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신선 시인>>
<<홍신선 시인의 양력>>
* 1944년 2월 13일, 경기 화성시 출생.
*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
* 1965년 '시문학' 등단.
* 시집 : 『서벽당집』, 『겨울섬』, 『삶, 거듭 살아도』.
* 시선집 :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 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찍다』,
『홍신선 시전집』, 『마음經』.
* 연작시집 : 『삶의 옹이』.
* 저서 : 『현실과 언어』, 『한국사와 불교적 상상력』외 다수.
* 동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 현재 계간《문학·선》발행인 겸 편집인.
* 2018.12. 제4회 문덕수문학상, 17회 노작 문학상 수상.
<<홍신선 시인의 시>>
퇴직을 하며/홍신선
얼마나 범속한 재능에 속고 속아왔는가
얼마나 열정에만 눈멀어 미련없이 달려왔는가
그동안 나는
허공에서 허공을 꺼내듯
시간 속에서 숱한 시간들을 말감고처럼 되질로 퍼내었다
말들을 끝없이 혹사시켰다
아직도 미뤄둔 잔업처럼 방치해놓은,
독자도 없는 시들을
폐농지처럼 황량한 그 내부문맥들을 폐관하는 일,
처자식 입에 풀 바르느라
이골 난 호구질에 늘 무릎 꿇었던 일
막 나주볕들이 제 심중에 돋우고 있는 심지 끝에
막바지 불똥처럼 해밝게 앉는
지난 시간 초심이나 되돌아보는 일
이제 다시
어디에다 무릎 꿇고 환멸의
더 깊은 이마 조아려야 하는가
이 낙화 세상을 만났으니/홍신선
몸을 열면 깊은 강물이 들여다보이던
꽃 만개한 벚나무가
기어이 거품 부글대는 출렁이는 물결들을 정신없이 쏟고 섰다.
바람 한 오라기 없는 공중에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깨 부딪치고 때로는 등판 짚고 떠오르기도 하며
웬 억하심정인지 무슨 앙숙인지 섭섭한 속내 깊이 삭이는 건지
땅 위에 닿도록
지는 꽃잎들 태허정적인양 일체 기척 없이 내려앉는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제 나름 모두 속뜻이 있거니
두어라 적막도 하나의 소리이고 전언이니
전언이 자욱이 깔린 저 허공,
허공을 걸레처럼 쥐어짜 이 마을에 뜻 오독한 문장을 내걸고 있는 나는 누군가.
일철 돌아오며 빈 전가(田家)에서
이 낙화 세상을 만났으니 나는 홀로 나를 만나
벚나무 몸 안의 범람하는 강물소리를 진종일 듣는다
낙발(落髮) 한 올/홍신선
해 질 녘 청소 중 거실 바닥에서 우연히 집어 든 낙발 한 오라기
이 가는 은색 머리카락에는 언제 그 검었던 빛깔과 젊음이 죄다 익었는가
삼천 장(丈)* 아닌 집뼘 넘는 거기 내 삶이 통째로 담겨 있어 빛나는가.
노질(老耋)의 어느 날 무심코 집어 든 저리 투명한 은발 한 올.
* 삼천장(三千丈). 이백의 시 「추포가秋浦歌」에서 가져옴.
겨울섬/홍신선
대교(大橋)를 건넜다 피난민 몇이 과거를 버린 채 살고 있다.
마을 밖에는
동체뿐인 새우젓 배들
빈 돛대 몇이 겨울 한기에 가까스로
등 받치고 기다리고.
물 빠진 갯고랑, 삭은 시간들 삭은 물에 이어져 잠겨 있다.
일직선, 버려진 마음들로 쌓아 올린 방파제까지
나문재나물들 줄지어 나가 있다
뻘에 두발* 내리고 붙어 있는 목에 힘준 저들
쓸리지 않으면
개흙으로 삭는 일
더러 쓸리면
닻으로 일생 내리는 저들의 일.
