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것이세월뿐이랴]5
[5] 제목 :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제 5 부
미니시리즈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제 5 부
$#1. 정민의 방 (새벽)
창을 통해 새벽 여명이 밝아온다.
책상 위의 스탠드 여전히 밝혀져 있고, 전날 외출복을 그대로 입은 정민, 생각
에 잠겨 의자에 앉아있다.
정민, 밤을 새웠는지 안색이 초췌하다.
밖에서 두부장수 종소리가 들린다.
문 열리고, 어머니 삐쭉 얼굴을 들이민다.
어머니 정민아.
정민 ...
어머니 정민아!
정민 (그제서야 본다. 스탠드 끈다)
어머니 너 얼른 가서 순두부 좀 사와라.
정민 응. (일어선다)
$#2. 길 (새벽)
두부장수, 정민이 내민 작은 양푼에 순두부를 담아준다.
정민, 가만히 양푼만 내려다본다.
$#3. 아버지의 집, 마당 (새벽)
어머니, 숟가락 들고 부엌에서 나온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가며
어머니 이 기집애가 두부를 사러 어디까지 간 거야.
어머니, 삐쭉 열린 대문을 밀면, 대문 앞에 순두부 담긴 양푼이 놓여있다.
어머니 이게 뭐야!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문 밖을 둘러본다.
$#4. 준일의 집 앞 (새벽)
준일,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새벽운동을 끝내고 뛰어온다.
마당으로 들어서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다 깜짝 놀란 얼굴로 현관 앞을 본
다.
현관 앞턱에 정민이 앉아있다.
준일, 당혹스러운 얼굴로 다가온다.
저민, 옆에 놓여있는 우유(아침에 배달되는)를 집어, 우유곽을 연다.
정민 드세요. (준일에게 내민다)
준일 (받아들고) 웬일이냐, 일찍부터.
정민 (일어선다) 선생님 먼저 가세요.
준일 (우유 마시다 보는) ?
정민 저도 곧 갈게요, 뮌헨에.
준일 정민아!
정민 지금 당장 함께 떠날 순 없어도, 선생님 떠나실 때 제 마음도
같이 가요. 여기서 할 일이 있거든요.
준일 (기막힌 심정으로 본다)
정민 저한테 선생님만큼이나 소중한 분이 많이 편찮으세요.
$#5. 약수터
집 근처의 집 야산 약수터.
트레이닝복, 운동화 차림의 아버지, 통에 약수를 담고 있다.
그 옆에 묵골댁, 바가지로 약수물 마신다.
묵골댁 아고 시원타. (둘러보고) 집 뒤에 요런기 있으니 히안하이 좋
네. 요래 물도 마시고 운동도 하고... (바가지 주며) 많이 드소.
동상.
아버지 예. (누님이 남긴 물을 마신다)
$#6. 오솔길
플라스틱 물통을 든 아버지와 묵골댁, 나란히 내려온다.
묵골댁 부산에다 되믄 여는 영 북쪽인기라 쪼매 찹다고, 고마 얼음이
찌인거 좀 봐라.
아버지 발에 힘 주고 걸으세요. 조심하세요, 누님. 길이 미끄럽습니다.
묵골댁 내 걱정 말고, 자네나 낙상 안 하도록 조심하게. (잠시 서서,
다리를 주먹으로 탁탁 치며) 이제 내도 갈 때가 됐나 뼈마디
가 고마 다 녹았다.
쪼매 걸을라카믄 아드득, 아드득 쇳소리도 나고...
아버지 내일부터는 집에서 쉬세요. 물은 제가 떠다 드리지요.
묵골댁 어데. 내가 약물 한 사발이 그리 봐서 오나.
우리 동상 이래 일난 게 고맙고 고마봐서 따라 나오제.
내 요새는 일나도 누어도 고마 나무관셈보살 소리가 절로 난
다.
아버지 ...(가만히 누나를 보다가) 누님, 제가 업어 드릴까요?
묵골댁 (한숨) 안 할란다. 자식 두고 내가 지금 늙은 동상 등에 업히
게 됐나. 기영이 이 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코빼기도 안 비
치고...
아버지 너무 걱정 마세요, 누님. 수습이 되는대로 연락하겠지요.
묵골댁 에구 무심한 놈. 자식이 다 무신 소용이고... (앞서서 걸어간다)
$#7. 아버지의 집 안방 (밤)
아버지, 이부자리 깐다.
뒷설거지를 끝낸 어머니, 문 열고 들어온다.
아버지 나 이제 그만 회사에 나가봐야 될 것 같아.
어머니 (본다)
아버지 병가도 끝나가고... 내가 없으면 연말결산 하기도 힘들테고...
어머니 (앉으며)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져요. 당신 없다고 회사문
닫아요?
아버지 (앉는다) 집에만 있자니 갑갑하기도 하고.
어머니 병원서 나온지 얼마나 됐다구요. 몸조리 해야죠.
아버지 이만큼 쉬었으면 됐지.
어머니 (잠시 망설이다) 안 그래두 말할라구 그랬는데요. 이참에 회사
그만 둬요.
아버지 (보면)
어머니 당신 낼모레 환갑예요. (눈치보고) 머리 허예지서 통근버스 타
고 다니는 거 남 보기도 그렇구요.
아버지 나이 들면 허예지는 거야 당연한 거고...
우리 정수 클 때까지는 좀 더 다녀야지.
어머니 ...
$#8. 정민의 학교 음악당 (낮)
무대 뒤쪽에 학생들 '제00회 기악과 졸업 연주회'라 쓰인 플랜카드 붙인다.
그 옆에 최 조교 "응, 그래. 아니 저쪽으로 좀 더 왼쪽으로" 등의 지시대사 애
드립으로 하고.
객석 앞줄에 준일과 이 교수,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정민, 악보집 위에 자판기 종이컵 커피 얹어서 가져온다.
정민 교수님.
이 교수 (하나 집으며) 고마워.
정민 (준일에게 잔 내민다)
준일 (받아들다 손이 스친다)...
정민, 미소짓고
준일, 어색한 듯 시선 피한다.
$#9. 음악당 (시간 경과)
무대설치가 끝난 음악당.
정민, 여학생 1과 함께 클라리넷 합주한다.
경쾌하고 빠른 곡.
