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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를 키운 손정의의 힘"
“이 사람 뭔가 일을 낼 것이다.”
1994년 여름 소프트뱅크가 주식공개를 했을 때 필자는 직감했다.
소프트뱅크 설립자인 손정의(일본명 손마사요시)가
재일동포이기 때문에 주목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세상을 변화시킬 ‘신천지’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이다.
1994년 필자는 막 세상에 선보인 인터넷의 위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15기 숙생으로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한 일본의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経塾) 덕분이었다.
인터넷이 아시아로 연결될 당시,
게이오(慶応)대학 쇼난 후지사와(湘南藤沢·SFC) 캠퍼스는
한국·중국·동남아시아의 허브 역할을 했다.
간단히 말해 SFC를 통해 인터넷이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쓰시타정경숙은 SFC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SFC 허브를 통해 당시 신천지나 다름없던 고속인터넷망이 마쓰시타정경숙 안에 깔렸다.
한국 친구들에게 이메일이 얼마나 편한지 알려줬지만,
인터넷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엄청나게 느린 한국의 인터넷 속도 때문에
인터넷에 대한 관심 자체가 극히 희박하던 시기였다.
당시 손정의에 대해 특별히 주목한 이유는 소프트뱅크 상장 무렵
실린 일본 언론의 기사들 때문이었다.
1978년 소프트뱅크의 종잣돈이 된 1억엔에 관한 기사다.
음성인식 자동번역 소프트웨어가 소프트뱅크를 일으켜 세운 결정적인 힘이었다.
일본어로 말을 하면 영어로 번역해서 글로 보여주는,
전자계산기 스타일의 기기와 소프트웨어다.
아이폰 음성인식 소프트웨어인 시리(Siri)의 초기판 정도라 보면 된다.
원래 손정의는 이 기기를 마쓰시타전기(松下電器)에 팔려고 했지만
거부당하자 샤프 전기에 1억엔에 판다.
현재 중국산 음성 번역기의 경우 단돈 50달러만 주면 살 수 있다.
필자가 일본에 머물던 1994년 당시에는 5만엔이 넘는 고가의 첨단기기였다.
손정의는 이후 1억엔을 바탕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소프트웨어 전문회사를 차린다.
종업원 수 30명이었다. 1970년대 말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던
인베이더(Invader) 게임 소프트웨어를 일본과 아시아 전역에 배포해 대성공한다.
당시 필자는 그가 만든 샤프 제품의 음성 번역기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더불어 고등학교 재학 때이던 1978년 무려 100원이나 하던
인베이더 게임에 빠진 기억도 갖고 있었다.
일본에서 느낀 인터넷의 위력과 함께, 이미 경험한 음성 번역기와 인베이더 게임을 통해
손정의가 신천지를 이끌 주인공이 될 것이란 느낌을 자연스레 갖게 됐다.
20여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필자는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에게
주기적으로 글로벌 리포트를 올리고 있었다.
김 회장은 한국의 청년을 세계로 몰아세운
첫 번째 글로벌 경영자가 아닐까 싶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그의 생각은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신한국의 나침반이자 모토(Motto)였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영어교육을 받으러 워싱턴에 가는 세상이 됐지만,
한국 청년이 자유롭게 외국 유학에 나서게 된 것은 1987년 무렵부터로 기억한다.
세계로 눈을 돌리라는 메시지는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결의’이기도 했다.
필자는 당시 마쓰시타정경숙의 도움으로 전 세계를
오갈 기회를 가졌다.
김 회장의 ‘세계는…’에 감동을 받았기에
현장의 정보를 대우에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전 세계를 오가며 올린 수많은 보고서 중 하나가 바로 손정의에 관한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소프트웨어의 첨병으로 나서는 사람이 손마사요시다.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재일동포이기도 하다.
미래산업의 선구자라는 관점에서 한국과의 협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김 회장이 일본에 들를 때 꼭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를 기대한다.”
사실 당시 손정의는 세계경영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세계적 기업인 김우중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김 회장이 필자의 보고서를 직접 읽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하지만,
필자가 아는 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우그룹은 한국 최초의 해커를 특별채용한 곳이다.
인터넷과 IT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기업보다도 빨랐지만,
IMF 체제와 함께 미래를 향한 도약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 이후에도 손정의에 관한 얘기는 일본 신문·방송을 통해 꾸준히
접해 왔다.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알리바바(阿里巴巴)에 관한 기사이다.
2000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손정의가 알리바바에 2억엔을 투자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2014년 가을 중국 최고의 부자로 떠오른 알리바바의
잭마(馬雲)의 얼굴도 당시 일본 잡지에 크게 실렸다.
2000년 손정의는 이미 일본 내에서는 소프트웨어의 최고 강자로 떠오른 상태였다.
국내 사업의 기반을 확실히 다진 상태에서 중국 투자에 나선다.
