 하지 않앗나 시포요.
하지만 이들이 1학년 2 학년때는 밥 먹듯이 햇던 우승을 정작 3 학년 가장 전성기때는 하지 못햇습니다.
오히려 성준, 문병권등 희질군한 경북고등학교가 또 다시 4개 대회를 휩뜰어 버리는 기염을 토 햇는데..
선린상고는 두번의 결승전에서 준 점수가 죄다 ...실책......실책도 참 기이한 것들이 나오더라고요...
이게요......
안되는 것이 잇더라고요..
군에 잇을때...다른소리 만큼이나 야구 오지게 좋아 하는 사람이 잇엇는데....경상도 사람....
계급은 높앗지만 다른소리와 중대는 달랏고 막 씹엇지요....
야는 혀튼 말 하고 싶으면 다른소리 찾아와 나발 거리고 갓습니다.
-봐라 봐라..
-선린이 우승??.........절대 못 한다 아이가..
-김정수가 우승을 이끌 만한 실력은 못 되지만....한 께임 정도는 뭔 짓을 해도 할 놈이거덩.
-선린이 1차전에 진흥하고 붙는다 아이가.
-김정수가 일 낸다........두고 봐라..
해태 시절의 김정수..
세상에나......
말이 씨가 된다고 꼼짝없이 그리 되더먼..
신들린 듯 한 수비 하며...
이건 안 되는 시합이네.....인정
야가 말은 참 재수 없게 햇지만 ..어쩜 저리 쪽집게야 ..싶엇는데..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빨강장갑의 마술사 라고 불리는 한양대학 감독 김동엽이 그런말 을 햇더라고요..
주간 스포츠에...선린이 우승한다는 보장이 잇는 것은 아니다..며....김정수를 딱 찍어.....그리 말 햇답니다..
전문가들이니....아무래도 좀더 깊이 보는 것이 잇엇을것 아닙니까??
선린이 경북에게 에라로만 우승을 갖어다 받치던 결승전(황금 사자기?)을 ...야 하고 같이 봣습니다..
수송부에 tv가 더 크고 좋앗던가??....칼러 엿던가??...
야가 위로해 주더라고..
-실력으로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잇다 아이가.......으잉??
야가 박노준의 광팬이엇고...
타자로써 조형일을 참 좋아 햇습니다..김건우나 박노준 보다 더 낳다는 것이지요.
야가 선린상고가 아닌 다른 학교에 잇엇다면 훨씬 더 돋 보엿을 것이다는 것이지요.
박노준이 리틀 야구 시절 ...당시 절대지존 대만팀을 1:0 으로 쎳 아웃 시켯습니다.
이 시절 대만의 리틀야구는 결승전에서도 콜드게임을 만들어내는 천하 무적이엇는데..
박노준에게 1 안타(?)의 빈공으로 녹아 버린 것이지요.
한국 대표팀이 대만 원정을 갓을때...대만 팬들은 여전히 박노준은 기억하고 잇엇고,,,박노준이 어떻게 성장 햇는가
확인하고 싶엇겟지요...
이 시합에서도 대만 팀은 박노준에 1:0 으로 또 한번 녹앗지요.
이런 이야기를 배창 맞게 주고 받을 사람이 다른소리 박에 없엇던 것 같습니다.
박노준과 김정수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나란히 국가 대표에 선발이 됫엇습니다.
당시 남우식(南宇植) 투수는 모든 게임을 거의 혼자 던지다시피 했습니다. 1학년때부터 대부분 게임을 혼자서 던졌으니, 요즘 같았으면 아마 감독이 ‘선수 혹사죄’로 감옥에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히 봉황기 대회에서는 54이닝을 완투, 단 2실점만 하는 ‘철완’을 과시했습니다. 결승전에서 남우식(南宇植)은 대광고의 ‘아리랑 볼’(아리랑 볼이 아니고요...오다가 뚝 떨어지는 공...당시 이런 공 던지는 투수들이 심심쟎게 잇엇습니다...아웃 코스에 뚝, 인코스에서 뚝,,그리고 복판 직구...그런식이엇지요) 기교파 투수인 이동한(李東翰)과 손에 땀을 쥐는 투수전을 벌인 끝에 1대0 완봉승을 거두며 최우수선수상을 안았습니다.
--)) 이때는 선수 혹사는 당연한 것이엇고...그런 개념 조차 없엇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잘 던진 선수들이 대학이나 실업팀에서 죽을 쓰는 경우는 너무 많앗습니다.