(비욘드 사일런스 삽입곡 중, 'Red Sallon'정도의 곡이면 좋겠다)
객석의 준일, 활짝 웃으며 신나게 연주하는 정민의 모습을 본다.
그 위로.
정민E 선생님 먼저 가세요. 저도 곧 갈게요, 뮌헨에.
당장 함께 떠날 수는 없어도, 선생님 떠나실 때 제 마음도 함
께 가요.
$#10. 음악당 앞
연습을 끝낸 학생들과 정민, 준일, 이 교수 걸어나온다.
여학생1 배고프다.
여학생2 나두. (준일에게) 교수님, 우리 점심 사주세요.
준일 응?
여학생1 이제 독일 가시면 저희 졸업하고 나야 오실 거구, 교수님한테
얻어먹는 재미두 끝이잖아요. 사주세요, 네?
준일 그러자. (문득 정민을 본다) 이렇게 하지, 최 조교.
최 조교 (준일의 옆으로 온다)
준일 (지갑에서 돈을 꺼내 최 조교에게 준다) 자네가 데리고 가서
사주게.
최 조교 (받으며) 교수님은요?
준일 젊은 사람들끼리 가. (이 교수 보며) 우리 나이든 사람들은 빠
지는 게 좋겠네.
여학생1 (준일의 팔짱끼며) 같이 가요, 교수님.
준일 (팔 빼며) 아니다. 이교수님이랑 할 이야기도 있고.
이 교수 저요?
준일 예, 가시지요.
준일, 앞서고 이교수 따라간다.
학생 등 애드립으로 "우우, 데이트 잘하세요 / 교수님 파이팅" 놀린다.
정민, 그런 준일과 이 교수의 뒷모습을 본다.
$#11. 일식집
점잖은 분위기의 실내.
준일과 이 교수, 식사하는.
이 교수 (저 내려놓고) 아침을 안 먹어서 정신없이 먹었어요.
맛있네요, 음식이 참.
준일 (받아서 펴보는)
이 교수 예전에 내가 알던 친구들 주소랑 전화번호예요.
필요하실 때 연락하세요. 아무래도 낯선 곳이니까요.
준일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교수 뭘요.
아후, 선생님 가시는데 왜 이렇게 제 마음이 안 놓이구 싱숭생
숭 하죠?
준일 ...(그런 이 교수를 가만 보다) 다 드셨으면 어디 야외로 나가
바람이나 좀 쏘일까요?
$#12. 야외 찻집 교외의 분위기 좋은 찻집. 창 밖으로 겨울풍경이 보이는 곳이
다.
창가에 준일과 이 교수 앉아있다.
이 교수 (둘러보며) 스산하긴 해두 좋네요. 벌써 이렇게 겨울이 깊어진
줄 몰랐어요.
준일 이 선생님.
이 교수 (보면)
준일 지난번에 저랑 같이 뮌헨에 가고 싶다 하셨지요?
이 교수 정말 그럴 수만 있음 좋겠어요.
준일 그럼 저랑 같이 떠나시겠습니까?
이 교수 네?
준일 ...이 선생님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습니다.
이 교수 (눈 동그래져 쳐다보는)
준일 선생님이 승낙하시면 더 추워지기 전에 해 넘기지 말고, 결혼
하고 싶습니다.
이 교수 누구요? 저하고 선생님요?
준일 예.
이 교수 (놀리듯) 저한테 지금 프로포즈하시는 거예요?
준일 ...(무안해서 얼굴 붉어지는)
이 교수 (소리내서 웃는다) 하 선생님. 제 이름 아세요?
준일 (당황하는) 예?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교수 진희예요. 이진희. 결혼을 전제로 만날 사이에 적어두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준일, 미안한 표정이고, 이 교수 깔깔거리며 웃는다.
$#13. 동 찻집 시간경과
창 밖으로 황혼 빛이 물든다.
준일은 차를, 이 교수는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
이 교수 청혼 감사해요.
준일 ...
이 교수 사십이 다 되도록, 결혼신청 한 번 못 받았다면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속 상했을텐데..
그야말로 구제해 주셨네요. 노처녀한테 추억거리 하나 선물하
신 셈이에요.
준일 그런 게 아닙니다.
이 교수 그럼 선생님 절 사랑하세요?
준일 이제껏 사랑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각자의 세계를 인정해주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격려하고.. 평생을 그렇게 함께 가는 게 결혼 아닐까요?
이 교수 친구와도 그 정도는 하죠.
준일 그런가요?
전 아내와 그렇게 살았는데.. 선생님이 제 청혼을 받아들이신
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이 교수 (웃고) 선생님. 정민이가 그렇게 신경 쓰이세요?
준일 정민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안색 굳는)
이 교수 그래요? (준일을 보는)
$#14. 이 교수의 집 앞 (저녁)
준일의 차 춰져있고, 준일과 이 교수 서 있다.
이 교수 덕분에 바람도 쐬고, 즐거웠어요.
준일 들어가십시오.
이 교수 (집 한 번 보고) 모처럼 아침에 집 한 번 치웠는데, 구경 안
하실래요? 술도 한 잔 하시구요.
준일 다음에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준일, 차에 탄다.
이 교수, 차 유리창을 똑똑 두드린다.
준일, 차, 유리창 내리면
이 교수 선생님. 오늘밤에 곰곰이 생각 한 번 해보실래요?
정민이가 아니고, 저랑 결혼하고 싶은 게 맞는지.
준일 이 선생님.
이 교수 만일 제가 분명하다면요 정식으루 다시 한 번 프로포즈 해주
세요.
준일 알겠습니다.
준일의 차 떠나고,
이 교수, 활짝 웃으며 손 흔든다.
준일의 차 멀어지면,
이 교수, 손 내리고 고민스러운 표정이 된다.
$#15. 준일의 집, 거실 (밤)
준일, 실내복 차림으로,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있다.
준일, 엔서링 머신 틀면 정민의 소리 흘러나온다.
정민E 선생님, 많이 늦으시나봐요. 이 교수님이랑 식사 즐거우셨어
요? 선생님 떠나시기 전에 이젠 제가 매일 저녁 차려드리려구
했었거든요.
오늘 메뉴는 김치볶음밥이었는데... 내일 뵐게요. 안녕히 주무
세요.
준일, 다시 한 번 재생한다.
