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民畵)의 종류(種類) |
|
|
|
|
|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들은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고려 때부터 한국 사람들은 다투어 그림 받기를 바랬다. 좋은 그림을 얻으면 잠을 못 자고 기뻐했다. 그림 한 폭을 금은처럼 귀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여러 문집(文集)에 보인다. 그림 한 장 얻어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유별나게 그림을 좋아한 한국 사람들은 이미 삼국 시대로부터 궁전(宮殿), 사찰(寺刹), 민가(民家)는 물론 무덤 속, 가구, 옷가지에까지 그림을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 여류 시인(女流詩人) 김삼의당(金三宜堂)은 그의 집 모든 벽에 그림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한 일이 있으며, 판소리 《춘향전(春香傳)》에는 춘향이 방 천장에까지 그림을 붙였다고 했고, 또 어떤 글에는 '평양 감옥 안의 벽 문에도 많은 그림을 붙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모든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옛날에는 집안의 벽뿐만 아니라 대문간, 광, 부엌문, 문장, 벽장문에 많은 그림을 붙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웬 만큼 사는 집에는 병풍(屛風) 몇 틀은 반드시 있었다. 한국 사람들의 한 평생은 병풍에서 시작하여 병풍으로 끝난다고 할만큼 병풍은 생활 필수품(生活必需品)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인이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을 때 모란(牡丹) 병풍을 치고 그 앞에서 백년해로(百年偕老)를 맹세했고 안방 화조(花鳥) 병풍 아래서 살을 섞고 새 핏덩어리를 잉태하고 해산했다. 외풍(外風)을 막아 주는 병풍 그늘에서 젖먹이 시절을 자란 한 생명의 돌잔치, 생일잔치, 환갑잔치 등에 언제나 병풍을 둘렀다.
방안과 울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사에 병풍은 필수였다. 차일(遮日)을 두르면 반드시 병풍을 둘렀다. 늙어 병들고 뒤이어 죽음의 문을 두드릴 때, 사람들은 병풍을 둘러 쳐주었다. 주검 앞에 흰 병풍을 둘러 주었고 무덤에 묻힌 뒤에 제삿날 제사상 굿판에 병풍을 둘렀다. 궁궐(宮闕), 역사(驛舍), 서원(書院), 사찰(寺刹), 신당(神堂), 무당 집 어디에나 병풍이 있었고 용궁(龍宮), 선경(仙境), 극락 세계(極樂世界) 풍경에도 병풍 그려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병풍들은 글씨, 수, 또는 아무 그림도 없는 소병(素屛)이 있었지만 대개는 6폭, 10폭, 12폭의 그림으로 된 병풍이었다.
이처럼 그림 속에 파묻혀 살다시피 한 한국 사람들이 좋은 그림을 큰 보배로 여기며 잠을 못 이룰 만큼 사랑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
|
|
|
|
대가(大家)와 화원(畵員)만으로 채우지 못한 그림 수요 |
|
|
|
그러면 전통 사회에서 그처럼 많이 필요했고 또 많이 제작, 사용된 그림은 어떤 그림이며 이런 그림은 누가 그렸는가.
고려 이후의 한국 그림에 대한 짤막한 비평 중에는 <속화(俗畵)>가 판을 쳤다고 개탄한 대목이 나온다. 근엄한 일부 유학자들이 풍속도(風俗圖)와 같은 속기(俗氣) 넘치는, 화법(畵法)을 무시한 그림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작품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속된 그림들에 대한 걱정을 놓고 여기서 단 몇 마디로 간단히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전통 사회에 압도적으로 많던 그림은 뛰어난 대가들에 의한 신품(神品), 절품(絶品)이 아니라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고 대중적인 속화(俗畵)였다는 사실만은 뚜렷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 미술사의 전(全) 시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작가로 추앙 받은 화가의 수가 적었고 그들의 작품 또한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가들은 돈만 받으면 누구에게나 모두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고 비창조적인 작품을 남발하지도 않았으니 좋은 화가의 그림을 구하기란 금을 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많은 그림 수요를 메운 작품들은 대부분이 속될 수밖에 없는 실용화(實用化), 즉 감상보다는 장식(裝飾)을 위주로 한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그림이었다. 이런 그림이 어떤 그림이었나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누가 그런 그림을 그렸나를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 미술사의 대들보와 같은 대 화가들은 대부분이 「도화서(圖畵署)」라는 정부 기구 소속의 화원 출신들로 한 평생을 창조적인 작품 활동에 바친 예술인들이었다. 도화서를 거치지 않은 사람, 도화서를 그만 둔 사람, 끝까지 도화서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아예 처음부터 도화서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문인 화가(文人畵家)들도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중국을 닮은 듯하나 그 본질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 수묵화(水墨畵)의 전통을 확립했고 그들의 작품은 비록 수가 적었으나 한국 미술사의 주조를 이루며, 정통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품을 <정통화(正統畵)>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에 「도화서」가 있었다. 신라 시대로부터 도화서는 왕실, 정부 등 국가기관과 사대부에게 필요한 모든 그림을 그렸고 그 역할과 화풍(畵風)은 중국의 화원(畵院)에 비슷했다.
그들의 임무는 앞서 말한 국가 관청의 제례용(祭禮用)그림 장식화(裝飾畵), 초상화(肖像畵), 기록화(記錄畵)로부터 자수 본(刺繡 本)의 제작까지 다양하였고 그런 일거리는 늘 폭주했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대부분의 화가들은 도화서 출신, 또는 도화서 화원들이었는데, 「도화서」는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림을 통해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던 유일한 길이었다. 공정한 선발 고시, 치열한 경쟁, 승진과 기예(技藝) 향상을 위한 경시 등 엄격한 제도를 갖춘 조직의 화풍은 대체로 극세화(極細畵), 즉 엄격한 법식을 따른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그들의 그림에 특색과 독창성이 있기는 했으나 전통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대부분의 그들 그림을 <원체화(院體畵)>, 또는 <원화(院畵)>라 부르고 있다.
많은 <불화(佛畵)>는 화법이 원화 풍에 가까웠으나 그림의 작가가 화승(畵僧)이라는 특수한 신분의 승려들이었고 그 주제와 불교 의식에 따른 제작 과정, 소재 양식 등 한국 불화의 독특한 전통이 주로 큰 사찰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
|
|
|
|
|
민화(民畵)와 민화를 그린 장인(匠人)들 |
|
|
|
한국 사람들이 그처럼 좋아하면서 그들의 생활 공간을 온통 메웠었던 그림들을, 극소수의 정통 화가, 언제나 일손은 모자라는데 작업량이 넘쳐서 그들의 책임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던 화원, 불화(佛畵)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그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집 안팎을 아름답게 꾸미며 생활 풍습에 따라 여기 저기 붙였던 그림만을 전문으로 그린 화공들이 따로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그림 공부를 제대로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림 수요가 워낙 크다 보니 아예 처음부터 이런 생활화만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공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도화서나 대가들이 주도하는 화단의 주류에서 멀리 벗어나서 그저 일상생활에 얽힌 대수롭지 않은 그림만을 그려서 서울 같으면 「광통교」 아래 「병풍전」에 내기도 하고 시골 장터에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름 없는 화공들이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시골 장터를 떠돌아다니면서 가죽에 물감으로 글씨, 그림, 혁필화(革筆畵)를 그리고 인두를 불에 달구어 나무나 종이에 낙화(烙畵)를 그려 준 유랑(流浪) 화공 같은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그림에 재주가 있었으나 도화서 시험에 떨어진 사람, 처음부터 시험 볼 엄두도 못 내본 사람, 또는 신윤복(申潤福)처럼 도화서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림들을 대 화가나 화원들이 전혀 그리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분명히 대가들의 호랑이, 용, 화훼(花卉), 영모(翎毛) 그림도 장식과 일상생활을 위한 면이 없지는 않다. 더욱 많은 원화 풍 민화의 작가는 화원과 화원(畵院)의 수법을 배운 장인들이었다. 그러나 화원들이 왕실이나 정부 관서, 또는 사대부 집에서 쓰기 위해 그렸거나 시중에 팔기 위해 그린 그림들은 극소수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것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장식용 그림들은 집안 벽이나 다락문, 대문간, 병풍 여기저기에 더덕더덕 붙이고, 명절이 오면 새로 사다 붙이기도 하고 - 집안이나 병풍이 낡고 더러워서 도배를 하게 되면 아무런 아쉬움 없이 헌 그림 위에다 새 것을 붙여 버린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긴 그림들이었다. 이런 그림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오랜 생활 습관과 방식에 따라 그들의 주거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고, 또 명절 때 같은 연중행사에 특별한 뜻을 갖고 붙인 그리 대단치 않은 그림들은 대개가 이름 없는 떠돌이 화공들이 그린 그림들이었다. |
|
|
|
|
|
무가(巫歌), 한양가(漢陽歌), 민속극(民俗劇), 풍속기(風俗記)에 보이는 민화(民畵)의 종류(種類) |
|
|
|
민화는 집 안팎의 장식(裝飾)과 민속(民俗)에 따른 관습에 따라 사용된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을 사들인 대중들의 구미에 맞아야 했다. 오랜 관습에 따라 귀신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모든 집에서 사용한 그림들은 그 종류와 그림을 붙인 곳이 대개 비슷했다. 대중들의 그림에 대한 취향도 엇비슷해서 예전부터 내려오고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그림들이라든지 이웃집이나 동네 사람들이 많이 붙인 그런 그림들을 거의 습관적으로 사다가 집 안팎과 병풍을 장식했다.
수 천년을 이렇게 내려온 민화는 자연히 한 틀을 갖게 되었고 대부분의 그림들은 이 틀 안에서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제작되었다. 과거의 한국인들이 남긴 화론(畵論), 화찬(畵讚), 시(詩), 시조(時調), 가곡(歌曲), 산문(散文), 소설(小說)에는 '어떤 그림을 어떻게 썼나' 하는 대목들이 더러 보이는데 여기서는 그 중 몇 개를 추려 보기로 한다.
