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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시와징후(PS) 2023 겨울호, 신작시 리뷰
詩, 삶과 사랑의 통점(痛點)에서 피어나는 꽃
김필영 (시인 / 평론가)
많은 경전은 자연계의 생물과 무생물에게 유한적 존재로서 언젠가는 소멸해 가는 멸성의 존재임을 인정한다. 소멸과 상실이 자연계의 보편적인 순환작용으로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유한한 인간이 멸성임을 직간접적으로 신체적, 감정적, 영적의 아픔을 체험적으로 겪게 되는 것은 생의 주기율처럼 바꿀 수 없다.
예술적 표현의 극점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유한적 존재자로서 대상의 삶과 소멸의 통점(痛點)에서 사유된 작품일수록 감동 깊고 가치가 있다. 생명의 태동에도 고통이 있고, 소멸에도 피할 수 없는 아픔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통점(痛點)은 그 주체가 실질적으로 아픔을 겪는 상황과 동일한 체험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대상을 관조하고 아프게 느껴지는 통점에서 예술은 공감을 일으키게 되며, 문학에서 詩 역시 그렇게 사유된 작품이 완성도가 높다.
통권 5호를 향해 걸어가는 『계간 P.S 시와징후』겨울호 ‘신작시’ 작품에서 “생의 통점(痛點)에서 피어나는 사유”라는 범주에서 사적 편견을 초월하기 위해 편집된 순서대로 읽혀지는 시 위주로 다시 들여다보는 기쁨을 누려 본다.
귀뚜라미가 울어젖힐 땐 24도래요 그늘의 도래지가 곧 추위의 슬하에
잠긴다는 걸 안다는 거죠 겨울을 혼자 나지 않으려고 목청을 밝히는 거라
나요? 그래야 적막한 벌판에서 더 헐벗은 이들이 하나 둘 짝을 찾아 모인다
는 말이죠
밤이면 풍향이 바뀌어 달이 뜨는 집이었어요 골목의 가로등이 깨진 뒤
였던가요 아부지가 작고하시자 팔 한 짝이 없어진 것 같아요. 엄니까지 소
천하시니 귀뚜라미가 울어요 하루 종일 먹먹하여 생면부지의 몸으로 세든
다는 말이죠
울음의 도수를 찾는다면 귀뚜라미도 따뜻한 물결로 휘돌지 않을까요?
- 강희안 「귀뚜라미 보일러」 전문
위 시에 등장하는 「귀뚜라미 보일러」는 산업문명이 세상을 점령하고 등장한 온수제조장치 즉, 생활용수를 데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난방보일러 상품명과 같다.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특정상품의 홍보를 위해 이 시를 쓰지 않았음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첫 연 도입부에 귀뚜라미가 울 때 지상의 온도를 24도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상식일 수 있으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상식을 천진하게 차용하여 서술하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귀뚜라미는 20c' ~ 28c' 온도를 가장 좋아한다고 알려졌는데 화자는 그 중간 온도를 적시한 셈이니 시의 표현에서 과학상식의 차용도 정확한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간의 묘사들은 “귀뚜라미”가 되어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주장인바, “귀뚜라미가 우는 이유”로서 “겨울을 혼자 나지 않으려고 목청을 밝히는”것이라는 천연덕스러운 능청과 이어지는 표현에서 “그래야 적막한 벌판에서 더 헐벗은 이들이 하나 둘 짝을 찾아 모인다”는 주장을 통해 화자는 자신의 외로움을 귀뚜라미를 통해 은유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2연을 통해 화자가 그려준 풍경은 우리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통점과 중첩된다. 1연의 귀뚜라미를 차유한 외로움의 온도보다 차갑고 아픈 과거로 장면이 옮겨진다. 이제 통점의 실체를 밝히지 않으면 시는 완성될 수 없다. “밤이면 풍향이 바뀌어 달이 뜨는 집” 분명 귀뚜라미 보일러도 없이 차가운 방에 살던 달동네 그 시절, 산비탈 비좁은 골목, “가로등이 깨진 뒤였던가요 아부지가 작고하시자 팔 한 짝이 없어진 것 같아요.”라는 행간에서 부나 명예나 권력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엄니까지 소천하시니 귀뚜라미가 울어요”라는 행간에서 정작 우리에게 살아 있게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시의 결구는 “귀뚜라미 울음”을 승화시켜 “울음의 도수를 찾는다면 귀뚜라미도 따뜻한 물결로 휘돌지 않을까요?” 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그 답을 독자 각자에게 돌려놓았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존재의 상실이 얼마나 우리를 평생토록 아리게 하는지, 우리를 포함한 화자가 피할 수 없었던 그 통점을 상기시켜 줌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방의 구들을 훈훈하게 데워준다.