술을 마시며 정민의 목소리를 듣는 준일의 쓸쓸한 얼굴.
$#16. 병원 (낮)
태준, 포트에서 뜨거운 물 받아 녹차 만든다.
아버지, 검진을 받은 듯, 셔츠의 단추 채우고 소파에 앉는다.
아버지 요새는 기침도 안 하고, 약수터 갈 때 숨도 덜 차는 게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네.
태준 (차 가져와 티 테이블에 놓으며, 소파에 앉는다)..
아버지 (차 한 모금 마시고) 간사한 게 사람이라고.. 한 오 년만 더 살
면 좋겠다 싶더니 수술이 잘 됐다니까 욕심이 생기는군.
태준 (보면)
아버지 정수 말일세. 우리 막내 시집가는 건보고 죽었으면 싶어져. 욕
심이 과한가?
태준 아닙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정수 시집가서 아이 낳구, 외손주 재롱두 보시구 하셔야죠.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 (웃고) 말이라두 기분이 좋군. (차 마시고) 햇차라 그런가 향이
좋네.
태준 예. (차를 마시다 아버지를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17. 정수의 교실
정수와 아이1, 2 청소당번이다.
아이1, 2 책걸상 정리하고,
정수, 창틀 닦고 있다.
문득 손을 멈추고 창 밖을 보는 정수의 아이답지 않은 심란한 표정.
선생님, 책상 앞에 앉아 잔무 정리하다 정수를 본다.
선생님, 정수 옆으로 걸어온다.
선생님 정수, 요새 무슨 걱정 있니? 친구들하고 잘 놀지도 않고, 웃지
도 않고.
정수 ...
선생님 (아이1, 2를 돌아보고) 희철아, 성원아.
아이1, 2 네.
선생님 선생님 책상 위에 출석부, 교무실에 좀 갔다 둘래?
아이1 네.
아이2 저두요?
선생님 그래.
아이1, 2, 선생님 책상으로 가 출석부 들고 문 쪽으로
선생님 (그 모습 보다) 이제 선생님한테 얘기해봐.
정수 아무것두 아니에요.
선생님 정수야, 저번 시간에 우리 이런 말 배웠지.
좋은 일은 나누면 배가 되고, (대답을 구하는 표정으로 본다)
정수 슬픈 일은 나누면 반이 되요.
선생님 그래, 그럼 정수 힘든 거 선생님하고 반씩 나누지 않을래?
정수 미안해서요.
선생님 응?
정수 나 혼자 막 웃구, 친구들하고 놀구 하는 거 아빠한테 미안해서
요. 아빤, 많이 아픈데...
선생님 저번에 수술하신다더니.. 아직두 많이 편찮으시니?
정수 수술할 수 없대요.
선생님 응?
정수 (침울한) 우리 아빠... 죽는데요, 선생님.
선생님 (정수를 안아준다) 어떡하니... 어떡하니 정수야... (머리를 쓰다
듬어주며) 이럴 땐 선생님이 어떡해야 우리 정수 맘 아픈 거
덜어주지?
정수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18. 학교 운동장
교문 쪽으로 걸어오는 정수와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하구 떡볶이 먹으러 갈까?
정수 아뇨.
선생님 (장난스럽게0 그러지말구 가자. 응? 응?
정수 네.
아버지E 정수야-
정수, 교문 쪽을 보면 웃고있는 아버지.
$#19. 교문 앞
아버지와 정수, 선생님 서 있다.
아버지 자식을 맡겨놓고도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별 말씀을요. 편찮으시다는 거 알구두 찾아 뵙지 못해 제가 죄
송하지요. 건강은 좀 어떠세요?
아버지 염려해주신 덕분에 수술도 잘 끝나고, 이제 다 나았습니다.
선생님 (그 소리에 정수를 본다)
정수 (서둘러) 아빠. (옷자락을 붙잡고) 그만 가.
아버지 이럴게 아니라, 어디 가서 점심이라도 함께 드시지요. 선생님.
정수 (급히 아빠, 선생님 바쁘시대. 그죠? 선생님.
선생님 (사태를 아는) 음, 그래. (아버지에게) 어떡하죠, 아버님. 제가
점심약속이 있어서요.
아버지 예,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인사하고)
선생님 (목례) 예. 살펴가세요.
정수, 월요일에 보자.
정수 네, 선생님. (인사하는)
정수,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선생님, 그런 정수와 아버지의 뒷모습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20. 분식집
휴대용 가스렌즈 위에 즉석 떡볶이 끓고 있다.
정수 맛있게 먹는
아버지, 물 따라서 정수에게 준다.
정수, 포크 내려놓고 물 마신다.
정수 아빠, 나 어디 갈지 생각했어.
아버지 어디 갈건대?
정수 (손꼽으며) 놀이공원 아니면 만화영화 보러.
아빤 어느 게 더 좋아?
아버지 글세... (잠시 생각하다) 정수야, 우리 좀 더 멀리 가볼까?
$#21. 골프장 진입로
멀리 클럽 하우스가 보인다.
택시 한 대, 진입로를 올라가고 있다.
택시 뒷좌석에 아버지와 정수 보인다.
$#22. 사무실
직원들 몇 명, 일하고 있다.
예전 아버지의 자리에 직원1이 앉아있다.
아버지, 걸어온다.
여직원1, 아버지를 보고 일어나서
여직원1 (당황하는) 어머, 부장님!
직원2 웬일이세요?
여직원2 안 그래두 쉬는 날에 문병 가려구 했었는데...
아버지 문병은 무슨. 그래 잘들 있었나?
직원3 좀 어떠세요? 몸은.
아버지 염려해준 덕분에 괜찮네.
아버지, 직원1 쪽으로 온다.
직원1 (어색한 듯 일어서 있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웃으며) 그래. 시간이 좀 나서 말야. 연말결산 한 거 좀 보러
왔네.
직원2 예...
아버지 (둘러보며) 그 동안 자리가 바뀌었나... 자네가 그리로 옮겼군
(하다 문득 자신의 책상을 본다)
(인서트) 책상 위에 '경리부장, 최태영'이라 쓰인 명패.
아버지, 일순간 표정 굳어진다.
아버지, 당황한 시선으로 직원1을 본다.
$#23. 사장실
사장, 의자에 앉아 있고, 아버지 서 있다.
