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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동남쪽 25km 거리에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산성리에 있습니다. 병풍처럼 둘러싼 남한산성의 길이 12km의 굳건한 성벽은 한양의 중요한 수비 요새였고 산성 아래에는 임금의 임시거처인 행궁을 두어서 유사시 도성으로 활용했던 초대형 성곽도시입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하도록 건설된 해발 500m, 전체 성곽길이 12.4km의 산성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2년)에 축성(築城)하였다.
흙으로 쌓은 신라 晝長城 자리에 인조가 더욱 튼튼한 돌성을 쌓았다고 하는데요. 문화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지요. 그런데 이 남한산성에서 380년전 엄청난 사건이 시작됩니다. 그 사건의 시작이 바로 여깁니다. 여기는 남한산성의 남문 지화문(至和門)입니다. 남한산성 네 개의 문 가운데서 제일 큰 문이죠. 정문입니다. 그런데 1636년 동지섣달, 남문 아래 있는 비탈길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올라온 고관대작들이 있습니다. 바로 전날에 청나라가 침공했다는 급보를 전해 듣고 단 하루 만에 부랴 부랴 서울을 버리고 여기(남한산성)까지 올라온 인조와 그 무리들입니다.
도대체 그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단 하루 만에, 단 하루 만에! 서울을 버리고 여기까지 도망을 왔을까요? (한양 1636년 12월 13일).
전하, 큰일 났습니다. 청나라 오랑캐가 압록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전하, 더 큰일 났습니다. 청나라 오랑캐가 송도(개성)를 지났다 합니다. 아니, 어떻게 하루 만에!
인조 14년 12월, 귀를 의심하게 하는 놀라운 보고가 올라옵니다.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이 이미 안주(安州, 평안북도)까지 이르렀다고 긴급하게 보고 했다(인조실록33권, 인조14년). 12월 13일 평안남도 안주에 도착한 청나라 군사들이 단 하루 만에 경기도 개성까지 내려왔던 것입니다. (개성유수가 긴급히 보고하길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임금이 피난을 결정했다(인조실록33권, 인조14년). 12월 14일.
언제 압록강을 건넜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안주에 접근한 적군이 수도 개성까지 돌진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 사이에 임경업 장군의 백마산성 등 수많은 산성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청나라 군사들의 엄청난 속도전의 비밀, 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밀을 찾아갑니다. 380년전 백마성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청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장군! 오랑캐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죽을 각오로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마라 예! 장군! 성벽을 방패삼아 전쟁을 준비한 조선의 군사들, 그런데 오랑캐가 그냥 지나가는데요. 왜 그냥 지나가? 여기 왜 안와요?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이때 조선은 산성 중심의 방어책을 고수하는데 당시 청나라 기마병은거의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불과 5일만에 진격할 수 있는 아주 빠른 속도로 바로 조선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작전을 취했기 때문에 산성중심의 방어책은 청나라 군사를 막는 데는 무용지물이었죠.
조선의 왕만을 노린 청나라의 속전속결전략, 놀라운 진격속도의 첫번째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 만에 임금이 피난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건 참 황당합니다.
전하, 싸우셔야 합니다. 전하, 항복해야 합니다. (인조의 선택은?) 준비하라! 도망갈 준비하라! 청나라와의 속전속결이 아니군요. 인조 역시 속전속결로 피난을 결정합니다. 아니 청군이 쳐들어 왔는데 하루 만에 내린 결정이 도망이라니요? 그런데 우리 임금인 인조, 경력(?)이 있습니다. 1624년 이괄이 난을 벌였을 때 충남 공주로 한번,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또 한번, 이번이 세번째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왕들 가운데서 도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상습 도주범입니다.
도망길, 아니 피난길에 오른 인조, 인조가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창덕궁->숭례문), 서울 은평구에 도착한 청나라 군대에 의해 강화도 피난길이 막힙니다. 별수없이 피난지를 바꿉니다. (숭례문->광희문). 한양의 동남쪽 南漢山城입니다.
南漢山城으로 향하는 인조가 통과한 도성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이 인조의 다급함을 말해줍니다. 숭례문에서 길을 돌려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 광희문(光熙門)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여기를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렀습니다. 屍軀, 그러니까 시체가 도성 밖으로 나갈 때 쓰였던 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제 시체가 드나들던 작고 천한 문을 통해서 우리의 상습 도주범 인조 일행이 길을 나섭니다. 목적지는 동남쪽에 있는 南漢山城입니다. 이로써 47일간의 짧되 끔찍한 전쟁이 막을 올리게 됩니다.