저녁노을을 보려고 서녘으로 난 창이 넓은 필자의 서재 밖 발코니에도 귀뚜라미보일러가 있다. 서늘한 가을부터 엄동설한 내내 수년을 귀뚜라미 보일러로 온돌을 데워 등을 달구면서도 어찌 그리 무심했을까. 이 시를 읽는 내내 참 부끄러웠다.
사랑초가 죽었다
스무 해 가까운 목숨이었다
신혼집 베란다 작은 화분에
미신처럼 엄마가 몰래 묻어두고 간
사랑 한 뿌리
찬기가 오면 거실에 들였다가
경칩 지나면 볕 좋은 곳에 내어 놓았다
꽃이 먼저 오고 이듬해에 큰아이가 왔다
입하 못 미쳐 엄마가 죽었는데
빈손이었다
그때부터 이 집의 겨울엔
안으로 들여야 할 생각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미처 들이지 못한 것들은
집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잊혀졌다
꽃기린 무늬벤자민 군자란
당신을 기억하는 목숨들은 다 데려가고
잊어가는 사람들만 여기 남아서
상한 속에 생각을 들였다 내놓으면
아이는 한 뼘씩 키가 자랐다
- 권상진 「사랑초」 전문
위 시, 권상진 시인의 「사랑초」는 “사랑초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시향이 행이 진행될수록 점진적으로 깊어지는 권시인의 다른 시에 비해 한칼에 여린 사랑초가 베인 것처럼 섬뜩하다. 사랑초의 식물적 생태에 대한 표현은 생략되었고 긴박하게 사랑초의 생육일지와 같은 통점이 전개되고 있다.
화자가 기르던 사랑초는 다년생 화초이나 겨울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곳에서는 밖에서 겨울을 날 수 없다. 다섯 개 작고 여린 꽃잎을 지닌 사랑초는 종류와 색상이 다양다. “스무 해 가까운 목숨이었다”는 표현에서 사랑초는 꽤나 긴 기간 화자의 돌봄을 받았던 것 같다.
신혼의 단꿈으로 여념이 없었을 시인이 ‘스무해’나 사랑초를 길러온 것은 어떤 의지가 작용되었을까? 이어지는 행에서 “신혼집 베란다 작은 화분에/ 미신처럼 엄마가 몰래 묻어두고 간/ 사랑 한 뿌리”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아들 몰래 사랑초를 묻어두셨다는 것을 알게 된 화자는 “찬기가 오면 거실에 들였다가/ 경칩 지나면 볕 좋은 곳에 내어 놓”으며 사랑초를 가꾸는 일상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의 신혼생활이 사랑에 기초를 두고 살기를 기원한 어머니. “꽃이 먼저 오고 이듬해에 큰아이가 왔다”는 표현에서 사랑초를 심어둔 어머니의 바람은 이뤄졌지만 “입하 못 미쳐 엄마가 죽었는데/ 빈손이었다”는 표현에서 아들에게 각인된 ‘엄마’라는 존재의 상실에 대한 충격에서부터 화자의 통점은 진동하게 된다. 아들이 엄마를 잃고 살아갈 수 있을까? 큰아이가 왔다는 말엔 작은 아이가 태어났음이 생략된 말이니, 밥값이 안되는 시를 쓰며 두 아이를 양육해야 했던 아들은 “그때부터 이 집의 겨울엔/ 안으로 들여야 할 생각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미처 들이지 못한 것들은/ 집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잊혀졌다”. 추운 겨울 “미처 들이지 못한 생각”이라는 화자의 회한과 통점 속에는 ‘사랑초’뿐만 아니라, ‘엄마’라는 상실의 존재가 떨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실제 권시인이 SNS에 올린 사진의 베란다 풍경을 우연히 본 기억이 있다. 