중국 내 신생 IT기업 20여개사의 책임자를 직접 만나
사업계획을 들은 뒤 곧바로 투자에 나섰다.
알리바바는 가장 화제가 된, 최고의 투자금을 받은 곳이다.
당시 손정의는 20여 기업과 각각 10분 동안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10분이 짧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미국의 벤처캐피털 비즈니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길다고 말할 듯하다.
프로 입장에서 돈 냄새를 맡는 데는 1분이면 족하다.
막말로 1분 만에 대박 여부에 대한 판단이 선다고 한다.
길게 줘서 5분간 들은 뒤 5분간 질문을 하는 식이다.
손정의는 16살부터 6개월간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해
17살 때 샌프란시스코 세라몬테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부모가 반대했지만 일본에서 고등학교 재학 중 미국 수학여행을 다녀 온 뒤 자퇴한다.
‘단신(單身) 미국행’을 고집했다고 한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이 뜨기 전인 1977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한다.
입학 즉시 소프트웨어 공부를 시작해 1년 만에
자신의 작품인 음성인식 자동번역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낸다.
흔히들 놓치기 쉬운데, 손정의는 경영인 이전에 IT 발명가이다.
배경에서 보듯 일본에서 활동하는 최고경영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영어에 능통하다.
영어선생으로 일한 잭마도 영어가 능통하다.
인터뷰 당시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를 진행했다.
10분간 잭마의 얘기를 들은 뒤 손마사요시가 입을 뗐다.
“얼마면 되겠는가?”
“1000만엔에서 2000만엔 정도는
필요할 듯하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2억엔을 투자하겠다.”
당시 20여 중국 IT회사들이
받은 투자금은
평균 2000만엔, 즉 20만달러 수준이었다고 한다.
올해 9월 알리바바의 뉴욕증시 상장과 함께
손정의의 알리바바 주식총액이 800억달러를 넘어섰다.
14년 전 투자금의 4000배 이익을 낸 셈이다.
알리바바의 뉴욕증시 상장 후 손정의는
당분간 알리바바 주식을 팔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1년 내에 배로 뛸 것이란 것이 주식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멀리서이지만, 필자가 손정의를 직접 본 것은 올해 3월 11일
워싱턴에서다.
백악관 북쪽 문 반대편에 있는 미 상공회의소 본관에서였다.
미국 통신 시장의 미래와 과제를 테마로 한, 미국에서 행한 그의 첫 번째 공식 연설이었다.
사실상 미국에서의 데뷔에 해당한다.
미 상공회의소는 워싱턴, 나아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로비단체 중 하나이다.
글로벌 비즈니스의 첨병에 해당한다.
손정의의 연설은 IT 관계자 정부요인 로비스트 등 500여명이 모인 곳에서 이뤄졌다.
스티브 잡스처럼 단상에 올라가 혼자서 영어로 행하는 프레젠테이션이다.
연설의 주된 내용은 통신 이용객들의 편리와 이익을 높이자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AT&T와 버라이존(Verizon)으로 대표되는 2강(强)과, 스프린트(Sprint)와 T-모바일(Mobil)의
2약(弱) 구도를 3강체제로 바꿀 경우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손정의는 지난해 7월 216억달러를 투자해 스프린터를 구입했다.
T-모바일도 구입해 AT&T와 버라이존에 필적하는
대형 통신회사를 설립하겠다는 것이 연설의 주된 취지였다.
결국 8월 초 소프트뱅크가 T-모바일 구입을
자진 철회하면서 3강 체제는 무위로 돌아가지만,
손정의의 연설은 미국을 대표하는 기존의 통신사에 대한
선전포고쯤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통신사가 문을 열 경우 일본 IT제품들도 미국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우려가 미국 의회 관계자들에게 전달됐다.
미국에서 통신 분야는 인·허가 때 의회의 재가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소프트뱅크가
일찌감치 T-모바일 구입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52분간 이뤄진 미 상공회의소 연설을 지켜보면서 필자가 놀랐던 점은 두
가지이다.
먼저 손정의의 탁월한 프레젠테이션 능력이다.
일본의 그 어떤 경영자도 할 수 없는, 영어를 통한 발제다.
문장을 외워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머릿속의 생각을 전하는 순간형 연설이다.
발음만 들으면 일본인이 아닌 듯하다.
팔을 크게 움직이는 등 몸동작을 크게 하면서 행하는 연설 모습도 특이하다.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정열 같은 것이 프레젠테이션 곳곳에서 느껴졌다.
둘째 미국에 대한 존경과 찬사이다.
10대에 미국에 와서 배우고 익힌 프런티어 정신에 대한 얘기를 빼놓지 않는다.
자유와 풍요의 나라 미국을 “정말 사랑(Love)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1860년대 철도, 1930년대 전기, 1950년대 고속도로,
1990년대 인터넷을 잇는 모바일 브로드밴드가 도래했다고 진단한다.
