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대는 봄바람에 후두둑 꽃비 쏟아지고, 눈부신 햇살에 푸르름을 더해가는 신록으로 더욱 아름다운 5월의 고궁. 경복궁을 출발해 창덕궁, 창경궁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고궁들은 터벅터벅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거리도 가까워 봄 마실길로도 제격. 게다가 올 10월 말까지 각 궁궐마다 굳게 잠겨 있었던 전각 1곳의 내부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개방되는 전각은 경복궁의 수정전, 창덕궁의 영화당, 창경궁의 통명전, 덕수궁 정관헌, 종묘 망묘루 등 총 5곳으로 이들 모두 전각 안에서 바깥을 바라봤을 때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들이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궁궐이 더 이상 격리된 공간이 아닌 휴식도 취하고 담소도 나누고 독서도 하는 등 누구나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곳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다. 여기다 지난 5월 1일부터 만 원짜리 관람권 한 장으로 서울 5대 궁궐 모두를 관람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제도까지 시행되고 있다. 더욱 풍성해진 볼거리에 더욱 간편해진 고궁 나들이. 임금만이 드나들 수 있었던 길인 어도(御道)를 따라 고궁으로의 봄마실을 떠나보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세운 경복궁은 조선 왕실의 5대 궁궐 중 규모와 건축 면에서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 최고의 구중궁궐인 셈이다. 경복궁에서 유심히 봐야할 곳은 조선시대 최고의 궁궐전각으로 경복궁 중심 건물인 근정전, 나랏일을 보시던 사정전, 중요한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경회루,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 중심건물의 강녕전, 보물 제810호로 지정된 자경전 십장생 무늬 굴뚝, 그리고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과 왕비의 후원인 아미산이다.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은 궁녀는 겉치마를 뒤집어 입어 표시를 하고 그 후로는 여느 궁녀들과 다른 배우를 받았다고 한다. 허나 하룻밤 승은을 입었다고 해서 바로 후궁이 되는 것이 아니고, 후궁이 된 뒤에도 매일 왕의 부름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여인네들에게는 ‘수다문’ 이라는 이름이 남다르게 느껴졌을 법하다.
개방된 수정전 마루에서 본 경회루의 풍경. 내부에서는 사진전시회도 열린다
바깥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봄날,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선보이는 곳은 다름 아닌 경회루다.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 경회루는 예로부터 조경미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과연 경회루 자체의 모습도 고풍스럽지만, 머름대 뒤편으로 피어난 수양벚꽃과 어우러진 경회루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궁에서 살게 했는데 이들의 직책이 흥청이었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목숨을 잃은 연산군이 ‘흥청’ 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
비운의 단종의 역사가 담긴 곳 또한 경회루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이 조정을 장악하고 단종을 보위하던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과 궁인, 신하들까지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게 된다. 단종이 수양대군에서 옥새를 넘겨준 곳이 바로 경회루다. 이에 분개한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하자 성삼문이 훗날을 기약하자며 만류했다고 한다. 이들은 세조 즉위 후단종 복귀를 꾀하다가 실패해 경복궁 사정전 앞뜰에서 친국(親鞫)을 당하고 결국 사형에 처해져 사육신이 되었다.
경복궁이 웅장한 남성의 멋이 있다면, 창덕궁은 단아한 여성의 미가 있다. 자연스럽게 산세에 따라 지형을 변화시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연 속에 건축물이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은 1405년 태종이 세운 조선왕조 제2의 왕궁으로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 방면에 있다 해서 ‘동궐’ 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경복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에 대해서 공식적으로는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 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내전들이 불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 지은 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순종이 승하한 후 창덕궁의 훼손은 더욱 심각해졌다. 해방 이후에도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1997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로 거듭났다.
먼저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뤘던 인정적 일원이 나온다. 2단의 월대 위에 단아한 2층 전각을 세워 당당함이 돋보인다. 임금님의 집무실로 쓰였던 선정전은 현존하는 창덕궁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지붕에 값비싼 청기와가 올려진 곳이다. 인정전이 창덕궁의 가장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 중심건물이다.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비좁았던 선정전의 편전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순조의 아들이자 현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대조전의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위 : 봄기운이 완연한 창덕궁의 모습들 아래 : 사각연못인 부용지와 주변 아름다운 건축물들
창덕궁의 으뜸은 당연 후원이다. 창덕궁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이다. 후원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 등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인위적 손질을 더해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냈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뒷산 응봉으로 이어진다. 즉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 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영화당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특히나 영화당은 동쪽으로는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형상이고,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어주는 절묘한 경관이다.
달빛 아래 봄꽃 향기 그윽한 창덕궁의 밤길을 호젓하게 거닐어 볼 수 있는 창덕궁 달빛기행
창덕궁의 참 묘미는 무엇보다도 비오는 날의 풍경이다. 노거수가 드리워진 연못가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이 수면 위에 떨어지는 풍경은 가히 선경이기 때문이다. 여기다 연경당 앞 물철쭉, 옥류천 개울의 은방울꽃 등도 창덕궁의 빠질 수 없는 구경포인트. 이 외에도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향하는 숲길은 내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산책로다. 수백 년 동안 왕과 왕비만이 즐길 수 있던 창덕궁 밤길을 산책하며 우리 고궁이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창덕궁 연경당 앞에서 즐기는 명인의 국악공연은 신명나는 한국의 풍류를 만끽할 수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외에도 함께 개방된 창경궁 안 왕비의 침소로 사용됐던 통명전과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쓰였던 덕수궁 중화전과 고종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는 정관헌, 종묘제례 때 임금이 머물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던 장소인 망묘루 등도 가보면 좋겠다.
자료협조 ㅣ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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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비와 깨구락지..메르치의 여행 보따리 원문보기 글쓴이: 포비와 깨구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