사장 앉아요. 박 부장.
아버지 괜찮습니다.
사장 회사 어려운 거 박 부장이 더 잘 알겠죠. 이제 한참 애들 키워
야 되는 젊은 사람들 내보낼 순 없질 않아요. (아버지를 보고)
박 부장은 나이도 있고, 병가도 낸 참이고.. 알다시피 경리부장
자리라는 게 하루도 비울 수가 (하는데)
아버지 이젠 다 나았습니다. 사장님.
내일이라도 출근할 수가 있습니다.
사장 우리 회사 정년 없다고는 하지만, 박 부장 다른 회사 같으면
내년이 정년 아닙니까? 밑에 사람들 앞길 열어준다 하는 심정
으로 이해하세요.
미리 상의해야 했지만, 박 부장 형편이 그래서, 그냥 결정했어
요.
아버지 ...최군이 회사자금 운영이냐, 잔디 수입 건이나 이런 걸 다 모
를텐데요. 아직은...
사장 박 부장 빈자리가 크지요. 다 압니다. 그래도, 최 부장이 그 동
안 잘 해왔어요.
차차 배워가면서 하면 되지요.
아버지 ...
$#24. 회사 로비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정수.
정수의 시선에 사무실 쪽에서 나오는 아버지와 사장, 직원1 보인다.
(정수의 시선으로) 아버지, 한 손에 개인 짐을 정리한 쇼핑가방을 들고 있다.
사장, 직원1에게서 봉투를 받아든다.
사장, 아버지에 봉투 주고, 아버지 받는다.
아버지, 사장에게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사장, 손 한 번 들어주고 사무실 쪽으로 간다.
정수, 그런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있다.
$#25. 골프장 진입로
양쪽으로 가로수들 늘어서 있고, 그 뒤로 필드가 보인다.
아버지와 정수 터덜터덜 걸어 내려온다.
아버지의 쇼핑가방에,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와 칫솔이 삐죽 나와있다.
아버지, 멈춰서서 쓸쓸한 시선으로 필드를 바라본다.
정수,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간다.
아버지 예전에 처음 왔을 땐 말이다.
저기, 저기가 다 산이었다.
회사라고 왔더니 막 터 닦느라 사방이 휑당그래한 게... 창고
한 채만 덜렁 있었는데 말야.
정수 ..
아버지 그게 벌써 서른 두해 전이구나. 참 많이 변했어 여기두.
아버지, 서늘한 표정으로 멀리 클럽 하우스를 돌아본다.
$#26. 아버지의 집, 마루(오후)
문 닫혀있고, 석유난로 켜있다.
어머니와 정희, 양끝에 앉아서 이불홑청 당기고, 묵골댁 빨래 개키고 있다.
원정, 이불가지고 장난치고.
E 때르릉- 전화벨 울리는.
어머니, 옆에 놓인 수화기 든다.
어머니 네. (사이) 안녕하세요. 지금 집에 없는데... (사이) 그래요? 회
사요? (의아한 표정이다)
$#27. 버스 정류장 (오후)
골프장 진입로와 국도가 맞닿아 있는 버스 정류장.
아버지와 정수,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정수, 아버지를 훔쳐보다 눈이 마주친다.
정수 아빠. 내 친구 아빠들두 회사 그만 둔 사람들 많다. 저번에 학
급회의 시간에 그랬어.
아버지 ...
정수 선생님이, 우리들만 방학이 있는 게 아니구, 어른들두 살다보
면 겨울방학처럼 긴 방학이 있는 거라구 그러셨거든.
아버지 ...(딸을 본다)
정수 아빠두 그렇게 생각해. 응?
아버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마. 아빠두 이제 방학이니까, 졸업이니까...
우리 정수하구 신나게 놀구 여행두 다니구... 그러지 뭐. 그러
면 되는 거야.
정수 ...(아버지를 본다)
$#28. 아버지의 집, 마루 (오후)
어머니, 빨래를 개키다가 화가 나서, 확 밀친다.
어머니 (혼잣말로) 뭐한다고 거긴 가서...
묵골댁 와 카노?
정민의 방, 문 열리고 정민 나온다.
정희 엄마, 무슨 일 있어요?
어머니 빠뜨린 물건 챙겨 보낸단다. (한숨) 니 아버지, 회사에서 그만
나갈 그랬나부다.
정희 (놀라고)
정민 (앉으며) 아버지, 회사 가셨어요?
어머니 그래. 거긴 뭐하루 가서... 맘 상할 게 뭐 있어. (혼잣말루) 꼭
그렇게 해야 돼. 아픈 사람한테.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그만 둘까봐. 야박한 인간들....
묵골댁 잘 됐다. 옛날 같으면 사육십이믄 상노인이다.
펴난히 아랫목 차지하고 밥상 받을 나이에 이제 그만 쉬야지.
돈 벌어오라고 등 떠밀라 캤나.
정희 고모!
묵골댁 정희 니는 퍼득 수산시장 가서 횟감으로 돔이나 한 마리 사온
나. 정민이는 푸자간 가서 고기 쇠고기 한 칼 끊어오고.
어머니 (짜증) 무슨 잔치 났어요. 지금.
묵골댁 그라믄 오늘 같은 날 지 아버지한테 것두 안 할라 캤나?
평생 자식새끼 거다 먹이, 공부 시키, 우리 동상 등골이 다 주
질러 앉았구만.
어머니 (기막힌 얼굴로 고모를 본다)
$#29. 전시회장 (오후)
성수와 영주, 갤러리 직원과 함께 액자 걸고 있다.
영주 이건 입구 쪽에 거는 게 좋겠다.
성수 그럴까.
영주 (직원에게) 그게 좋겠어요. 앞으로 옮겨 주세요.
직원 (액자 들고 가고)
영주 오빠 전시횐데 왜 내 마음이 설레나 몰라.
성수 (웃고) 너두 이 천년 되면 한다며. (농담조로) 21세기 혜성과
같이 나타난 여류작가 오영주(하는데)
성수의 핸드폰 울린다.
성수, 전화 받고.
성수 여보세요. (영주 눈치 보고) 예. 장모님.
영주 (장모님이라는 소리에 성수를 본다)
성수 (눈치 보며) 예, 오늘 저녁은 좀 선약이 있어서요. (사이) 예.
