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마는 개복동 10년, 경장동 10년을 하다 1993년 문을 닫습니다. 은마가 문을 닫은 직접적 요인은 일찍이 허가를 한 요정이 나중에 보니 학구제에 걸려 있어 시청과 교육청 간에 법리적 해석에 문제가 되어있었습니다. 경장동이 개발되기 전과 후의 시각차이 이기도합니다. 그 일로 지역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했습니다.
간접적인 요인은 시대성입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본인이 칼국수를 먹겠다고 선언하고 공직자가 골프를 치거나 요정에 가면 자리를 짜르겠다는 언명이 언론을 장식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군산의 요정은 견딜 수 없었고 다수가 한 번에 다닐 수 있는 한국관, 백악관 등의 나이트클럽이 성업이었습니다. 동경, 풍차, 킹 클 등 대형 스탠드바와 가라오케가 잘되었습니다. 노래방이 들어섰습니다. 군산에 룸살롱이 생깁니다.
군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중앙로와 월명동에서 시청, 경찰서, 법원 등이 조촌동으로 빠져나갑니다. 일제 때부터 군산 상권의 중심축이 영동이었는데 이것이 급격히 나운동 쪽으로 넘어갑니다.
나운동에 신시가지가 형성됩니다. 군경묘지 앞에 여관 촌이 들어섰습니다. 1번지와 같은 매머드 술집이 들어섭니다. 호국의 영령들에게 미안한 감도 없이 밤마다 환락의 불야성을 이뤘고 음악과 노래 소리는 멀리 은파유원지까지 메아리치는 시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은마가 문을 닫은 전후, 군산 근대사의 전설적인 요정 송죽도 문을 닫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송죽 사장 김양이는 서울 장충동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전에 전라북도에서 지사를 했거나 고위 공직자들이 출세해 서울에서 장, 차관이나 중앙부처의 간부가 되어있었고 이들이 옛 향수 때문에 눈치껏 송죽을 다녔습니다. 전라북도 국회의원들도 눈치껏 다녔다합니다.
전라도 출신을 따라 송죽에 간 서울의 거물들이 사장의 품위와 전라도 음식의 맛깔스러움 그리고 여인들의 애교와 환대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 집 예약하기가 참 어려웠다합니다.
2002년 내가 월명동장일 때 옛 송죽 김 사장이 고급 승용차로 개인 운전수가 차를 몰고 군산에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후도 많은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적기에 서울로 자리를 옮긴 그녀의 사업 감각과 혜안에 놀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