임금이 南漢山城으로 향했다. 변란이 갑작스레 일어났으므로 왕을 따르는 신하 중에는 도보로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임금의 가마가 南漢山城에 도착한 것은 새벽 한시가 지난 후였다. 성안 백성은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인조의 피난길을 따라 올라봅니다. 인조가 피난하던 그때는 음력 12월 길이 얼어서 더 힘든 밤길이었습니다. 새벽 한시가 넘어 南漢山城에 도착한 인조, 뒤에는 두려움에 떠는 만 5천명의 백성들이 따라 들어왔죠.
우리의 임금님, 인조와 신하들은 여기서 과연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이 어전회의를 벌였을지 모를 행궁으로 가 보겠습니다.
북한산성 그리고 화성의 행궁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 행궁인 남한산성 행궁, 행궁이란 임금이궁궐 밖에서 거처하던 곳으로 별궁 또는 이궁이라고도 부릅니다. 임시도성인 셈이죠. 하지만 지금의 南漢山城 행궁은 본래의 것이 아닙니다. 화재로 불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하네요. 행궁으로 들어서면서 문득, 우연 아니 필연이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남한산성과 마찬가지로 이 행궁 역시 인조가 지었습니다. 엄청난 예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이 만든 궁으로 자신이 도망쳤으니 말입니다.
여기 앞에 보이는 것이 행궁 중에서도 외행궁입니다. 지금 정부청사와 같은 곳입니다. 여기서 왕과 신하들이 회의했던 곳입니다. 외행전에서 내상문을 지나 올라가면 내행전 상궐이 나옵니다. 왕이 잠자고 생활하는 공간이죠. 丙子胡亂 당시 이곳에서 생활한 임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조선의 왕이 거처하는 곳이라면 늘 볼 수 있는 日月五峯圖도 그 앞에 놓인 의자도 당시 인조의 처지를 보여 주듯이 초라하고 좁고 낡은 공간 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조 임금, 丙子胡亂 당시 외행궁으로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주로 내행궁에서 정사를 처리했죠.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도 회의를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신하1: (남쪽으로 도망가고픈 신하) 영남과 호남쪽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신하2: (그냥 남한산성에 있고 싶은 신하) 오랑캐가 지척이거늘 어딜 간다 하십니까?
신하3: (강화도로 도망 가고픈 신하) 南漢山城은 적을 오래 막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강화도로 꼭 가셔야 합니다.
신하4: (강화도로는 도망가기 싫은 신하) 영의정은 가족이 모두 강화도에 있으니 가자는 거 아니오!
신하3: (강화도로 도망가고픈 신하) 나라를 생각하는 나에게 어찌 그런 망발을 하시오.
(南漢山城에 온 후에) 김류가 왕에게 강화도로 피할 것을 권하였는데 홍서봉과 이성구는 그 말에 찬성하였으나 이홍주는 안된다고 하였다..
박종인: 아니, 서울을 버리고 도망 온 임금과 신하들이 청나라군과 싸울 생각은 안하고 딴데로 또 도망갈까 궁리를 하고 있어요? 제 정신입니까?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정신이 나갔다? 그것도 아닙니다. 청나라 오랑캐한테 똑같이 전쟁을 당한게 바로 9년전 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1627년 정묘호란).
명실상부 중원의 강자였던 명나라, 조선과 군신관계였던 명나라, 그러나 花無十日紅 꽃은 기어히 여름이면 지는법, 하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 명의 기세는 꺾이고 여진족이 급성장합니다. 그 사이 명과 대립하던 후금(여진족)이 막강해져 훗날 뜻밖에도 조선을 침략합니다. 정묘호란입니다. 병자호란 9년전, 1627년 1월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인조는 1주일 후에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갑니다. 겨우 두달을 버틴 조선은 3월 강화도 연미정에서 후금을 형제의 예로 대우한다는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철저한 패배였죠.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후금이 처음부터 조선에 적대적이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1592년 조선이 일본에 침략 당했을 때 여진족 추장 누루하치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우리에게 전쟁에 이골이 난 정병 9만이 있는데 조선을 돕고 싶소. 하지만 조선정부 관리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북방의 오랑캐가 10만의 정병을 가졌을리 없고 우리를 돕겠다는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여진족의 세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눈치챘을텐데 헌데 여진족을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했던 조선은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너희들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변화를 눈치챕니다. 지는 명(明)나라와 뜨는 후금(淸)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잡느라 노력했죠. 하지만 1623년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훗날인조)을 왕으로 세우는 일로 반정을 일으킵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광해군과는 반대의 정책을 펼치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을 위해서 후금을 배척한 것입니다. 인조 14년 2월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후금에서 조문사신단을 보냅니다. 그런데 조선은 이들에게 허술한 천막을 내주고 그리고 천막 뒤에는 감시하는 병사까지 배치합니다. 결국 사신단은 화를 내며 돌아가 버립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나중에 큰일이 생긴다 해도 체면 때문에 오랑캐를 무시해 버린 겁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신병주: 또 하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636년 4월에 청나라 홍타이지가 청태종으로 즉위하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청황제 즉위식에서 대부분의 사절단들은 최대한의 예를 표하는데 이때 조선의 사신으로 갔던 나덕헌과 이확이라는 인물만은 제대로 인사를 안하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외교적인 결례를 보입니다.