(사이) 예. 아버님이요... (사이) 알겠습니다. (전화 끊는다)
영주 ...
성수 영주야. (고민스럽게) 저기 말야 나 먼저 나가봐야겠다.
영주 처가댁에?
성수 ...
여주 그래, 갔다와. 뒷일은 내가 다 알아할게.
성수 미안하다.
성수, 입구 쪽으로 가다 돌아보면,
영주, 웃으며 손 들어준다.
성수, 뒤돌아서면,
영주, 샐쭉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본다.
$#30. 아버지의 집, 마당 (저녁)
정민, 외출복 차림으로 문 열고,
아버지와 정수 들어온다.
정민 (아버지에게서 쇼핑가방 받고) 오셨어요?
아버지 오냐. (마루 쪽으로)
정민, 쇼핑가방을 마루 끝에 놓는다.
어머니, 쇼핑가방을 본다.
어머니 ... (마음이 안 좋은)
아버지 회사 갔다왔어. 당신 말대루 이젠 좀 쉬어야 될 것 같아서, 회
사에 사표내고 왔네.
어머니 (고개 끄떡이면서, 웃으며) 잘했어요. 잘했어.
정희와 원정, 묵골댁 외출복 입고, 정수방에서 나온다.
'아버지/동상 왔나? 예' 애드립 대사
원정 이모! (정수에게 가는)
정수 원정아. (좋아서 안아주는)
아버지 어구, 우리 원정이 왔구나. (머리 쓰다듬어 주며, 혼잣말처럼)
우리 원정이 오랜만에 왔는데 맛있는 거 좀 했나?
어머니 안 그래두 우리 외식하기루 했어요.
$#31. 중국집, 방 (저녁)
음식들 놓여있고, 아버지와 어머니, 묵골댁, 정희, 정민, 정수, 원정 앉아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회사에서 전화 왔었어요. 이거 정희,
정민이 애들이 마련한 자리예요.
아버지 (그랬구나 하는 눈빛으로) 그랬군. (딸들보고) 고맙구나.
정희 아버지 (주전자를 들어 아버지 잔에 따르려 한다)
아버지 (술잔 든다)
어머니 술은 무슨. 니 아버지 드리지 마라.
정희 한잔만요. (아버지의 잔에 따른다)
아버지 그래. (술 받고 마신다, 술 주전자 들고) 누님 한 잔 하시지요.
묵골댁 그럴까? 모처럼 동상이 주는 술 한 잔 먹어 볼까나.
아버지 (따르고) 당신도 한 잔 하겠소?
어머니 (보다, 잔 내민다) 그래요. 까짓건. 삼십년 만에 ㅓ디 당신 술
한잔 받아 봅시다.
문, 열리고 성수 들어온다.
원정 아빠! 아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성수의 다리를 부여 안
는다)
아버지 왔나? 김서방.
성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버님.
묵골댁 아구, 바쁘다카디, 오느라 욕봤다. 어여 앉아라.
자리에 앉으려던 성수, 정희와 눈이 마주친다.
굳어지는 두 사람.
아버지 (흐뭇한) 정말 모처럼 다 모였구나.
자, 어서들 들자. 김서방도.
성수 예. 아버님.
식구들, 떠들며 밥 먹고,
성수와 정희, 애써 눈길을 피한 채 저를 든다.
아버지, 성수의 잔에 술 따라주고, 다른 식구들 웃고 떠들고...
$#32. 거리 (저녁)
아버지와 식구들 저녁을 먹고 나왔다.
묵골댁 아구, 집에 가서 명태 한 마리 구아 무야겠다.
동상 덕에 어떻게나 청요릴 많이 먹었던지 짜구 날라칸다.
(바지 추스리며) 고마 바지 호크 터질라.
아버지 (웃고)
$#33. 노래방 (밤)
대형 방.
가족들 중심으로 꾸며진 요란하지 않은 실내.
아버지와 식구들 저마다 앉아있다.
성수, 원정이를 무릎에 앉고 있고.
식구들 중 한명 경쾌한 노래 부르고,
정민, 탬버린 흔들고 모처럼 가족들의 즐거운 모습이 보여진다.
성수와 정희, 눈길 마주치면 애써 피하며 어색하다.
어머니 정희야, 너두 하나 불러봐라.
정희 ...못해요 전.
아버지 (흐뭇한) 어디 우리 원정에미 노래 한 번 들어볼까.
정희 (못 이겨 일어나는) 예. 그럼 아버지 좋아하시는 곡 하나 부를
게요.
정희, 나가 마이크를 잡는다.
버튼 누르고, '어부의 노래' 부른다.
정희 (마이크 잡고) 아버지, 고맙습니다. 엄마두요.
제가 이만큼 커서, 원정이를 길러보니 아버지, 엄마 마음을 알
겠어요. 아버지, (울먹인다) 오래오래, 오래오래 건간하세요.
정희,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기설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앞쪽에 앉아있던 아버지, 무대 앞으로 나가 딸의 어깨를 잡는다.
정희, 일어나 아버지에게 안겨 운다.
아버지, 정희의 등을 쓸어준다.
$#34. 아버지의 집, 마루 (밤)
성수, 잠든 원정이를 업고 있다.
정희 저희들 그만 가 볼게요.
어머니 가긴 어딜 가? 이밤에. 낼 아침에 여기서 바루 출근하면 되지.
정희 가야돼요, 엄마.
묵골댁 희야 고마 예서 묵어 가라마. (원정이 보고) 알라 열도 있든데,
날도 칩고, 그카다 아 병난다.
정희 아녜요, 괜찮아요.
아버지 김서방, 자고 가게. 술도 한잔했는데, 차 운전하지 말고.
성수 (난처한)...
$#35. 안방 (밤)
아버지, 이부자리 깔고 있고, 어머니 손 닦으며 들어온다.
아랫목에 원정과 정수, 자고 있다.
아버지, 일어나 옷걸이대에 걸려있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민다.
어머니 (받고) 뭐예요? 이게.
아버지 (앉으며) 퇴직금이라고 주더군.
어머니 (앉고) 당신 퇴직금 땅겨 섰잖아요.
아버지 그거 제하고 얼마 안 되네.
어머니 (봉투를 본다) 평생 누나 뒤치다꺼리, 조카 뒤치다꺼리.