그 베란다엔 행간에 표현된 모습 그대로 “꽃기린 무늬벤자민 군자란” 등이 사랑초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화사한 핑크빛 사랑초는 씩씩하고 체구가 큰 화초들 틈에서 뿌리가 새끼를 쳐서 늘어났으나 미처 돌보지 못한 사이 가느다란 줄기에 가녀린 꽃잎들이 흐드러져 있었음을 기억한다. 이제 사랑초가 죽게 된 경위, 아니 잃어버리게 된 변명을 들어보자. 화자의 고백 그대로 “그때부터 이 집의 겨울엔/ 안으로 들여야 할 생각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미처 들이지 못한 것들은/ 집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잊혀졌다”는 표현에서 꽃들은 점점 사라져 갔고, “꽃기린 무늬벤자민 군자란/ 당신을 기억하는 목숨들은 다 데려”갔다는 표현에서 지금은 아무 화초도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시는 마지막 행간에 “상한 속에 생각을 들였다 내놓으면/ 아이는 한 뼘씩 키가 자랐다”는 고백으로 마쳐진다. 생략된 행간에 못다한 말은 무엇일까? 그 고백 속엔 한 뼘씩 키가 자란 아이가 ‘사랑초’를 묻어 참사랑을 가르쳐주신 엄마의 선물이었음을, 잠시 잠시 엄마를 생각지 못했던 상한 속의 아픔 속에 길러낸 내리사랑이라고 둘러대기엔 너무도 미안한 존재 내 엄마, 사랑초처럼 죽어 지금은 소멸해버린 “엄마”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랑초보다 아픈 통점이라는 것을 차마 쓰지 못하고 생략하였다.
먹구름이 몰려 있는 왼쪽은
내 몸의 병력서病歷書
젖은 목록은 곳곳에 얼룩으로 남아있다
아찔한 계단에서 미끄러진 순간
오른쪽은 잽싸게 빠져나가고
굼뜬 왼쪽이 나를 받아 안았다
얼굴에 칼자국 깊은 괴한과 마주친 외진 산길
구사일생도 왼쪽이 감당했다
두려움과 부딛힌 그날의 파열음을
왼쪽이 꺼내 읽는다
뼛속에 기록된 묵은 기억이 밤새 욱신거린다
오른쪽 보조補助인 왼팔
어머니가 나의 오른팔이었듯, 오른팔의 오른팔인 왼팔
바지에 한쪽 다리를 꿸 때도
윗도리에 팔을 끼울 때도 멀쩡한 오른쪽이 앞서고
왼쪽은 거들다가 번번이 순서를 놓친다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닭싸움
한때는 회사 대표로
유치원 봄소풍 학부모 닭싸움도
끝까지 버틴 왼쪽 다리가 큰 덩치들을 다 넘어뜨렸는데
왜 왼쪽은 오른쪽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다급한 몸을 받아준
착한 왼쪽을 끙끙 앓는다
- 마경덕 「착한 왼쪽」 전문
위 시, 마경덕 시인의「착한 왼쪽」 은신체의 좌우편 중 왼편에 대한 체험적 소회를 사유하여 詩의 행간으로 소환하고 있다. “먹구름이 몰려 있는 왼쪽은/ 내 몸의 병력서病歷書/ 젖은 목록은 곳곳에 얼룩으로 남아있다”는 고백에서 느낄 수 있듯, 너무나 ‘착해빠진 왼쪽’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은 평생 화자의 삶과 더불어 동행한 한 몸이다. 생의 여정에 함께하는 동안 고행과 아픔을 참아내며 공존하다가 화자의 몸에 젖은 통점으로 기억의 곡간에 이력을 쌓으며 걸어오다가 시인인 동반자의 배려로 이 시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셈이다.