먼저 옛날 사람들이 집을 짓거나 이사한 뒤에 무당들이 와서 부른 《성조가(成造歌)》의 <황제(黃帝)풀이>중에서 그림에 관계된 부분을 옮겨 본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주택 건축과 실내 장식의 이상(理想)과 실제를 읊은 구전(口傳)의 서사시(敍事詩)라 할 수 있다. |
|
|
|
|
|
|
도배를 한 연후에 그림 치장이 없을소냐 벽장문은 복자(福字) 필통(筆筒) 그림 다락문은 병화(甁花) 그림 대청을 바라보니 부모(父母)는 천년수(千年壽)요 자손(子孫)은 만세영(萬世榮)이라 뚜렷이 붙였구나 안방을 바라보니 부모께 천년산(千年山)의 수양산(首陽山)이 빗초였구나 건너방을 바라보니 자손의 만년수(萬年壽) 구봉(龜鳳)이 깃들었구나 남벽(南壁)을 바라보니 삼신산(三神山) 세 노인이 흑백(黑白)을 들고 바둑두는 형상이요 북벽(北壁)을 바라보니 십장생(十長生)이 분명하다 사각(四角) 기둥 입춘서(立春書)라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마건곤복만가(春滿乾坤福滿家)라 부엌문 위를 바라보니 계견사호(鷄犬獅虎) 쌍기린(雙麒麟)이 분명하다 광문을 바라보니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분명하다 중문(中門)에 세 선비요 대문에는 을지문덕(乙支文德) 진숙보(秦叔寶)가 분명하다 그림 치장 연후에 사방부벽이 없을소냐 |
| |
|
|
|
사방에 벽화를 그린다. 동쪽에 팽택령(彭澤令)을 사직하고 심양(심陽)으로 돌아가는 도연명(陶淵明), 서쪽에 삼고초려(三顧草廬), 남쪽에 성진(性眞)이 팔선녀(八僊女) 희롱하는 『구운몽(九雲夢)』, 북쪽에 강태공(姜太公) 낚시질하는 장면을 그려 놓고 뒤에 가구들을 들여놓는 대목이 나오고 나서 병풍을 치장한다. |
|
|
|
|
|
|
대(大) 병풍, 소(小) 병풍, 곽분양(郭汾陽)의 행락도(行樂圖) 효제(孝悌) 병풍, 백자동(百子童) 병풍을 둘렀구나 …… |
| |
|
|
|
|
|
<수영(水營) 들 놀음>이나 <봉산(鳳山)탈춤>등 민속극에도 방안에 붙인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심우성(沈雨晟)이 수집한 대사(臺辭)에 이런 대목들이 나온다. |
|
|
|
|
|
|
방문을 썩 열고 보니 청릉화(靑綾畵) 도벽(塗壁)에 황릉화(黃綾畵) 뛰(띠)하고 황릉화 도 벽에 청릉화 뛰, 꿩 새끼 그린 화방에 매 새끼 날아들고 매 새끼 그린 방에 꿩 새끼 날아 들 제 …
네 벽에는 각각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상산사호(商山四皓), 탕왕(湯王)의 용궁 행(龍宮行), 강태공(姜太公)의 낚시질 그림 … |
| |
|
|
|
|
|
또 지금부터 약 백년 전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서울 모습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에는 「광통교(廣通橋)」 아래 「병풍전(屛風廛)」에서 다음과 같은 그림과 병풍채를 팔았다고 했다. |
|
|
|
|
|
|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강남금릉경직도(江南金陵耕織圖), 소상팔경(瀟湘八景), 계견사호(鷄犬獅虎), 어약용문(魚躍龍門), 해학반도(海鶴蟠桃), 십장생(十長生), 매란국죽(梅蘭菊竹), 구운몽(九雲夢), 강태공(姜太公), 상산사호(商山四皓), 삼고초려(三顧草廬), 도연명(陶淵明), 이태백(李太白), 문배용(門排用) 신장(神將), 모란(牡丹)병풍, 영모(翎毛)병풍, 산수(山水)병풍, 글씨 병풍, 오봉산일월(五峰山日月)병풍 |
| |
|
|
|
|
|
고대 한국의 풍속을 적은『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열양세시기)』『경도잡지(京都雜誌)』에 나오는 그림 종목을 추려 보면 |
|
|
|
|
|
|
수성(壽星), 선녀(僊女), 직일신장(直日神將), 금갑장군(金甲將軍), 붉은 도포와 까만 사모를 쓴 사람 그림, 종규(鐘규), 귀신머리〔처용상(處容像)〕, 닭, 범, 버드나무 가지를 깎아 끝을 갈라지게 하고 먹을 찍어 쓴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의 글자, 물고기, 게, 새우, 제비, 신선이 사슴 탄 그림, 금강산일만이천봉(金剛山一萬二千峰), 관동팔경(關東八景), 꽃, 새, 나비, |
| |
|
|
|
|
|
그저 손쉽게 고른 몇 곳의 그림 장식 대목들이 얼핏 보면 잡다하나 그림의 내용을 계열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개의 큰 덩어리 속에 포함되며 이렇게 나누어 봄으로써 한국 민화가 무엇인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즉 화조(花鳥), 산수(山水), 민속(民俗), 교화(敎化)로 나눌 수 있다. |
|
|
|
|
|
1) 화 조 (花鳥) |
|
|
|
다락문에 붙은 꽃병과 꽃꽂이 그림으로부터 꿩 새끼 그린 화벽(畵壁)에 매 새끼 날아드는 그림, 매란국죽(梅蘭菊竹), 모란(牡丹), 영모(翎毛) 병풍, 닭, 범, 물고기, 게, 새우, 제비, 꽃, 새 나비가 모두 이런 화조 그림 속에 들어간다. 민화 중에 가장 많은 것이 화훼(花卉), 영모(翎毛), 축수(畜獸), 어해(魚蟹), 초충(草蟲), 기명절지(器皿折枝), 사군자(四君子) 등으로 불러온 화조 그림들이다.
식물 중 나무로는 대, 솔, 오동, 포도, 갈대, 버드나무, 꽃나무에는 매화, 난초, 국화, 연꽃, 동백, 수선, 진달래, 개나리, 메꽃, 작약, 모란, 월계, 해당화, 옥잠화 등이 있다.
동물에는 사슴, 봉황, 토끼, 원앙, 닭, 공작, 학, 오리, 제비, 참새, 나비, 꿀벌, 백로, 까치, 말, 소, 호랑이, 꿩, 매, 메뚜기 등이 있고 물 속에 사는 거북, 잉어, 도미, 붕어, 메기, 복어, 송사리, 게 등이 있다.
동물과 식물 단독으로, 또는 여러 가지를 산, 물, 바위 등과 같이 그렸는데 여기에 나오는 꽃, 새, 나무들은 한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사물이었다. 꽃처럼 아름답게, 나무처럼 싱싱하게, 바위처럼 의젓하게, 그리고 그 속에서 쌍쌍이 정답게 살아가는 짐승처럼 부부가 영원히 사랑하기를 바라면서 그려 붙인 것이 이 화조 그림이다. |
|
|
|
|
|
2) 산 수 (山水) |
|
|
|
앞에 나온 노래에는 또 천년산(千年山), 수양산(首陽山), 삼신산(三神山), 소상팔경(瀟湘八景), 산수(山水)병풍, 오봉산일월(五峰山日月)병풍, 금강산 일만이천봉, 관동팔경(關東八景)이 나온다.
산수화는 한국 회화사(繪畵史)의 중심으로 정통화의 대가들은 바로 산수화의 거장(巨匠)이었다. 정통 산수화를 그처럼 좋아하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은 민화 화공들이 정통화를 모방하거나 순수한 민화 풍으로 그린 산수화를 좋아했다.
민화의 산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금강산, 관동팔경, 고산구곡(高山九曲), 제주도 등 한국 풍경이고 또 하나는 소상팔경(瀟湘八景), 신선도(神仙圖) 그림 계통에 나오는 중국 산수 그림이다.
그림을 통해서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되며 방안과 병풍 속에서 변하지 않는 자연의 영원한 모습을 늘 즐기는 동시에 금강산, 제주도 등 명승지에 대한 한국인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
|
|
|
3) 민 속 (民俗) |
|
|
|
민속화(民俗畵)의 준말이 바로 민화라고 주장할 만큼 민화는 한국 민족의 민간 종교, 생활 양식, 사고 방식, 풍속 습관, 민속 예술, 민중 문화 등 민속으로 총칭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민속화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
|
|
무속화(巫俗畵) |
|
|
|
한국 민족의 가장 오래된 종교인 무교의 믿음을 그린 그림으로 민족의 시조이자 고대 국가의 상징인 단군(檀君), 삼국 시대로부터 내려온 시조왕 제(始祖王 祭), 조상 제(祖上 祭)의 유풍을 따라 기념한 왕조(王朝)의 군왕, 조국을 외적(外敵)의 무력 침공으로부터 지킨 장군들, 중앙 및 지방관서의 고급 관원, 창부(倡夫), 마부, 무당 그림이다. 무교와 깊은 관계에 있는 산신, 용신과 도교의 여러 신들, 불교의 석가모니를 비롯한 보살들을 무속화해서 그린 그림들도 여기에 속한다. 옛날 신당, 무당 집에 걸린 그림과 아울러 점쟁이들의 점괘 책(占卦冊), 불교에서도 발행하는 도교, 무속적인 부적(符籍)도 무속화의 일종이다.
원시적 유일신 하느님만을 참된 신으로 믿은 한국 무교는 현세(現世), 인간 중심적(人間中心的)이어서 많은 무속화에 미신의 요소를 찾기 힘들고 특기할 점은 남성뿐 만 아니라 여성을 똑같이 모셔 산신이 나오면 산신 마누라, 왕이 나오면 왕후, 대감이 있으면 대감 마누라를 그렸다. |
|
|
|
무교(巫敎) 사상을 담은 그림 |
|
|
|
한국 무교의 중심은 현세에서의 인간의 행복과 장수에 대한 기원과 믿음에 있었다. 오래오래 건강하고 아들, 딸 많이 낳아 행복하게 살기를 염원한 그림들이 무교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앞서 나온 구절 중의 천년산(千年山), 삼신산(三神山), 세 노인, 십장생, 해학반도(海鶴蟠桃),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 신선이 사슴 탄 그림들이다. |
|
|
|
무속에 사용한 그림 |
|
|
|
벽사진경(벽邪進慶)을 위해 평상시 혹은 명절에 궁궐과 민가에 붙였던 민속화로 구봉(龜鳳), 계(鷄), 견(犬), 사(獅), 호(虎), 쌍기린(雙麒麟), 어약용문(魚躍龍門), 문배용 신장(門排用 神將), 수성(壽星), 선녀(仙女), 직일신장(直日神將), 금갑장군(金甲將軍), 종규(鐘규), 처용(處容) 등이 모두 이런 그림들이다. 호랑이, 사자, 개, 용, 잉어 등 가장 흔한 민화에는 모두 액을 막고 경사가 오기를 바라는 믿음이 담겨 있으나 차차 장식적인 그림으로 변한 듯한 흔적이 보인다. |
|
|
|
일상 풍속(日常風俗) |
|
|
|
앞 노래에는 중국의 강남 금릉경직도(江南金陵耕織圖)만이 나왔으나 민화에는 호렵도(虎獵圖), 경직도(耕織圖), 평생도(平生圖) 등 사냥꾼의 사냥 장면, 농사 짓고 베 짜는 모습,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린 선비의 한 평생, 그리고 일상 풍속을 그린 그림들이 많다. |
|
|
|
4) 교 화 (敎化) |
|
|
|
교화란 매우 부자연스러운 호칭이나 한국 사람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킨 도덕률(道德律), 그리고 긴 세월을 통해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발전시켜 완전히 한국 문화로 만든 중국의 유가(儒家) 및 도가(道家)의 사상으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관,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충효(忠孝)를 강조한 그림으로부터 한국과 중국의 고사(故事), 시(詩), 역사소설 등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노래 속의 도연명(陶淵明), 삼고초려(三顧草廬), 강태공(姜太公), 효제병풍(孝悌屛風), 상산사호(商山四皓), 탕왕(湯王), 이태백(李太白)이 바로 이런 그림이며 효자도(孝子圖), 삼국지(三國志) 전쟁 등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대목을 그림으로 그린 것도 포함된다. 또 한국 사람들은 판소리, 민담(民譚), 민화(民話),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민화로 그렸다. 《별주부전(鼈主簿傳)》,《토끼전》,《수궁가(水宮歌)》로 불리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팔선녀를 거느리는 『구운몽(九雲夢)』의 성진(性眞), 《춘향전(春香傳)》, 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열락도(悅樂圖)>, 그리고 <문방구도(文房具圖)>, 즉 <책거리> 등 특수한 그림들이 많다. |
|
|
|
|
|
대립(對立)으로 상반(相反)되는 민화의 양식(樣式) |
|
|
|
한국 민화를 보다 잘 알기 위해서는 화제(畵題)나 그림의 내용과 뜻을 중심으로 그 종류를 나눔과 동시에 그림의 양식(樣式)에 따른 분류가 바람직하다. 한국 민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근 10년째 접어드는 오늘날까지 어느 것이 참된 한국의 민화인가에 대한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데 가장 큰 차이가 양식(樣式)의 문제에서 온다. 어느 것이 한국의 민화인가에 대한 주제(主題)의 분류에는 그다지 큰 문제점이 없으나 민화의 양식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여러 민화를 놓고 보면 거기에는 두 개의 다른 양식(樣式)이 있다. 그림을 보면 바로 짐작이 가겠으나 예를 들면 <그림 2>와 같은 그림은 썩 잘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구도, 형상, 색채, 선 모두가 잘 조화되고 그림의 모든 부분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화법의 테두리 안에서 규격화, 양식화된 느낌이 있으나 중국 화원(畵院)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빈틈없이 완벽한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 3>의 민화는 솜씨가 어설프고, 서툴고 투박하며 거칠다. 그림에 나름대로 짜임새와 통일성은 있으나 언뜻 보면 아주 소박하고 치졸하며 그 색깔이 마치 어린이 그림처럼 유치하게 보인다.