결국 그해 10월 청태종이 편지를 보냅니다. 화친에 응하지 않으면 곧장 한양을 치겠다. 내가 팔도를 유린하면 강화도에 숨어서 어쩔 것인가. 조선의 문신들이 우리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11월 25일까지 화친하지 않으면 쳐들어 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조정은 화친하자 나가서 싸우자 라고 자기들 끼리 싸우며 허송세월 하죠. 결국 그해 12월 태종은 예고한 그대로 쳐들어옵니다. 9년전 보다 더 큰 참극, 병자호란입니다. 예정된 전쟁을 막지 못한 인조, 반정의 당위성을 지키고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했던 것이 하나의 이유라면 어쩌면 성품도 한 몫 했을지 모릅니다.말이 없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렸다는 기록입니다. 누군가는 또 반정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요?
인조는 워낙 의심이 많았을 뿐더러 자기를 왕위에 앉힌 인조반정의 일등공신들을 자신의 주변에 심습니다. 그들의 말만 믿었죠. 반정의 일등공신들이 과연 전쟁에서도 일등공신이었을까요?
인조의 신하들, 그 이야기의 첫번째 주인공은 병자호란 당시 북쪽 방어를 책임지던 서북방 도원수 김자점 (1588~1651) 입니다. 당시 김자점은 정방산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정방산성 건너편 용골산에는 봉화가 있었는데 12월 6일 이후 연거푸 두번이나 봉화가 피어 오릅니다. 봉화를 본 병사가 청나라가 침략했다고 보고합니다. 총사령관인 김자점은 도성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병사를 향해 칼을 빼듭니다. 이 한 겨울에 적군이 쳐들어 오다니 왜 괜한 말로 나라를 어지럽히느냐?
청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넌 날은 9일, 그리고 안주를 거쳐 개성에 이를 때까지 닷새 동안 조선정부에는 일체 보고가 되지 않았습니다. 보고만 제때 이루어졌다면 병자호란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사고를 친 반정의 일등공신은 김자점 한 사람만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기 남한산성의 북문에서 맹활약을 한 이가 한 사람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북문은 세곡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세곡이란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북문에는 이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북문 앞입니다. 북문 위에 ‘全勝門’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자는 문이죠. 과연 그럴까요?
북문이 전승문이 된 사연 이 사람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조반정 일등공신 김류(1571~1648)입니다. 남한산성 피신 보름째 인조가 마냥 지원병만 기다리지 말고 나가서 싸우라고 재촉합니다. 김류, 어떤 작전을 펼쳤을까요? 굶주린 병사들 앞에 갑자기 북문 앞 쪽에서 청나라 군사가 나타나더니 거기에 소와 말과 돼지를 놓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저걸 보고 김류가 나가라 나가서 가축들을 가지고 오라! 고 얘기를 합니다. 누가 봐도 유인책이 분명한 그 상황에서 부하들이 거부합니다. 그랬더니 부하들을 찌르면서 나가라고 그랬던 겁니다. 부대장의 칼에 위협 당하여 출전했던 우리 군사들은 결국 매복한 청나라 군사의 제물로 쓰러집니다 (결국 300여 정예병은 매복한 청나라 군사들에게 몰살).
김류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김류가 화약을 아까워하여 많이 주지 않고 잠깐 동안 우리 군사들이 다 죽기에 이르렀다. 무능한 지휘관 김류와 김자점, 당연히 처벌을 받았겠죠. 무능하게 전쟁을 이끈 김자점과 김류에 대해서 상소가 빗발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조 임금은 모든 상소 결재를 거부하고 각하시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김자점 등을 정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조가 따르지 않았다. 김류가 처벌을 기다렸으나 인조가 김류를 위로하고 타일렀다. 그런데 무능한 관료가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바로 김류의 아들, 이름은 김경징이라고 합니다. 그가 활동했던 참혹한 무대 여기 남한산성이 아니라 멀고 먼 서쪽에 있는 섬, 강화도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 강화도, 강가의 꽃처럼 아름다운 섬이라고 해서 江華島 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성 한양의 입구에 있는 강화도는 수많은 전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찌나 여러번 왕들이 피난을 왔는지 도읍지라는 뜻의 都자를 써서 江都라고 불리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는 참혹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사연 바로 노을처럼 붉고 아름다운 이 갯벌에 숨어 있습니다. 붉게만 보이던 갯벌, 알고보니 이 작은 풀들이 모여서 빚어낸 색채입니다. 이 풀의 이름에 강화도의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김포 앞에 있는 강화도에는 해변가에 이렇게 붉은 풀들이 피어있습니다. 나문재 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 나문재를 ‘경징이풀’ 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대체 무슨 사연으로 나문재는 당시 강화도 감찰사 김경징의 이름을 갖게된 걸까요?
