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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동(李末仝.1443∼1518)) 진사를 추모하여 1928년 重建된 도원정사는
정문에서 연못의 다리를 지나 정사가 있고 옆에는 별채인
안락와(安樂窩)가있으며 정사중앙의 마루 좌,우로 삼외제(三畏齊)와
산택헌(山澤軒)등 두개의 방이 있다,
23세 말동(末仝)-자(字) 자원(子源), 호(號) 도원(桃源)
-1443년 세종 계해(癸亥)년에 경주 부남리에서 출생
-과거와 녹(祿)을 구하는 학문은 좋아하지 않았는데 양친의 명으로
과거에 응하여 성종 1480년 37세때 생원진사, 성균진사에 모두 합격하시고
성종이 승하하시고 연산군이 실덕하는 것을 보고
장차 선비의 화가 있을 것을 미리알고 경주로 귀향하셨다가
은거할 생각으로 1496년(54세) 기계로 솔권하여 이가하셨다.
-은거시(隱居詩)
저 달에 천고의 빛이 어리고
이 바위는 늙었네라 백년등 감고
깊숙한 이 골짝엔 하도 그윽해
무심한 무릉도원 예가 아니랴.
-도원이란 무릉도원의 약칭인데 별유천지(別有天地)란 뜻으로
진(晉)의 무릉이란 곳에 한 어부가 배를 저어가다가 복숭아 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를 따라 올라가 별유천지에 이르러 진시황 난리를
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바깥세상 일을 모륵 산다는
고사가 있다.
-기계에 은거하신뒤 얼마안가서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6년뒤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어진 선비들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는데
환란에서 벗어난 도원공을 보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식견에 감복하였다.
-공은 효성과 우애와 공경심이 독실하여 선고 거상때는 3일간 식음을
전폐하여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일이 여러번 있었다.
눈물로서 3년을 마치고 위로 두형을 잠자리와 음식을 함께하면서
부친 섬기는 도로서 섬기었다.
-묘는 대옥동 경좌(庚座)인데 묘제일은 음력 10월 8일이다.
배는 월성정씨 현감 효본의 따님, 묘는 합폄.
-중종 무인년(1518년)에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桃源先生文集 (古明 810.819 이31?) (古枕 810.819 이31?.A) (古西 810.819 이31?)
李末仝 (1443∼1518) ; 字 子源, 號 挑源, 本貫 慶州.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事項不明], 大正13(1924)跋.
2卷1冊 ; 31.7x21.5cm.
四周雙邊. 半匡 ; 18.5x15.3cm.有界.10行18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전기의 학자인 이말동의 시문집이다.
이말동은 수의부위(修義副尉) 윤흥(允興)의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총명하고 준수하여 경사백가를 고루 관철(貫徹)하고 실천에 힘써서
과거에 응하여 작록(爵祿)을 구하는 일은 뜻하는 바는 아니었다.
부모의 뜻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1480(성종 1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의 난정을 예측하고 벼슬의 뜻을 끊고
경북 영일의 기계(杞溪)로 돌아와서 더욱 학문에 주력하여 사자육경(四字六經)
을 깊이 탐구하며 효우(孝友)를 다하여 실천에 힘썼다.
시문(詩文) 또한 능했으나 대부분 산실(散失)되고 약간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문집은 1924년 후손 영우(英雨), 종현(鍾炫) 등이 간행하였다.
저자의 유문은 시만 남아 있을 뿐인데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대개 영물(詠物), 한거(閑居), 영회(詠懷)의 내용을 담은 것이 많다.
당시 사회상의 일면인 동시에 피세(避世), 은둔으로 한거 자적하였던
사림학파의 기질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만시(輓詩) 5수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만점필재김선생(輓焰畢齋金先生)」,「만김대유굉필(輓金大猷宏弼)」 등은
그의 사우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목된다.
부록의 「사마방목(司馬榜目)」은 1480년 생원시와 진사시의 합격자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저자와 함께 김굉필(金宏弼), 송흠(宋欽),
성희안(成希顔) 등의 이름이 들어 있다.
序 ; 柳必永.
目錄.
卷之 1. 詩(89首).
卷之 2. 附錄 ; 行狀, 遺事, 墓碣銘, 墓誌銘, 桃源亭重建上樑文, 桃源亭重建記, 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
跋 ; 張錫英.