미국이 세계의 리더로 지속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모바일 브로드밴드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을 만든 나라가 미국이지만, 모바일 브로드밴드는 한참 처져 있다는 것이다.
157㎝가 채 안 되는 키지만, IT세계의 미래를 전망하는
손정의의 시각은 그 어떤 IT거인보다도 원대하다.
비용절감이나 효율성 같은, 소비자 중심의 IT를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일본 특유의 서비스 정신을 엿볼 수도 있었다.
미국의 강점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약점도 충분히 알고 있는 연설이었다.
미국의 부족한 부분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의회가
그의 사업 구상에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손정의는 미 상공회의소 연설이 끝난 저녁,
미국 공영TV인 PBS의 간판 프로그램 찰리 로즈(Charlie Rose) 토크쇼에 등장했다.
32분간 얼굴을 맞대고 진행하는 인터뷰 스타일의 프로그램이다.
손정의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미 상공회의소 연설의 연장선이지만,
보다 인간적인 면을 부각하면서 미국 IT업계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아이폰이 나오기 2년 전에 스티브 잡스를 찾아가 애플의 ‘신무기’가 등장할 경우
독점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애플 아이폰이 나올 것을 예상해 200억달러를 투자해
통신회사를 미리 사들였다는 기업비밀도 소개했다.
아이폰은 현재 일본 전체 모바일 시장의 70% 이상을 점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를 미리 만났기에 애플 독점공급권을 따냈고
그 덕에 소프트뱅크의 주가도 수직상승했다.
‘하얀 집(白戶家)’ 시리즈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텔레비전 광고이다.
도시의 4인 가족을 모델로 한 소프트뱅크의 30초짜리 광고이다.
전형적인 일본 가정인데 출연자의 모습이나 배경이 특이하다.
어머니와 딸은 평범한 일본 여성이지만 남성 배역인 아버지(お父さん)가 흰 개(犬)이다.
더불어 장남은 코지로(小次郎)라 불리는 흑인이다.
가정부 배역은 영화 ‘맨 인 블랙(Man in the Black)’의 주연인
토미 리 존스(Tommy Lee Jones)가 맡고 있다.
하얀 집 식구들은 소프트뱅크의 다양한 모바일 프로그램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이들 출연진이 식사를 하거나 쇼핑을 하면서
스토리 중간중간에 소프트뱅크 광고를 전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발상의 광고로, 사실 처음 보면 뭘 말하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바뀌며 새로운 스토리가 선보인다.
일본인들은 소프트뱅크의 광고를 다민족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발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면에 자리 잡은 이 광고의 해석 가운데는
일본인들이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바로 손정의의 출신 배경이다. 어머니와 딸을 일본인으로 내세웠지만
개, 흑인, 우주인이 등장하는 가족들의 배경이
재일동포 손정의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재일동포로서 자신의 배경을 하얀집이란 가공의 세계를 통해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얀집은 손정의의 배경이자 근본에 해당한다.
구글에 들어가 키워드로 ‘손마사요시’를 치면
곧바로 나오는 것이 ‘손마사요시 국적’이다.
재일동포 3세라고 하지만 일본으로 귀화했는지 여부가
일본인의 관심사 중 하나이다.
손정의는 현재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인이다.
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은
파친코나 식당 같은 분야에 국한된다.
중앙정부의 허가나 도움이 필요한 분야의 비즈니스에서
비(非)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적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나 발언을 할 경우
언제 어디서 일격을 당할지 알 수 없다.
2006년 1월 일본 전역을 놀라게 한 검색 포털사이트 라이브도어 설립자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의 추락은 손정의의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호리에가 만약에 귀화한 재일동포가 아니었다면
체포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소문이 일었다.
손정의가 일본 최고의 부자로 등장한 상태에서 ‘설마’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소프트뱅크가 아닌, 개인 손정의의 추락은 결코 상상밖의 가설이 아니다.
“당신은 한국인입니까?”는 손정의를 만나는
한국인들이 던지는 공통 질문 중 하나이다.
한국 기자의 그 같은 질문에 대해 손정의는 “지구인”이라 답한 적이 있다.
중국인 영어선생인 잭마를 세계적 IT 리더로 만들어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시킨 인물이 손정의다.
국가와 민족, 나아가 피(血)에 근거한 2~3세 경영인 문제로 점철이 된
한국 기업의 풍토 속에서는 100년이 가도 손정의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없다.
단언컨대 손정의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오늘과 같은 성공 스토리를 연출해 낼 수 있었을까.
일본 비즈니스 풍토에서 탄생된 일본 IT 기업인이
손정의의 본래 모습이다. 손정의가 아니라 손마사요시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대한민국 기술 명장이 사는 법"
15~19세에 일 시작, 스스로 기술 터득해 특허 따내 …
장비 고장나면 "기계 뜯어볼 기회"
쾌재
‘우리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 울릉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운동장에서 교련이란 훈련을 받으며 고등학교(울릉종합고)를 졸업했습니다.