당신 한 평생이 이렇게 얄팍하네. (내밀며) 당신이 써요.
아버지 (본다)
어머니 평생하고 싶은 건 한번도 못해봤잖아요.
얼만지 물어도 안 볼게요, 떡을 사먹던지, 옷을 사 입던지 쓰
고픈 데 써요.
아버지 ...
어머니 얼른 넣어요. 내 맘 변하기 전에.
$#36. 정민의 방 (밤)
정희, 침대에 앉아 있고,
성수, 의자에 앉아있다.
정희, 침대 이불 하나와 베개 하나를 바닥에 내린다.
정희 당신이 침대에서 주무세요.
성수 아냐. 내가 여기서 자지.
정희 고마워요, 오늘.
성수 그 말 들으니까 내가 더 미안해지는 것 같군. 그만 자지. (웃
옷 벗는)
(시간 경과)
스탠드 불 빛 밝혀져 있다.
정희, 침대에 누워있고,
성수, 바닥에 누워있다.
정희 원정이 만할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건너방에서 아버지, 엄마
싸우는 소릴 듣고 살았어요. 이방에서 매일매일.
성수 ..
정희 얼른 이 집에서 벗어나야지. 철들 때부터 늘 그런 생각하면서
지냈어요.
성수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정희 ...좋은 아내, 좋은 엄마 그게 꿈이면 안 되는 거예요? 능력 있
는 영주씨 보다 날 보니까, 내가 그렇게 싫고 초라해 보였어
요?
성수 그런 게 아냐. 당신을 알고 몇 년 동안 참 행복했던 것 같아.
복이 많구나, 내가.
뭐든지 알아서 다 해주는 아내.
늘 신혼 때처럼 똑같이 날 사랑하고 봐주는 아내.
정희 ...
성수 왜 당신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을까?
업혀서 길을 가다 넘어지면 말야, 업어주던 사람은 손 툭툭 털
고 일어나면 되지만, 업혀가던 사람은 훨씬 더 많이 다치게 돼
있어.
나 당신이, 나와 원정이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당신 때문에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두 당신을 업고 세상을 건널 수가 없으니까.
정희 ...
성수 난 내 꿈대로, 당신은 당신 길대로 이젠 그렇게 갔음 싶어.
정희 (눈물이 흐른다. 팔로 눈을 가린다)
$#37. 아버지의 집, 마당 (밤)
알전구만 동그랗게 어둠을 밝힌다.
적막하게 불꺼진 방이 보인다.
$#38. 정민의 학교, 음악실 (낮)
학생들 졸업연주회 준비하고 있다.
여학생들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는.
강당으로 나란히 다정하게 들어오는 준일과 이교수.
여학생1 (정민에게) 두분 보통 사이가 아니래.
정민 (여학생1의 시선을 따라 준일과 이교수를 본다)
여학생2 이건 극빈데 두분 같이 독일에 가실지도 모른데.
정민 !
여학생1 어머머머. 너 어떻게 알았어?
여학생2 효은이한테 들었지.
효은이 이모부가 음대 학장님이잖아.
최조교 어허, 어른들 일에 괜시리 말 퍼뜨리지 말구, 얼른 연습들이나
해.
정민, 객석 앞쪽에 나란히 앉는 이 교수와 준일을 본다.
$#39. 학교 주차장
준일의 차가 보인다.
$#40. 준일의 차안
준일, 차 시동을 걸고, 벨트를 매다가, 문득 차 쪽으로 걸어오는 정민을 본다.
정민, 다가와서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탄다.
준일 (보면)
정민 드릴 말씀이 있어요.
준일 다음에 하자. 지금은 약속이 있다.
정민 이 교수님하고 같이 독일 가신다는 거 사실이에요?
준일 그래.
정민 선생님!
준일 그만 내려라.
정민 ...(완강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준일, 정민을 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 돌리고 차를 출발시킨다.
$#41. 동, 예술대학 건물 앞
준일의 차 정차해있고, 차 옆에 서있는 준일과 이 교수.
여전히 꼼짝않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정민.
준일, 조수석으로 다가와 차문을 연다.
준일 어서 내려라.
정민 (표정이 흔들린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꼿꼿한 표정이 된
다)
준일 (언성이 높아진다) 박정민!
정민 ...
세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돈다.
이 교수 정민이가 할 말이 있나 보네요. 우리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죠, 뭐.
준일 (사무적으로) 박 조교. 왜 이렇게 예의가 없나?
내리라는 말 안 들리나?
정민 선생님.
준일 할 말 있으면 다음에 내방으로 찾아오게!
정민, 그제서야 서운한 눈빛으로 마지못해 내린다.
이 교수, 난처한 듯 본다.
준일 (이 교수에게) 죄송합니다. 타시지요.
이 교수, 정민을 한 번 보고 차에 탄다.
이내 차 출발하고.
정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사라지는 차를 지켜본다.
$#42. 산길 (낮)
아버지,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한 손에 물통을 들고 내려오고 있다.
뒤로, 약수터 보이고.
아버지, 갑자기 기침을 한다.
심각하게 터져 나오는 기침.
아버지, 울컥 욕지기가 치민다.
손으로 입을 막으면 붉은 핏덩어리가 한 덩어리 쏟아져 나온다.
경악하는 아버지의 표정.
$#43. 정류장 길
아버지의 통근버스가 오가는 길
아버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
택시 한 대가 다가와 아버지 앞에 선다.
아버지, 물끄러미 택시를 바라본다.
$#44. 태준의 진료실 앞
아버지, 운동복 차림 그대로 환자 대기용 의자에 앉아있다.
발 밑에 놓여있는 한말들이 물통.
의자에 환자들 빽빽이 앉아있고.
문 열리고, 간호사 나온다.
간호사 (아버지에게)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진료하는 환자분이 계
셔서요.
아버지 (넋나간 사람처럼 간호사를 본다)
간호사 오늘 진료하시는 날이 아니라서.
아버지 (일어난다) 바쁜가 본데 다음에 오지요.
간호사 선생님.
아버지, 물통 들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진료실 문 열리고, 환자와 함께 태준 나온다.
간호사, 태준에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뭐라 말한다.
태준 (빠르게 걸어가 아버지의 팔을 잡는다) 선생님.