識 ; 李鍾炫.
<포항의 역사 탐방>
학 행
이 말 동
자는 자원, 호는 도원, 본관은 경주인으로 조선조 성종 경자년 중사마 양시에 급제하여 학행과 문장이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았던 김한선당 남추강, 안정민, 김절제 등과 도의로 교제하는 등 시문을 남겼으며, 한선당과는 동년계를 맺어 연상약, 도상사하여 정지로 사귀었다고 계첩에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 정사가 어지러워 불사하고 기계면에 은거하여 많은 시문을 남겼다.
경주이씨 (기계이씨 집성촌) 계보
시조 알평 표암공 始祖 謁平 瓢岩公(신라 육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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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세) 중시조 거명(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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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금현(병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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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 금서(중원태수호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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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세) 윤홍(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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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 승훈(정조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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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세) 주복(좌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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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세) 칭(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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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세) 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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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 총섬(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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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세) 춘정(순흥부사) 춘림(문하시랑)
(시랑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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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세) 녹천(공부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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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세) 준억(도위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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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세) 중화(병부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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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세) 정핵(어사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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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세) 숙진(상서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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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세) 예(감찰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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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칠세) 손보(감찰사장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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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세) 길상(사재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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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구세) 양오 - 존오 - 존중 - 존사
(사온서직장) (우정언) (진사) (교감)
직장공파 석탄공파 진사공파 교감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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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세) 良(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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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일세) 環(환)---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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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이세) 允興(윤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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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삼세) 哲仝(철동)-釋仝(석동)-末仝(말동)
(도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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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세) 宗幹(종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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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오세) 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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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육세) 養性(양성)-順性(순성)-復性(복성)-安性(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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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구세) 이상달 - (사십세) 관형 이한수 - (사십일세) 이 재영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포항으로 갈계획인데........찾아 가봐야 겠네요```
포항에서 20여키로 떨어진 곳이죠...어렸을때는 그곳이 먼지 모르고 그저 경치가 좋아 놀러 자주 갔었는데....기계는 교감공파 휘말동 후손들이 살고 있는 울경주이씨 집성촌이죠....거기서 기계유씨 시조인 유태사묘를 찾아가다 보면 기동지라응 저수지가 나오는데 저수지 산기슭에 신태사묘와 재실이 있고 도로에서 둑끝편 왼쪽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그마을이 우리 판윤공파 일가들이 마니 살아요~~ 참 내용은 도원정사 맞는데...제목이 잘못적혔네요~~~도은정사 → 도원정사로
도원선생 문집 서문에 .." 본조정 에 종묘를 세운지 인조와 명조때에 참으로 규화한 극성의 모임으로 오래지 않아 무오, 갑자사화를 맞았다. 이에 비장의 액이 태소하였다. 대현 군자 는 일시에 참혹한 ..... " 도원선생이 살았던 험란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아래 도원정 중건기에는 "바야흐로 월성 북쪽 60여리에 기계촌이 있는데 도원 이선생이 만년에 거처하여 살았던 곳이다. .... ~
언제 짬나면 한번 들러야 겠습니다^^ 三畏齋 재실의 글 아래 횡으로 쓴 글씨가 어두운 지식을 사로잡아 갑니다. 곧 천명과 대인과 성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려워 하라는 말뜻으로 보입니다. 종친들의 살아잇는듯한 글씨가 가슴에 아련해 옵니다^^
포항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길 안내해 드리죠~~^^017-530-6707
녜 종친님 고맙습니다^^ 울산에 오실 일이 있으시면 꼭 연락주세요^^ 저 역시도 취미로 울산향토사연구회에 일을 보고 있습니다^^ 011-719-8783
산택손은 주역 괘상 가운데 11번째로 "내것을 덜어서 남에게 준다"는 괘상입니다. 작게는 개인의 적은 재산으로 보지만, 크게는 국가와 국민, 또는 더 크게는 국제적인 관계로도 생각해 볼수가 있습니다. 손괘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손해와 이익이 반드시 따른다. 따라서 산택 "손"의 괘상은 백성이 잘 살아서 자기의 재산을 덜어, 국가나 군주에게 보태어 주는 것이 손괘라고 하였으니, 백성이나 민초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미로 산택헌이라는 마루 호를 썼는가 봅니다. ^^ 종친의 혜량한 마음을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