살아보니 그것도 아닌데 이 섬만 벗어나면
꿈이 다 이루어질 줄 알고 친구들 대부분 연락선을 탔습니다.
그 시절 도시는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이란 고단하기 그지없어 의지력이 약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36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니 수많은 성공의 씨앗들이
우리 주위에 날아다녔는데도 난 그것을 잡을 줄 몰랐지만
이 친구는 한눈팔지 않고 한우물만 파며 노력했습니다. 내 친구 이름은 이상원입니다.’
경북 울릉군청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울릉도 대로변에는 ‘축! 이상원, 두산중공업 상무 승진’이라는 플래카드도 걸렸다.
최수일 군수는 축전을 보냈다. 울릉군의 자랑이 된 그는
대한민국 명장(2003년 선정) 이상원(55)씨다.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발전기 핵심 부품인
터빈블레이드(엔진 날개)를 만든다.
서류를 만지는 임원이 아니라 기름때 묻혀가며
생산 현장을 지키는 두산중공업 최초의 생산직 임원이다.
이씨가 뭍으로 가는 연락선을 탄 건 1977년.
“대학은 꿈도 못 꿨죠. 가난해서 일하느라 결석도 많이 했으니 고교 성적도 나빴습니다.
촌에선 공무원이 최고 아닙니까. 대구로 나가 공무원이 되려 했는데 낙방했습니다.”
대구의 작은아버지가 “울릉도로 돌아가면 오징어잡이밖에 더 하겠느냐”며
낙담한 그를 붙잡아 기술을 배우도록 종용했다.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도 평생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고 한다.
그렇게 국립대구직업훈련원에서 기술인의 문을 두드렸다.
밀링가공기술을 1년간 익힌 그는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 공채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시 일을 배워야 했다.
이씨는 “당시에는 기업이 쓰는 설비 중에 우리가 생산한 것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미국·독일·영국에서 외국 차관으로 들여온 것이었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죠”라고 말했다.
어깨너머로 기술을 하나씩 익혀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을 무렵 그가 욕심을 낼 일이 생겼다.
올림픽이 열리던 88년이었다.
회사가 터빈블레이드 설비를 미국에서 들여왔다.
미국에서 한 달간 기술을 익힐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미국 회사 직원들이 넌더리를 냈죠.
밤낮없이 묻고 고가 장비에 붙어 실습하느라 떨어지질 않았으니까요.”
그가 ‘터빈블레이드를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 게 이때부터라고 한다.
미국을 다녀온 지 3년 만인 91년 그는 증기터빈블레이드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장 반장 시절이다.
이후 그는 40종의 터빈블레이드를 국산화해 2700억원의 수입대체효과를 거뒀다.
대통령 표창만 세 번, 2011년에는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자기 사업체를 꾸린 명장도 많다.
김대인(59) 대흥제과제빵기계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김씨는 중학교 2학년을 다니다 자퇴했다. 생계를 잇기도 힘든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까까머리 소년은 그 길로 서울 충무로의 수도·냉동기기 설비회사에
들어가 공장에서 숙식하며 허드렛일을 했다.
쫓겨나지 않으려 선배들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냈다.
지칠 만도 했지만 소년은 독했다. 밤이면 일한 내역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냉동과 판금 관련 책을 읽으며 불합리한 점이나 결함을 찾아 적었다.
휴일에도 그는 공장을 지켰다. 책과 메모지를 펴 놓고 기계 앞에서 실습을 했다.
공장생활 6년차 때 그는 전국 주요 납품처의 애프터서비스(AS) 담당이 됐다.
김씨는 “일급호텔, 골프장, 아이스크림 공장 같은 거래처를 다니며
‘나도 내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26세에 사업체를 꾸렸으나 딱 1년 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그는 “경험이 없어 좌충우돌하다 끝났다”고 했다.
이후 한 번의 사업 실패를 더 겪은 그는 결국 다시 냉동설비회사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
러면서 적금을 부었다. 33세이던 89년 당시 냉동설비산업의 메카이던
청계천8가에 ‘대흥설비’라는 이름으로 점포를 냈다.
그때 자본금이 1000만원이었다.
점포는 작았지만 속은 알토란 같았다.
SKC선경화학과 연간 1억원의 보수용역계약을 체결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냉동사업은 한철
사업이잖아요.
고민하다 공조냉동기술을 접목해 도 컨디셔너(Dough Conditioner) 개발에 들어갔죠”라고 말했다.
냉동→냉장→저온발효→고온발효를 거치며 빵을 굽는 기계다.
전날 반죽해 넣어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빵이 나온다.
기계 오류로 빵값을 배상해주기를 반복하다 4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 기계는 제과제빵업계의 프랜차이즈를 가능하게 했다.