확실히 이 두 양식은 양극(兩極)에 마주 서 있는 것 같다. 털끝 하나 하나를 그리는 극세화(極細畵)와 감필(減筆)로 생략, 과장된 대담하고 자유로운 필치(筆致)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전자를 합리적인 그림이라 한다면 후자는 불합리한 그림으로밖에 달리 볼 수 없다.
이러한 양식의 대립은 일찍이 조선시대의 한 문인이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모든 인류 문화 발전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한국 회화사(韓國繪畵史)의 전(全) 시기, 또는 한 시대에 있어 객관과 주관, 정(正)과 반(反), 합리와 불 합리, 이치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일의 상생(相生), 상극(相剋) 현상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환경 건조물(環境建造物)인 지석묘(支石墓)가 북방식, 남방식으로 하나는 세련되고 우아한 외면의 비례와 균제(均齊)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반면, 다른 편이 소박한 무기교(無技巧)로 자연스런 내면의 균형과 음악적인 어울림을 찾은 데서 오는 대립과도 같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四神圖), 삼국 시대 불상, 고려자기, 조선시대의 모든 미술과 공예품에 이런 양식화된 것과 자유스러운 것의 대립을 볼 수 있듯, 민화에서도 딱딱한 한국 도화서 및 중국 화원 풍으로 된 그림과 제멋대로 자유스럽게 그린 순수한 민화 맛이 나는 그림의 대립 현상이 나타난다. |
|
|
|
|
|
원화 풍(院畵風)의 그림과 순수한 민화 |
|
|
|
이미 10년 전부터 <신세계 미술관>에서 여러 차례의 <민화전>을 주관하고 1973년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민화를 포함한 <한국 민예 미술 대전>을 관장한 최순우(崔淳雨)는 작품 선정 과정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 권위 의식이나 작가 의식 없이 순정과 익살에 가득 찬 오히려 민화의 맛이 나는 순박한 그림을 위주로 했고 도화서 화원의 그림을 제외했다.
한국 민화를 가장 먼저 수집하고 가장 넓게 섭렵하고 그것에 대해 가장 많은 글을 쓴 한국 민화의 대가 조자용(趙子庸)은 민속화(民俗畵) 계통의 그림을 내세우면서도 최근 간행된 영문판『민화 입문(民畵入門)』에서는 한국 민화를 고급과 저급으로 구분하였고 원화 풍을 고급 민화로, 순수한 민화 풍을 저급 민화로 구분했다.
『시사(時事)』지(誌) 연재 및 단행본 저술, 강연을 통해 <민족화> 및 <겨레그림>으로서의 민화의 역사성을 일찍부터 강조한 김호연(金鎬然)은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이 유종열(柳宗悅)을 통해 수집한 것과 같은 바보스러운 그림이 한국 민화의 전부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저질화(低質化)된 작품보다 원화 풍의 걸작을 더 좋은 민화라 했다.
그런데 한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민화는 <민속화(民俗畵)>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아마추어, 농민들, 또는 떠돌이 화공들이 일반 대중의 얄팍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채워 주고 그들의 취미에 맞도록 그린 원초적이며 순박한 풍경, 인물, 초상, 풍속, 장식, 그리스도 교의 성화(聖畵)를 민화로 부르고 있다. 이런 민화 또는 농민화(農民畵)들은 아카데미, 또는 정상 회화 교육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과 뚜렷이 구분된다.
고려의 이색(李穡)이 정월 초하룻날 그것을 두르고 병이 낫기를 기원하던 십장생 세화(歲畵) 병풍과 《한양가(漢陽歌)》에 나오는 「광통교(廣通橋)」 아래 병풍 가게에서 팔던 십장생, 해학반도(海鶴蟠桃), 그리고 왕궁의 용상(龍床) 뒤에 치는 것과 같은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들은 틀림없이 도화서 원화 풍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런 그림들과 아울러 오늘날 우리가 그저 <민화(民畵)>로 부르는 원화 풍의 십장생 등 거창한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떠돌이 장인이 아니라 화법을 알고 잘 배워 도화서의 전통 양식에 따라 좋은 작품을 만든 화원, 또는 화원에 못지 않은 화가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그린 십장생, 오봉산일월도, 책거리 등을 <화원 그림> <원체화(院體畵)> <원화(院畵)>라고 부르고 있다.
능행도(陵行圖), 초상화(肖像畵) 같이 의심할 여지없는 도화서 그림을 빼고라도 어느 모로 보나 화원의 작품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을 <민화>로 통틀어 취급하는 데에 문제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한국 회화사 테두리에서 소외되었던 한국 도화서의 뛰어난 작품과 조선시대 성화(聖畵)의 아름다움이 조자용(趙子庸), 김호연(金鎬然) 등에 의해 재발견(再發見), 재평가(再評價), 재인식(再認識)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민화의 수집과 연구에 생애와 재산을 바친 조자용과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새로운 회화사의 가능성을 모색한 김호연의 노력이 없었던들 한국 민화에 대한 최근 국내외의 관심과 이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회화에 대한 그들의 남다른 사랑과 사명감을 이해하면서도 '도화서(圖畵署)의 원화(院畵), 화승(畵僧)들의 불화(佛畵), 그리고 일반 민속화를 <한화(韓畵)> <겨레 그림>으로 부를 때 거기에는 마땅히 한국 사람들이 그처럼 좋아하던 정통화도 포함시켜야 옳지 않을까', '원화(院畵)는 원화로서, 민화는 민화로서 나누어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민화는 대중과 서민들의 그림이며 양반, 사대부의 그림은 정통화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가' 하는 점은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
|
|
|
|
|
민화는 선비들도 다 좋아한 그림이다 |
|
|
|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규경(李圭景)이 풀이한 <속화(俗畵)>와 전통 사회에서 많은 문인들이 말한 속화란 어쩌면 저속, 비속하다는 말이 아니라 속언(俗言), 속풍(俗風), 민속(民俗)처럼 한국에 고유한 한국의 그림을 뜻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런 말을 쓴 문인들도 모두가 민화 속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한국 그림들 중에서 외국인이 더 좋아한다고 우리의 평가 기준이 달라질 수도 없으며 외국 사람들이 '민화는 순수한 아마추어들의 그림을 뜻한다' 해서 우리도 그대로 쫓아갈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림을 이야기하고 그 양식(樣式)과 작가(作家)의 정신(情神)을 말할 때 정말 떠돌이, 그러나 멋쟁이 장인들의 그림과 화원들의 그림을 뒤섞어서는 안될 것이며 한국 문화의 국제성을 생각할 때에도 화원들이 뛰어난 솜씨로 그린 원화를 그림 공부를 제대로 못한 떠돌이들의 그림이라고 내세워서도 안될 말이다.
참다운 민화의 맛은 서툴고, 어수룩하게 보이면서 전혀 꾸밈이 없는, 그러나 옛날 그림 그리던 환장이들이 아마도 얼근하게 취해서 멋대로 자유롭게 그린 <그림 4>와 같은 멋쟁이 그림에 있다고 많은 사람은 본다. 원화 풍의 그림도 좋지만 민화의 멋은 어수룩한 그림 쪽에도 똑같이 있는 것이다.
민화의 주제(主題), 그리고 두 가지 양식(樣式)을 알고 나면 '<민화>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대강 짐작하게 될 것이다. 즉 순수한 민화란 한국 회화사의 주류(主流)에서 벗어난 비전문적(非專門的)인 화공 장인들이 대중의 그림에 대한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멋대로 그린 어수룩하고, 소박하고, 꾸밈없는 허드레 그림, 그리 대단치 않은 그림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다 광범하게 그 동안 한국에서 통용된 민화의 개념은 정통화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한 도화서 원화(院畵), 불화(佛畵), 도교화(道敎畵) 등 장식과 종교 민족에 관계된 그림들을 포함했다. |
|
|
|
|
|
◇ 민화(民畵)의 발생(發生) |
|
|
|
한국의 민화가 언제부터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문헌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에나 무엇을 그리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나면 거기에 환[色]을 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람의 본능과 인류 회화 발달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 민화란 제대로 그림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런 가식 없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한국 민화의 발생은 한국 회화사와 때를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알타미라 동굴의 <주술도(呪術圖)>를 방불케 하는 울주(蔚州)의 청동기(靑銅器) 시대 암벽화(巖壁畵)에 민화 호랑이, 물고기, 사람과 같은 그림이 새겨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석기 시대 도기 표면에 빗살과 같은 줄로 무늬를 그어 그릇을 아름답게 꾸미는 동시에 어떤 초자연의 힘에 의한 벽사(벽邪)와 진경(進慶)을 기대했던 그 믿음과 마음은 전통 사회 한국 사람들이 집 안팎을 그림으로 장식했던 뜻과 같았다.
고구려 고분 그림은 민화적(民畵的)인 요소가 많다. 죽은 사람의 무덤의 벽과 천장을 그림으로 채웠다는 사실 자체가 전통 사회에서 집안과 대문밖에 그림을 그려 붙였던 생각과 비슷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분 벽화의 내용과 양식이 민화적이다.