청나라 군이 쳐들어오자 인조는 세자빈과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강화도로 피신시킵니다. 세자빈 일행도 백성들도 김포나루에서 강화도로 갈 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강화도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저 김포 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야 되는데, 김경징이 이런 짓을 합니다. 자기가 싣고 온 자기재물 50궤짝에 이르는 재물을 제일 먼저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건너 보냅니다. 그러느라 김포나루에서 울부짖으며 배를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은 강화도로 건너지 못합니다.
마침내 세자빈이 ‘경징아, 경징아’ 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 소리를 건너 듣고서야 자기의 식솔과 재물을 무사히 건넌 걸 확인한 김경징이 배를 내줍니다. 그런데 울부짖는 사람들 뒤로 청나라 기병들이 들이닥칩니다. 기록은 이렇습니다. 기병들에게 밟히고 끌려가고 바닷물에 빠져 죽고!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그 참혹함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백성들의 위무를 담당하던 총사령관 김경징입니다. 자, 그럼 이 탐욕스러운 김경징, 강화도로 건너온 후 업무는 잘 했을까요? 그의 업무는 강화도 수비입니다.
하지만 김경징이 벌인 업무는 이렇습니다. 하루 종일 술 퍼먹기! 좁고 험한 바다를 끼고 있어 적이 섣불리 쳐들어올 수 없는 천연의 요새, 강화도, 결코 빼앗을 수도 없는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에는 정신이 없고 매일 기생들과 술판 벌이기에 바쁩니다. 이를 보다 못한 봉림대군(훗날효종)이 야단을 칩니다. 술 좀 그만 먹고 수비에 힘써야 하지 않겠소? 그러자 우리 김경징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한겨울에 어름은 저렇게 얼어있고 청나라 군사들에게 배가 없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 그리고 또 술 먹습니다.
얼음은 녹았고 청나라 군대는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를 건너와서 공격을 한 거지요.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 다니며 울고 있다. 적병이 나루터에 주둔하여 홍대포를 쏘았다. 경징은 겁에 질려 정신을 잃고 창고 밑으로 피했다. 적에게 욕을 보이지 않으려는 부인들이 바다에 빠졌다. 머리 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있는 낙엽처럼 바람에 날려 둥둥 떠다녔다. 백성들 지켜줄 감찰사는 숨어버리고 백성들은 차디찬 바다 가에서 죽어갔습니다.
380년 전의 비극은 그대로 이땅에 흔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강화도 바닷가가 붉게 피로 물듭니다.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물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고 청나라 말 발굽에 짓밟혀 죽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문재가 가득한 해변에서 쓰러지며 당시 최고 사령관 이었던 김경징을 원망합니다. 경징이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쓰러져 가죠. 그래서 이 붉은 나문재를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경징이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뿐 아니라 산천초목 마저 희생되어야 했던 참혹한 전쟁, 병자호란, 강화도는 꽃처럼 아름다운 섬이 아니라 참혹한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인조가 북쪽 하늘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망궐례(望闕禮)입니다. 궁궐이 멀리 있어서 황제를 배알하지 못할 때, 멀리서 나마 절을 하는 의식이죠.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무시무시한 홍이포로 위협을 하는 상황에서도 인조는 명나라 황제의 생일과 새해 첫날 두 차례 망궐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중무장한 적군이 산봉우리에서 남한산성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조 임금, 적(청나라)의 적인 명나라를 향해서 경배하고 있습니다. 산봉우리에 있는 청태종,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저렇게 경배하는 인조의 가슴 속에 과연 성 밖에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에 대한 생각은 들어있기는 할까요? 그런데 더 큰 적이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로 굶주림입니다. 추위는 점점 심해만 가는데 원군은 오지 않고 식량은 줄어만 갔다. 성안에 말과 소가 모두 죽었으며 살아있는 것은 굶주림이 심하여 서로 그 꼬리를 뜯어먹었다. 군사들도 백성들도 앙상하게 말라갔습니다. 남한산성은 이제 굳건한 요새가 아니라 굶주림의 감옥이었죠.