2행부터 열거되는 “착한 왼쪽”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찔한 계단에서 미끄러진 순간/ 오른쪽은 잽싸게 빠져나가고/ 굼뜬 왼쪽이 나를 받아 안았다”는 고백은 몇 번인지 횟수는 생략되어 있지만 실제 계단에서 낙상했을 때의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삶의 여정에서 정상적 행로에서 미끄러지는 일로 힘겨운 고비를 맞았을 때 고난을 극복해 가며 오르내렸던 여정 속 여러 계단일 수 있다. 아무튼 미끄러지는 일은 심신 모두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인데 그때마다 “굼뜬 왼쪽이 나를 받아 안”아 주었으니, 왼쪽에게 얼마나 고마웠으랴. ‘굼뜬’이란 말은 매우 느리다는 말인바, 왼쪽의 느림은 민첩하지 못한 화자를 기다려 준 셈이 되곤 한 것 같다. 몸이 따라올 때까지 일정한 위치에서 기다려 준다는 것, 공감이 가는 굼뜸의 미학이다.
낯선 곳의 밤길이나 외진 산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맹수보다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화자도 외진 산길에서 “얼굴에 칼자국 깊은 괴한과 마주친” 적이 있었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으랴, 이때 그곳을 목숨줄을 붙들고 탈출해야 했던 “구사일생도 왼쪽이 감당했다.”고 알려주니 왼쪽은 희생적 구원자였던 셈이다. “두려움과 부딪힌 그날의 파열음을” 신체 모든 기관보다 그 상황을 감당했던 ‘왼쪽’은 잊지 못하고 있어 꺼내 읽으면 “뼛속에 기록된 묵은 기억이 밤새 욱신거린다.” 이렇듯 왼쪽은 화자에게 평생을 굼뜬 기다림으로 생명을 지켜준 자아 속 동반자였다.
필시 화자는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오른쪽 손을 주로 사용하였던 것 같다. 팔을 사용하는 행동에 오른팔이 먼저 나설 때, 항상 “오른쪽 보조補助인 왼팔”이 있었다. 오른팔 입장에서 보면 거리낌 없이 으레 의지할 수 있었으니, “어머니가 나의 오른팔이었듯, 오른팔의 오른팔인 왼팔”이란 말이 맞겠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 삶을 반추해 왼쪽에 대한 회상을 해보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바지에 한쪽 다리를 꿸 때도/ 윗도리에 팔을 끼울 때도 멀쩡한 오른쪽이 앞서고/ 왼쪽은 거들다가 번번이 순서를 놓”쳤었다. 심지어 “유치원 봄소풍 학부모 닭싸움도/ 끝까지 버틴 왼쪽 다리가 큰 덩치들을 다 넘어뜨렸”을 만큼 “왼쪽의 존재” 생애를 통틀어 함께 해준 고마운 존재였다.