일상생활 풍속과 산수, 동서남북 중앙을 나타내는 용, 호랑이, 닭, 거북이, 황제(黃帝) 등 방위를 나타내는 짐승과 신, 무속(巫俗)에 나오는 천왕(天王), 지신(地神), 무덤 주인공 부부 초상 등이 무교(巫敎)의 산물(産物)이라고 할 수 있는 민화의 내용과 같다. 양식을 보아도 십장생 계통의 해, 달, 구름, 사슴, 거북이 등이 서툴고, 투박한 -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순수한 민화 양식으로 그려져 있다.
백제전(百濟塼)에 부조(浮彫)된 산, 물, 구름, 바위, 나무의 뜻과 모양은 조선 왕조의 민화에 유사하며, 신라 토기와 고구려 자기에 그려 있는 그림들과 조선왕조 시대의 그림, 도자기, 가구에는 현재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민화와 비슷한 그림이나 무늬가 수없이 나온다.(그림 1 참조) |
|
|
|
|
|
민화의 내용과 양식(樣式)은 사전(史前), 삼국, 신라, 고려, 조선 왕조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 |
|
|
|
민화와 같은 내용과 양식을 가진 그림과 무늬는 비단 과거의 유물과 유적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문헌에서 민화적인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글을 찾을 수 있다. 삼국 시대의 기록 속에만도 민화에 가장 흔한 화목(畵目)으로 여성과 아름다움, 부귀의 상징인 모란꽃, 그리고 용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가로리 네이어라…… 둘은 내 아내의 다리인데 나머지 둘은 어느 간부(姦夫)의 다리인가, 빼앗고 빼앗긴 것을 싸워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고 물러나는 처용(處容)에게 역신이 사죄하며 맹세하는 장면이다. 「당신의 초상화만 대문간에 그려 붙여도 그 근처에 얼씬하지 않겠습니다.」그래서 신라 때에도 양재(讓災)를 위한 처용(處容) 화상이 집집마다 문간에 걸렸고 이것은 분명 민화며 민화 풍 그림이었을 것이다.
중국 그림의 기원을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가장 영웅적인 한국 민족인 동이(東夷)족의 군왕 치우(蚩尤) 얼굴 그림을 대문간에 붙였던 데서 찾는데 '치우'라는 음이 '처용'과 비슷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치우, 처용 얼굴 그림을 대문간에 붙이던 풍습, 즉 민화를 집 앞에 붙였던 풍속은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이름을 남긴 오랜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단군상(檀君像)은 분명히 민속화의 무속 그림에 속하며, 고려말까지도 솔거 작품으로 전하는 단군 그림들을 집집마다 걸었다는 이제현(李齊賢)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고유섭(高裕燮)이 한국의 화론(畵論)을 집성한 문인들의 문집에서 뽑은 시문(詩文)과 고승(高僧)들의 글을 보면 민화 화목(民畵畵目)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울러 고려 때부터 여염집에는 <속화>를 많이 붙였다는 말이 여러 기록에 보이는데 이것은 민화, 민화적인 그림들이 그림을 그처럼 좋아하던 한국 사람들 집안과 병풍에 많이 붙어 있었다는 뒷받침도 된다. |
|
|
|
|
|
민화는 종합예술로서의 한국 건축(建築)의 일부였다. |
|
|
|
한국의 모든 공예품 특히 민예품으로 불리는 공예품에 민화 같은 그림, 그리고 이런 그림이 도안화된 무늬가 많다는 사실은 한국 민화의 기능에 대한 하나의 추측을 가능케 한다. 즉 청자, 백자의 도기, 장롱, 함, 실패 상자, 반닫이, 베개 모, 함지, 필통, 문통, 고비(편지 등을 꽂아 두는 물건. 종이를 주머니나 상자처럼 만들어 벽에 붙임) 등 수많은 공예품에 새기고, 그리고, 수놓은 그림들이 공예품의 단순한 장식(裝飾)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한 작품의 생명이 없어지는 불가결(不可缺)의 중요한 부분같이 민화는 옛날 주택의 일부였다.
한국 민족의 미의식과 조형 감각(造形感覺)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종합 예술로서의 한국 건축에 있어 그림은 민가(民家), 궁궐(宮闕), 사찰(寺刹)을 불문하고 집을 장식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집을 만드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였다. 집안과 밖, 대문 안팎과 울 안, 방안과 마당에서 그림과 글씨는 주거 공간 안에서 건조물(建造物)과 사람을 하나로 맺어 주는 매체(媒體)이며 생명체(生命體)였다.
원래 한국 주택은 자연 안에서 사람이 자고, 먹고, 쉬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고 생활 공간은 대자연(大自然)의 품속이었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요로 알던 사람들에게 집안은 그 연속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택은 자연의 한 부분이었고 건축 양식(建築樣式) 또한 자연에 법(法)한 것으로 아무런 꾸밈이나 잔재주가 없었다. 그런데 집이 자연의 연장으로 너무 소박하고 단순하다 보면 사람에게 느낌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절간에 간 것처럼 싸늘할지 모른다. 그림과 병풍은 그 냉냉함과 외로움을 훈훈한 사랑과 인정으로 감싸기 위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 수렵도(狩獵圖)를, 황룡사(皇龍寺) 벽에 노송도(老松圖)를, 역사(驛舍)에 충신 그림을 그린 까닭이나 전각(殿閣), 선박(船舶) 등에 한국식 색깔로 단청(丹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한국 주택에 그림이 꼭 있어야 했던 이유로 미루어서도, 모든 주거 공간에 필수 불가결한 그림인 <민화>는 한국 주택 발달의 역사와 때를 같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민화들은 아무리 오래 거슬러 올라가도 3백년을 넘지 못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민화는 그리 대단하게 여긴 그림이 아니었다는 점, 더러워지거나 낡으면 언제나 헌 것을 없애고 새 것으로 대체했다는 점, 끊임없는 외적(外敵)의 침입에 따른 병화(兵火), 약탈(掠奪)로 소실(燒失)되었다는 점들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민화는 19세기에 제작되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으며, 20세기초의 작품도 많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민화의 보급과 발달을 특정 시기와 연관짓지만, 한국 예술과 민화의 모습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민화의 발생과 성장을 미술사(美術史)의 전시(全時)로 보면서 그 종말을 전통 사회가 몰락하던 해방 전후로 봄이 옳지 않나 생각된다. |
|
|
|
|
|
◇ 민화(民畵)와 한국 사회 |
|
|
|
한국 민화는 전통 사회의 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분명히 예술은 시대와 사회를 비치는 거울이며, 충실한 징표가 된다.
전쟁과 죽음이 몰아친 사회에 평화스러운 기쁨의 예술이 태어날 수는 없다. 이인성(李仁星)의 일제 시대 작품 속에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우수(憂愁)와 슬픔이 감돌고, 한국 전쟁을 치르고 난 이중섭(李仲燮)의 그림에는 부부의 행복을 바란 한 쌍의 새 그림에서조차 절망의 어두움이 서려 있다. 작가의 괴로움은 시대와 사회의 고민인 동시에 사회와 시대의 즐거움과 기쁨은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 메마르고 거칠던 변관식(卞寬植)의 화면이 해방과 독립을 맞아 밝은 빛에 찬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국 민화를 자세히 관찰하면 전통 사회는 평화스럽고 행복한 사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두움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오직 밝고, 명랑하고, 건강하고, 솔직한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러한 그림이 나오고, 이러한 그림만을 찾던 사회와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을 즐겁게 노래하면서 살던 행복한 사회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민화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건축, 조각, 공예품, 고려의 도자기, 삼국 시대 미술품이 모두 이런 평화스럽고 행복했던 사회와 예술가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간혹 한국 전통 사회의 역사를 계급(階級)의 대립과 지배층(支配層)의 횡포(橫暴) 억압에 대한 민중(民衆)의 저항(抵抗)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 사회를 극소수 귀족 계급에 의한 대중의 착취로 보는 사람들은 <장인>으로 불리는 예술인이 사회의 천시와 냉대를 받고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운 나날들을 보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술은 그들과 대중의 한(恨)을 표현한 것이라 하고 곧잘 판소리, 탈춤, 살풀이를 예로 든다. 그리고 민화도 민중의 소리며 대중의 몸부림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
|
|
|
|
|
전통 사회는 한(恨) 맺힌 계급 사회가 아니었다. |
|
|
|
세상 만사가 모두 제 눈에 안경이라 부처 눈에는 세상이 부처처럼, 돼지 눈에는 돼지로밖에는 달리 볼 수 없기 때문에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의 '무단 정치(武斷政治)' 아래 문화가 말살(抹殺)되고 모든 한국인이 그들의 노예(奴隸)로 전락한 것을 슬퍼한 일본인 유종열(柳宗悅) 눈에는 한국의 도자기와 예술은 비애(悲哀)의 발로(發露)였고 그런 예술관은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전통 사회와 전통 예술을 볼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힘차고 강하고, 억세고 끈질긴, 한국 민족의 마음과 믿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생명의 예술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밝고 환한 한국 미술의 참 모습을 보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심청전(沈淸傳)>이 정말 그렇게 슬프기만 한가, 죽음과 헤어짐의 심연(深淵) 속에 계시(啓示)되는 삶과 만남의 밝은 빛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흥부전>, <수궁가(水宮歌)>, 포복절도(抱腹絶倒)할 배(裵) 비장(裨將) 이야기에 원한이 담겼다고 해석할 수 없다. 살풀이는 오히려 신접(神接)의 황홀경, 무상(無上)의 엑스터시를, 움직임을 떠난 움직임으로 노래하며 춤춘 크고 무거운 예술로 봐야 옳다.
<봉산(鳳山) 탈춤>에서 양반과 중을 구슬리는 대목이 민중의 지배층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파워 엘리트들의 조직 단체인 국가에서 주관하여 많은 국가 행사에 공연된, 이른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한 자리에 모여 다 같이 크게 웃어 본 놀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구슬림의 대상이 된 것은 양반과 중이었다. 그들이 놀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놀림을 당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없고 양보했다는 증거가 되며 민중(民衆)의 적(賊)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탈춤이나 들 놀음, 산대놀이에서 양반 대신 상인들을 그처럼 욕하고 때리고 조롱했다면 그런 광대(廣大)들은 큰 변을 당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전통 사회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였는가를 생각해 봄이 마땅하리라 본다.