남한산성은 굉장히 험준한 산 속에 있는 석성(石城) 입니다. 이 촘촘한 돌, 그리고 험준한 산세, 제 아무리 천하의 청나라 군사라 하더라도 쉽게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難攻不落이죠. 거꾸로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나가기도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왕실 사람들은 물론 모든 백성들은 이 성 안에 갇혀서 식량보급마저 끊긴 채 남한산성 안에서 마냥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거죠. 많은 이들이 남한산성이 함락되면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한산성에는 단 한 명의 청나라 병사가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박종인: 전보삼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전보삼/세계유산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관장: 반갑습니다. 많이 보던 분이네,
박종인: 박종인입니다. 남한산성이 인조 때에도 비록 치욕의 장소로 낙인 찍히기는 했지만 인조 때도 청군이 들어온 적은 없었죠?
전보삼: 그럼요, 지금의 가락시장 쪽이 진터예요. 청나라 진지인데 거기에서 남한산성은 네 차례 공방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요. 이 자연 지세가 아주 난공불락이에요. 그래서 도저히 안되니까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벌봉이라는 봉우리, 인조 때는 성을 쌓지 않았지만, 숙종 때는 쌓았던 벌봉이라는 제일 높은 봉우리가 있어요. 그곳을 점령했는데 벌봉에서는 성 안이 보여요. 거기서 대포를 쐈어요. 이 성은 도무지 접근이 안됐어요.
박종인: 벌봉이 여기 숲 말고 그 뒤쪽에 큰 것 반쯤 보이는게 벌봉입니까?
전보삼: 거기(벌봉)를 보면 높이가 515미터예요. 여기(남한산성)는 한 450미터되고요. 그러니까 이제 내려다 보여요.
박종인: 타이지가 딱 본 거지요.
전보삼: 그러니까 청나라 군사들이 완벽하게 남한산성의 지리적인 환경을 다 공부하고 왔어요. 그래서 여기를 가면 어디를 막아야 하고 쌍령하고 광교산을 막아서 원병이 오는 것을 차단하고 하는 것들을 치밀하게 계산을 다 하고 왔어요.
집요한 청군의 공격도 견뎌냈습니다. 하지만 내부의 균열은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항복해야 합니다! 항복해야 합니다! 대안도 없고 결론도 없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 원군은 오지 않고 식량은 바닥이 나고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의 진영을 향해 청나라 대포가 불을 뿜습니다. 꽝!!
결정적으로 1월 26일 강화도 함락소식이 전해집니다. 남한산성이 함락되도 강화도의 봉림대군이 남아 항쟁할 것이라는 마지막 기대가 무너진 것이죠.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최명길-이조판서), 명길은 전하를 앞 세우고 적의 아기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입니다 (김상헌-예조판서), 적의 아기리 속에도 분명 삶의 길은 있을 것입니다 (최명길), 나는 살고자 한다 (16대 조선의 왕인조), 그렇게 인조는 치욕의 삶을 택합니다. 왕의 상징인 곤룡포를 벗고 오랑캐 나라 청의 신하를 뜻하는 남색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오랑캐에게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섭니다. 산성으로 피난 오던 때 보다도 발걸음이 무겁겠죠. 들어올 길은 택할 수 있었으나 항복하러 가는 길은 선택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문이 제 뒤에 보이는 지하문, 남문입니다. 하지만 인조가 항복을 위해서 산성을 벗어날 때 왕의 문인 남문을 이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태종은 그(인조)에게 남문을 허락하지 않고, 이 허름한 서문을 통해서 나오게 합니다. 사람하나 겨우 지날 좁고 낮은 이 문으로 나가야 했던 인조와 세자 일행, 그들이 향한 곳은 삼전도, 지금 서울 잠실 부근입니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높은 단을 쌓고 앉아 있는 앞으로 백걸음을 걸어나가서 그 유명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번 절하고 절할때마다 세번고개를 조아림)의 예를 올립니다.