힘 힘 풀어 놓고
공판장 매표소 횟집들로 선착장에 힘 풀어 놓고
두어 걸음 비켜서서
말채나무 오그라든 두 손에
저보다 큰 겨울 하늘 든 채 있다
사는 일이 사는 일로 투명하게 보이고 있다.
* 두발: 원래는 ‘두 발’로 ‘두 다리’라는 뜻이지만 중의법도 가능함.
우연을 점찍다/홍신선
사창굴이 따로 있는가 아파트 단지 뒷길 화단에
때늦은 쪽방만한 매화들 몸 활짝 열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지 앵벌이 한 마리 절뚝절뚝 한쪽 발 끌며
꽃에서 꽃으로 방에서 방으로 점, 점, 점 찍듯 들렸다 날아간다
날아가다 또 들른다
무저갱 같은 꽃들의 보지 속에서
반출 금지된 자손이라도 비사입(秘私入)하는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도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모가지 한 번 내미는 것이
목숨 점지되는 인연이라는데*
쪽방촌 성폭행범처럼 점점점 씨를 묻으며 드나드는 저 앵벌이 선택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매화들 뭇 가지에서 가건물처럼 철거된 빈자리
곧 거북이 모가지만한 열매들 불쑥불쑥 내솟고
그즈음 앵벌이는 또 사창굴 여느 꽃의 곪아 터진 몸 찾아다니며
가장자리 나달나달 핀 종이쪽지 구걸 사연이라도 돌리는가
이 꽃의 음호 속에 저 꽃의 치골 위에
점, 점, 점 우연을 점찍는가
겨울 들길에서/홍신선
겨울들길,
시린 듯 따뜻한 하늘 한 자락 끌어다
홑겹의 비닐 바람막이로 치고는
힘줄 불거진 앙상한 손가락으로 지나가는 늙은 시간이
무시로 쓰다듬던 것.
赤銅色 휑한 찔레덤불 속에 오그라든 불알쪽만한
손때에 길든 반들거리는 바알간 열매 서너 알.
그렇다 어느 논물꼬 혹은 여울에서 암몸과 숫몸을
빈틈없이 꽉 짜맞춘
結氷 그 깊은 속에서
사소한 균열이 되어 부시시부시시
비집고 나오는
가는 물 몇 방울.
아직도 내 부를 노래
겨울의 저편에
이 세기의 끝에 그렇게
선명히 남아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홍신선
2월의 덕소(德沼)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는 걸.
입 닥치고 강 가운데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달맞이꽃/홍신선
질까 말까
속으로 망설이는 달맞이꽃 망설이는 소리
또 그 옆에서
속으로 필까 말까 머뭇대는 달맞이꽃 머뭇대는 소리
망설이는 순간의 삶의 總體性
머뭇대는 순간의 立體性
밖으로 밖으로 모두 樂觀論만 쳐다보는
이 시대에
골똘히 내면을 무더듬고 섰는
고개 숙인 꽃의 목덜미
오늘 그 뿌연 목덜미에
남김없이 주어진
휘영청한
달밤!
나의 시/홍신선
왜 전신 마비 침대의 사내처럼 너는 늘 등밀이 등밀이로만 누워서 흐르는가
절벽에서 꼭 한번만은,
어떡하긴
필생의 결단처럼 양손 가볍게 놓아버려라
수백 수십 길 곧추 떨어지다 일어서다 마침내 한 방 먹이거라
대명한 하늘땅 사이
먹먹한 목청 큰 사자후 한 방
귀청 장렬히 터진 뭇 회중들의 먹은 귀때기들도 쓸어버려라
죄다 묻어버려라
폭포여
시여
참회록/홍신선
지나가거라, 나는 여기 아프지 않게 주저앉아 남으려 하느니
다만 늙고 병들었을 뿐이니
지나가거라 남은 시간들은
퇴역한 무용수처럼 한 벌씩 목숨 벗어던지며 자진하리니
아직도 손으로 더듬더듬 짚어가면 삭이지 못한 살피죽 밑 멍울선 죄들 만져지느니
지나가거라
언제 나를 던져 피투성이로 너인들 껴안고 뒹굴었느냐
폭발한 적 있느냐
안전선 뒤에 남 먼저 뒷걸음질로 물러서지 않았느냐*
그렇다 잘 가거라
살아서 더는 만날 수 없는 마음의 덧없음에 살 떨릴 뿐
오, 말 탄 자
그대는
* 고 임영조의 시 중에서
처서 근방 추전역/홍신선
1.