본사에서 반죽 재료만 상점에 공급해주고 시간 맞춰 넣어놓으면
다음날 전국에 설치된 모든 체인점에서 같은 맛의 빵이 나왔기 때문이다. 외
환위기 당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대기업에 1400여 대를 납품하기도 했다. 그
는 이와 관련된 특허만 8개를 보유하고 있다.
김씨가 개발한 제품은 미국과 일본, 동남아 등지로 수출되고 있다.
그 사이 직원은 70명으로 불었고 매출액은 120억원을 넘어섰다.
이씨나 김씨 같은 대한민국 명장은 587명이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다.
최첨단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선봉장으로
지금도 산업 현장을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기술인력인 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떻게 기술을 습득했으며, 어떤 활약을 했을까.
한국노동연구원 조성재 선임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이
이런 의문을 풀어줄 만한 연구자료를 내놨다.
86년 명장제도가 도입된 뒤 명장 반열에 오른
213명을 표본 추출해 이들의 이력을 조사했다.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50대가 46%로 가장 많고, 60대가 37.1%였다.
이들의 출신·거주지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과 거의 일치한다.
영남권 출신이 10명 중 4명이었다. 현 거주지도 10명 중 5명이 영남권이다.
수도권(36.2%)보다 많다. 조 박사는 “수도권을 기점으로 구미공단,
울산공단으로 이어지는 경부 축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행됐다.
이게 투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호남이나 충청권 출신 명장도 영남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긴 경우가 많았다.
명장들은 대체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모 중 3분의 2가 농업에 종사했다.
빈한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신하는 과정에
이들 명장이 있고 그 과정을 주도했음을 짐작케 한다.
처음 일을 시작한 나이도 15~19세가 47.4%였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생업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10명 중 4명이 처음 일할 때 중졸 이하 학력인 것은 그래서다.
그래도 이들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못 배운 한(限)을 기술로 풀어내고, 학업도 이어갔다.
44.6%가 전문대졸 이상의 최종 학력을 갖고 있다.
10명 중 4명은 자기 분야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한 명장은 “80년대 초반에 장비 사고가 났다 하면 난리가 났다.
누가 책임질지 눈치보기 바빴다. 그런데 난 좋았다.
기계를 뜯어볼 수 있는 기회니까. 공구부터 챙겼다.
퇴근해서도 도면을 연구하느라 밤잠을 자지 않았다.
그렇게 기술력이 높아졌고, 자격증도 하나씩 늘어났다”고 회고했다.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명장도
“기능공 입장에선 자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박사나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땐 한계가 있는 걸로 보거든요.
그래서 대학에 갔죠. 이론을 알게 되니까
그분들과 얘기할 수 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선 대부분의 명장이 ‘나의 숙련 내용은
중국과 같은 개도국이 따라오기 어렵다’고 자신했다.
명장들은 이렇게 독학으로 기술을 터득한 경우가 많다.
기업에 근무하는 명장 중 ‘선배에게 배웠다’는 사람이 45.7%로 가장 많지만
두 번째로 많은 것이 ‘스스로 익혔다’(35.7%)였다.
포스코의 한 명장은 “공장에 배치됐을 때 선배들이 안 가르쳐 줘요.
강도나 온도에 따른 특성 같은 걸 비밀 취급하더라고요.
후배한테 노하우를 줘버리면 자기들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어깨너머로 하나씩 터득하고…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후배를 가르칠 땐 ‘작업에 임하는 태도’부터
바로잡는다(30.5%)는 명장이 많았다.
향후 이들은 어떤 꿈을 또 꾸고 있을까.
현대중공업에 다니는 명장은 “저를 포함한 명장 몇 분이 퇴직 후
70세까지는 후배 양성과 노하우 전수를 하려 합니다.
교육을 위한 사회적 기업을 설립해 기업이나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할까 구상 중입니다.
‘가르쳐 놓으면 다 나라의 인재들이 되겠지’라는 생각에서요”라고 말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거나(85.4%)
후배를 위한 교육을 하고 싶다(10.3%)는 명장들이 대부분이었다.
◆ 대한민국 명장=숙련기술장려법에 따라 1986년부터
시행됐다.
기계, 전기·전자, 서비스, 공예, 화공, 조선, 섬유와 같은 업종에서
15년 이상 종사한 사람을 대상으로 국가가 심사해 선정한다.
이들은 장려금과 같은 우대를 받는 대신 품위를 유지할 의무를 진다.
품위유지 의무를 어기면 명장 자격이 취소된다.
[S BOX] 명장 되면 2호봉 승급, 정년 뒤 4~5년 재고용도
산업 각 부문에서 활동 중인 대한민국
명장들은
한국 산업의 기술발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공업화에 시동을 걸던 1970년대엔 기초적인 용접과 같은 전통 숙련기술을 익혔다.
그러다 외국의 첨단 기기가 도입되고 자동화되자 그에 맞춘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숙련의 내용을 손끝 기술에서 문제해결 기술로 진화시킨 것이다.