그런데 대학야구나 실업야구는 고등학교 야구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 햇습니다.
입장료 없이 야구를 하기도 하고 그랫습니다..
당시에는 스피드건이 없었지만, 천보성(千普成) 현 한양대 감독은 “남우식(南宇植)의 공 스피드는 당시 150㎞는 충분히 나갔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투수란 마운드의 종합 예술가지요. 직구 하나만 달랑 던지기보다는 슬라이더, 커브, 싱커, 포크볼, 체인지업, 너클볼 등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면 금상첨화입니다. 여기에 컨트롤을 필수로 갖춰야 합니다. 타자의 심리를 읽고 게임을 요리하는 노련미도 필요하지요. 유명 투수가 되려면 그런 요소들이 다 필요하지만 기본은 역시 빠른 직구입니다. 강속구는 어깨·허리·손목의 힘이 든든한 하체를 바탕으로 조화를 이룰 때 나온다고 합니다. 아무리 덩치가 큰 투수라도 팔의 힘만으로 던지면 총알 같은 강속구는 나오지 못하지요. 175㎝ 정도의 신장에 보통 체격이던 (이때기준으로는 결코 작은 체격은 아니지요...선린상고의 투수 이길환(남우식 한참 후배) 175cm 70kg 좋은 체격을 자랑 합니다......라는 중계 아나운서의 맨트를 지금도 기억 합니다...이 시절에 180이 넘으면 대형선수 라는 닉 네임이 따라 다녓습니다) 남우식(南宇植)은 온몸으로 강속구를 던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교시절만 놓고 보면 선동열(宣銅烈)·최동원(崔東原)·김시진(金始眞) 등 그 어느 투수도 남우식(南宇植)의 인기와 영광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해 최초로 일본과의 고교 교환경기가 열렸는데, 남우식(南宇植)이 맹활약한 한국 선발팀은 콧대 높던 일본팀에 6전 전승(이 선발팀이 사실상의 경북고등학교 멤버 고대로 엿습니다...이해창도 당연히 선발 되엇지만,,,폭력사건에 휘말려 못 갖지요....이 시절 운동선수들의 인성은 참 않 좋앗지요...조폭 중간 정도...)을 거두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깜짝 놀란 일본야구협회장이 직접 찾아와 매년 정기전을 치르자고 사정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하지만 고교시절 지나치게 어깨를 혹사한 탓에 남우식(南宇植)은 한양대에 진학한 이후 팔꿈치와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결국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끝으로 1980년 12월 야구계를 떠났습니다. 과열된 고교야구 때문에 아까운 선수의 수명이 단축되고 만 것입니다.((그 이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길환 사건-이길환이 주사를 맞으면서 연투의 연투를 거듭하여 사람들의 연민을 삿던 사건) 이후 ..비로써 선수 생명 이라는 것이 화두가 되엇고 여러가지 조치가 실행 되기는 햇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선수시절 못지않게 성실하게 뛰었답니다. 현재 남우식(南宇植)은 롯데햄우유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이따금씩 남우식(南宇植)씨가 회사에서 승진할 때마다 신문의 피플면에 그의 소식이 실리고 있습니다. 그는 기자에게 "야구만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처음엔 너무 어렵더군요. 낮에는 영업사원으로 그라운드가 아닌 마케팅에서 경쟁했고 밤에는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자신과 싸웠습니다. 운동을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는 후배들을 위해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자신이 임원이 된 소감을 말했습니다.
▲ 한국고교야구 최고스타인 남우식의 고3 때와 현재 모습.">
<사진설명: 남우식 투수의 경북고3학년때 모습(왼쪽)과 현재 모습>
당시 남우식(南宇植)과 청룡기 결승전에서 맞붙어 0대1로 패했던 경남고 김성관(金成琯) 투수는 이후 타자로 전향, 고려대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남 선수와 함께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또 프로구단 현대의 김재박(金在博) 감독은 2학년이던 1971년 대광고 2루수로 출전했습니다만, 그다지 주목은 받지 못했습니다. 김 감독은 “그때는 고교팀도 나무 배트를 사용해 알루미늄을 쓰는 요즘 선수들보다 타격의 정확성과 정교함이 뛰어났다”고 말했습니다.