시의 결구에서 “왜 왼쪽은 오른쪽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표현은 왼쪽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온 아린 통점을 에둘러 표현한 변명이다. 왼쪽이 오른쪽에게 삶의 모든 시기, 모든 장소, 모든 상황, 온 삶을 통해 오른쪽, 아니 화자의 생애에 그림자보다 가깝게 영혼과 밀착해서 도왔음을 새삼 돌이켜보니 왼쪽에게 한량없이 미안한 것이다.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고 치면 왼쪽은 주인공 곁에서 열연한 ‘빼어난 조연’이랄까, 영화의 주인공이 돋보일 수 있도록 받쳐주고, 스토리가 지루하지 않도록 양념 역할을 구성지게 함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작품 속에 없어서는 안 될 빛나는 연기를 한 셈이 아닌가? 그러나 인생이란 영화 같을 뿐, 영화가 아니니 대종상 최우수조연상 감인 왼쪽에게 상을 줄 수 없고, 왼쪽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생의 모든 고난의 때마다 “다급한 몸을 받아준/ 착한 왼쪽”에게 서러우리만큼 미안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통점이 쑤셔와 끙끙 앓는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별 하나를
사랑했네
사랑은
사랑 하나로만 사랑하지 못하는 거라서
별조차 별나라에 가보지 못한
별이 되고 말았네
손가락 걸 때마다 아뜩했던 별이여
밤마다 별나라에 소풍 갔던 별이여
눈물 그렁그렁한 단 하나뿐인 별이여
별이 별을 품지 못하고
별다운 얘기 한 마디 걸어놓지 못한
지지 않는 별이여
- 박정원 「첫사랑」 전문
위 시, “첫사랑”이라는 제목을 읽는 순간, 가슴을 비수에 찔린 것처럼 숨이 멎을 것 같다. 사람의 생명이 사랑의 결실로 불변의 유전자를 지닌 채 역사의 강물로 흐르고 있다는 진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에, 사람이 스스로 체험한 사랑 중 ‘첫사랑’의 기억은 그 사랑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만인의 가슴에 제각기 가장 감동적인 통점의 詩로 수놓아져 있다. “첫사랑”은 인류 역사를 통해 어떤 왕이나 현자도 쉽게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라서 서럽게 아름다운 옹이가 박힌 통점이라서, 문득 시를 평하기보다 차라리 독자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별 하나를/ 사랑했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첫사랑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마음일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경전의 진리처럼 사랑의 기본정신에는 비이기심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하물며 생애에 처음 느끼게 된 ‘첫사랑’이라면 그 비이기심의 순도는 얼마나 드맑았을까?
문학작품에서 사랑을 소재로 쓴 작품은 많고 많지만 詩에서 ‘첫사랑’을 주제로 발표된 시는 흔치 않다. 어쩌면 처음 사랑을 시도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흘러가버린 첫사랑이라면, 누구나 서툴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모두의 가슴 깊이 심겨져 있어 건드리면 심장이 찔리는 듯한 “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박정원 시인은 그 이유를 “사랑은/ 사랑 하나로만 사랑하지 못하는 거라서/ 별조차 별나라에 가보지 못한/ 별이 되고 말았네”라고 첫사랑의 숙명적 실패(사랑의 성공 여부를 사랑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패라는 단어로 표현하나 혹자들은 결합 되지 못한 사랑도 사랑 그 자체로 아름다운 가치가 있다고 보며, 반드시 실패라고 단언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사랑을 사랑 하나로만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사랑을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대부분의 첫사랑이라는 별을 향한 항해는 별에 닿기 전 난파되어 “별조차 별나라에 가보지 못한 별”이 되고 마는 것일까?
시의 중반은 “첫사랑”이라는 항해가 별에 다다르기 전 파선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묘사하고 있다. “손가락 걸 때마다 아뜩했던 별이여/ 밤마다 별나라에 소풍 갔던 별이여/ 눈물 그렁그렁한 단 하나뿐인 별이여”라는 3행의 은유적 묘사에 내재된 의미를 새삼 ‘첫사랑의 선각자’ 인 독자 앞에서 평하는 것이 부끄럽다. 첫사랑은 모두의 가슴에 이미 빼낼 수 없는 대못으로 박혀 있는 것이기에 독자에게 묻는 것이 낫겠다. 별에게 손가락을 걸며, 예쁜 볼에 입맞추고 싶어도 말못하고, 재잘거리는 입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걸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는가? 밤마다 꿈속에 별을 그리워하며 별나라 소풍길을 도란도란 걷다 홀로 깨어났을 때 얼마나 황망했는가? 처음 겪는 사랑이 사랑인줄 모르면서 가슴 아리도록 전율하는 사랑이라는 느낌이 신비롭고 설레어서 행여 놓칠새라, 얼마나 눈물이 그렁그렁 했는가?