세번 절하는데 한번 절할 때 마다 세번 고개를 조아리는 항복의 예법입니다. 치욕의 구고, 하지만 치욕의 왕은 살았고 백성들은 죽었습니다. 47일간의 전란-그 짧은 전쟁 끝에 잡혀간 포로의 숫자만 50만명이 넘었으며 죽거나 다친이는 헤아릴 수 조차 없었습니다. 한성에 남아 있는 자라곤 단지 10살 미만의 어린이와 나이 일흔을 넘긴 사람들 뿐인데 대부분 굶주리고 얼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참혹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신병주: 사실은 정묘호란 때 금나라와 형제관계를 맺었다는 자체는 후금도 결과적으로 공격목표는 명나라 라는 거예요. 외교적인 대처가 적절했다면 병자호란을 피할 수도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외교적 실책이 나은 참상의 흔적,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서울 삼전도비 (사적 제101호, 1639년(인조17), 서울특별시 잠실동 47번지).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했던 곳에 세워진 삼전도비(三田渡碑), 4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석입니다. 이렇게 큰 비석을 세우라고 한 사람, 누구였을까요?
박종인: 병자호란, 그 짧은 전쟁이 끝나고 2년후 바로 여기 삼전도에 큰 비석이 섭니다.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의 강요로 만들었습니다. 이름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입니다. 三田渡碑라고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하여 세우도록 한 비석이죠. 앞면에는 여진어와 몽골어로, 뒷면에는 한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박종인: 호란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조선이 청을 황제국으로 모시면서 살겠다는 우리로 보면 치욕적인 내용이 적혀 있는 거죠. 그런데 훗날 고종이 이 비석을 땅에 묻어버립니다. 훗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자 고종은 비석을 땅에 묻는다. 1917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다시 세웁니다. 1955년 이승만 정부시절 내무부 치안국장의 요청으로 다시 땅에 묻히다. 1983년 굴욕의 역사 속에서도 교훈을 찾으라는 한 前任 대통령도 있었다.
박종인: 그런데 이 치욕을 눈뜨고 보지 못했던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비석에 빨간색 페인트로 ‘병자호란’ 그리고 ‘370’ 이라는 큰 글자의 낙서를 해버렸습니다.
삼전도비 스프레이 훼손, 중국과 역사마찰 보복? 삼전도비 훼손한 30대 용의자 검거(2017년 2월얼 26일) 병자호란 항복기록 삼전도비 훼손, 경찰수사 나서(2007년 2월 7일) 그런다고 역사가 덮어지겠습니까?
때로는 무관심과 외면으로 역사를 덮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1년 뒤 1638년 3월 정반대의 내용을 담은 상소 두장이 올라옵니다. 신풍부원군(장유)-청나라로 끌려간 며느리와 아들이 이혼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前승지(한이겸)-청나라로 끌려갔던 딸이 돌아왔는데 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장가를 들려고 합니다. 막아 주십시오!
박종인: 아들을 가진 아버지와 딸을 가진 아버지가 이토록 마음이 다릅니다. 지도자와 나라가 무능한 탓에 죄없는 그녀들이 포로가 되어 적국(청나라)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무능한 자들이 그녀들을 외면하고 배척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여인들의 아픈 상처가 머물던 땅을 찾아갑니다. 중국 사신이나 관리가 묵어가던 홍제원이 있었다고 해서 弘濟川입니다.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이 절로 사진을 부르네요. 서울 弘濟洞입니다. 지금은 어린이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인공폭포가 있고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죠. 아주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2017년 가을이죠. 그런데 밑에 저 개울, 홍제천에 그 옛날 400년 전 병자호란의 비극이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홍제천에는 맑은 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380년 전 이 개울에는 여인들의 서러운 눈물이 함께 흘렀습니다. 400년 전, 청나라로 끌려갔던 여자들이 대거 돌아옵니다. 조국, 아니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서 돌아온 還, 고향 鄕, 여자 女 그래서 還鄕女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還鄕女들이 떼로 개울 변 바위에 앉아서 몸을 씻습니다. 몸이 더러웠을까요? 뭐가 더러웠기에 자기들은 몸을 씻으라고 강요당했을까요? 그리고 이들이 소위 오랑캐 강요에 의해 끌려가서 돌아왔는데 이 사람들이 씻어야 할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니, 이 사람들을 강요 때문에 끌려가게 만든 사람들의 죄는 무엇이었고 그 사람들은 몸을 씻었을까요? 도대체 이 전쟁은 누가 일으켰으며 누가 막지를 못했으며 이 전쟁이 일어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병자호란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국제정세에 어두웠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조선이 왜 국제정세에 어두울 수 밖에 없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기도 가평에 있는 朝宗川 변에 바위가 있습니다. ‘朝宗岩’ 이라는 번듯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에 스물두 자의 글씨가 적혀 있는데 그게 왜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망할 수 밖에 없었나. 그 이유를 풀 수 있는 비밀입니다. 여기에 훗날 세우려고 했던 정자의 이름입니다. ‘見心亭’ 이라고 합니다.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서 그 옛날의 기운을 되살린다 라는 뜻이죠. 몰아낼 사악한 기운은 무엇이고 회복해야 할 기운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해답 역시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칡넝쿨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데 세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朝宗岩’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朝宗’은 ‘황제에게 배알한다’ 라는 뜻입니다. 황제에게 배알을 하는 바위란 뜻이죠. 여기서 황제는 바로 명나라 황제를 뜻합니다.