▶1972년
첫번째 열린 대통령배 대회에서 경북고가 우승하면서 ‘3년연속 우승’이란 대기록을 세웠지만, 청룡기부터는 군웅할거 시대로 돌입했습니다.(( 사실은 경북의 독 무대가 될 것이라고 봣지요...황규봉 이선희는 남우식의 너무 뛰어난 활략으로 2 학년때 까지는 빛을 보지 못햇지만..이미 그때 부터도 전국구엿습니다....황규봉 하나만 잇써도 우승이다 햇는데 ...짝배 이선희 까지 덤으로 잇엇쓰니
그런데.....항상 그렇지만 .....안 되는 것이 잇습니다.
경북은 중앙고 윤몽룡에 녹아 버렷고 ...그 이후 이상하게 힘을 쓰지 못 햇습니다.....
이런 경우가 꽤 잇엇습니다..
김정수 김남수가 버팅기던 신일도 싹 쓸이 할 것이다는 예상을 전혀 체워주지 못햇고
박노준 김건우 조형일의 선린 상고도 그랫지요
여기서는 이를 군웅할거의 시대라고 서술을 하네요))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슬로커브가 일품이었던 중앙고 윤몽룡(尹夢龍) 투수는 청룡기 결승전에서 우완 황규봉(黃圭奉)과 좌완 이선희(李善熙)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경북고를 4대1로 KO시켰습니다. 당시 윤몽룡(尹夢龍)의 변화구에 헛스윙만 해대는 경북고 타자들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황규봉이 난조를 보이자...이선희로 교체 하엿고...4번을 때렷던 윤몽룡은 이선희에게 연거푸 삼진을 먹엇습니다.....윤몽룡의 베터리 켓처가 김승수엿는데....야는 세컨 도루를 저지 하기 위해 송구 하려다 볼을 빠드렷지요...급하니 얼른 주워 앉은 자세에서 세컨에 송구 하는 괴력을 보엿고...관중들이...지금 뭘 봣냐??.....햇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켓처가 나오기 시작 한 것입니다..).황규봉에 '황소'라는 별명처럼 정통파 강속구 투수인 황규봉(黃圭奉)은 고려대 1학년인 197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뽑혀 출전했으나 투숙 호텔에서 불이 나 뛰어내리다가 부상을 당하면서, 이후의 선수생활이 그리 화려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쨌든 윤몽룡(尹夢龍)은 여세를 몰아 봉황기에서는 배명고와의 결승전까지 올라가 4번 타자로서 직접 만루홈런을 터뜨리는등 투타에서 맹활약했지만 계속된 완투로 8회에 무너지며 5대7로 역전패, 준우승에 그치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지요. 당시 윤몽룡(尹夢龍)의 만루홈런이 파울볼이 아니냐는 배명고의 항의 때문에 경기가 1시간 가까이 지연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윤몽룡(尹夢龍)은 고교졸업후에 건국대(당시 대학야구는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가 주도 햇고..건국대학이 이해창 윤몽룡 을 영입 새로운 대학야구의 강자로 발 돋움 하기 시작 햇습니다....이들은 실업팀을 이기고 대회 결승에도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햇습니다...백호기(?) 결승에서 경리단과 맞 붙엇는데(육군 경리단은 당시의 올스타 팀).....이때 김봉연이 3연타석 홈런 기록을 냇지요...이전 시합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때렷고 그 시합에서 연타석 홈런 ...그래서 3 연타석 홈런...
이전에도 김봉연을 3연타석 홈런을 때린적이 잇엇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은 또 다른 3 연타석 홈런을 볼 수 잇기를 기대 햇지만...3번째 타석에서는 범타로 물러낫지요....퍼스트로 실금 실금 뛰어가는 김봉연을 향해 관중들은 우 우 ....하는 야지를 놧습니다...그 야지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잘 알앗던 김봉연은 관중들을 향해 ..의미 잇는 몸짓을 보여 관중들의 폭소를 자아네게 햇지요...그리고 나서 아나운서의 3연타석 설명이 나왓습니다.....관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넷습니다....그 시합을 봣습니다..)로 진학했고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1984년 뜻하지 않게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 야구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작고한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의 아들이며 대한야구협회장을 지낸 정몽윤(鄭夢允) 현대해상화재 회장은 중앙고 재학 시절, 같은 학년 최고 스타였던 윤몽룡(尹夢龍) 선수의 플레이에 반해 ‘도시락을 싸들고’ 야구장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1999년에 발간된 ‘한국야구사’란 책은 1972년을 ‘고교야구 전국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서울과 영남세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고교야구에 호남세가 합류, 그 인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산상고는 그해 ‘역전의 명수’란 애칭을 얻으며 고교야구의 전국시대를 연 주인공이자 호남야구의 기수였습니다.(야들이 전국 대회에서 선린상고에게만 전두번을 젓써요...그때 단체 응원을 가서.................군산행......하며 야지를 놓앗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도 극성스런 애들은 서울 운동장 까지 따라와서 군산상고를 응원을 햇는데.....왜 또 선린이야...라며 지들끼리 두털 거리는 것을 들은 기억 잇습니다....일종의 천적 관계엿던 거지요....
