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희 선수가 동국대 감독에서 오리온스 감독으로 선임 되었다는 말을 듣곤 가장 먼저 떠오른 이가 눈내리는날 안전을 위해 자가 운전 대신 택시를 타고 용인 수지 체육관으로 출근하다 참변을 당한 안타까운 비운의 천재 故 김현준 선수가 생각이 납니다...
인터넷이 우리의 일상사가 되고 그럼으로써 2~30 대 젊은 세대들이 주류를 이루는 이런 공간에서 옛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자칫 어울리지도 않고 그네들의 생각과 가치관의 생각등,,,많은 차이들이 있어 무척 조심 스럽기 까지 한것은 사실 입니다.
김현준이 광신 상고 다닐때만 하더라도 광신 상고는 청량리 시조사 건물 옆 골목에 위치한 학교 였습니다...
아마 문경은 까지도 청량리 광신을 다닌걸로 기억 합니다만...
광신 상고가 청량리에 소재 했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저 처럼 농구를 사랑하는 올드팬이거나 서울 토박이 일거라 생각 합니다.
물론 지금은 신림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김현준이란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80년 2월 전국 종별 농구 선수권 대회 였습니다.
1978년 까지 신선우-박수교-박인규-안종관-조동우-조명선 등이...할약했던 이른바 2기 연세대 황금 메버 세대에 눌려 이들 재학중 대결인 연고전에서 치욕을 맛 봤던 고려대가 임정명-이충희-이민현 등...초고교급 선수들을 스카웃에 성공...
1979년 부터는 실업 - 대학을 떠나 그야 말로 무적 고려대 농구 신화를 그려 갑니다...
막강한 자금력으로 연 고대 선수들을 스카웃한 현대-삼성은 물론이고 김동광의 기업은행 마저 고대의 스파르타 농구에는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고 고대는 아직도 깨지지 않은 49연승의 신화를 그려 나갔습니다.
신입생 이던 김현준이 2학년으로 올라갈 즈음 맞 붙은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모든 전문가들이 고대의 우세를 점쳤 습니다만 이미 적수가 없었고 어느 정도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고대 선수단의 눈동자가 히둥그레진 사건이....
이충희와 똑 같은 모습에 애띤 용모가 돋보이고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쎄련되 보이던 배번 10번을 달고 코트위를 혼자 휘어 젖고 다녔던 김현준 이었습니다.
전반전 내내 압서있던 고대가 후반 시작하자 마자 연대 김현준에게 이충희가 신입생 시절에 연대 황금 멤버들에 맞서 골 폭풍을 떠뜨리며 고대 응원석을 환호에 빠뜨렸던 것 처럼 김현준은 찰거머리 수비수 이왕돈( 연세대 이광재의 부친)의 페이스 대 페이스 마크에도 불구하고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가며 2년만에 연세대가 라이벌 고려대를 격파 하는 코트위의 쿠데타를 일으 킵니다.
김현준의 동기생인 김남기와 이성훈까지 그 경기에서 맹활약 임정명-이충희가 졸업하게 되는 다음해 부턴 이-임이 그랬던 것 처럼 김현준-김남기-이성훈에 이어 초고교급 랭킹 1~3위들인
고명화-오세웅-조명선이 가세할때는 다시금 무적 연대의 시대가 도래할 거로 전문가들은 생각 합니다.
이충희-김현준이 슛 천재로 기억되기 전 세대인 신동파 선생의 경기는 실제로 보질 못 했기에 어떠한 언급도 하질 못 합니다만...
우리 농구사에 있어 이충희-김현준 1년 선 후배가 동시에 나왔다는것 자체가 한국 농구에 커다란 행운이 아니었을까 생각 합니다.
아직도 회자 되고 있는 대학-실업 시절의 그 들의 라이벌 관계 만큼 뜨거웠고 치열했던 경기는 보질 못 했습니다.
이런것이 라이벌이다 할 만큼 그들의 라이벌전은 용호상박,막상막하로 불리울 만큼 어느 한쪽아 원사이드 하게 이기는 경기가 없을 만큼 치열했고 뜨거웠기에 팬들은 그 둘의 대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줬으리라 생각 합니다.
이기적이고 고독해 보인 독고다이 스타일의 전형적인 슈퍼 스타의 기질을 가졌던 이충희,
스타라고 보기엔 동료들과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사교적이고 웃음이 많았던 김현준,,,,
어쩌면 이런 차이가 한 선수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 그에 농구를 보지 못했던 후배들에게 까지 최고의 선수로 불리우며 회자되고 있는줄도 모릅니다.
탈렌트 김응석氏의 외모와 흡사해 가끔 티비 프로그램에 닮은꼴 스타로 알려졌던 김현준 선수,
야구의 김재박 감독 처럼 당구,골프,볼링,,등 공으로 하는 운동은 그 재질이 너무 탁월해 적수가 없었다는 가슴 따뜻한 승부사 김현준 선수...
슈퍼 스타 이고 독선적이며 자기 프라이드가 목숨 보다 소중해 보였던 이충희에 비해...
후배들을 잘 다독 거리며 인간미가 돋 보였던 김현준...
이충희와 비교되는 안타까운 넘버 투의 길을 걸었을 지언정...
그가 기록해논 농구 대잔치 6천점의 최고 기록과 각종 야투율,어시스트왕,,,등 다재 다능 했던 그의 기록들은 지금 처럼 모든 조건이 좋기만 하고 대회가 많았던 시절이 아닌 열악하고 어려웠던 시기에 기록했던 기록들 이기에 더더욱 훌륭하고 값져 보인다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문경은-김승기가 삼성에 입단 했을때...
은퇴를 미루고 삼성에 한번 더 우승을 선사 하고 싶다며 노장의 투혼을 불 살랐던 김현준...
연세대와의 8강전에서 문경은의 팔꿈치에 눈을 맞은 서장훈이 대 선배들 앞에서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으르렁 될때도 연세대 할아버지격의 대 선배인 김현준이 그런 서장훈의 히프를 툭툭 치며 다독일 정도로 정도 많았고 가슴이 따뜻했던 전자 슈터 김현준...
그 경기 후...
연대-고대-중대의 새까만 후배들에게 김현준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요즘 우리 후배들 농구 실력은 크게 늘었지만 선배에 대하 예우나 경기중 감정을 컨트롤 하는 자기 억제력은 없고 너무 쉽게 흥분 경기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며...
소녀팬들의 과 보호를 받고 온순하게 농구만 했던 젊은 스타들에게 경종의 말 까지 했습니다.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 하기 위해 목이 활 처럼 뒤로 젖여지며 상대의 장신 수비수들을 따돌리는 슛이 일품 이었던 페이더 웨이의 이충희,
상대 수비수들을 따돌리며 사각에서 백보드를 이용한 슛이 일품 이었던 뱅크 슈터 김현준..
미인 박명 이란 말 처럼 그가 할일은 너무도 많건만 이렇게 지면으로나 그의 추억을 되새길 밖에 없는 작금의 이런 큰 불행 앞에 이처럼 비가 오는 날이나 이충희 감독이 어디 대학의 감독이 되었더라, 어디 프로 구단의 감독이 되었더라 하면 회자되는 인물이 故 김현준 선수 이거늘 그의 안타까운 짧은 생이 원망될 뿐 그를 기리는 이런 추억은 다시금 멍울로 밖에는 안되어 지는군요...
가끔 수원 삼성 체육관에 가면 볼 수 있는 빨간색 유니폼의 배번 10번에 새겨진 그의 영구 결번만이 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