아버지 (무거운 표정으로 태준을 본다)
태준 ...(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덜컥 내려앉는 기분)
$#45. 병원식당
점심시간이 끝난 듯 한적한 실내.
아버지와 태준, 식판을 놓고 마주앉아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태준 (애써 태연하게) 요즘 운동하세요?
아버지 음.
태준 미리 연락 주셨으면 좋은 데로 모실 걸요. 입맛에 맞으실런지.
아버지 (숟가락 들고) 괜찮군.
태준 많이 드십시오.
아버지 ...(한 숟가락 먹는다)
아버지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알지 않는가?
태준 ...(올게 왔구나 하는)
아버지 (수저 놓고, 희미하게 미소짓는) 숨기지 말게 태준이.
이제 사실대로 말해 줘.
태준 ..(어두운 표정으로 숟가락을 놓는다)
$#46. 태준의 진료실
태준, 진료실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태준, 괴로운 표정이다.
태준의 시선에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런 모습들 위로
아버지E 피가 보이더군. 의학상식은 없지만 그게 무슨 뜻인 줄은 아네.
말해주게... 그렇다면 나도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지.
$#47. 병원 마당
아버지, 벤치에 앉는다.
먼 산을 보다 기침을 쿨럭쿨럭 한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는다.
물통마개를 뚜껑에 약수를 조금 기울여 따라 마신다.
두어 번 반복하는 아버지.
아버지, 약을 넘기고,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먼 산을 보고 있다.
그런 모습들 위로
태준E 수술 못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자각증상이 오리라곤... 말씀드
려야 하는 건지, 아닌지 저도 많이 망설였습니다.
아버지E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가? 사실대로 말해주게. (떨리는) 봄이
오는 건 보겠는가?
태준E 선생님...
$#48. 병원 마당
아버지, 벤치에서 무겁게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병원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49. 아버지의 집, 마당 (저녁)
묵골댁 마당을 서성이며, 대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 부엌에서 저녁상을 들고 나와 마루 쪽으로.
어머니, 상을 마루에 놓는다.
정수, 수저를 챙기고.
어머니 (마루로 올라서며) 고모, 저녁 잡숴요.
묵골댁 (못마땅한 듯 들은 척도 않고, 대문만 바라본다)
어머니 고모, (하는데)
묵골댁 대주가 안 들어왔는데 저녁이 다 뭐꼬? 시방 저녁 먹을 생각
이 나나?
어머니 정수 아버지가 애예요? 때 되면 들어오겠죠.
묵골댁 (하늘 한 번 보고) 꾸무럭한기 금시라도 한바탕 퍼붓겠구마는,
그래 허술하게 차리고...
어머니 안 얼어죽어요. 답답하니까 어디 바람이라두 쐬나 부죠.
묵골댁 약수 뜨러 간 사람이 그래 갖고 어딜 갔단 말이고? 무신 일이
난기다. 연락도 없이 이기 무신 일이고. 고마 날도 깜깜해지는
데... (목을 빼고 대문 쪽을 본다)
어머니 올 때 되면 오겠죠. 고모 말 대루 이제 날도 저무는데.
$#50. 거리 (밤)
정민, 터벅터벅 걷고 있다.
포장마차가 불을 밝힌 채 서있다.
정민, 그 앞을 지나간다.
정민, 포장마차 앞을 지나치려다 문득 바라본다.
$#51. 포장마차 (밤)
휘장이 내려져있는 아늑한 포장마차.
두, 세명의 손님이 간이 테이블에 앉아있다.
정민, 들어와 간이테이블에 앉는다.
(시간경과)
정민의 앞에 소주와 안주 한 접시 놓여있다.
정민, 안주에는 손도 대지않고, 술을 따라마신다.
주변의 손님들과, 주인 남자 정민을 힐끔 거린다.
휘장이 들춰지고, 아버지, 들어온다.
남자 어서오세요.
아버지 소주 한 병 주십시오.
정민, 소주잔을 들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문득 바라본다.
아버지, 물통을 든 채 간이 테이블로 오다가 딸을 본다.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아버지 (놀라) 정민아!
정민 (놀라서 일어난다) 아버지...
$#52. 아버지의 집, 마당 (집)
어머니와 묵골댁,
정수, 마루에 앉아있다.
마루문 열려있고, 마당에는 싸락눈이 간간이 뿌리기 시작한다.
묵골댁 일났다. 일났어. 질도 미끄럽고 어느 골짝서 낙상이라도 했나
부다. 이 일을 우짜꼬?
어머니 ...(걱정스러운)
묵골댁 어느 골짝에 엎어져 있는지... (일어나서 신발 신으려고) 이럴
게 아니다. 찾으러 나서야 되겠다.
어머니 가만히 줌 계세요. 기껏해야 바가지 엎어놓은 거 같은 뒷동산
에서 일은 무슨 일이 생겼겠어요?
묵골댁 (다시 마루 끝에 앉고) 그라믄 와 안 오노? 고마 가슴이 벌렁
거리서 죽겠구마.
어머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깥쪽을 본다)
$#53. 포장마차 (밤)
아버지와 정민, 앉아있다.
테이블에 소주 있고.
아버지 한잔 따라줄래?
정민 드시지 마세요, 아버지.
아버지 오늘은 한잔하고 싶구나. 이 술 한잔 마신다고 무슨 차이가 있
겠니? 안 그러냐?
정민 (당혹스런) 아버지.
아버지 (미소) 병원에서도 그러더라. 적당히 마시면 괜찮다고.
정민 (아버지의 잔에 따라드린다)
아버지 (쭉 마시고) 너도 한 잔 할래? 우리 부녀간에 대작 한 번 하자
꾸나.
정민 (받고, 아버지 발치에 물통보고) 아버지. 오늘 어디 다녀오셨어
요?
아버지 (자기 옷차림 내려다보고) 그냥 여기저기 좀 다녀봤다. 답답해
서.
정민 (고개 끄덕이고) 많이 힘드시죠?
아버지 아니다. 힘이야 네 엄마하고, 너희들이 더 들지. (쓸쓸한) 한
잔 따라라.
정민 그만하세요.
아버지 (빈잔 들고) 한잔만 더 하마.
정민, 아버지의 잔을 채운다.
아버지, 술병 받아 정민의 잔에 술 따라준다.
정민, 몸 돌려서 한 잔 마신다.