다른소리 고등학교 3 학년때는 선린상고 암흑기....군산상고 김용남에 꽁꽁 묵혀 콜드게임으로 젓습니다....원 없이 설욕당한 것이지요 )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군산상고에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문 부산고의 편기철(片基哲) 투수는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1대4로 뒤진 9회말, 군산상고가 한꺼번에 4점을 뽑아 승부를 뒤집었으니 말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TV를 지켜보던 저에게 그날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군산상고의 스마일 투수 송상복(宋相福)은 결승전에서 무려 12안타를 맞았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더욱 싱긋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마 그런 여유가 역전승을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송상복(宋相福) 투수는 훗날 군산시의회 의원도 지냈다고 하는군요. 군산상고에는 당시 홈런타자인 김봉연(金奉淵)·김준환(金準桓)·김일권(金一權)·양종수(楊宗秀) 등 한방 나가는 슬러거들이 많았지요. 그날 군산상고가 우승하기까지의 사연을 주제로 한 ‘자, 지금부터야’라는 영화(요절한 배우 하명중이 최간수 감독 역할을 햇습니다...진유영이 사고뭉치 선수 역할을 햇고..아마도 김일권의 역할이 아니엇을까?....영화에서 감독을 피해 도망하는 모습과 도루 하는 모습을 중첩 시켯습니다......
김봉연은 에이스 투수면서 4번을 때렷습니다. 송상복은 2 학년....
나중에 밝혀졋지만 송상복은 심한 어깨 통증을 느끼고 잇엇고 던질때 마다 아파서 찡그린 것이 tv에서는 웃는 것으로 보엿답니다....송상복의 야구인생은 거기까지...호히려 김성한의 투구력이 더 좋앗습니다.) 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야구사의 최고 홈런타자인 김봉연(金奉淵)은 현재 충북 음성군에 있는 극동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지요. 학교 홍보실장 역할도 맡고 있다고 합니다.
-)) 김봉연의 별명이 촌놈입니다.
본래 군산 촌놈인데다 ...연세대 시절 고무신 신고 추리닝이나 걸치고 각설이 처럼 학교 근방에서 어슬렁 거렷고...
인상 또한 산뜻하거나 뺀질 뺀질 하지 못 합니다....최동원이나 박철순과 비교하면 ...뭐...바로 알수 잇습니다.
그런데 김봉연과 이야기 한번이라도 나눠본 사람은 한결 같이...........갸...진국이네....라고 한답니다.
다른소린 그런 경험이 없다 보니.....그 진국이 어떤의미 인지는 잘 모릅니다..
해태 시설 김봉연이 삼성 이만수와 한참 홈런 경쟁을 하고 잇엇을때...
--야 ..야 야...봉연아 ..만수가 연타석 홈런 때렷단다..............윤동균
지금이야 휴대폰으로 실시간 알수 잇지만..그 시절이야...선수들도 시합 끝나고 나서 전화해 보고야
또는 tv 방송 보고서야 알앗던 시절
봉연이가 ....그 소리를 듣고 똥줄이 탓을 것 아닙니까...
그 래 가 꼬.....
무심타가 되지 못하고 잇는 대로 똥힘이 잔뜩 들어가서....막가지질 햇지요..
시합도 지고..홈런도 못 치고...
-내가 인생 헛 살앗써..
-동균이 형(윤동균이 한참 선배) 말을 진짜로 들엇쓰니..................김봉연
김일권 김봉연 김성한 김윤한...이른바 kkkkk 포들을 앞세운 해태는 천하 무적이엇지요..
그리고 그때 그 시대 상황에서 해태 야구는 야구가 아니엇습니다..
광주의 해태는 반드시 이겨야 햇고 또 이겻습니다..
그런데 코리언 시리즈에서 해태가 빙그레 이글스 김대중 이란 히멀건 투수에게 영봉패를 당하는 이변이 나왓습니다.
이 기가막힌 시합이 끝나고 ...김봉연 왈..
