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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초와 메밀묵밥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문득 생각나는 먹을 거리 중에 하나가 메밀묵이다. 밤이길어지는 만큼 사람의 속은 허허해지고 쓸쓸한 허기가 사정없이 휘몰아칠무렵 골목에는 메밀묵 사려를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듯 그릇을 들고 나설수 밖에 없었다. 채치듯 썰어 동치미국물에 말고 잘익은 김치에 깨소금과 김가루를 부셔넣고 참기름을 살짝 둘러 찬밥을 말아 식구들끼리 둘러 앉아 먹던 그 평범하고 슴슴한 맛. 난 기타에 실려있는 박목월선생님의 <적막한 식욕> 이란 시는 메밀묵을 소재로 쓴 시중에 가장 압권이다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 박목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素朴)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者)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渴求)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시집 "난(蘭)기타", 1959)
박목월선생님은 봄날 저문저녁에 메밀묵을 드셧지만 아무래도 메밀묵을 먹어야할 시절은 늦가을 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때가 옳다 . 날이 차가워지면 메밀묵은 탱탱한 탄력을 띠기 시작한다. 맛도 맛이지만 식재료의 씹는 맛 또한 중요한 식감이기 때문이다 냉면을 좋아 하는 사람들도 이런 뜻으로 겨울에 먹는 냉면을 최고로 친다 . 탱탱한 면빨. 찬바람이 불면 름날 힘없고 흐늘흐늘한 묵발에 능청능청한 힘이 실리는 것이다 .
묵이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순 우리식 먹을거리이다. 잡곡을 가루를 내거나 그냥먹는 것이아니라 곡물의 녹말 앙금을 뽑아내 고아 굳히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제맛을 낸다 .
메밀묵을 만들려면 메밀을 씻고 까불려서 깨끗이 헹군 뒤 끓는 물에 담가 쓰고 떫은 맛을 우려낸 뒤 맷돌에 갈아 체로 걸러 가라앉힌 앙금으로 풀을 쑤듯 끓이는것이다 천천히 가마솥에 불을때며 은근하게 졸이는 과정이 가장 고된 일이다. 묵의 질감이나 탄성을 확보하는 것이 오랜 솜씨와 경험을 요구한다 너무세게 불을 때면 바닥에 누룽지가 생기고 묵 전체에 탄내가 배어 맛을 버린다 . 그러니 혹 진도가 빠르다고할때면 물을 부어 농도를 묽게 하는 응용도 필수이다 . 묵의 농도가 적당하다는 것은 저어주던 나무주걱을 세워 보면 안다고 했다 나무 주걱이 반드시서면 사발에 담아 식힌다 성급하게 식히면 묵이 뻣뻣해지나 찬바람에내놓아 서서히 자신이 머금고 있던 온기를 뱉아내게 해야한다 . 묵은 맛이 아니라 질감과 탄력 농도의 미학을 지닌 가장 한국적인 먹을 거리이다. 결국 묵맛은 묵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묵을 만드는 오렌 경험과 양념에 있다는 말이다 .
소위 묵밥은 도토리묵으로 하느냐 메밀묵으로 하느냐 하는 원재료의 구분이 있다, 도토리 묵밥은 충청도지방의 옥천 정지용 생가 근처 구읍 욕쟁이 할머니집과 .과 대전 구즉이 잘한다. 구즉마을은 대전 유성구 봉산동에 있다. 대전사람들은 가끔 대전에 '6미(味)3주(酒)'가 있는데 설렁탕, 돌솥밥, 삼계탕, 숯골냉면, 대청호매운탕, 구즉도토리묵과 오미자주, 국화주, 구즉농주다. 구즉은 6미 중 하나와 3주의 하나를 가진곳이다 . 말하자면 그곳 도토리묵은 농주와함께 먹으면 끝내 준다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그래서인지 전국에 소문이 퍼져 이곳에 묵집 30개가 모여 있다 맛있는 도토리묵은 로 가을에 주운 졸참나무 도토리로 만든 것이 맛있다고 하는데 이제는 중국산 도토리묵을 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할 형편이다 . 구즉의 묵밥은 묵을 손가락 굵기의 채로 썰어 멸치 다시마 무를 넣어 끓인 육수를 붓거나 동치미 국물에 잘게 썬 김치와 김을 얹는다. 거의 모든 묵밥의 보편적 레시피이다.