어떻게 보면 전통 사회의 주인들은 양반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으로 불리는 대중(大衆)들이었다. 양반은 언제나 몸을 삼가고 근신(勤愼)하면서 사회와 국가를 이끄는 기둥 노릇을 했다. 그리고 전통 사회는 남녀(男女), 노소(老小), 빈부(貧富), 귀천(貴賤)이 한데 얼려 정답게 살던 혈연 공동체(血緣共同體)였고 그런 동족 의식, 연대 의식으로 외적(外敵)의 침입을 몰아내며 국가와 사회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동족간에 끊임없는 암투(暗鬪), 역사 소설에 자주 나오는 민중의 포한(抱恨)과 봉기(蜂起), 반목(反目)과 투쟁이 전부였다면 어떻게 전통 사회는 그 오랜 세월을 존속할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민화와 모든 미술품, 예술을 놓고 볼 때 분명히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물질의 빈곤 속에서도 족함을 알고 인생의 행복을 알던 사람들이다.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마음에 그늘이 없고 언제나 밝게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모든 민화는 그처럼 건강하고 명랑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못 먹고, 못 살고, 못 배우고, 벼슬 못해서 한(恨)에 맺혀 살았더라면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고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해도 마음에 없는 웃음과 익살을 민화 속에 심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한(恨)에 맺힌 팔리아치의 웃음이 눈물일 수밖에 없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에서 민중의 시달림을 지울 수 없듯, 누구도 억지로 꾸며서 한국 민화의 명랑한 웃음을 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
|
|
|
|
현세(現世)의 행복만을 추구한 사람들 |
|
|
|
민화에 보이는 바 한국 사람들이 빈궁한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즐거움만을 찾았다는 그 낙천성(樂天性)은 한국 무교(巫敎)의 인생관과 여기에서 비롯된 한국 사람의 낙관주의 사고 방식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국 무교의 본질을 깊이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한국인들은 원시적 유일신 하느님만을 믿고 다른 잡신(雜神)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매우 이지적(理智的)이며 현세 중심적(現世中心的)인 민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보면 한국의 무교에 잡신이 우글거리고 호랑이나 용이나 나무, 바위 등에 마구 절하고 복을 비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무당들의 무가(巫歌), 무경(巫經), 무속화(巫俗畵), 그리고 제례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한국 무교는 오직 인간만을, 인간의 행복만을 찾은 종교며 다른 나라의 미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속화(民俗畵)의 무속화(巫俗畵)나 무속에 관계되는 그림을 보더라도 어디 하나 이상스럽게 생긴 귀신이나 도깨비를 그린 민화가 없다. 산신(山神), 용신(龍神)은 물론 옥황상제(玉皇上帝), 제석 마누라, 모두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호랑이, 용, 거북이, 닭 그런 짐승들이 복을 갖다 주고 액을 막는다고 정말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오랜 습속(習俗)으로 재미와 놀이로 민속에 얽힌 하나의 행사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그림들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는 언제나 민화에 가장 많이 나오는 십장생(十長生)처럼 몸 튼튼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
|
|
|
|
|
민화에 나타나는 무교(巫敎)의 뿌리 |
|
|
|
지극히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한국 민족은 외래 문화의 수용에 언제나 적극적이었으나 무교의 기본 믿음, 생활 자세만은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인 유학이나 불교 문화가 들어오더라도 한국 무속에 휩쓸렸고 유교, 도교, 불교를 받아들이되 무교적(巫敎的)인 사고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민화가 이미 청동기 시대의 암벽화(巖壁畵)로부터 고구려 고분 벽화, 고려, 조선시대 공예품에 나타나는 바 - 화조, 산수, 민속, 교화의 그림들 - 그 중에서도 십장생 계통 그림들에 그대로 이어 오고 끊임없이 반복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마음의 바탕, 그 생활 의식만큼은 긴 세월을 통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 민화의 화조, 산수, 민속, 교화의 모든 종류의 그림들은 우주(宇宙)와 역사(歷史)의 중심인 사람들이 꽃과 새들처럼 행복하게, 자연처럼 순박하고 깨끗하게, 그러면서 십장생 등이 뜻하는 대로 오래오래 건강하고 아들, 딸과 같이 천 년, 만 년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민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미술, 공예품에 새겨져 있는 그림과 무늬들은 불교, 유교, 그리고 속세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도교의 마음이 아니라 바로 무교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내세(來世) 아닌 현세(現世)에서의 수복(壽福)을 지상의 영화로 믿은 한국 사람들의 인생관과 생활 철학은 그대로 생활 풍습에 반영되었다. 그런 풍속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컸다. 정월 초하루, 보름, 단오(端午), 추석 등에 얽힌 각종 민속 행사와 놀이에서 민화가 큰 일을 맡았던 것은 고대 기록에 잘 나와 있고 실제로 민화는 이런 행사를 위해 제작되기도 한 것이다. |
|
|
|
|
|
민화의 사회 윤리사적(社會倫理史的) 기능 |
|
|
|
민화는 한국 사회와 대중들의 행복과 평화 수복강녕(壽福康寧)에 대한 소망과 욕구를 나타내면서 한편으로 모든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을 그러한 마음으로 이끌어 주기도 했다. 동양에서의 그림은 착한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을 경계하기 위한 교육을 위해 생겨난 것이었다. 화조, 산수 그림을 진종일, 아침, 저녁으로 보고 있으면 좋은 음악을 듣는 듯 사람의 마음이 꽃처럼 아름다워지고, 부부간의 사랑이 불로초 먹으며 힘차고 다정하게 어울리는 한 쌍의 사슴처럼 무궁무진하며 사람 마음은 무속화 그림처럼 씩씩하고 용맹스럽게 되었을 것이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는 삼국 시대부터 한국 사회를 지킨 윤리와 도덕의 바탕이었다. '부모를 공경하고[孝], 형제와 이웃이 화목하며[悌],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신의를 존중하고[信], 그것으로 국가 사회를 지탱하는 예악이 확립되고[禮], 언제나 진리와 정의 편에 서며[義], 근면, 검소(儉素), 절제를 미덕으로 알고[廉], 헛된 부귀와 공명을 탐하던지 불의를 범하는 일의 부끄러움을 알라[恥]'하는 도덕률은 모두가 <그림 5>와 같은 <효제도> 병풍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쳤다. 글로 적은 시문학에 대한 존중은 <문방구도>, 또는 <책거리> 그림으로 나타났고, 한국의 이름난 시 구절 또는 중국 시에 붙인 그림들은 예문(藝文)에 대한 민중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볼 때 한국 민화는 대중에게 아름다움을 통한 기쁨과 아울러 무교가 찾아낸 인간 본위, 인간 중심의 우주, 인생관, 그리고 정치 사회를 지킨 윤리 의식의 고조와 예문에 대한 민중의 애경(愛敬)을 심어 주고 북돋아 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원래 아름다움을 찾는 예술과 선을 목표로 한 도덕이 합치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화가 사회의 순화(醇化), 인심의 정화(淨化)를 위한 기능마저 지녔던 것은 오랜 세월을 이어온 생활화, 실용화의 여덕(餘德)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
|
|
|
|
민화는 서민들만의 그림이 아니었다 |
|
|
|
민화를 벽에 붙이고 민화 병풍을 두르고 살던 사람들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집간이나 꾸리고 밥 세끼 제대로 먹어야만 집안에 그림을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 소득이 낮고 주로 1차 산업에 의존했던 전통 사회의 구성원들의 생활이 경제적(經濟的)으로 여유가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대한제국(大韓帝國)> 말까지만 해도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이 기아선상(飢餓線上)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부자는 아니었으나 살만큼은 살았던 시대였다. 더구나 전통 사회에서는 돈 많고 잘 사는 일은 오히려 송구스럽게 생각해서 최고 권력층에 올랐던 사람도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선비가 많았다.
그 참 모습이 어찌 되었건 가난한 서민들이 모두 민화를 사다가 집안에 붙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아무래도 일정 수준 이상 사람들 그림을 붙였을 것이다. 옛날 양반이나 선비들은 어려운 <정통화>만을 좋아하고 민화는 서민 대중이 좋아한 그들의 그림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양반과 선비들, 이른바 귀족들은 민속(民俗)에 얽힌 집 안팎 장식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들도 결혼식 때 민화적인 모란(牡丹) 병풍을 두르지 않고 기운 생동하는 산수 병풍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겸산(兪謙山)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는 '양반 친구 집에서 책거리 병풍 친 것을 새 책을 사다 놓은 줄 알고 놀랐다'는 대목도 보이는데 대체 사대부는 대가 그림만을 좋아하고 민화는 돈도 지위도 없는 대중들이 좋아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오히려 민화는 생활화, 실용화로서 한국인의 생활 공간에서 생활에 반드시 있어야 했던 생활 필수품(生活必需品)으로 모든 한국인의 그림이었다. |
|
|
|
|
|
전통 사회의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大衆文化) |
|
|
|
여기에서 잠시 전통 사회에서의 대중문화와 고급 문화의 관계를 생각하면 먼저 대중문화와 고급 문화의 구분이 뚜렷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확실히 한문으로 된 시와 소설은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 사회 대중들이 한학(漢學)에는 모두 일자무식이었다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서당개도 10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는데 한 평생을 한문으로 된 시(詩), 문(文)을 외는 것을 보고도 대중은 언제까지나 아무 것도 몰랐을까. 서양 한복판에 떨어뜨려 놓아도 5년만 되면 곧잘 그 나라 말을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옛날 대중은 한문 글자는 몰랐을지라도 유명한 시 글귀는 그 뜻을 알고 좋아했을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민중의 예술이라는 판소리, 탈춤 등에 나오는 한문시(漢文詩)들을 어떻게 좋아했단 말인가.
어려운 문자를 척척 외는 광대도 광대려니와 그것을 듣고 웃고 좋아하던 민중들에게 이른바 고급 문화란 완전히 남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시(詩), 서(書), 문학(文學)을 제외한 예술 분야, 그러니까 건축, 조각, 회화, 공예와 같은 조형 미술과 음악, 연극, 무용에 있어서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모두가 대중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이나 고급 문화인이나 똑같이 그 아름다움을 즐겼던 것이다. 대중들은 아악(雅樂), 궁중정재(宮中呈才) 무용,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듣고 보아도 모르고 왕이나 고급 관리는 판소리, 무당춤, 민화를 싫어했는가. 우리는 세종(世宗)이 한국의 대중 음악을 궁중에서 연주하도록 하고 대원군(大院君)이 판소리를 즐기고 최치원(崔致遠)이 민속춤을 노래했다는 등 갖가지 이야기를 알고 있다. 집을 짓고 쇠와 돌을 쪼고 그림을 그리며 환[色]을 치고 소리하며 춤추는 창부(倡夫), 화공(畵工), 석장(石匠), 편수(片手)들은 글자로 된 고급 문화권 밖에서 살았을 망정 실제적으로 고급 예술의 주역들이었으며 그 창조자와 관찰자 사이에 신분의 격차로 인한 괴리(乖離)와 반목(反目)은 없었다고 봄이 타당할 듯싶다.
모든 대중문화를 사대부, 양반들도 좋아했고 고급 문화에 드는 전통 예술을 대중도 그대로 사랑했다는 것은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비단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민중(民衆)과 사대부, 양반 등 지배층(支配層)을 하나로 결속(結束)시켜 주는 동시에 새로운 삶과 진보를 위한 활력소(活力素)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대중 예술에 몸을 담은 장인들은 떳떳하고 보람있게 살아가고 또 그렇게 예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고 민화 한 장 그릴 때도 기쁜 마음으로 모든 정성을 기울여 줄을 긋고 색을 칠했을 것이다.