기업의 변화를 선도하며 한국 경제를 현장에서 떠받친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명장을 ‘한국 산업 도전의 역사’라고도 한다.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기업마다 좀 다르다.
두산중공업의 경우 명장 중시 경영을 한다.
사무직이나 생산직의 직급 명칭이 같다.
생산직에서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이 탄생할 수 있다.
명장 신청을 회사가 독려한다. 명장이 된 뒤에는 각종 혜택을 준다.
명장이 되는 순간 2호봉이 오른다.
공장 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차량 비표가 주어지고,
사내외 강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강의기법도 교육한다.
정년 퇴직한 뒤에도 4~5년은 재고용된다.
사내에는 명장의 전당을 건립해 핸드프린팅을 조각해주고
명장협의회에 매년 활동비를 지급한다.
"나는 걷는다, 돈이 없어서" "차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그 또한 기미 낀 얼굴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다."
7년 전 텔레비전에 방영된 한 화장품 광고에 나온 말이다. 2년 전에는 서울 도심 버스정류장에 이런 광고 문구가 붙었다.
"날은 더워 죽겠는데 남친은 차가 없네."
한 음료 회사가 내건 이 옥외 광고물은 "자동차가 아닌 마시는 차를 지칭한 것이다"라는 업체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누리꾼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 금세 철거됐다. 젊은 층에게 '자동차 소유 여부'는 뜨겁고 민감한 소재였다. '뚜벅이'를 자연스럽고 떳떳하게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경기 불황의 영향이 크지만, 승용차를 '못' 가지기보다 '안' 가지기로 결심한 이들도 상당수다. 보행, 대중교통, 자전거, 카셰어링 등 다양한 대체 이동 수단에 만족하는 이들에겐 자동차 말고도 '지름신'을 맞이할 다른 소비재가 널렸다.
20~30대의 자동차 수요 감소 현상은 여러 통계에서 드러난다. 지난 9월 한국자동차산업협회가 발표한 '연령별 승용차 신규 등록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상반기 20대, 30대의 승용차 신규 등록량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10.2%, 6.9% 떨어졌다. 40대는 소폭 감소했고(-0.8%), 50대는 오히려 증가했다(0.9%). 운전면허를 따는 젊은이 수도 줄었다. 2005년과 2013년 연령별 운전면허 소지자 통계를 비교해보면 8년 사이 다른 연령층은 모두 운전면허 소지자가 증가한 반면 22~37세는 연령별로 2만~19만명씩 그 수가 감소했다. 국내 대표 자동차업체인 현대자동차의 고객 연령층 자료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현대자동차 승용차를 구매한 20대 고객의 비중은 9%로, 2011년 11.8%에 비해 2.8%포인트 감소했다. 30대의 비중은 27.6%에서 21.4%로 감소 폭이 더 컸다.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박수만씨(가명·29)는 4년간 몰고 다니던 중고 경차를 재작년 다시 중고 시장에 내다팔았다. 대학 시절 원거리 통학용으로 차를 마련해 유용하게 잘 사용했지만 직장에 취업한 이후에도 학자금 대출을 갚는 등 기본 지출이 많다 보니 보험료, 유류비 등 다달이 나가는 차량 유지비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있다가 없어지니 행동반경이 좁아져서 불편함이 크다"라면서도 박씨는 당분간 자동차를 구입할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2010년 보고서 '국내 20대 자동차 수요 영향 요인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생은 30~40대에 이른 예전 대학생에 비해 여전히 자동차 구매 의향이 높게 조사됐다. 이들은 자동차의 '자유로운 이동'과 '프라이버시' '자기표현' 등의 매력을 높이 샀다. 중소기업 직장인 김수인씨(가명·28)는 "버스 막차를 타고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다가 '내 차'에서 맞는 바람은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하곤 한다"라면서도 차를 구입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차는 갖고 나가는 순간 돈이잖아요." 김씨 말에 따르면 또래들 가운데 차를 끌고 다니는 경우는 집이 굉장히 부자이거나 아버지가 오래 몰던 승용차를 물려주거나, 둘 중 하나다. 비교적 초봉이 높은 대기업에 입사한다 해도 새 차를 뽑는 경우는 극소수라고 했다. 김씨는 "우리 또래는 대부분 비싼 주거비를 치르며 좁은 월세방에 산다. 자동차는커녕 차를 둘 곳조차 변변찮은데 어떻게 감히 보험료, 주차비, 기름값, 자동차세가 들어가는 차를 살 생각을 하겠나?"라고 되물었다.