아버지 자식. 꼭 사내놈 같구나. 술 마시는 폼이.
정민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걸요. 그죠?
아버지 (웃고) 지금도 좋다.
정민아. 무슨 속 상한 일 있냐?
정민 아뇨. 아버지는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버지 아니다. 그냥 한잔하고 싶어서. (쭉 마시고) 한잔 더 따라라.
우리 정민이랑 마시는 술맛이 좋구나.
정민 (염려스러운) 아버지...
아버지 괜찮다.
아버지의 잔에 술을 채우는 정민.
$#54. 길 (밤)
아버지와 정민, 포장마차에서 나온다.
고즈넉한 거리에 눈이 펄펄 내린다.
정민 어머! 눈 와요. 아버지. 많이 와요.
아버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그래. 소담스럽게 오는구나.
정민,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걷는다.
아버지 이런 날, 이렇게 아버지 팔짱 끼면 쓰나. 남자친구랑 다녀야지.
정민 (쓸쓸한, 과장스럽게 웃으며) 글세 말이에요. 안 그래도 오늘
미팅했는데 차였어요. 속상해서 살짝 한잔만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저 포장마차에서 만난 거 엄마한테 비밀이에요.
아버지 오냐 알았다. 대신에 나도 비밀이다. 술 마신 거.
정민 (웃는다)
두 부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정민E 이러구 있으니까요. 옛날 생각나요. 저 정수만 했을 때 아버지
랑 동물원 간 적 있었어요. 눈왔을 때.
아버지E 아 그랬나?
정민E 제가 자꾸 넘어지구 그래서 아버지가 업어 주셨어요.
아버지E 업어 줄까?
정민E 네. 지금 말구요. 내년 겨울, 후년 겨울, 그 후년에두 매년 업
어주세요. 아버지 지팡이 짚고 다니는 할아버지 될 때까지요.
정민의 소리, 조금씩 작아진다.
밥물 잦아드는 것처럼.
가로등 아래 눈이 펄펄 내리고, 두 부녀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진다.
$#55. 아버지의 집, 앞 (밤)
아버지와 정민, 걸어온다.
아버지, 문득 이발소를 보면, 안에 불이 켜져 있다.
$#56. 마당 (밤)
어머니, 묵골댁, 정수 서있다.
문 삐꺽 열리면, 어머니와 묵골댁 반색해서, 앞으로 나서며 '당신이유?' '동상이
가' 애드립 대사 한다.
정민, 들어와 한 손에 든 물통 내려놓고.
어머니 (물통보고, 다급히) 니가 왜 그걸 들고 와? 아버지 만났니?
정민 네.
어머니 (대문 쪽 보며) 아버진?
정민 이발소 아저씨랑 바둑 한 판 두신대요.
묵골댁 아고.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구마, 내사 마 간이 고마 팍 오그
라 붙은기라.
어머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 아휴! 주변머리라구는, 늦으면 늦는다구
전화 한번 넣기가 그렇게 힘들어.
$#27. 이발소 (밤)
아버지와 이발사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서있다.
테이블에는 집에서 담은 과일주가 커다란 유리병에 담겨있고,
연탄난로 위에 찌개가 끓고 있다.
문 열리고, 정수 들어온다.
정수 아빠.
아버지 정수야, 다 늦게 안 자고 왜 나왔어?
정수 아빠랑 같이 갈려구.
아버지 아버진 좀 있다 갈 건데, 정순 가서 자는 게 어떨까?
정수 아빠, 나두 여기 있을래. 나중에. 졸리면 들어가서 자면 되잖
아. 응? 응?
아버지 (웃고 만다)
(시간 경과)
아버지와 이발사,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정수, 이발의자에 앉아 큰 타올 덮고 자고 있다.
이발사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버지 아뇨. 그냥 좀 답답하고, 막막하고... 이젠 그만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어떻게 끝내야
하나... 그저 아득하네요.
이발사 (무슨 소린가 싶어 보는)
아버지 수술이 안 됐다는군요.
이발사 부장님! (놀라서 보는)
아버지 식구들이 날 생각해서 말을 안 한 모양입니다.
이발사 ...(말없이 술을 따라준다)
아버지 그냥 그때 말입니다. 처음에 병 알았을 때, 병원에 가지 말걸
그랬나 봐요. 이왕 체념했던 거 기대를 안 가졌을 텐데...
(웃고) 희망이라는 거 그거 참 고약한 겁니다.
처음보다 더 힘드네요. 받아들이기가.
이발사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세상 참 불공평 하단 말 밖에.
아무 할 일도, 책임질 일도 없는 이런 늙은이는 멀쩡하고, 부
장님 같으신 분이...
아버지 생전 그런 생각 안 해 봤는데 아들 하나 있음 싶어요. 그럼 마
음이 좀 마음이 놓일까... 이것저것 뒷일도 부탁하고.
(정수를 한번 본다) 너무 어려서. 저 놈 어떻게 두고 가나. 다
걸리는 거 뿐입니다.
정수, 눈을 살며시 뜬다.
아버지 누구한테 뒤를 맡기나...
장 선생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발사 예. 말씀하시지요.
아버지 저 없더라도 간혹 간혹 저희 집 좀 들여다 봐주세요. 잘 사나.
이발사 그러지요.
아버지 집안에 사내가 없어놔서요.
봄이 되면, 집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은데 제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요.
이발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버지 우리 정민이 결혼할 때 제 대신 식장에두 한 번 가 봐주세요.
이발사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아버지 그 녀석 참 예쁠 겁니다.
장 선생님, 우리가 이웃해 산 게 거진 스무해... 아마 그쯤 됐
지요? 이제 남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도 드리구
요. 한잔 받으세요.
아버지 술 따른다.
정수, 기척을 내지 않고 잠든 척 한다.
정수의 볼에 눈물이 흐른다.
정수, 소리를 내지 않느라 일부러 기침을 한다.
아버지 (혼잣말로) 감기가 오나.
장 선생님, 우리 정수 이 앞 지나갈 때 가끔씩 머리도 좀 쓰다
듬어 주십시오.
이발사 알겠습니다.
아버지 (허허 웃고) 부탁이 너무 많네요.
아버지와 이발사, 서로 술잔을 나누고,
정수, 꼬부리고 돌아누워 소리없이 눈물만 흘린다.
제 5 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