민화는 평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현세(現世)에서 인간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사람이 우주(宇宙)와 사회(社會)의 중심(中心)으로 믿으면서 모든 예술인들을 존중하던 사회의 한 산물(産物)이었다. |
|
|
|
|
|
|
|
◇ 민화(民畵)의 특징(特徵) |
|
|
|
민화 화가들은 많은 경우 전혀 색다르고 남이 안한 그림을 그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기호(嗜好)와 요구에 따라 몇천 년을 그려 온 화조와 산수, 민속과 교화의 그림을 그렸을 따름이다. 민화의 아름다움을 전통과 역사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처럼 오랜 세월을 통해 수천의 화공(畵工)들이 찾아낸 내용과 양식(樣式)을 따랐다는데 있다.
정통 화가들의 많은 작품은 하나밖에, 한 번 밖에 창조되지 않았다. 같은 화제에 같은 양식의 그림을 두 번 다시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민화의 주제는 언제나 비슷했다. 화조, 산수, 민속, 교화 모든 그림들이 이미 청동기(靑銅器) 시대부터 끊임없이 내려왔던 것이다.
그림의 내용이나 주제 면에서 보면 민화에 나오는 화조, 산수, 교화 그림은 정통화와 불화에 같이 나온다. 같은 사회에서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이 같은 마음에서 산수, 인물, 교화, 화조 그림을 그렸으리라는 점을 의심할 수 없다. 더욱이 민화의 상징처럼 알려진 호랑이, 용, 십장생은 <정통화(正統畵)>, <원화(院畵)>에 모두 나온다.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타이, 티베트 민화에 똑같은 그림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민속화(民俗畵), 그 중에서도 무속에 얽힌 그림들은 민화 쪽이 압도적으로 많고 민화의 본령은 이런 민속에 관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무교(巫敎)에 바탕을 둔 생활 의식에서 생겨난 그림이 민화에 많이 들어 있다. 따라서 주제만을 놓고 민화의 특징을 말할 때 우리는 무교의 특성을 밝히면 되고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이다.
민화 양식의 특징은 순수한 민화와 원화 풍의 민화에 모두 공통되며, 순수한 민화의 특성을 잘 알고 나면 원화에 가까운 민화의 특징을 더 잘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
|
|
|
|
다양한 민화의 소재(素材) |
|
|
|
먼저 '무엇으로 그림을 그렸는가' 하는 소재를 보면 정통화는 대개 장지(壯紙)로 불리는 한국 화선지, 또는 중국에서 수입한 화선지, 그리고 비단에 먹물로 그림을 그리고 옅은 색을 입혔다. 좀 짙은 색을 쓴 그림이 있으나 대부분은 수묵담채(水墨淡彩), 또는 수묵화였다. 원화와 불화는 짙은 물감인 당채(唐彩)로 장지, 또는 베 바탕에 그렸다.
그러나 민화는 멋대로 였다. 원화 풍 민화가 비교적 원화에 가까울 뿐 순수한 민화 풍 그림들은 소재의 변화로 새로운 창조를 모색한 현대 화가들처럼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찾았다. 그림의 크기, 화폭의 모양이 멋대로 이다. 장지에도 그렸으며 창호지에도 그렸다. 중국에서 온 화선지로부터 양지(洋紙)로 불리는 크라프트 지, 모조지, 삼베, 모시, 양사, 비단, 광목, 나무판자, 소재를 가리지 않고 어느 것에나 그리고 바탕이 주는 아름다움을 찾았다. 바탕에도 별별 색을 다 물들였다. 은 물감, 금 물감으로 그리기 위해 마련한 붉은 색, 검정색, 청색, 남색, 녹색, 황색의 비단, 또는 베 바탕이 보인다.
물감도 원화, 불화처럼 특수하게 처리된 광물성의 물감들로부터 화공들이 손수 만든 것으로 보이는 식물성 물감, 서양화에 사용되는 유화용 물감, 그리고 페인트로 그린 그림까지 있다. 붓으로도 그렸으나 손가락으로도 그렸고 가죽붓, 버드나무 가지, 불에 달군 인두 등 멋대로 그렸다. |
|
|
|
|
|
주제는 같아도 같은 민화는 없다 |
|
|
|
구미나 일본 등지의 민화는 대량생산된 작품들이 많다. 일본의 대진회(大津繪)나 니회(泥繪)는 똑같은 크기의 똑같은 모양 그림을 수천 장씩 그린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미술과 공예에는 이 양산(量産)의 흔적이 없다. 그처럼 많이 제작된 도자기, 목기에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의 같은 작품을 찾지 못한다.
이것은 한국 미술의 가장 큰 특징(特徵)의 하나인데, 그처럼 많은 민화의 작품이 되더라도 한국인들은 절대로 꼭 같은 두 개를 만들지 않았다. 수천 년을 되풀이된 호랑이, 화조 그림이 수천 장 우리 앞에 나돌았으나 판에 박은 듯이 같은 두 장의 민화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앞서 말한 바, 민화는 전통과 역사의 아름다움이라는 점에 사실은 이의(異議)가 없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민화에 창조성(創造性)이 모자란 공예적(工藝的)인 그림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증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양식을 이야기하기 전에 또 한가지 덧붙일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른 민화 양식의 변천 문제이다. 한국 민화의 양식이 고구려 벽화 시대와 삼국, 고려, 조선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때 공예품에 나타난 그림 무늬와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그림들을 비교할 때 민화가 가진 사회적(社會的), 종교적(宗敎的)인 이유 때문에도 별로 큰 변화는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국토가 비록 좁고 인구가 그리 많지 않다 하나 우선 대한민국 안에서도 서울, 충청, 전라, 경상, 강원 각도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격이나 예술성이 상당히 다르다. 전라도 반닫이와 강원도 반닫이의 모양이나 서도의 배뱅이굿과 남도의 민요 가락이 다르듯 민화에도 각도의 특성들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따지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반적인 특징만을 들어보겠다. |
|
|
|
|
|
형 상 (形象) |
|
|
|
민화가 다른 그림과 다른 점은 그림 속에 나오는 모든 물건의 형태가 자유스럽다는 점이다. 정통화, 원화, 불화, 그리고 원화 풍 민화의 형태는 전통적 화법과 기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사람, 집, 나무, 산, 바위 등 그림 속에 들어간 모든 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던 법식(法式)을 존중하고 그 테두리를 원칙적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민화들이 어설프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 모양이 일그러지고, 바뀌고, 과장되고, 없어진데서 비롯된다. 실제로 이 세상은 사람 눈에 비치는 대로 딱 규격에 맞는 사실적인 형상으로 된 것은 아니다. 자연을 카메라로 사진 찍듯 옮겨 놓는 것이 그림이 아니라 그림 속에 하나의 새 세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의 멋과 생각으로 좀 비틀어 보기도 하고, 진양조 가락처럼 늘려 보기도 하고, 자진모리, 휘모리처럼 다그쳐 볼 수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회삼경(會三經)』은 세상을 동그라미, 네모꼴, 세모꼴의 집합으로 보았는데 한 폭의 평면 위에 네모꼴로 바위산을 그린 그림이 있고, 포물선, 쌍곡선으로 된 원, 타원으로 산과 나무, 짐승, 새들을 그린 그림이 있다.
아예 형상을 없애 버린 그림도 있다. 민화에는 뾰족한 예각(銳角)이 없다. 막힌 데도 없다. 마치 모든 자연의 물체처럼 너그럽고 둥글둥글한데 이것이 민화의 친화력(親和力), 동화력(同化力)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
|
|
|
|
선 (線) |
|
|
|
대부분의 민화는 정통화와 같이 선(線)으로 된 그림이다. 선으로 형체의 외곽을 그리고 그 안에 색을 칠했다. 그러나 짙은 색으로 경계를 삼아 형상과 형상, 색과 색의 마주침으로 줄을 긋지 않고 그린 작품들이 민속화(民俗畵), 특히 무속화(巫俗畵)에 많다. 선묘(線描) 중심의 동양 화법에서 완전히 탈피한 셈이다.
선(線)을 두르지 않고 물감의 자연스런 번짐으로 형태를 만드는 몰골법(沒骨法)이라든지 바림의 기법, 선 대신 점을 찍기도 하고, 또 어떤 그림들은 산이나 바위의 준법(준法)을 정통화에서 빌어 오기도 했다.
많은 민화의 선은 두툼하고 힘차다. 그러면서도 모난 데가 없으며 부드럽다. 물 흐르듯 미끄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민화의 형상은 원만하다. 뿐더러 민화의 선은 빠르다. 속도와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같은 내용의 그림을 몇십 년 그린 데서 오는 숙련이 단 몇 분 동안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광풍처럼 빠른 속도는 다른 그림에서 찾기 힘들다. |
|
|
|
|
|
색 (色) |
|
|
|
한국 민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그 색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말하고 있다. 민화의 색은 세상을 푸른 색, 붉은 색, 검정색, 흰색, 노란 색의 다섯 가지의 조화와 변화로 본 무교(巫敎)와 오행 사상(五行思想) 등에서 유래했으며 그 변화와 배합(配合), 안분(按分)에는 회화적인 원칙 말고도 철학적인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색깔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고구려 고분 벽화와 어린이, 여인들의 옷 색깔, 색동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민화 중에서도 특히 무속화(巫俗畵)에 이 다섯 가지의 짙은 색깔들이 사용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색상의 대비(對比)와 조화(調和), 균형(均衡)과 비례(比例)가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멋을 부리고 있다.
그림의 한 부분을 특히 돋보이기 위해 보색(補色)과 아울러 반대(反對) 색을 대담하게 사용한 수법 같은 것이 그 예이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흰색을 사랑했고 검정의 아름다움을 알았으며 밝은 색을 좋아했고 빛에 민감하여 밝고 어두운 변화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한 가지 색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식물에서 채취한 물감을 섞기도 했다. 몇 번을 칠하고 또 칠한 경우도 있다.
그들은 대상의 색깔보다 그림 안에서의 색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주관적(主觀的)인 색가(色價)를 더 중요시했다. 다섯 가지 색 중에 어느 색을 주조로 해서 그림을 그리는가를 중요시했다. 흰색, 검정색, 붉은 색, 파란 색, 노란 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그리면서 끝없는 색의 변화를 주고 있다. 방안의 빛을 생각해서 색을 짙게 쓴 경우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색의 빛깔이다. 같은 두 개의 민화가 없듯 같은 두 가지 색이 없다. 같은 붉은 색이지만 천 가지, 만 가지의 변화가 있고, 보면 볼수록 신비스러운 색의 빛깔을 찾아낸 것이다. 허름한 시골 민화로부터 원화 풍 민화에 이르기까지 빛깔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
|
|
|
|
|
구도(構圖), 원근(遠近), 움직임, 소리 |
|
|
|
전통 회화의 기법과 화법에 얽매이지 않는 민화의 구도, 원근은 모두 자유스러웠다. <삼원법(三遠法)>을 알고 있었고 <중앙 투시법(中央透視法)>을 모를 리가 없었으나 그들은 먼저 화폭 안에서의 여러 물체, 형상의 짜임새와 새로운 질서를 더 중요시했다. 진출색(進出色)과 퇴거색(退去色)을 이용한 원근법, 중요한 것을 크게, 그렇지 않은 것을 작게 그리는 법 등 민화에 고유한 원근법도 썼다.
