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에 관한 시모음 39)
가을 비 /김교태
가을비가
창밖 난간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어깨 비스듬히
감물 들인 광목 책보를 메고 앉아
초동(樵童)으로 돌아가자
나의 아명(兒名)을 길게 부르고 있다
모두가 잠든 밤중이라
반갑게 소리치지 못하고
창을 열고 말없이
내다만 봐야 했던
아! 가을은
주렁주렁
미안한 마음이 열리는 계절!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권대웅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기억이 있다
당신을 적셨던 사랑
아프지만 아름답게 생포했던 눈물들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 건널목에서
비 맞고 서 있던 청춘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마다
기우뚱 하늘 한구석이 무너지고
그 길로 젖은 불빛들이 부푼다
흐린 주점에서 찢었던 편지들이
창문에 타자기의 활자처럼 찍히는
빗방울의 사연을 듣다보면
모든 사랑의 영혼은 얼룩져 있다
비가 그치고
가슴이 젖었던 것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몸으로 젖었던 것들만이 잊힐 뿐이다
밤거리를 맨몸으로 서성거리는 빗방울들
사랑이 떠나간 정거장과 쇼윈도와 창문과
나무들의 어깨 위로
구름과 놀던 기억들이 떨어진다
국화 허리 같은 당신이 떨어진다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가을비 내리네 /김덕성
들릴까 말까
속삭임
다소곳이 창문밖에 찾아오는 손
임인가
창밖을 내다보니
슬며시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반갑구나
진작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늘을 우러르던
고마운 비
내 손바닥에 앉은 빗방울 하나
따르르 구르며
내 가슴에 안기며 적시는
임의 사랑의 편지
가을비에 젖다 /이홍섭
하반신을 못 쓰던 그 여자애는
매일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에 나오곤 했다
학교 앞 그애의 집 앞을 지날 때면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와
내리는 비를 어디론가 불러가곤 했는데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
그애가 치던 피아노 소리는
또다시 내 방에 흘러들어와
생의 먼 곳을 적시곤 하는 것이다
가을비 속에서 /범진 배태성
해가 뜨지 않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만
슬픈 세월만
이 아침에 머뭅니다,
뿌연 먼지 덕지덕지
억 겹의 한처럼
주루룩 창문에 흐르고
그래도 깨어난 외로움이
밖을 내다봅니다,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을비 5 /은파 오애숙
가을과 겨울길섶
경계선 선언하려
갈바람 휘날리는
산등성 위로 왔누
세상사 만물이치
알리려 창열고서
산야를 붉게 적셔
눈물로 이룬 바다
제자리
돌려주려고
진액되어 숨죽누
가을비에 묻어온 사랑 /이민숙
가을이 오기를
가을에 비가 내리기를
길게도 기다렸지요
지난 가을비에
두고 간 사랑의 잔영으로
주저 없이 뛰어내리는 쌀비
흠뻑 적시어 메마름이 오기 전에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듯
단비로 오셨습니다
낙엽 되어 방황하는 저 가을도
그대 오시기를 동구 밖에서
까치 발로 기다렸습니다
온 누리 고루고루
분무기로 흩뿌리는 생명의 물처럼
촉촉하게 내립니다
한 계절을 보내고 맞이하기에
차란차란 차오르는 그대는
묻어오는 가을사랑입니다
가을비 /이봉우
가을비 내리는 날
마음을 씻어 봅니다
봄여름 쌓인 먼지
깨끗이 깨끗이
마음의 묵은 때 벗겨봅니다
가을비 장대처럼
한참을 내리더니
잿빛 하늘은 환하게 밝아옵니다
내 마음도 맑아집니다
퐁퐁 솟는 샘물처럼
눈 시린 하늘처럼
가을비 /이명희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내 마음 적시며 한없이 흘러내린다
이 비가 그치면
산야의 가을은 더욱 깊어질거야
울긋불긋 물감 드리운 것처럼
얼마나 아름다울까
청잣빛 하늘 양떼구름 흘러 흘러
한 폭의 수채화처럼
산마루 걸치며 바람 부는 대로
그림 바뀌는 황홀한 가을
정처없이
굽이진 오름길 좋은 사람들
함께할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오고 가다 눈인사 나누며
미소 짓는 여유로운 하루가 된다면
내일 눈을 감는다 하여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쉼 없는 고단한 삶 속
아!