첫사랑의 기억을 되새겨 보면, 첫사랑을 앓는 상황 속 존재가 머물렀던 세상은 “냉정한 이성적 세상”이 아닌 “꿈꾸는 감성의 세상”의 배우와 같다. “별이 별을 품지 못하고” 가슴에 대못으로 남았으나 그 대못에 “별다운 얘기 한 마디 걸어놓지 못”한 채, “지지 않는 별”을 평생 그리워해야만 하는 첫사랑, 그 첫사랑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 같은 무대에서 첫사랑을 꿈꾸듯 연기하는 배우였던 우리가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어쩔 수 없이 꿈에서 깨어나야 하므로 “첫사랑”은 꿈의 무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꿈속의 영원히 지지 않는 별, 그 “첫사랑”은, 은하의 별처럼 눈이 시리게 바라보다 가눌 수 없는 그리움의 통점이 아려오면 그렁그렁한 눈으로 꿈꾸듯 바라봐야만 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별이 아닐까? 눈 뜨면 보이지 않지만 눈 감으면 간밤의 꿈처럼 선명히 보이는, 가슴 속에 영원히 지지 않는 별...
지상에 드러낸 뿌리는 나무의 맨발이다
쓰러질까 봐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짓밟히고 갈라져 피가 나와도
아무런 내색 없이 견디고 있다
굳은살 박인 거친 맨발이 안쓰러웠다
양말을 신겨드리고 싶었으나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생각했다
공원에 나무와 달리
볼품 없이 마르고 무뚝뚝하지만
위험한 자리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맨발의 나무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주고 있다
나무의 맨발은 아버지의 발이다.
이대의 「나무의 맨발」 전문
흔히 나무의 뿌리와 줄기는 으레 지표면의 흙을 경계로 삼아 흙 아래로는 뿌리가 되고 흙 위로는 줄기와 가지를 이루어 나무는 하늘을 향해 자란다. 위 시는 뿌리를 흙 밖으로 드러낸 나무를 관조하고 사유한 작품으로 한 장의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시의 첫 행은 “지상에 드러낸 뿌리는 나무의 맨발이다”라는 명징한 표현으로, 흙 밖으로 드러나 있는 뿌리를 양말도 신도 신지 않은 발, 즉 ‘맨발’로 은유하고 있다. 어느 곳에 있는 나무인지,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생략되어 있다. 응당 흙에 덮어 물길을 찾아 땅속 깊이 뻗어나갔어야 할 나무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시인의 눈으로 들어온 것이다.
뿌리가 드러난 상태 묘사에 “쓰러질까 봐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짓밟히고 갈라져 피가 나와도/ 아무런 내색 없이 견디고 있다”는 자태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한쪽으로 경사진 곳에 서 있는 나무로 여겨진다.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짓밟혀서 뿌리의 표피마저 갈라져 수액이 흐르고 있는 상태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 길가에 서 있던 나무로 읽힌다. 땅속으로 내려간 뿌리는 줄기 가지의 길이만큼 흙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뿌리는 뻗어가는 위치와 역할기능에 따라 수평근, 수직근, 측근, 직근, 장근, 모근, 세근 등으로 불리운다. 수평근, 수직근, 직근 등이 식물체를 바로 서도록 흙 속으로 뿌리를 내려 나무를 지탱하게 하는 지지 작용을 하며, 뿌리털은 어린뿌리의 끝부분에 아주 한정된 부분인 근모대에서 물기와 무기양분을 흡수하며, 흙 속에 있는 뿌리털 세포의 용액 농도는 흙 속의 용액 농도보다 높기 때문에 삼투현상에 의해 물이 뿌리 속으로 흡수되어 나무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맨발이 드러난 나무의 뿌리가 “굳은 살 박힌 거친 맨발이 안쓰러웠다”는 표현으로 볼 때, 화자는 나무가 서 있는 곳을 상당 기간 수차례 반복적으로 나무뿌리가 짓밟히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안쓰럽다”는 말은 딱하고 불쌍한 사람이나 그 사정을 봤을 때 심리적 현상이 작용할 때 사용되는 형용사인 바, 화자는 뿌리가 드러나 짓밟히는 모습을 일정 기간 이상 나무뿌리 지켜보며 마음이 아프고 가엾다는 동정심으로 뿌리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관심이 깊어짐으로 나무를 식물 이상의 어떤 인격체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진 것 같다.