뚜벅이 생활을 하다가도 가정을 이루는 과정에서 대개 차를 마련한다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 단계 또한 잘 참고 견딘다. 올가을 네 살 연상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윤선미씨(가명·27)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 '자차'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도시 근교의 가구거리에서 혼수를 마련할 때나 예단과 함을 들일 때 차가 없으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씨 부부는 향후 최소 2년간은 차를 구입할 생각이 없다. 신혼집 전세 대출금을 갚기도 빠듯한데 자동차 구입·유지비까지 감당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윤씨는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는 최대한 참아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 윤씨처럼 자녀가 태어난 후부터는 차량 구입을 고려할 수 있다는 의견이지만 그 첫 출산 시기 역시 점차 뒤로 미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1993년 27.55세이던 산모 평균 초산 연령이 지난해 31.84세로 4년 이상 늦춰졌다). 2000년 59.5%이던 서울시 대중교통 분담률은 2010년 64.3%로 증가했다. 지하철 분담률이 1996년 29.4%에서 2010년 36.2%로 늘었고 같은 기간 승용차 통행 대수는 465만 대에서 449만 대로 줄었다. 도보 및 자전거 통행량은 연평균 2.8%로 여러 이동 수단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2012년 처음 국내에 등장한 이후 꾸준히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카셰어링 대표 업체 그린카와 쏘카 회원 수(각각 34만명, 33만명)의 90%를 차지하는 주 고객은 20~30대다. 1년 전부터 카셰어링 서비스를 이용하는 직장인 손병주씨(31)는 "교통망이 좋지 않은 지방에 가거나 부모님 댁에서 반찬을 갖고 온다거나 할 때 차가 없으면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한 달에 몇 번 되지 않는 그때를 위해 비싼 차를 사서 유지하느니 필요할 때 잠깐씩 이용할 수 있는 카셰어링을 이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묵혀두었다가 올해 처음 카셰어링 서비스를 이용하며 '장롱 면허'를 탈출했다. 자기 차를 갖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문씨가 차 구입을 포기한 주요 이유는 '다른 취미 생활을 위한 비용' 때문이다. 베이킹, 재봉틀질, 커피 내리기 같은 취미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구와 재료들 값이 만만치 않다. IT 기기 신제품에도 관심이 많고, '해외 직구'에도 적극적이며 종종 여행도 가야 한다. 장기 불황·인구고령화로 인한 청년층 실업률 증가와 소득 감소를 한국보다 먼저 겪은 일본은 자동차 내수시장 규모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직전 770만 대에서 2011년 420만 대로 매우 위축됐다. 일본 자동차공업회가 18~24세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면허 취득자 중 실제로 운전하는 비율이 1999년 74.5%에서 2007년 62.5%로 감소했다. 지난 4월 미국의 한 자동차 시장조사 기관은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18~34세의 비중이 2008년 금융위기 이전에 17%였다가 2012년 11%로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미시간 대학 교통조사연구소는 지난해 미국인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운전한 거리를 분석한 결과, 2009년에서 2011년 사이 16~34세의 누적 운전거리가 23% 감소했다고 밝혔다. 반면 대중교통 이용률과 자전거 통근율은 각각 40%, 24% 상승했다.
자동차 업계로서는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쌍용자동차 홍보팀 황수택 사원에 따르면, 자동차 시장에서 20~30대 고객은 정보 수집 채널이 많고 구매 의사 결정 단계가 위 연령층보다 복잡한, 한마디로 '까다로운 고객층'이다. 하지만 자동차 같은 고관여 제품(소비자가 다른 제품에 비해 더 많은 생각과 추론을 거친 뒤 구입을 결정하는 상품)은 한번 사용했던 브랜드의 이미지가 긍정적일 경우 다시 구매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동차 회사로서는 초기 진입 고객인 20~30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가처분 소득도 증가해야 자동차 수요 역시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업계 자체만으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변화에 대응해 졸업·취업·창업·취직·출산 등 청년의 생애주기에 따른 차별적 가격 할인 프로모션, 유예 할부·중고차 보상 할부 등 다양한 금융 상품 등을 개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차 홍보팀 권용준 차장도 "2030 세대는 지금 소비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더라도 향후 주력 소비층으로 대두될 것이기 때문에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를 보고 이들과 꾸준히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전략을 연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즐기는 문화와 신기술을 자동차에 적극 융합하는 시도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기아차가 고객들에게 스마트키 기능을 탑재한 손목시계를 제공하는 등 자동차에 웨어러블 기기를 접목시키고, 벤츠 생산업체 다임러가 카셰어링 사업 '카투고(Car2Go)'에 뛰어드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자동차업계의 자구책이 경기 불황과 인구 구조에 기인한 거대한 변화에 맞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 20대 인구의 본격 감소는 2020년쯤부터로,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무조건 건강하길"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7.5%가 '직장 생활로 지병을 얻었다'고 한다. 병원 치료를 받은 사람도 60%가 넘었으며, 회사를 그만둔 경우도 15.9%나 되었다. 대한민국 직장인 10명 중 2명이 건강도 잃고, 직장도 잃은 셈이다. 승승장구하던 표 팀장이 건강에 문제가 생겨 휴직을 하겠다고 찾아왔다. 추진력과 승부욕을 가지고 매사 열심히 일한 표 팀장이라 속이 상했다. 주말에는 좀 쉬라고 몇 번이나 권했건만 휴일까지 반납하고 업무에 매달리니 속병이 생길 수밖에. 또 과음을 해도 젊은 혈기로 멀쩡히 출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기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직원이 되더니,
근무 평가에서도 최하위를 차지하고 말았다. 1인3역을 해 내는 회사의 대표 사원이 되었다. 늦은 밤까지 자리를 갖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이기