이리 바쁘게 살고 있는
내 인생이 처량하다
거리에 가을비 오다 /이준관
노란 우산 아래로 장화의 물방울을 튀기며
나는 거리로 나선다
비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자, 나는 들으마, 너는 말하라
나는 외로운가 보다
나는 누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가 보다
풋내기 시인처럼 앞뒤 운이 맞지 않는 네 말소리에
나는 열중한다
얼간이처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나는 외로운가 보다
길가에는 젖은 발들이 흐른다
젖은 발들이 내 쓸쓸한 발등을 밟는다
나뭇잎들이 비의 말을 따라 흉내를 낸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따먹으며, 나뭇잎은 나보다 더 외로운가 보다
항상 나에겐 낯설기만 한 비의 알파벳
이국 처녀의 눈처럼 파란 비 오는 가을 풍경
나는 누구를 방문할 일도 없는데
꽃집에 들러 꽃을 산다
주정뱅이처럼 꽃을 보고 혼자 지껄이는 나는
형편없이 외로운가 보다
비야 비야, 안녕 /김경희
가을비 촉촉이
인사를 하네
가벼운 입맞춤
하루 힘이 되네
누가 뭐래도
난 그렇게 생각해
그리움 나날
반짝반짝 꿈을 꾼다
가을비 석별 /오보영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젠
갈 때가 된 듯하여
막 출발하려든 참 이었단다
그간 먼 길 떠날 채비도 다 했고
무엇보다도 네가
새로운 님 맞을 준비를 이상 없이 다 해놓고
차분히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맘 편안히
발걸음 옮길 수 있어서 더욱 좋구나
모쪼록 앞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좀 매섭고 차갑더라도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 품어 안고 보듬으면서
다소 긴 시간
우리 다시 만날 그 때까지
무탈하게 잘 지내거라
가을 빗소리 /김복수
시월 첫날 온종일 비가 내린다
식구라고는 달랑 하나뿐인 칠순 넘긴 마누라와
가을 빗소리 듣는다
당김줄 늘어져 바람 빠진 장구 소리처럼
빗소리가 마당에 픽픽 드러눕는다
나무 이파리들이 뚝뚝 눈물 보인다
마누라는 다 된 곡식 잡아간다. 하늘보며 구시렁거리고
나는 빗소리가 어쩐지 나를 보내는 장송곡처럼 서글퍼
찬바람 한 움큼 휑하니 눈 속에 찾아와 두 뺨에 흐른다
아버지는 오복 중에 건강이 으뜸이라 하시며 서둘러 가셨는데
나는 된서리 맞은 호박 이파리처럼
맥아리 없는 몸뚱이 붙들고
당김줄 늘어진 장구 소리 듣는다
악보에 없는 슬픈 장송곡 연주 듣는다
아버님의 가을비 /청학(靑鶴) 김영전
오늘 새벽에 잠을 깨니
처마의 지붕에 보슬비가
장단을 맞추는 듯 내리고 있네
문득 옛날의 고향 아버님 생각나네
지금의 가을비는 아버지는
원치 않은 가을비가 가슴을 태웠을거다
농부의 마음 누가 알까나마는
벼를 낫으로 베고 단을 묶고 논둑에
가리치고 건조를 해야 하는데
비가 내리니 얼마나 애가 탓을까?
타작 하면 곧 바로 노적을
해야 하니까 건조가 절대적이다
조용한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
처마의 보슬비 장단에 옛 상이
갑자기 떠오른다 왜일까?
조용히 눈을 감고 고향의
가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아버님의 혼잣말 저 가을비는
언제 그치고 햇빛을 주려나
자연과 더불어 삶을 지내시고
먼 여행을 먼저 가신 아버님
오늘 따라 문득 가을비에
생각 납니다
가을 비 /허태기
이른 새벽 잠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떠 본다
9월의 벽두부터
누군가가 찾는 듯
가만히 창가로 다가가니
바람자락 휘두르며
낙수가 부르고 있다
가을이 온다고
어서 와서 보라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빗속을 뚫고
스몰등을 켠 차량들이
어디론가 질주하고
월요일의 우산들이 서둘러
보도를 오간다
무덥던 여름이
소리 없이 물러나고
아직 닿지 않은 빈자리를
추적추적 비가 채운다
잎 새에 쌓인
묵은 먼지 씻어내고
고운 색 단장하려고
9월의 첫날에 비가 내린다
가고 오는 틈새가
왠지 허전한데
공허한 마음을 가을비가
메운다.
가을비 /이성진
짜라락 짜라락 톡탁 톡
새벽잠 깨우는 빗소리에
잠자리 털었습니다
반가움에 창문 열고 하늘에 악수 청하니
제법 세찬 비 반갑게 인사합니다
올해 들어 유난히 진절머리나는 가뭄 길었는데
목마른 갈증 풀어 줄 가을비 참하게 내리니
올 가을에는 단풍물도 곱게 들겠습니다
이른 가을 내리는 살가운 비는
모두가 바라는 풍년을 약속하는데
우리도 살면서 이 처럼 소중한 것
잘 만들면 좋겠습니다
서로 간에 믿음 주는 약속도 그렇고
보이지 않는 마음 움직이는 사랑도 그렇고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 참 많습니다
올 가을에는
가을비 참하게 내리는 오늘처럼
모두에게 좋은 때가 찾아들어
풍성한 수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간에
넉넉한 마음 덤으로 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