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곳이 교우촌
요즈음 국내 성지를 정리하다가
내가 태어나서 국민학교졸업까지 자라고 살던 곳이
교우촌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시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이
지나가는 어떤 분을 보고 천주학쟁이라고 했는데
당시는 그 뜻을 몰랐었지요.
어른이 되어 족보를 들여다보다가
우리 조상들이 묻힌 곳이 사기막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릴 때는 사구막골이라고 해서 그 뜻을 몰랐는데...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 한 분이 오셔서
우리들 4학년 담임을 맡으시더니
1년 후 홀연 떠나셨습니다.
그 후 신부님이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벌초하러 갔다가 친척 어른분에게 신부님 이야기를 했더니
서리 누구네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교우(천주학쟁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민학교때 자주 소풍을 갔던 굴암절이 있는 한덕골이
김대건 신부님이 어릴 때 잠깐 지내다 골배마실로 이사가시고
순교하신 후 시신을 지게에 지고 미리내로 넘어가신 길도
바로 내가 살던 이웃동네였던 것이지요.
사리틔 공소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상반 )
용인지방에 천주교의 전래가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첫 신앙운동이 시작된(1777∼1779년) 천진암과 경기도 광주 등이
용인과 인접한 거리라는 사실로 보아 다른 지역보다
상당히 일찍이 복음이 전해졌으리라 여겨진다.
첫 박해인 신유년(1801년)박해 때부터 각지에 흩어진 교우들이
이곳 용인지방으로 숨어들었고, 이들이 용인지방에 전교한 장본인일 수도 있다.
용인지방에는 오래된 전설을 갖고 있는 교우촌으로
사리틔(현 용인시 이동면 서리)에 전해오는 <신부터>,
<붉은고개>에 관한 이야기와 태화산 중턱에 성지굴(聖地屈)이 있다.
문헌상으로는 1827년 정해 박해 때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살다가
포교에게 잡혀 전주 감옥에서 1839년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의 경우로 보아
1815년 을해박해 때 이미 용인지역에 교우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훗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 정도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사촌 이여진(요한)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는 없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용인지방에 알려진 교우촌으로는 은이, 골배마실, 한터, 사리틔,
먹뱅이, 한덕골, 손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등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용인)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서울과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서리 하반은 박해 때 교우들이 피신해 살던 마을이며
이곳에서 성명 미상의 성직자가 거처했으므로
신부 고개와 붉은 고개의 설화를 신자들에게 남겨 주었다.
아직도 신부가 거처하던 집터가 남아있고 신부터로 넘어가는 붉은 고개는
신부가 전교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호환(虎患)을 당해
세상을 떠난 신부를 마음 아파하던 교우들이
고개 이름을 붉은고개라고 칭하게 되었다.
또한 사목을 하려고 넘나들던 고개는 신부고개라고 이름지어
지금까지도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구전을 전해줄 수 있는 유물이 70여년전에 밭을 일굴 때 항아리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썩은 기도책과 묵주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증언자는 작고한 전 공소회장인 권희집(權熙集) 마티아이며,
그는 어렸을 때 그 광경을 목격했다고 전해준다.
이 공소 강당은 1976년 용인 본당 장덕호 신부에 의해
서리 상반에 옛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지금은 사리틔 공소가 천리 성당에 속해 있다.
현재 상반과 하반에 모두 약 10가구 정도의 교우가 살고 있으며,
공소에서는 정기적인 미사는 없다.
한덕골 성지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4리(龍仁市 二東面 墨4里) 한덕골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이다.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이었다.
이곳으로 피난와서, 처음에는 기거할 집이 없어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는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 나무와 산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서 살었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최경환의 형 최영겸도 1832년 무렵에 이곳 한덕골로 이주해 왔으며,
1839년 이후에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아우인 최신정(델레신포로)이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이 골배마실은 본래 한덕골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과
어은이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길이 막혀 버리고, 양지 방면에서만 들어갈 수가 있게 되어있다.