그것 참, 무지렁이 행색의 이 산골아낙들은 벌써 다리가 아프다 무릎 연골 찢어진 몇 몇은 대신 제 몸속 착착 접은 접이의자들 꺼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거개는 골다공증에 휜 다리로 삐그덕대거나 아니면 챙겨들고 갈 깔개방석만한 가을 기억 위에 앉은뱅이처럼 주저앉았다
철둑길 散落의 코스모스들의, 해질녁 허리춤께 와 걸린
저 마지막 타는 백열의 목숨 한 점
나도 이 지구 겉옷에 잠시 얹혔다 날아가는 빛 한 점이고 싶다
2.
낯빛 푸르딩딩 질린 고요들도 벌써 다리가 아프다
시간이 航跡처럼 여러해살이풀들 몸속에 숱한 칼금 그어가겠구나
앞 잇새 휑하니 벌어진 도깨비바늘풀 입안에서 새는 발음들,
할렐루야 아닌
날라리야로
모서리 깨진 자모음들 툭툭 쏟아진다 날선 마른 바늘들 시간에 콕콕 박힌다
추전역 지난 계곡 철교에 수십 년 숨어사는 짐승이 건널목 퇴역간수처럼 크르렁크르렁 운다 느리게 통근열차 지나갈 때마다 깊이 더 깊이 숨었는지 지금껏 겁먹은 소리로 운다
징집영장 풀려 돌아오는
내 먼 회상의 등 뒤
귀화종 풀 마르는 향기 수수 억 만평이다
앉든 서든
아득하다
시인의 봄날/홍신선
1.
말뚝에 매인 뿔 터진 염소처럼 제자리 빙빙 돌던
비썩 마른 정신 한 필 끌고서는,
먹고무신 밑에 우두둑 우두둑 튀는 몽돌만한 햇살들,
저 광막한 잔풀나기 하늘 어느 한 구석에 옮겨 매는가
2.
삼십 몇 년 교직에서 조기퇴직 한 뒤
날마다 일과처럼
막걸리 한 병, 잡음 끓는 FM라디오 한 대
지참하고
근린공원 으늑한 구석 등받이 나간 목의자에 누워 해동갑을 했다는데
얼른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던 혼잣말이 그예 씨가 됐는가
달포 넘게 그는 보이지 않는데
막걸리에 부어터진 간(肝) 부스러기와
잔해처럼 흩어져 있는 잡음 몇 토막
부근의 햇볕들만
오늘은
홀가분한 듯 저렇게 속속드리 제 내부 밑바닥까지 환히 내보인다
음악/홍신선
군포에서 의왕 구간 전철안에서
소리 짓씹히는 기아바이 행상꾼 녹음기 릴테이프에서
그가 덜컥덜컥 튀어나온다
그의 값없는 음악
삶치고 허망한 행상꾼들 아닌 자 있으랴
고3 시절 진학포기하고 밴드부에 혼자 남아
중고짜리 트럼벳만 자랑스럽게 불던
지방 방송국 경음악단 한 구석을
늙어서도 끝끝내 지켰던
그
내 마음 시골 학교
야트막한 담장 밖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증기 배출하는 압력밥솥처럼 몸피 큰 나무속에 오래 들끓던
덜 퍼진 밥알 마낭 수천 수만 꽃 알들
확확 터져 나왔는가 몰라
누가 고요의 얼굴을 봤는가/홍신선
누가 공중에 꾸불텅 꾸불텅 장장하일 도수로導水路를 파내 놓는가
듬성듬성 선 상수리나무들 우듬지와 속가지에서
그 건너 나무들의 곁가지와 우듬지께로 건너뛰는
도수로에는 왼종일 할딱할딱 딸국질하며 떠흐르는 쓰람매미 소리
고요할 때 고요 속으로 더 깊이 침하해야 한다는 듯
곳곳에 도열한 나무벽 틈으로 스며드는
그 쓰람매미 소리 속에는
더러 참수형으로 모모의 대갈통 떨어지는 소리