뿌리가 드러난 것에 더하여 짓밟혀 굳은 살이 박힌 나무는 화자에겐 이제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양말을 신겨드리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만큼 나무와 화자는 친근감을 교감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나무에게 양말을 신기는 일이 예삿일이 아님을 느끼는 것은 그 행위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나무를 돕는 궁극적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화자는 나무 곁을 수없이 오가며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나무와 마음 속으로 많은 생각을 나누었던 것 같다. 그 길가에 선 나무는 “공원에 나무와 달리/ 볼품 없이 마르고 무뚝뚝”하게 말라가는 것을 발견할 정도로 화자는 나무에게 관심을 쏟는다.
한그루의 가로수일 수 있는 나무를 화자는 한 인격체로 보며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위험한 자리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맨발의 나무”는 항상 말없이 화자를 포함한 행인을 지켜보며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주고” 있는 존재로서 삶의 한 울타리 안에 더불어 사는 공생의 관계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주”었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생각하게 된다. 시의 결구는 “나무의 맨발은 아버지의 발”이라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오신 아버지의 발로 치환하여 위로해 준다.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는 아버지의 자애롭고 말 없으신 헌신이 떠오르는 나무의 맨발, 지금은 곁에서 뵐 수 없는 별이 된 우리 아버지의 발처럼 손으로 만져보며 양말이라도 신겨드리고 싶은 맨발인 것이다.
산 오르는 길
나뭇잎이 환하게 빛났다.
저
하얗게
맑은 영혼!
허형만 「새똥」 전문
위 시는 제목이 “새똥”이지만 산을 오르다가 눈앞에 환히 빛나는 “나뭇잎”을 본 순간의 느낌을 묘사한 시로, 5행의 시이나 의미강조를 초월한다면 3행으로 축약해도 시어가 흐트러짐 없이 시야로 들어오는 시다. 새똥은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배설하는 분뇨이다. 조류의 똥이니 냄새도 심하고 나무 아래 새워둔 자동차 위에 떨어지면 열처리된 도색마저 변질될 만큼 화학적 성분이 독한 새똥이 어떻게 시적 상관물로 등장한 것인가?
첫 행, “산에 오르는 길”이란 도입부에서 산의 이름과 동행자 유무는 생략되어 있다. 그저 화자가 홀로 산을 오르고 있는 듯하다. 등산하는 화자의 심리적 상황 역시 가늠할 수 없다. 등산의 목적지점을 향하여 오를 때, 보폭의 속도로 역행하는 산에 서식하고 숲을 지키는 자연의 사물들이 시야로 들어왔을 것이다. 정상을 향하는 걸음 사이로 계곡을 흐르는 물살이 바위틈 돌들의 옆구리를 간지럽힐 때, 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을 것이며, 형형색색 다양한 초목들이 비탈에 맨발을 묻고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햇살을 반사하며 방문객을 맞을 때, 화자는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며 자연의 신비로움을 만끽하였을 것이다. 숲 사이로 부는 바람결에 맑은 이슬을 머금은 풀벌레들의 합주와 나뭇잎들의 코러스가 어우러질 때, 화자도 숲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화자가 산을 오르며 접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은 생략되었고, 화자의 시선이 숲의 한 나무를 향했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나뭇잎 한잎’을 주목하게 된다. 여느 나뭇잎의 색상과 명도와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환하게 빛나는 나뭇잎’을 찰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무수한 나뭇잎들 사이에서 유독 ‘환하게 빛나는 나뭇잎’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화자는 무척 놀라게 된다. 화자를 놀라게 한 나뭇잎의 정체는 제목에서 암시했듯, 새가 배설한 ‘똥이 묻은 나뭇잎’이었다. “똥”의 의미에 대한 은유적 추리는 생략하고 나뭇잎이 그토록 환하게 빛났던 이유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새똥 묻은 나뭇잎이 왜 그토록 환하게 빛났던 것일까? 