이런 면에서도 한국의 <책거리>는 특별한 그림이다. 그 자체에 특별한 뜻이 없는 수많은 일상 용품들의 집합인 이 그림은 물체들의 형태, 선, 색깔들의 상호 조화와 균형을 위해 포치(布置)한 정물들의 서정시(抒情詩)와 같은 것이다. 사물을 보는 사람의 눈을 한자리에 고정시켜 투시하지 않고 삼차원 공간의 세 개 축 안에서 시점(視點)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소리의 순수한 가락과 장단으로 이루어진 음악처럼 형태와 선, 그리고 색의 리듬과 멜로디의 어울림을 추구한 그림들이다.
중국 그림에도 있는 매우 양식화된 문방도 그림을 이처럼 멋있는 정물화로 승화시킨 사람들은 서툰 민화 화가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뛰어난 도화서의 화원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완벽한 원화 풍 책거리보다 역시 그 형태가 일그러져 가는 민화 풍 책거리가 더 매력적이다.
다양한 구도와 배치를 통해 화폭 안에서의 움직임, 시간의 흐름, 자연의 음악 소리를 내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여백(餘白)이라 부르는 그림 없는 공간을 거기에 그린 물체나 형상보다 더 중요시한 그림이 많다. |
|
|
|
|
|
화 관 (畵觀) |
|
|
|
이런 양식상의 특징은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민화를 그린 화공들이 비록 같은 내용의 그림을 되풀이하여 그리기는 했으나 언제나 다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장인들은 어떤 마음에서 그런 특색 있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지 몰라도 한 평생의 생활과 수천 년의 민화쟁이의 전통에 따라 몸과 뼈를 깎는 노력만은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허드레 그림 같은 민화 속에도 그들의 피와 평생을 쏟아 넣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민화를 그린 화공들이 비록 한국 화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작품 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세계 그 어떤 민화와 다른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나온 민화의 특징(特徵)이나 뒤에 나올 매력(魅力)은 모두 민화 장인들이 몸으로 터득한 예술관(藝術觀), 회화 이론(繪畵理論), 기법 원리(技法原理)에 바탕을 두었으며 그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남을 모방하거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다. 아무리 같은 주제 그림을 그리더라도 새롭고 색다르게 그려야 한다. 기술이 전부는 아니지만 먼저 최고의 기술을 지니도록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림은 먼저 아름다워야 한다. 흥이 나고 신이 올라야 진짜 멋있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 그리는 것을 보는 사람과 함께 즉흥의 예술로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물체의 환상에 구애되지 않고 형상이 없더라도 그림 안에서의 음악성은 더 높아져야 한다.……
민화 화공들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많은 좋은 민화는 '이렇게 우리는 작품을 했노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
|
|
|
|
|
◇ 민화(民畵)의 매력(魅力) |
|
|
|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민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학자, 예술인, 미술 평론가, 실업인, 학생, 주부 등 수많은 사람들이 민화를 사랑하고 또 집에 걸어 놓고 있다. 외국인 중에도 한국 민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이 민화를 좋아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용이나 양식을 넘어선 특별한 매력(魅力)은 어디에서 오는가. |
|
|
|
|
|
쉽고 간단해서 좋다 |
|
|
|
민화는 어렵고 복잡한 그림이 아니다.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며느리 누구나 집안에서 그저 보고 좋아하던 그림이었다. 그 속에 심각한 철학(哲學)이 깃 들어 있지도 않았고 남들이 모르는 어려운 이야기도 없었다. 고상한 것, 훌륭한 것, 심오한 것이 없었다. <정통화>가 가슴속에 넘치는 예술의 시적(詩的) 감흥(感興)을 거르고 걸러서 조화에 이르고 조화에 참여하고자 한데 반하여, 민화는 깊이 생각하고 거를 필요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나타냈다. 민화 그림쟁이는 유식한 말도, 깊이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민화의 이야기 치고 어려운 것이 없다. 집안 식구들과 어울려 밥 먹고 이야기하며 가끔 보는, 아니 보지 않더라도 그런 사랑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가벼운 무드 음악 같다. 쉬우니까 부담이 없어진다. 복잡한 세상에 어렵고 딱딱한 교훈을 강요한다면 머리가 무거워진다. 벽이나 병풍에 어렵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그림들이 걸렸다면 집안 문 위는 묵직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려워서 좋을 까닭이 없다. 이 세상 이치도 쉽고 간단해야 알 수 있다고 『주역(周易)』은 말한다. 쉽고 가벼운 이야기, 세상 만사를 모두 잊어버리고 옛날 할머니, 어린애들처럼 웃으며 보고 살 수 있는 그림 이야기가 있어 더욱 좋다. |
|
|
|
|
|
솔직해서 좋다 |
|
|
|
민화에는 허세가 없고 가식이 없다. 있는 그대로 생각한 그대로를 직선적(直線的)으로 표현한다. 애써 기교를 부리지 않고 굳이 남의 눈에 잘 보이고자 꾸미지 않는다. 그래서 민화는 건강하다. 순수하고 시골 처녀처럼 순정(純情)이 넘친다. 민화의 서툰 솜씨도 여기서 온 것이다. 투박하고, 거칠고, 모자라고, 바보 같은, 그리고 어린애처럼 유치(幼稚)한 그림으로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말 어린애처럼 천진스럽고 억지가 없고 자연스럽다. 솔직하게 애써 꾸미지 않으니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연은 원래 꾸미지 않고 저절로 되는 법이다.
완벽, 완전, 우미(優美)하면 자연스럽지 않다. 기교를 부리면 자연과 멀어진다. 한국 미술과 한국 민화의 특징은 서투른 솜씨에 있다. 완전하고 정교하기로는 중국의 미술, 공예품만큼 철저한 작품들이 없다. 깨끗하고 세련된 점에서 보자면 단연 일본 작품들이다. 그러나 자연스런 맛은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
불완전, 미완성, 조잡한 것이 자연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한 장인들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민화에 그대로 나타난다 |
|
|
|
|
|
익살이 있어 좋다 |
|
|
|
한국인은 낙천적(樂天的)인 사람들이다. 민화의 웃음이 전통 사회의 한국 사람들과 민화를 그린 쟁이들이 모두 잘 살아 그렇게 명랑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려운 살림과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언제나 웃음을 웃고, 남을 위해 웃어 준 그런 낙천성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민화의 웃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재미있게 살고자 했다. 웃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웃을 뿐 아니라 민화를 보고 미술품을 보고, 예술을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예술인들은 모든 작품과 예술 활동 속에 잔잔한 웃음을 주는 익살을 집어넣었다. 민화의 일그러진 현상, 알록달록한 색깔, 투박한 선으로 강조하고 싶은 곳을 과장해 보고, 없어도 될 만한 것은 되도록 많이 생략했다. 재미있는 호랑이, 닭, 잉어를 그려서 보는 사람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이런 해학(諧謔)은 짐승 그림뿐 아니라 민속화(民俗畵), 산수, 화조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
|
|
|
|
|
꿈이 있어 좋다 |
|
|
|
민화는 꿈속처럼 아름답다. 어둡고, 차갑고, 추하고, 악한 것은 모두 민화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다. 곱고, 착하고, 순결하고, 너그럽고, 무던한 그런 미덕(美德)만을 민화는 찾고 그렸다. 붓대를 잡고 종이 위에 줄을 긋고 물감을 칠하여 장인들은 아름다운 꿈속에 젖어 있었다. 사람들이 세상을 한바탕의 큰 꿈이라고 할 때, 그것을 허망한 꿈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으로 들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꿈을 꾸듯, 예술의 여신이 보여주는 환상(幻想)과 환각(幻覺)과 환희(幻戱)의 꿈속에서 그들은 민화를 그렸을 것이다.
나비를 그리면 꿈속에서 일찍 장주(莊周)가 보았던 그 나비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를 분간 못하는 나비를 그렸다. 암수의 사이가 가장 좋다는 원앙새, 항시 떨어지지 못한다는 장끼와 까투리, 봉(鳳)과 황(凰)을 그리면서 그들은 전생(前生)에 오동나무 아래 뜰 앞 모란꽃 핀 동산, 연꽃 핀 연못가에서 바로 그들이 그렇게 사랑을 나누었던 꿈을 꾸었으리라.
세상이 어둡고 괴로워서 꿈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환각 속에서 찾으려 해서 꿈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바로 꿈이었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사람만이 예술을 할 수 있으며, 예술은 인생처럼 꿈이기 때문이었다. |
|
|
|
|
|
믿음이 있어 좋다 |
|
|
|
민화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장인들의 예술에 대한 믿음이 있다. 되풀이 말한 대로 한국 무교(巫敎)의 중심은 사람과 사람의 행복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모든 복락(福樂)을 누리며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랬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이 한 세상을 재미있고 즐겁게 살자는 것은 모든 한국 사람과 무교의 기본적인 믿음의 자세였다. 내세(來世)를 믿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잘 못 살더라도 내세에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이 세상은 그러니까 사람이 그 속에 있고 사람의 훈김이 서려야만 존재(存在)의 뜻이 있었다. 화조, 산수, 민속, 교화 어떤 그림을 그리든 나, 너, 우리, 우리 집 식구들, 친구, 동네 사람들이 그 속에 꼭 있어야 하고 그 모습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입김이 있어야 했다.
꽃과 새들을 그리면서 반드시 남과 여의 사랑을 염원하고 닭과 병아리들, 독수리와 새끼들을 그리면서 집안에 둔 아들, 딸에 대한 애정을 다짐했다. 산수화에 되도록 이면 사람을 그려 넣었다.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 한국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장면도 그렸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모든 사물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책거리 그림에서조차 사람의 체온을 느끼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민화는 사람에 대한 쟁이들의 신앙 고백과 같으며, 이런 믿음은 모든 민화의 바닥에 깔려 있다.
사람에 대한 믿음 못지 않게 예술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일찍이 최북(崔北)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했던 이항복(李恒福)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저런 무리들은 제 재주만 믿고 거만하다'고 투덜댄 일이 있었다. 쟁이들이 그 많은 민화를 줄기차게 그린 것은 한국 사람의 여망과 성원, 아울러 예술에 대한 그들의 굽힐 줄 모르는 믿음에 감복(感服)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
|
|
|
|
따뜻해서 좋다 |
|
|
|
어느 민화고 몸서리치고 가슴이 섬뜩해지는 그림은 없다. 한 두 개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모두가 따뜻하고 훈훈한 인정이 넘친다. 이것은 비단 민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그림과 미술, 공예에 공통되는 두드러진 특징이며 매력이다.