예 저기 부서지고 남은 문짝들 돌쩌귀 찌걱이는 소리……
시골 아파트단지까지 신불자信不者로 떠돌다 들어온
땟국 꾀죄죄한 한 그루 송장풀이
길 한켠으로 비켜 누운 채 매미소리 돋우워 베고
보여주는
대황大荒의 고요
이 여름날의 욱신거리는 적요여
우연을 점 찍다/홍신선
사창굴이 따로 있는가 아파트 단지 뒷길 화단에
때늦은 쪽방만 한 매화들 몸 활짝 열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지 앵벌이 한 마리 절뚝절뚝 한쪽 발 끌며
꽃에서 꽃으로 방에서 방으로 점, 점 찍듯 들렀다 날아간다
날아가다 또 들른다
무저갱 같은 꽃들의 보지 속에서
반출 금지된 자손이라도 비사입(秘私入)하는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떠도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모가지 한 번 내미는 것이
목숨 점지되는 인연이라는데
쪽방 촌 성폭행범처럼 점점점 씨를 묻으며 드나드는 저 앵벌이 선택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매화들 뭇가지에서 가건물처럼 철거된 빈 꽃자리
곧 거북이 모가지만 한 열매들 불쑥불쑥 내솟고
그즈음 앵벌이는 도 사창굴 여느 꽃의 곪아터진 몸 찾아다니며
가장자리 나달나달 핀 종이쪽지 구걸 사연이라도 돌리는가
이 꽃의 음호(陰戶) 속에 저 꽃의 치골 위에
점, 점, 점 우연을 점 찍는가
연탄불을 갈며/홍신선
컨테이너 간이함바집 뒤 공터에서
연소 막 끝난 헌 연탄재 치석 떼듯 떼어버리고
윗 것 밑으로 내려놓고
십구공탄 새 것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하나 생식기 맞춰 넣고 아궁이 불문 열어두면
머지않아
자웅이체가 서로 받아주고 스며들어
한통속으로 엉겨 붙듯
연탄 두 장 골격으로 활활 타오르리라
둥근 몸피 속속들이 푸른 불길 기어 나와
단세포 목숨처럼 탄구멍마다 솟구치리라 꿈틀대리라
왜 통합이고 통일인가
연탄불 신새벽녘 갈아보면 모처럼 너희도 안다
후끈후끈 단 무솥 안에서
더 요란스럽게 끓어 넘치는
뭇 사설의 뒷모습들.
전율/홍신선
얼마나 지겨우면 저렇게 떼로 몰려 선 오리나무들 진저리치는가
이따금 자해하듯 부르르 부르르 사십년생 몸을 떤다
한여름내 허공의 백금도가니 속에서 벼려낸
줄톱이며 삽, 식칼만한 잎들을
마른 신경들을 적막하게 툭툭 꺾어내린다
그 오리나무의 소리없는 진저리의 진앙지는 어디인가
유관부 나이테들이 우물벽인 듯 짜들어간
심부深部에서, 쿨럭쿨럭 기를 쓰고 밑바닥 욕망들을 길어올리느라
흔들리는가 고장난 양수기의 목구멍처럼 쿨럭이며 올라오는
죽음들로 경련하는가
가을 찬 비 속 허리와 어깨에서 문득 고동색 녹물이 흘러나와
번진다. 내부기관의 예리했던 감성이나 기억들
관절의 물렁뼈들 이제는 개먹을 대로 개먹어
아무리 몽키 스패너로 힘껏 조여도 조여지지 않는
이음새 틈새로 산화된 물질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시동 꺼뜨리지 않고 간간히 진저리라도 쳐야 하는가
