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에 관한 시모음 22)
진달래꽃 /정연복
요즘 삶이 힘들고
많이 지쳐서
봄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것도 몰랐는데.
만우절인 지난주 토요일
친구랑 불암산 오르는 길에
군데군데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꽃.
너무너무 예쁘고
반가운 마음 그지없어
가까이 가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송이송이 꽃마다
웃는 얼굴로 속삭이네
긴긴 겨울 너머
희망의 새봄이 왔다고.
난쟁이 진달래 /김길자
100년 만에 온 폭설과 한파
끝없이 추락하는 한랭전선에 서서
봄을 기다리는
금강산에서 만난 난쟁이진달래
흙 한줌 없는 바위틈에서
언 시간을 녹이고 있을까
두툼한 겨울이불 걷어내고
일만 이천 봉 에워싼 안개 헤집으며
삶의 희망을 보여준
난쟁이 진달래
너에게 달려간다
진달래꽃 /조남명
이 땅의 산과 들에
민족과 오랜 세월
인고(忍苦)를 같이한 진달래꽃
보는 이야 있건 없건
어디든 숨어 피어
빼어나지 못해 수수한 꽃
구백삼십여 외침에 시달린 빛이런가
빨노랑 외래 꽃 우쭐대도
역사는 내가 아느니
등굽은 채 산하에 누웠다
춘객(春客) 눈 맞춤에
부끄러워 볼 붉어진
시집 온 새색시 같은
은은한 자태의 연분홍 꽃이여!
외로웠던 설움에 북받쳐
수정 같은 이슬 머금고 흐느끼며
외로워 찾는 이를 반기려
잎사귀 모르게 꽃부터 피었는가
아기 진달래 /윤갑수
산마루 양지 녘에
봄바람 살랑이고
햇살은 따사로이
꽃잎을 애무하니
어여쁜 아기 진달래
소담스레 피었네.
진달래꽃 나무 /오석주
파란 하늘 뭉게구름처럼
해 맑은 햇살이
광택을 이루고
꽃 탑이 뭉글뭉글
산속 깊이 들려오는
산 새 울음소리
악보 없는 음표
의연히
서 있는 진달래꽃 나무
흠뻑 젖고
수도승이 된 양
유유자적
도심 속 이탈하여
자연과 숨바꼭질
태양광선
독차지하겠다는
진달래꽃 나무
붉은 잎으로 활짝 웃는
선속의 무법자
진달래꽃 하나 /정연복
좋은 벗과 함께 산행 중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막걸리를 따른 잔에
연분홍 진달래꽃 하나 띄웁니다
별것 아닌 막걸리 한잔이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기쁘게 살자고 다짐하지만
살아가는 일에 지쳐
생기와 여유를 잃어버리기 쉬운
나의 작은 마음속에도
진달래꽃 하나 띄우면 어떨까요.
진달래 /유영서
담장 너머 진달래가
곱게도 피었습니다
젊은 햇살이 사랑에 빠져
한창 연애 중입니다
나도 끼워 줄 수 없느냐고
물어봤더니
흐흐흐 웃기만 합니다
바라만 보아도
행복해집니다
아마도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에
사랑이 걸려 봄을 피워 냈나 봅니다
진달래꽃 /향초 허정인
봄 산은
분홍빛 사랑에 빠졌어요
이 산도
저 산도
비탈진 벼랑 끝
진달래꽃!
누리고 있는 저 자유로움
저 멋진 자태를 보세요
순하디 순한
고운 꽃잎으로
목젖 보이며 웃는
활짝 핀 진달래꽃!
어지러운 세상 모른 채
이 산, 저 산,
속살에 안겨
곱게도 물들이네요
분홍빛 사랑의 파장
아--아!
나의 발길도
구속 없는 자유를 누리며
진달래꽃에 빠졌습니다.