병자호란 47년 뒤에 세워진 朝宗岩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부터 당한 수모를 잊지 말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옆에 萬折必東, 무슨 말이냐? ‘황하가 만번 구부러져도 결국에는 동쪽으로 흐른다’ 라는 뜻입니다. 모양까지 황하와 비슷한 朝宗川 변에 새긴 명나라를 향한 마음, 큰 나라에 대한 작은 나라의 이러한 충성을 事大主義 라고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내 마음이 만번 구부리고 휘더라도 결국에는 명나라를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명나라에 대한 애정과 흠모를 얘기하는 거죠.
그 옆에 再造蕃邦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再造’ 다시 세웠다 ‘蕃邦’ 옆에 있는 나라, 조선을 얘기 합니다. 명나라의 하해와 같은 은혜와 덕으로 조선이 다시 일어났다는 그때 임금, 선조의 글씨입니다. 위에, 저기 보이십니까? 사무사(思無那) 라고 적혀 있습니다. 思無那, ‘사특한 마음이 절대 없이 산다’ 라는 뜻입니다. 뜻 좋죠? 저 글씨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입니다. 작은 나라는 조공을 바치고 큰 나라는 고무해지면서 공생을 할 때 事大主義는 나름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朝宗岩에 새겨진 事大主義에는 백성도 없고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도 없습니다.
자, 이 스물두 글자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곳이 바로 조종현[황제를 배알하는 곳에 있는]대보면[은혜를 보답하는 마을] 대보리에 있는 조종암[황제를 배알하는 바위] 입니다. 이 조종암이 세워진 날짜가 명나라가 망하고 수십년이 지난 1644년입니다. 그 당시의 우리의 지도자들, 우리의 소위 지식인들,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백성은 없고 오로지 사라져간 나라, 명나라에 대한 흠모와 사대의식 밖에 없었던 거죠. 이게 바로 47일간의 짧은 전쟁 와중에 도주에 도주를 거듭하고 농성을 하고 쫓겨나던 그 상습 도주범과, 그 무리들이 전쟁에 참패할 수 밖에 없었던 비밀이요, 적나라한 이유입니다. 병자호란 후 380년이 지난 오늘, 이 땅의 역사는 묻습니다. 작은 나라의 올바른 외교정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끝. (TV조선 박종인의 땅의 역사 6화 “남한산성 47일 그때 남한산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에서 정리).
① 1592년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여진족 추장 누루하치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우리에게 전쟁에 이골이 난 정병 9만이 있는데 조선을 돕고 싶소. 하지만 조선정부 관리들은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여진족을 오랑캐라 무시하며 너희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거절합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을 위해서 후금(여진족)의 제안을 배척합니다.
②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변화를 눈치채고, 지는 명(明)나라와 뜨는 후금(淸)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잡느라 노력 하지만, 1623년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훗날 인조)을 왕으로 반정, 정권을 잡은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광해군과는 반대의 정책을 펼치죠.
③ 그러나,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 명의 기세는 꺾이고 여진족(후금)이 급성장합니다. 조선은 후금의 적(명나라)에게 친명정책을 펼치므로 후금을 자극하여 막강해진 후금이 훗날 조선을 침략,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두달만에 항복, 형제의 관계를 맺는 강화조약체결, 그게 1627년 1월 정묘호란입니다. 이때까지 후금은 조선에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④ 1636년(인조14) 2월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후금에서 조문사신단을 보냅니다. 그런데 조선은 이들에게 허술한 천막을 내주고 그리고 천막 뒤에는 감시하는 병사까지 배치합니다. 사신단은 화를 내며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明에 대한 체면 때문에 오랑캐를 무시해 버린 겁니다.
⑤ 1636년 4월 淸의 막강해진 홍타이지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조선의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참석은 하였으나 최대예의를 표시하지 않자 청태종을 자극, 외교적인 결례, 결국 그 해 10월 淸太宗이 편지를 보내서 11월 25일까지 화친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조선은 主和派와 斥和波가 싸우는 동안 그 해 12월 태종은 예고한 그대로 공격, 그게 丙子胡亂입니다. 9년전보다 더 참혹,
⑥ 丙子胡亂 당시, 인조의 신하들, 북쪽 방어를 책임지던 서북방 도원수 김자점은 정방산성 건너편 용골산에서 12월 6일 이후 봉화가 연거푸 두번이나 피어 오르는걸 본 병사가 청나라가 침략했다고 보고했는데도 총사령관인 김자점은 도성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보고를 한 병사를 향해 칼을 빼들고 이 한 겨울에 왜 괜한 말로 나라를 어지럽히느냐고?