이 따뜻함은 한국 사람들과 예술에 몸을 담은 쟁이들의 따뜻한 마음에서 온 것이다. 한국인은 남에게 친절하고 곧잘 정을 쏟는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남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현세에서의 사람의 행복이 모두 친구, 이웃, 외국 사람과 함께 어울려 즐겁게 사는데 있다는 믿음과 선천적(先天的)인 본능에서 왔다. 어떤 외국인은 한국 사람의 이런 인정(人情), 인간애(人間愛), 동족애(同族愛), 외국인을 사랑하는 인류애(人類愛)를 자기 희생적, 자살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한국 민화 호랑이는 사납지 않다. 독수리는 닭보다 더 순하고 무서운 용이 없다. 물고기들에게는 따뜻한 어정(魚情)이 있다.
민속과 무속화에 징그러운 도깨비, 요사스런 귀신이 없다. 모두가 다 우리처럼 생긴 마음씨 좋은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구수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인정과 사랑에서 온 아름다움일 것이다. |
|
|
|
|
|
조용해서 좋다 |
|
|
|
한국의 예술은 매우 강한 예술이다. 끊임없는 외적(外敵)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을 지킨 민족의 강하고 끈질긴 의지가 그 거칠고 투박한 형태, 두툼한 선, 짙은 색깔로 나타난 다이나믹한 예술이다. 민화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집도 그렇고 불상도 그렇고 <정통화>도 그렇다. 모든 공예품에 강한 힘이 스며 있다.
그러나 쟁이들은 강하고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감쌀 줄 알았다. 단단하기만 하면 부러지기 쉽다. 끝내는 꺾이고 만다. 그것만으로는 멋이 없고 아름답지 못하다. 그래서 먼저 이 조용함과 평화를 찾았다. 뜨거운 가슴의 설렘을 차분하게 식히면서 고요하고 잔잔한 평화를 찾았다. 모든 민화는 평화스럽고 그래서 행복한 것이다. |
|
|
|
|
|
자랑하지 않아서 좋다 |
|
|
|
민화에는 자기 주장이 없다. 내노라고 나서지도 않으며 잘난 체, 젠 체 하지 않는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니 누구와 다투거나 남에게 욕을 먹을 리 없다. 시기할 사람도 없다. 그래서 누구와도 잘 어울린다.
전통 사회의 대가(大家) 집, 부자(富者) 집, 중인(中人)의 집, 천민(賤民)의 집, 관아(官衙), 역사(驛舍), 시골 주막집, 벽에 붙였던 민화들이 서양 집 리빙 룸, 현대 미술관 정문, 중국 요리점 현관, 호텔 사방에 붙여 놓아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까닭은 누구와도 동화(同化)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고 솔직하니 잘난 체 할 것도 없고 요란하게 떠들지도 못할 것이다. 알고도 모르는 척, 그래서 민화 부스러기는 한 쪽 구석에 박아 놓아도 말이 없다. 거기 그대로 있다. 하지만 그걸 내다 어느 대가의 그림 옆에 붙여도 꿇리지 않는다. 서양의 현대 추상화나 비구상 조각 곁에 두어도 좋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의젓하게 대화를 나눈다. |
|
|
|
|
|
멋이 있어 좋다 |
|
|
|
멋은 한국인의 미의식(美意識)과 행위의 바탕이다. 누구나 멋있게 살고 멋있는 옷을 입고 멋진 일을 하고 싶어한다. 멋있는 정치를 바라고 멋있는 경제 행위가 요망되고 멋있는 사람을 기다린다.
앞서 나온 한국 민화, 한국 미술의 특성(特性)과 매력(魅力)을 모두 합친 것을 멋으로 규정해도 좋다. 거기에 좀 더 보탤 말이 몇 개 있다.
먼저 자유를 들고 싶다. 화법(畵法)이나 기교(技巧)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마음과 기분 내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예술을 하는 자세이다. 자유(自由)와 즉흥(卽興)은 참다운 멋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하는 예술을 뜻하지 않는다. 화법을 넘어서는 마음의 법을 따라야 하는데, 이 법은 오랜 수련과 노력을 통해서만 몸으로 배울 수 있는 보통 화법보다 더 엄격하고 까다롭고 어려운 법이다. 법 없는 멋은 참 멋이 아니고 좋은 음악의 흐름과 같은 조화(調和) - 화음(和音), 선율(旋律), 리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울림과도 같은 뜻이며 어쩌면 민화와 한국 예술의 알맞음은 멋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알맞은 크기, 알맞은 형태, 색, 선, 분명히 이 모든 알맞음의 총화(總和)가 멋으로 이어진다.
멋없이 크고, 어울리지 않게 작고,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잔재주 부리는 멋은 멋이 아니다. 알맞은 크기의 집, 거기에 알맞은 모양의 조각, 그리고 알맞은 그림들, 이것이 참 멋이며 민화에는 이런 멋이 있다. |
|
|
|
|
|
깨달음이 있어 좋다 |
|
|
|
민화 그린 장인들은 세속적인 학문을 잘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글을 모르고 책을 못 읽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어느 기준으로 보면 인격도 없고 교양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붓과 물감과 종이뿐이었다.
글자와 책만을 참다운 지식과 인격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외운다고 해도 그런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한 푼의 도움도 되지 못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책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으나 책이나 글 말고도 밭가는 농부는 밭갈이에서, 방아 찧는 사람은 방아만을 찧어서도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참다운 이치(理致)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옛날 도편수(都片手), 집을 짓는 최고의 건축 기술자는 집만을 평생 지어도 장관 못지 않은 인품(人品)과 지견(知見)을 갖게 되고 한 평생을 도자기만 굽는 도공들도 어느 철인 못지 않게 인생을 달관할 수 있었다.
모든 기교와 재주를 떠나고 잘 그려보겠다는 생각과 남에게 아첨하는 자세를 버린 채, 아무런 생각 없이, 생각을 하지 않는 그런 인생 최고의 경지에 이른 민화를 그린 화공들이 있었고 이런 그림을 알아보고 사랑하던 옛날 많은 한국 사람들의 눈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어떻게 한국의 화공들은 도공(陶工)이 아무런 잡념 없이 그가 구운 그릇 위에 그림을 그리듯, 그토록 무심(無心),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주(無住), 무애(無碍), 무(無)의 그림을 그렸던가, 그리고 이런 그림들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랑했던가. 한국 민화가 찾아낸 최고의 경지는 바로 이런 깨달음의 그림이며, 그런 깨달음은 모든 좋은 민화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
|
|
|
|
|
그리고 신바람이 좋다 |
|
|
|
민화는 즉흥(卽興)과 재주의 그림이다. 술에 취하고 예술에 도취되어 흥이 오르고 신바람이 나서 모든 보는 사람 앞에서 단숨에 줄을 내리긋고 올려치고, 물감을 미친 듯이 칠하는 쟁이들의 그림이 민화다. 그것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그림 그리는 장인뿐만 아니라 그 곁에서 자신만만한 뛰어난 솜씨를 보며 '얼쑤 좋다, 잘한다, 기막히다' 고 감탄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과 함께 예술을 하는 행동의 그림이었다. 미리 '무엇을 그릴까'를 생각하지 않고 손이 먼저 가고, 물감이 먼저 떨어지는 충동의 그림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예술처럼 즉흥의 멋이 넘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광화사(狂畵師)들이었다. 미친 사람들이었다. 예술에 홀리고 그림에 미쳐 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점잔을 빼고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공자(孔子), 맹자(孟子) 외듯 하는 것이 아닐 테니 그림을 그릴 바에야 어린애 장난처럼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종이 위에 사람 얼굴, 꽃, 새, 산, 나무 모양을 만들고 좋아하자면 그처럼 미쳐야 되지 않았을까. 이왕 그림 그리는 놀이의 광대 노릇을 하자면 그렇게 신바람 나게 해야 할 것 아닌가. 깨달음이고 뭐고, 익살이고, 사랑이고, 꿈이고, 믿음이고, 그런 저런 구질구질한 이야기 다 걷어치우고 얼근하게 취해서 신바람 나게 그림 그린 환장이 정신이 잘 나타나 있어 민화는 좋다. |
|
|
|
|
|
민화(民畵)의 예술성(藝術性)에 관하여 |
|
|
|
보면 볼수록 민화는 사랑스럽다. 한국의 모든 미술품이 그렇듯이 처음 보기에는 어수룩하고 변변치 못하나 마주 앉아 서로 이야기 나누다 보면 곧 더없이 다정한 친구가 된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마음이 통하고 날이 갈수록 더 가까워진다.
왜 그런지를 캐 보려고 그 종류(種類)를 나누고 특징(特徵)을 밝히고 매력(魅力)을 풀어 보아 이렇게 말과 글로 적어 보았으나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으면서 또 엉뚱한 말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복잡하고 너절한 글로 민화의 참 맛과 멋을 해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생각하면 누구도 한국 민화의 모든 것을 글과 책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글과 그림의 세계가 다르며 말과 글의 한계(限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과 글보다는 여기 한 장의 민화가, 아니 민화를 인쇄한 사진이 민화의 모든 진실을 말해 주는 듯하다. <민화(民畵)>란 딱딱한 말이나 복잡한 글과는 인연이 먼 물건이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그러나 모든 한국인은 책을 거치지 않고 인생과 자연의 진실을 추구한 도(道)와 선(禪)의 예술 <정통화(正統畵)>를 사랑한다. 글을 읽지 않고도 사람이 예술을 통해 미칠 수 있는 최고, 최상의 경지를 찾아낸 조선 <불화(佛畵)>를 좋아한다. 말로 구차스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전통과 화법의 테두리 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찾은 도화서 <원화(院畵)>를 아낀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몸에서 몸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한국인의 모든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민화의 멋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속에 묻혀 버릴 줄을 안다.
민화가 서양 미술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를 때 창조적인 회화가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동양 미학(美學)의 관점에서 살필 때 화론(畵論)이나 화법(畵法)에 어긋나며 맞을 수도 없음을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통념이나 도식적(圖式的)인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예와, 미술, 기술과 창조의 모든 대립과 구분을 뛰어넘는 절대의 경지에 참(參)하여 새로운 예술로서의 공예, 새로운 조형 미술로서의 한국 민화를 정의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동양과 서양, 한국과 극동 미술, 한국 미술의 독자성에 생각이 미칠 때 더욱 그렇다. 서투른 말로나마 늘어놓았던 그 모든 특징(特徵)과 매력(魅力), 양식(樣式)과 내용을 종합하면서 '한국 민화 속에 이만한 것이 들어 있다면 예술품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미술과 창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고 물어 보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말의 결론을 위해 다시 한번 <민화(民畵)>는 이름 모르는 화공(畵工)들이 집 안팎의 장식(粧飾)과 풍속(風俗) 때문에 그림을 좋아하던 모든 한국 사람들을 위해 그려 준 화조(花鳥), 산수(山水), 민속(民俗), 교화(敎化)의 그림으로 한국인의 마음과 믿음이 가장 직접적(直接的)으로 솔직하게 드러난 그림이다. 웅장한 원화 풍의 민화와 소박한 순수 민화는 양식(樣式)의 차이(差異)는 있으나 다같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말로는 이를 설명하지 못할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다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