진달래 /허욱도
어떤 착각일까
겨울이 간 줄 아는지
봄이 와 있는 줄 아는지
천주산 기슭에서 웃고 있는 진달래 한 송이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살짝 왔다가 가는 것일까
시절이 아닌데
찬바람 불면 어찌하려고
이른 봄에 진달래가 찾아온 걸 보고
마른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봄이 놀라서
허둥지둥 달려오다가 흘린 봄비에
흠뻑 젖은 천주산이
찬 서리 맺힌 겨울을 얼마나 안아줘야
따스해진 봄을 볼 수 있는지
진달래로 화두 하나 쥐여준다.
문둥이와 진달래꽃 /나상국
하늘만 빼꼼 보이는
두메산골 오지
청아한 솔바람소리
눈 녹이고
꽃피는 봄이오면
산에 산에 진달래꽃 피면
이산 저산
연분홍 염색한 속치마 널어 놓은 듯
바람에 흔들리며 온통 붉게 꽃이 피면
긴 점박이 꽃술 흔들며
진달래꽃 피어나면
아이들 신이나
산에 올라 진달래꽃
입에 따 넣으면
에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산 저산
문둥이가 아이들
뒤를 쫓는다
진달래 /이주희
방명록에 서명하고 인사를 하니
부조 봉투를 받아든 봄이 고맙다며 말한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팬지는 나비처럼 날아오르게 해주고
제비꽃은 편지를 전해주려나 머뭇거린다
아장아장 애기봄맞이와
방글거리는 노란 민들레에 빠져든다
나팔수선화로 나팔을 불고
금낭화 주머니에 복을 소복이 담고 싶다
라일락 향수로 뒤발하고
개나리 입에 물고 나들이 가고 싶어 하는 사이
봄날이 여우볕처럼 지나가버릴 것 같아
연분홍 치마 닮은 진달래에 손이 가는 순간
안내 멘트가 나온다
다음 잔치 하객이 올 시간이니
서둘러 자리를 비워주시기 바랍니다
도솔산 진달래꽃 /김동주
도솔산 몸에서 여자아이 향기가 난다.
어둠을 후후 불어대는 달빛으로 편지를 쓰는
꽃들이 산중 생애를 쏟아낸다
뜨겁게 달아오른 기억을 또박또박 제 몸에 물들인다
젖몽올 같은 입술로
굳어버린 冬土의 시간을 녹여낸다
언어가 생기기 이전 신음소리로
꽃바람을 호호 불어댄다
새벽이 오기전
도솔산 능선길을 꽃들이 먼저 뛰논다
서로 젖가슴 만지며 아팠던 멍울을 세운다
총총히 박힌 하늘의 별 같은 언어를
귀 밝은 바람에 속삭인다
도솔산 가는 새벽길엔
환한 냄새가 읽혀지고 있다
진달래 술 /이외수
생각납니다
폐병 앓던 젊은날에는 양지바른 산비탈
각혈한 자리마다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었지요
지금은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
부질없는 욕망은 다 버렸지만
아직도 각혈같은 사랑만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술 한잔 주시겠습니까.
진달래 분홍 웃음 /박종영
아주 살포시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린다,
겨우네 웅크린 외로움도 꽃잔등 타고 번진다.
오싹오싹 가시덤불 훌쩍 넘어
옹알대며 얼어붙은 겨울 강 건너와
가느다란 몸 마디마디 흥겨워
봉곳하게 촉 궁그는 진달래,
진정 메마른 곳으로 퍼 나르는
꽃 비 머금고,
날겹의 옷을 벗기라도 하려는가?
초록의 숲에서 바라보는,
저토록 움찔거리는 환락의 몸뚱이
톡, 한 개 따 입에 넣으니
애써 수줍음 감추는 너 분홍색 웃음꽃,
봄날, 어지러운
뻐꾸기 울음 그립지는 않더냐?
진달래의 기도 /정연복
올해도 산에 들에
이 몸 피워 주셔서 감사해요
‘사랑의 기쁨’이라는
꽃말을 주신 것도.
연분홍 빛깔의 나의 고운 몸
나의 순한 영혼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의 가슴 가슴마다
사랑이 움트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