⑦ 인조반정 일등공신 남한산성 지휘관 김류는 남한산성 피신 보름째 인조가 지원병만 기다리지 말고 나가서 싸우라고 재촉, 청나라 군사가 굶주린 병사들 앞에 갑자기 북문 앞 쪽에서 나타나 거기에 소와 말과 돼지를 놓고 사라짐, 누가 봐도 유인책이 분명한데, 김류는 부하들을 찌르면서 나가라고 해 결국 300여 조선 精銳兵은 매복한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몰살당함, 또 김류는 화약을 아까워하여 많이 주지 않자 잠깐 동안 우리 군사들이 다 죽기에 이르렀다고.
무능한 지휘관 김자점과 김류에 대해서 상소가 빗발칩니다. 우리의 인조 임금은 모든 상소 결재를 거부하고 각하시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김자점 등을 정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조가 따르지 않았다. 김류가 처벌을 기다렸으나 인조가 김류를 위로하고 타일렀다.
⑧ 무능한 관료가 한 명 더,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강화도 감찰사였다. 청나라 군이 쳐들어오자 김포나루에서 자기가 싣고 온 자기재물 50궤짝을 강화도로 제일 먼저 배에 태우고 강화도를 건너 보냅니다. 그 결과 김포나루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강화도를 건너지 못합니다. 곧 청나라 기병들이 들이닥칩니다. 그들은 기병들에게 밟히고 끌려가고 바닷물에 빠져 죽고!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김경징의 업무는 강화도 수비, 청군이 건너오기 전까지 술만 퍼먹고 기생과 놀기만 합니다. 보다 못해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술좀 그만 마시라고 질책했다. 어름이 녹고 청군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와서 나루터에 포진하여 대포를 쏘니 김경징은 겁에 질려 숨었다고 한다. 적에게 욕을 보이지 않으려는 부인들이 바다에 빠졌다. 머리 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있는 낙엽처럼 바람에 날려 둥둥 떠다녔다고, 백성을 지켜줄 감찰사는 숨어버리고 백성들은 차디찬 바다 가에서 죽어갔다.
⑨ 1636년 丙子胡亂에서 패하고 조선은 두 왕자를 청에 볼모로 보낸다. 그 중 형인 소현세자가 돌아오자마자 죽고 나서 둘째 왕자(봉림대군)가 왕위에 올라 효종(孝宗)이 됐다. 효종에게는 믿고 의지하던 백강 이경여(李敬輿)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효종이 북벌에 온힘을 기울이다 심신이 피폐해지자 이경여는 ‘나라의 한을 씻어야 함은 마땅하지만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고 위로의 글을 올렸다.
효종이 이에 답글을 썼는데 그 글에 ‘至痛在心 日暮途遠’ 이라는 글귀가 등장한다. ‘나라와 백성의 수모를 씻지 못해 아픔은 깊이 남아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기만 하구려’라는 뜻이다.
⑩ 명나라가 망하고 수십년이 지난 1684년에, 조선 사대주의의 흔적, 경기도 가평 바위에 새겨진 스물두 글자, 1684년(숙종10) 명나라 의종의 思無那, 선조의 萬折必東再造藩邦, 효종의 日暮途遠 至痛在心, 낭선군 우의 朝宗岩, 이렇게 스물두 글자를 바위에 새기고 朝宗岩, 즉 “명나라 황제에게 배알을 하는 바위”라는 흔적을 남겼다. 1636년 1월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해서도 청태종이 산 위에서 인조의 새해 망궐례 하는 짓을 다 보고 있었다고,
⑫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 주변 나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무관심에 있었다. 병자호란 후 47년 뒤에 세워진 朝宗岩, 그 당시의 우리의 지도자들, 우리의 소위 지식인들,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백성은 없고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도 없고, 오로지 사라져간 나라, 명나라에 대한 흠모 밖에 없었던 거죠.
⑬ 우물 안에 개구리는 절대로 밖을 볼 수 없다. 우물 밖으로 나와야 세상을 잘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가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어떤가요? 위 제목의 메시지는 본인의 다움블로그 한국의 근현대사 카테고리에서, 2014.8.24. 1636년 인조14 병자호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2017.12.25. 일본을 조선보다 200년 앞서 강국 만들려던 소현세자, 부왕 애첩에 죽다, 그리고 2018.3.15. 미-중 갈등 속에 한국의 생존전략과 연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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