그러나 메밀묵은 단연 영주가 으뜸이다. 만드는 법은 도토리묵밥과 비슷하다. 사람들의 소문은 소백산 부석사 가는 길목 순흥묵밥집을 꼽는데 서울서 같이 내려간 권달웅 시인과 영주 토박이 시조시인 박영교 선생을 따라 나선 묵밥집은 영주시내 성당 뒷길 골목에 있는 곳 . <묵밥>이란 자그마한 간판 하나가 달랑 달린 가정집이었다.
주문 역시 박영교 선생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영주에서 올해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한 박영교 선생의 내공을 믿은 것이다 . 잠시 후 태평초라는 낯선 이름의 전골과 모두부 한모 , 그리고 노란 조밥에 메밀묵밥이었다. 묵밥집 메뉴의 전부였다 .
태평초 탕평채?가 경북 안동에 전래되면서 ?태평초?가 되었다고 하는데 막상 나온 태평초는 바특한 김치 전골에 가까웠다 탕평채란 청포묵을 가늘게 채 썰고 고기볶음, 미나리, 김, 달걀지단 등을 섞어 낸다. 그러니 이 음식의 유래가 탕평채에 나왔음을 믿어야 할지 말지 여하튼 낮술 한잔을 마시고 전골 속에 메밀묵을 한점 입에 넣었다. 보통의 메밀묵과는 달리 탄성이 두 배는 강했다. 끓여 내는 음식이라 보통 메밀묵보다는 좀더 졸여야 하며 메밀묵의 겉면 반들거리는 껍질부분으로 만들어야 한결 맛깔난다는 설명을 듣고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경주에 가면 메밀묵 건거니를 넣어 주는 해장국이 있다 . 그 맛이 새삼 태평초와 연결되며 돼지고기 한점과 김치 메밀묵을 숟갈 하나에 올려 떠먹는 재미도 그만이었다. 가을비나 겨울비가 촉촉이 내려 으슬으슬 하는 날 좋은 벗들과 나누는 술안주로는 이 이상이 없을 듯했다 . 주인장의 이야기로는 우리가 찾은 날 묵을쑤지 않아 구수한 묵누룽지를 드리지못한다고 아쉬워했다 . 아마도 그 동네 분들이 은밀하게 즐기는 별식이 묵누룽지인듯 했다 .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구수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
묵밥. 총총 썬 김치에 깨소금과 참기름을 두르고 올라온 묵밥 한 그릇에 노란 조밥 한 공기를 넣어 떠먹는 메밀묵밥의 맛은 참으로 소박하고 풋풋한 음식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메밀향이 가득 퍼지자 잊고 있었던 허기진 시절을 문득 떠오르게 하는 묵밥. 어느 시절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지 않았던가.
전국 도처에 보리밥집이 늘어나고 수제비나 오늘 먹는 묵밥처럼 양을 불린 궁핍함 시절들의 먹을거리들을 다시금 빛을 보고 있다 .일부러 골라 먹는 사람들은 그것이 맛있어서라기보다는 그런 음식에 담겨있는 자신의 추억을 먹는것이다. 기름진 오늘의 음식들이 거칠고 조악했던 지난날의 음식들보다 맛이 좋다는 역설이 속속 영양학적으로 증명 되고 있다. 패스트 푸드보다는 슬로우 푸드를 지양하고 웰빙이란 말이 아주 보편적인 단어로 귀에 익숙해지는 때이다.
바람은 차가워지고 밤은 길어진다. 메밀묵 사려 라고 외치는 메밀묵 장사의 아련한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
역시 맛집 기행은 김용범이 젤 낫다. 향토 원주민들을 통한 것이라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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