한편 골배마실 서쪽에 있는 '숨은 이들의 마을'인 '은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이곳 형제봉 아래는 박해 때문에 떠돌게 된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 공동체를 이룩한 곳이다.
원래 한덕골은,
윗마을 광파리골과 아랫마을 한덕골을 합쳐서 부르던 이름이며,
그중 교우촌은 윗마을 광파리골이다.
족보에 의하면 성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金澤鉉, 1766-1830)과
숙부 김제철(金濟哲, 1803-1835)의 묘가 한덕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성 김대건 신부 가족들의 한덕골 피난설을 뒷바침해 주고 있다.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곳에 와서,
중백부(仲伯父 崔榮謙)와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였다.
최신부는 그 이후에도 가끔 이곳에 들려 성사를 주곤 하였다.
이곳 한덕골 출신 순교자로는 성 김대건 신부와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5-1839) 성인을 비롯하여,
김 시몬(1870 순교, 40세), 김 마리아(1866 순교, 42세) 등이 있다.
천리요셉성당
용인대리구 천리요셉본당(주임 장찬헌 신부)은
박해시대부터 신앙의 명맥을 묵묵히 이어오고 있다.
용인 천리 일대는
박해시기에 많은 신자들이 모여 여러 교우촌을 형성한 지역이다.
본당 관할 내 한덕골은 1827년 정해박해 때
성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김 신부의 가족들은 솔뫼를 떠나 한덕골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나무에 칡을 엮고 억새풀을 덮은 초막에 기거했다는 구전이 내려오고 있다.
이 한덕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큰아버지인
최영겸(베드로)의 일가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부모인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녀가 박해로 순교한 후
최양업의 동생 최신정이 이곳에서 성장했다.
최양업 신부는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이후에도
한덕골에 들러 성사를 주곤 했다.
또 인근에는 신자들이 담배농사를 짓던
먹방이 교우촌도 자리하고 있다.
먹방이 교우촌은 이윤일 성인의 가족이 살던 곳으로
성인의 유해는 80년 가까이 교우촌 뒷산에 묻혀 있었다.
이밖에도 병목골, 검은쟁이, 서리 사리티 등
박해시대부터 이어온 여러 교우촌들이 자리한다.
이런 신앙의 명맥을 이어온 천리 지역에는 1890년대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미리내본당 초대주임인 강도영 신부는
1896년 미리내에 성당을 짓기 전에 천리에 성당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세도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일대에 많은 교우들이 살고 있었지만, 빈곤한 경제 사정으로
오랜 기간 공소 건물조차 세울 수 없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한국교회를 위해
미국 신자들이 구호물자를 보내주자
신자들은 이를 저축해 성당 건축기금으로 삼았고,
이런 사정을 안 독지가도 도움을 줬다.
성당 건축이 시작되자 본당신자들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 신자들도 도와
1957년 8월 성당 건물을 준공할 수 있었다.
이어 1960년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는 기쁨을 맞았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1964년 2대 주임신부의 전임 후
본당은 다시 용인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됐다.
비록 공소로 돌아갔지만 신앙의 명맥은 꾸준히 이어졌다.
공동체는 신앙을 전수해 나가면서 교구 사제를 3명이나 냈고,
여러 수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공소가 된 지 33년이 되던 1997년,
공동체는 다시 사제를 맞이하게 됐다.
2000년에는 새 성당도 봉헌했다.
신자들이 땀 흘려 세운 옛 성당은 교리실로 활용 중이다.
승격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본당 공동체는
한덕골 사적지와 이윤일 성인의 묘를 보존하면서,
선조에게 물려받은 신앙을 꾸준히 전해나가고 있다.
용천초등학교
1934년 설립.
내가 재학 당시 학생수는 600명이 넘었지만, 현재는 250명임.
건물은 1층 목조건물에서 3층건물로 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