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1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의 나라 》
살후 1:5~9
〈 이게 나라냐? 〉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이나 구호 들어보셨지요?
정권에 찬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외치는 소리입니다.
“이게 나라냐?” 나라가 어떻다는 뜻입니까? ~ 못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못마땅하니, “갈아보자!” 이 주장입니다. 그래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까지 나아갑니다.
선거철이 돌아오면 으레 나오는 주장들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둘로 나뉠 수 있을 겁니다.
① “맞아, 이건 아니지, 정말 나라가 이래서는 안된다!”
② “왜? 뭐가 어때서? 나라가 어떻게 돼야 하는데?”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제가 오늘 묻는 것은, 설교하는 저나 여러분이 어느 쪽이냐를 묻고자 함이 아닙니다.
여기서 같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한평생 살아가는 중에 자기 맘에 쏙 드는 나라, 그 나라가 과연 있겠냐는 것입니다.
① 번에 해당하든, ② 번에 해당하든, 자기 맘에 100% 부합하는 나라가 있을까요?
☞ 이 문제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플라톤은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에 동조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플라톤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치를 플라톤은 “우민 정치”라고 비꼬았습니다.
아테네의 정치를 오늘날 민주주의의 효시로 보기도 하는데, 플라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테네의 정치꾼이나 그를 따르는 귀족이나 “어리석은 자들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플라톤이 주장하는 ‘나라다운 나라’의 정치는 누가 해야 하느냐?
철학을 아는 자, 그들이 해야, “그게 바로 나라다!”라고 주장합니다. “철인정치”입니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창했지만, 역사에서 철인정치가 이루어진 사례는 없습니다.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의 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역사상 “나라다운 나라”는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 사람은 한평생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을 품고 살아갑니다.
〈 나라의 본디 주인 〉
☞ 인간은 왜 “이게 나라냐?”라는 원초적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셨으니, 천지, 삼라만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 주인이십니다. 사람의 주인도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창조물 중에서 유독 사람에게만은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왜 주셨습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미워할 수 있는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가운데 선택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워할 수 있는 자유가 폐쇄된 상태에서 나오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건반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조건반사가 아닌 사랑을 받고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미워할 수 있는 자유를 함께 허락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빼고 우리끼리 하겠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끼리’ ‘하나님 빼고 우리끼리’ 나라도 만들었습니다.
마치 자식들이 아버지를 떠나 ‘내 판단, 내 책임으로 살겠습니다’라고 함과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의 생각과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판단으로 인생을 삽니다.
오늘날의 ‘나라’ 바로 이와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우리끼리 만들고 우리끼리 꾸리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 사람이 만든 나라,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힘 센 자가 힘 없는 자를 지배하는 특성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힘이 곧 ‘정의’입니다. 힘이 약한 자들은 힘이 센 자들 아래 모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힘을 보유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권불십년이라 했습니다.
힘이 약해진 사람은 끌어내리고 다시 힘을 가진자가 지배하게 됩니다.
☞ 그래서 사람들 입에서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멈추지 못합니다.
〈 주님이 선포하고 바울이 전파하는 나라 〉
인생 참 가련합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자기 맘에 쏙 드는 나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바라는 나라가 마음속에는 있지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현실과 타협하여 잘 적응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현실과 타협이 안되어 힘들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의 나라”입니다.
“세상의 나라”를 향하여 “이것이 나라냐?”라고 투정하고 타박하면서도 오늘을 삽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플라톤이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우민정치’라 했습니다.
철학자가 지배해야 하는 ‘철인정치’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400년이 흘렀습니다.
그리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팔레스타인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천국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선포하기까지 사람들은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 나라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있다!” 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본문인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에서 가져왔습니다.
(5절)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 사도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선포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 백성 〉
☞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선포하고, 바울이 전파합니다.
“예수 믿는다” 할 때,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선포하고, 사도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이 진리를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슬픕니까?
“세상의 나라” 못마땅합니다. 마음 속에 “이게 나라냐?” 불만을 가지고 평생 삽니다.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나라, 그 나라가 꿈속에서만 있다면 얼마나 슬픕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사 11:4~5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이사야 11장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주시는 나라입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보겠습니다.
사 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모든 피조물 간에 반목과 대립과 살상이 없는 나라입니다!
〈 피조물 간의 조화, 깨어지다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 때는 지금처럼 먹이사슬이 없었습니다.
동물의 생존을 위한 양식은 식물이었습니다.
사람은 채소와 과일을 먹고, 동물은 풀을 먹었습니다.
창 1:29~30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셨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중에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피조물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은 ‘감이 달까 고욤이 달까’ 저울질하고 유리한 것을 취할 수 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와 생명과를 비교하여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따먹을 수 있어요!
☞ 사람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생명과가 아니라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하나님은 창조 질서의 판을 다시 짜야 했습니다. 왜요?
선악과를 따 먹은 첫사람 아담하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노예가 되었으니,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하와에게 징벌이 부과됩니다.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가혹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를 재편성합니다.
처음 창조는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은 상태의 질서였습니다. [플랜 A]입니다.
그러나 달라졌습니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휘하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노예가 되었으니 그에 합당한 질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뒤흔들었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먹이사슬의 단계 안에 속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육식이 시작됩니다. 천적관계가 생겼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쫓고 쫓기는 피튀기는 아사리판이 되었습니다. [플랜 B]입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나라’입니다.
☞ 세상의 나라에 사람의 만족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늘 불만입니다. “이게 나라냐?”
〈 가장 큰 소망 하나님의 나라 〉
선악과 범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먹이사슬의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약육강식, 자연도태, 적자생존이 불가피한 무한경쟁의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따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 하와의 선택은 “죽음”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따먹었으나 죽지 않았다.”
사람들은 참 영악합니다. 당장 죽어야 죽는 것이라고 우깁니다.
따 먹고 80년 후에, 혹은 100년 후에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까?
이렇게 애처롭게 살아가는 인생, 어떤 세상에 살아가야 합니까?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무한경쟁, ‘세상의 나라’”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 자칫 절망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거 못할 것 같다.’ 희망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있다. 그 천국에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믿어라!!”
5절 다시 봅니다. 5절 짧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줍니다.
(5절)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우리가 예수 믿음은 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은 ②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은 ③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은 ④ “세상의 나라에서 받는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④ 번째가 중요합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고난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수 믿음으로써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안 믿었으면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음으로써 당하는 고통은 무엇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아 이 고통, 이 고난이 내가 예수 믿음으로써 오는 것이구나!” 응답을 받으십시오!
단, 이 고난에 비하면 “하나님의 나라” 소망은 너무너무 크고 귀중하구나! 믿으십시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