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노래 [봉선화]-김천애(1940년 녹음)
민족의 노래 해설:[봉선화]-김천애(1940년 녹음)
봉선화 - 홍난파, 노래: 김천애 (1940 년 녹음)
https://www.youtube.com/watch?v=d0ElJJ1xuOY
146,526 views May 3, 2013
작품명 : 봉선화, 작곡: 홍난파, 작사: 김형준, 노래: 김천애 (1919 -- 1995)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오기는 3.1운동의 다음해인 1920년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되기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김천애가 봉선화를 제일 처음 무대에서 부른 것은 1942년 봄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곳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신인음악회서의 일이다.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섰지요. 청중들의 앵콜로 봉선화를 불렀는데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떠나갈 듯 했죠. 공연이 끝나자 청중 중의 교포들이 무대 뒤로 찾아와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당시의 감회를 회상하듯 김천애는 눈물을 글썽인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 붐을 일으켰다. 일본 경찰 당국은 드디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한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김천애는 그 후에도 무대에 설 때 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봉선화하면 누구든 김천애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천애 (1919-1995)
김천애님은 평양정의 여자 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한후 국내에 돌아와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서울대학 교 음악대학 창설에 힘을 기울여 1948년 성악과장으로 제직햇고 그후 숙명여대 음대교수, 음대학장등을 역임하다가 1972년 시민회관 (지금 세종문화 회관터)에서 갖은 독창회를 마지막으로 미국에 건너 갔습니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했지만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국내에는 오지 못하다가 우리나라가 민주화 돤 후 1990년 국내에 잠시 돌아와 KBS-TV 트집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애기를 들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독신으로 살던 님은 1995년 3월 30일 미국에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민족의 노래 해설>:[울 밑에 선 봉선화]
1. 울밑에 선 봉선화(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2.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3. 북풍 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 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소프라노 김천애(1919~1995) 여사가 1942년 봄 도쿄에서 열린 한 음악회에서 앙코르로 부르면서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김천애 여사가 흰색 저고리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자 동포 청중은 금세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합니다. 그해 가을, 서울과 평양 등에서 개최한 귀국 음악회에서 ‘봉선화’를 다시 불러 조선인의 마음을 울리자, 일제는 금지곡으로 묶고 음반까지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래는 이미 야금야금 전국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최대 히트곡이 됐다고 합니다.
봉선화 노래의 인기 비결은 역시 저항 의식이 강한 노랫말과 애절한 선율 때문이었습니다. 초가집 울타리 밑에서 모진 비바람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한여름에 빨갛게 피어나는 봉선화의 이미지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갈구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맞아떨어졌습니다. 어떤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굳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풍한설 찬바람에/네 형체가 없어져도/평화로운 꿈을 꾸는/너의 혼은 예 있으니/화창스런 봄 바람에/환생키를 바라노라.”
특히 3절에는 비애를 넘어 부활을 다짐하고 있어 숙연해집니다. 76세에 타계한 김천애 여사는 생전에 1~2절은 3절을 도입하기 위한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폐부를 찌르는 그 시구가 아니었더라면 ‘봉선화’ 선율은 영원히 사장되었을지 모른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봉선화’는 일제 강점기에 겨레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노래로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작곡자 홍난파가 친일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답니다. 그가 말년(1937~1941)에 일제에 협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소설가, 번역가, 음악가로서 민족 예술에 공헌한 부분은 확실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준엄한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하겠지만, ‘공(功)은 공이고 과(過)는 과다.’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쉽게 풀릴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견해도 있다고 합니다. 끝.
곡 해설 :
청년 홍난파는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던, 열세 살 위의 큰 형님뻘이던 김형준에게 자신의 멜로디에 가사를 입혀 줄 것을 부탁하였고, 작사가 김형준(金亨俊, 1885~1965)은 자신이 살던 집 울 안에 시들어가는 봉선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리 신세가 꼭 저 봉선화 같구려" 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고 있는 처량한 신세를 '울 밑에 선 봉선화'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이 가삿말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홍난파의 애상적인 멜로디와 김형준의 시(詩)가 합쳐져서 오늘날의 '봉선화'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 (중략)
미국 유학 중이던 젊은 시절의 홍난파는, 도산 안창호가 세운 독립운동 단체인 '흥사단(興士團, Young Korean Academy, 1913년 설립)'에 가입해 활동한 '민족운동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흥사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순사에게 검거되었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72일간의 수감 도중 갖은 고초와 고문을 겪었던 홍난파는, 일본의 회유와 전향 협박을 뿌리치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됩니다.
변절한 그는 결국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습니다.
또한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하면서 친일행적을 남기는 등 아쉬운 행보를 걷고 말았습니다. ----- (중략)
블로거 탄> : 한계상황을 모르는 후대가 함부러 선대의 역사를 제단하지 말라.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비원이 서린 봉선화 시구~
그 절규를 들어라!
홍영후(洪永厚), 자는 석조(錫祚) / 호는 난파(蘭坡)
1897년 4월 10일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現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아버지 홍준(洪埻, 1858. 9. 11 ~ 1917. 2. 8)과 어머니 전주 이씨(1858. 8. 27 ~ 1908. 3. 22)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1900년 5월 20일 통신사 전화과 주사(通信司電話課主事)에 임명되었다가 이튿날인 5월 21일 의원면직했다.
14살 되던 1910년 9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14년 3월 졸업했다. 그 사이 1912년부터는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에 입학해 1913년 4월 2회로 졸업했고, 1913년 다시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입학해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1914년 졸업 후 이듬해인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에 임용되었다.
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년간 수학했으나 이내 중퇴하고 1918년 4월 관립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해 이듬해인 1919년 3월 수료했다. 1919년 2월부터 문학, 미술, 음악의 3가지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三光)』을 창간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고, 1922년 9월에는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고 연악회의 기관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는 등 문예활동에 주력했다.
1926년 3월 도쿄고등음악학원(現 쿠니타치음악대학)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에 진학했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귀국 후 그해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교유(敎諭)로 채용되었다가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에 있던 셔우드 음악학교 연극과에 입학했고, 그해 12월 흥사단에 가입했다. 1932년 6월 셔우드 음악학교 졸업 후 귀국해 1933년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과 주임 교유로 부임했고,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러던 1937년,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순사에게 검거되었고, 72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전향 협박을 받았다. 결국 건강악화 끝에 그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또한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했다. 1941년 1월 11일 친일단체 조선음악협회의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1월 29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941년 8월 30일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서울병원)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조국 광복을 보지도 못한채 일제 식민 조선인의 한을 품고 44세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으니 애절하고 애통하기가 하늘에 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