때문이다. 사장들은 자신의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몸이 힘들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 그러니 사장은 몸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
'힘'을 쓰는 노동 집약적 산업에서 '머리'를 쓰는 지식 집약적 산업으로 전환되었다 해도 (누구를 만나 좋아하게 되고 친구로 삼게
되어도
진정 아름다운 우정으로 남고 싶다면 그에게 반대급부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그가 나의 친구가 되었으므로 그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어쩌다 그가 나를 모질게 떠나 간데도, 그가 내 곁에 머무는 동안 내게 준 우정으로, 내게 준 기쁨으로, 내게 준 든든한 마음으로 그냥 기뻐하면 됩니다. 진정한 우정은 세월이 지날 수록 더 아름다워집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더 가까이 느껴져야 합니다.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되는 이 세상에서 마음을 어긋 맡기며 서로에게 마음의 의지가 되는 참 좋은 친구, 아픈 날에,
어려운 날에, 가난한 날에, 외로운 날에, 정말 좋지 않은 날들일수록, 정말 몹쓸 환경에 처할수록 우정이 더 돈독해지는 너와 나의 만남이 많아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 "어머니의 자원봉사"
17년 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평범한 살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온 나라를 휩쓸던 IMF의 태풍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공장을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고,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파출부가 되어야 했습니다. 급기야, 빚쟁이들을 피해 노숙자가 되신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두 살 난 아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숙자 무료배식
자원봉사를 하십니다.
때로는 아이를 업고 나간 채 자원봉사 일을 하시는데 혹여, 비위생적인 환경이 아이에게 해가 될까 싶어 그러자 다음날 어머니는 당신이 자원봉사하시는 시설에
저를 데려가더니 구석진 자리에 저를 앉히시고, 유일하게 네 아버지를 받아준 곳이 여기야. 힘든 일, 어려운 일,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일에 가장 먼저 다가가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 - 오늘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 "어느 할머니의 시"
북아일랜드의 한
정신의학잡지에 실린 어느 할머니의 시
얼마전 북아일랜드의 한 정신의학 잡지에 실린
어느 할머니의 시를 소개합니다. 스코트랜드 던디 근처 어느 양로원 병동에서
홀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의 소지품 중 유품으로 단하나 남겨진 이 시가 양노원 간호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읽혀지면서 간호원들의 가슴과 전 세계 노인들을 울린 감동적인 시입니다.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간호원 아가씨들...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저를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요... 저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머리도 괴팍하고... 눈초리마저도 흐리 멍텅한 할망구 일테지요 먹을때 칠칠맞게 음식을 흘리기나 하고 당신들이 큰소리로 나에게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 소리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 할줄도 모르는 것 같고 늘 양말 한짝과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기만 하는 답답한 노인네... 목욕하라면 하고... 밥 먹으라면 먹고... 좋던 싫던 당신들이 시키는 데로 하릴없이 나날만 보내는 무능한 노인네...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지는 "나"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제발... 나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주세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 넘기는 제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줄께요. 저는 열살짜리 어린 소녀랍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 언니. 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방년 열여섯의 처녀랍니다.
팔에 날개를 달고 이제나 저제나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밤마다 꿈속을 날아다니는... 저는 스무살의 꽃다운 신부랍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 있는 아름다운 신부랍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새 스물다섯이 되어 아이를 품에 안고 포근한 안식처와 보살핌을 주는 엄마가 되어있답니다. 어느새 서른이 되고 보니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제 품에만 안겨있지 않답니다. 마흔살이 되니 아이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났어요. 허지만 남편이 곁에 있어 아이들의 그리움으로 눈물로만 지새우지는 않는답니다. 쉰살이 되자 다시금 제 무릎 위에 아가들이 앉아있네요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행복한 할머니입니다. 암울한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남편이 죽었거든요.
홀로 살아갈 미래가 두려움에 저를 떨게 하고 있네요. 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젊은 시절 내 자식들에 퍼부었던 그 사랑을 뚜렷이 난 기억하지요 어느새 노파가 되어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하네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내 심장 자리에 이젠 돌덩이가 자리 잡았네요.. 허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처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 것을... 젊은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그리고...이젠 사랑도 삶도 다시 즐겨보고 싶어요... 지난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나도 짧았고... 너무나도 빨리가 버렸네요. 내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때가 온것 같아요 모두들 눈을 크게 떠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 보아주세요. 제가 괴팍한 할망구라뇨... 제발... 제대로 한번만 바라보아주어요 "나"의 참모습을 말예요... - 호스피스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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