딱딱 부딪는 이빨 기슭에 몰려와 부서지는 침들이며
부유하는 언어들
선술집 안쪽에 버티고 들어앉은 단골 주정뱅이처럼
나무들 내부 깊이에 아직도 권태 몇이 쭈그리고 있다
오래 너무 살다보면
싱싱한 생에서도 녹물이 흘러나온다
뇌우 뒤의 햇살 환한 하늘 너머 새들이 흩어진다
자연/홍신선
불볕더위에 하의실종된 몇몇 계란꽃들 끌밋한 줄기와
그 위에 걸린 속팬티 만한 홑겹 그늘,
그 그늘 위에는 층고 두세 길로 낮게 뜬 구름장,
양생 끝난 시멘트 골조 외벽의 배수관들처럼
이들 모두는 허공 벽면에 가설된 웬 파이프라인들인가
때때로 허공 집 벽속에서 벽속으로 안보이게 연결된
PVC 배수관 어디쯤서 들리는
여름날 물 빠지는 소리
후쿠시마 원전 고농도 세슘도 통과하는 소리
계란꽃 둥근 줄기에서
앝으막한 구름장까지
또 내 살의 모세신경올에까지
내부에 묻힌 연결통로로
끊임없이 숨바꼭질하듯 순환하는 것,
숨었다 나타났다 뭇 사물들을 연결통로 삼아 돌고 도는 것은
수수만 종 유전인자들인가 생과 사인가
나는 이들 쉴새없이 생사돌림 하는,
뭇 생물들이 배수펌프처럼 생존기계 한 대씩 내부에 설치하고
생기와 죽음을 퍼 올리고 내돌리는
이 자연의 거대한 어느 외벽에 가설된 배수관인가
어디서 어디까지 연결된 속 빈 중간통로인가
저녁 둑길에서 나는 내안으로 막 순환 중인
낯선 배달꾼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순환궤도의 백혈구들을 경주마처럼 올라탄
세슘의 당당한 얼굴도 본다.
겨울/홍신선
언덕 너머 개울에서 헤어지는구나
겨울이여
그 동안 이 촌락에 와서
한가한 적막이 되어 그 큰 덩치로
떠 잇던 겨울이여
떠서는 잡념도 내게 보내주고
잡소리도 세상에서 움켜다가
저 산곡에 쥐어주더니
한동안의 정의(情誼)도 다 작파하고
개울에 와서 훌훌이 헤어지는구나
혁명/홍신선
그 시절 왕십리 전차종점 매표소 옆 노점에서
중고 드럼통 번철에다 호떡을 구워 팔며 그녀는 견뎠다.
이따금 등에 업힌 젖먹이를 추스르며
세상을 뒤엎겠다고 그 주인을 하겠다고
형무소 1.5평 독방에서 처형을 기다리던
애아범 잠적한 서쪽 까마득한 하늘에는 아예 등 돌린 채
그녀는 삭신이 아플수록 더 뜨겁게 몸 지지듯
뭇 호떡들 누르개로 꾹꾹 눌렀다 다시 끊임없이 뒤집곤 했다
성동소방서 망루 뒤쪽
터진 호떡에선 끈적이는 붉은 하늘이 흘러나오고
통금(通禁)의 자정 때까지
간드레 불빛에 찬 얼굴을 아프지 않게 묻곤 했다.
그냥 먹고 사는 셋집일 뿐인 세상이라서
팔다 남은 파치들처럼 등 따순 자리로 자리로 골라 눕히던
그 네 남매도 언제부터인가 모두 떠났다
시간이 관통해간 텅 빈 통로인 그녀가 끝까지
데인 손으로 시간의 큰 봉지들을 벌려가며
달아오른 번철 위에서 묵묵히 일생 뒤집고 구운 것은
결국 이 세상이었음을 자기가 그 주인이었음을
나는 이제 그녀의 쇠락한 눈가에서 읽을 뿐
그리고 안다, 처형된 사내가 가 있을
하늘의 어느 부분 근처를 지나가는
혁명의 실낱구름이 그 눈 속에 잠겨 있을 뿐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