새똥은 새의 종류와 새가 섭취한 먹이와 서식지의 환경, 건강 상태, 소화 과정 등에 따라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새똥의 성분은 질소, 인, 칼륨, 니코틴 등의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새똥의 성분 중 ‘인’이란 성분에 주목해 보면, 인(燐-Phosphorus)은 1669년 독일의 헤닝 브란트(Hennig Brand)가 은을 금으로 바꾸는 액체를 만들기 위해 공기를 차단하고 “오줌”을 약 40 양동이 분량(약 5,000L)을 모아 강열(強熱) 가열하면서 최초 발견하였는데, 그 물질 자체가 발하는 “사라지지 않는 빛”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인(燐-Phosphorus)은 약 11년 후 1680년 영국의 “로버트 보일”에 의해서 오줌에서 같은 물질이 석출되어 원소 주율표 제15족에 속하는 질소족 원소로서 확인되었다. 그때까지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모두 phosphorus라고 불렀는데(그리스어로 phos는 빛, phoros는 운반자), 그 후 이것이 ‘인’의 명칭이 되었다. 한편 동양에서 인(燐)이라는 글자는 원래 '도깨비불 린'으로, 공동묘지 주변에서 봤다는 도깨비불을 본뜬 글자다. 실제로 도깨비불은 시체나 뼛속의 인이 공기 중에서 “발화”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새똥 묻은 나뭇잎이 그토록 환하게 빛났던 것은 나름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시의 결구는 그 새똥 묻은 나뭇잎을 일컬어 “맑은 영혼!”이라고 부르짖고 있다. ‘똥 묻은 나뭇잎이 시인의 눈에 어찌 “맑은 영혼”으로 읽혔을까? 그것은 시각적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록으로 물든 나무들의 숲에서 시인의 시야에 비친 나뭇잎이 환하게 빛났을 때, 시인은 찰나적으로 시각적 시력을 상실했을 것으로 가늠한다. 속까지 초록인 신성한 몸으로 냄새나는 새똥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고도 환하게 빛나는 나뭇잎의 인분(燐糞)은 더는 ‘새똥’이 아닌 것이다. 흙의 원소로 빚어놓은 형상의 사람의 몸이 뼈와 살로 화(化)할 때, 360마디 관절마다 얼마나 큰 통증으로 삐거덕거렸을까? 그 통점을 앓으며 호흡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산 영혼이 되었듯, 저 새똥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뭇잎이 햇살을 받지 못해 호흡이 막혀올 때, 뒷면에 난 무수한 망사보다 촘촘한 물길 구비와 숨구멍으로 얼마나 많은 아픔을 허공에 토했을까? 따라서 그 아픈 물길과 숨구멍의 통점을 견디며 하얗게 빛나는 나뭇잎은 호흡하는 날까지 빛나는 영혼임을 시인은 영혼의 눈으로 바라봤으리라. 누구에게도 원망하지 않는 “빛나는 영혼”은 언젠가는 가지를 놓고 나무에서 내려와 나무의 언 발을 녹여주며 삭아가며 긴 꿈길을 걸어 다시 가지로 돌아올 것이다.
사회적 재난을 5년을 겪으며 여러 문예지가 폐간되어 스러져 갔다. 문단에도 시단에도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언어들이 길을 찾아 방황한다. 읽혀 지지 않는 시들이 몰려온다. 다른 언어들이 길을 내고 싶어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길을 찾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통점을 극복하며 시는 스러지지 않고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 암울한 시기에 『PS. 시와 징후』가 창간되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의 한 부문이 문득 떠 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PS.시와 징후』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영아처럼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오래, 아니 평생 휴머니즘을 견지하며 사람과 사물과 대자연을 아끼며 시를 사랑한 이들이 진솔한 뜻을 모아 하나의 새 길을 내어 해를 넘기고 벌써 5호를 맞는다. 새봄이 맞아 여린 꽃을 피우며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여름을 보내며 소낙비를 맞고 단단해지며 날로 멋진 모습으로 새로워져 탄탄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 『PS. 시와 징후』가 걸어가는 외롭고 쓸쓸한 詩의 길에 통점을 어루만져 주며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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