-김대중 선생님이 나오셧는데 어떻게 방망이질을 할 수 잇겐나...
호남 사람들에겐 어쩧던 특별 할 수 밖에 없는 정치인 김대중..
다른소리가 우리나라 대통령중에 유일하게 평가의 가치를 느껴 보는 대통령입니다.
김대중이 잘 햇다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보수 정치인 이지만 다른 대통령들에게서는 그런 평가의 가치조차 느낄 수 없다는 소립니다..
김대중에 대한 다른소리의 호감이...다른소리 고향이 목포이고 광주에서 중학교 1 학년을 다녓다는 것 때문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상관없씁니다.
정치인에 대한 평가야 사람들에 따라 기준에 따라 당연히 다르겟지만...
김대중은 사상가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 대중 정치인이엇고...대중 정치인 답게 대중들이 기대 햇던 만큼의 정치는 햇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른것들은 한결 같이 기대에 미치지 못 햇습니다..
박정희 전두환은 기대해 볼 것도 없엇던 정치인 이엇고
특히 노무현은 거의 사기꾼 수준이엇지요....
첫댓글 부산고는 29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제77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11-3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부산고 역사상 첫 황금사자기 우승이다.
어호호호호...
선린이 아직도 야구를 하고 잇엇네요.....결승전에도 오르고..
선린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같이 올라왓던 놈이 고1,2,3 학년 한반이엇습니다.
중학교때는 전국대회 우승도 햇고-선린 중학교는 워낙히 독보적이라서니--- 야나들은 심심하면 전관왕이야..
그때 선린상고에 마땅한 투수가 없써 영 힘을 못 쓰런 때라서....나름의 기대가 잇엇는데
고만 고만한 투수밖에 안 되더라고요.....
야는 집안이 넉넉햇고 ..그런탓인지 실업팀-금융팀-에 가지 않고 중앙대학으로 진학을 햇습니다..
본인은 건대를 가고 싶어햇는데...건대에 선린상고 선배들이 많아서 야구하기 편 하다며..
안 받아 주더랍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중앙대..
중앙대 만주벌판을 이야기 하면서 ...야구를 계속 할까.. 말까 중얼거렷는데....아마도 중도 하차 하지 않앗을까
시포요..
이때가 스타 플레이어들이 대학야구부에 진출을 시작 하던 때엿는데..
여전히 금융팀으로의 진출이 많앗씁니다.
이후는 당연히 다 대학을 가더라고요.
야 별명이 꼴뚜기..
@다른소리 야 야구 할 때 ..꼴뚜기 꼴뚜기 하며 놀려 먹엇는데....
죽여 분다며 ...퍼스트에서 소리 깍깍 지르고...잡아 먹을라고 햇써요..
다른소린 지금도 작앗고 그때도 작앗습니다...
꾸준히 커서 따또면은 햇지만..
저 시끼 수업시간에 골치 아프겟네.....겁도 낫지만.
언제 그랫나...기억도 못해요...낄낄거리고
그때 대구상고는 장효조, 김한근등....쟁쟁한 놈들이 버팅기고 잇엇던 시절인데..
황금 사자기(?) 에서 대구상고 하고 붙게 되엇지요.
딴놈들이라면 몰라도...장효조 에게는 안타 안준다.....고 큰소리 쳣는데..
진짜로 장효조 한테는 안타 안 줫습니다......
그래서 시합은 젖지만 학교에서는 목에 힘 쫌 줫습니다.
다른소리와 함께 학교들 다년던 선수 중에 ...쫄랑이 김광수 하나(1년 후배) 프로팀 까지 갓쓰니
암흑기는 참 대단한 암흑기 엿던 것 같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나니...이길환 신군식 들어왓고..야들 졸업하고나니 박노준 김건우 들어왓고..
그럭 저럭 야구 명문으로써의 체면치레는 한 셈인데..
@다른소리 지금은 야구던 뭐던 승패를 따지고 악다구니 쓰는것 자체가 싫어젓습니다..
내가 빤히 분명히 알고 잇던 과거의 이야기를 안심하고 되돌려 보며, 추억에나 잠기곤 하지요..
그런데......이것이 재미 잇네요..
그리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잇다는 것이 놀라와요..
@다른소리 그리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잇다는 것이 놀라와요..
진짜 영감님 기억력이 대단 하신거에요
ㅎ
난....
국민학교 졸업할때 담임슨생님 이름도 가물거리는디
ㅠㅠㅠㅠ
@여플떼기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