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제주는 마고지나에서 나온 영주
상고사역사 연구가인 노중평씨는 신시는 의회와 시장의 기능만을 갖춘 나라로, 각 종족이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할 때만 나라로서 의사를 결정하고 시장을 여는 초국가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각 종족의 대표가 참석하는 의회를 화백이라고 하였고, 또한 문물을 배에 싣고 와서 해변에 당(幢, 깃발)을 꽂아 놓고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것을 시장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규원사화揆園史話>단군기에서 기록되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가지고 있는 조천석(朝天石)을 조천지(朝天池)(장동균씨는 묘도군도가 있는 바다로 추정)에서 찾아낸 수석으로 보고있습니다.
조천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조천석을 방장산에서 방장에 모신 삼신의 신체로 보았던 때문일거라고 합니다.
한국애석문화연구소장 장동균씨는 신시가 있었던 삼신산 즉,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세 섬은 발해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묘도군도(廟島群島)로 보아야 한다는 설을 처음 발표했습니다.
즉 마고지나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봉래와 발해만을 징검다리처럼 잇는 일곱 섬이 칠성의 형상으로 늘어서 있는 바다 한가운데였다고 합니다.
묘도군도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은 묘도廟島의 묘자를 이 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보고, 탱그렁도의 탱그렁(하늘)은 단군을 의미하는 문자로 봅니다.
한국문자학회에 따르면, 묘廟자는 신농국시대에 나라에서 전욱 고양이 임명한 제관이었던 중여곤衆艅'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 데에서 생겨난 문자라고 하고, 탱그렁은 몽골족의 천공이나 천상계를 의미하는 탱그리(Tangri)와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농국이 생기기 이전에, 신농국의 조상인 고시高矢를 농관農官으로 썼던 환웅이 세운 신시국이 먼저 있었다는 점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묘도군도를 삼신산으로 보았을 때 환웅이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국을 세웠다는 기록의 출처가 묘도군도에 있다고 보게 되지만, 묘도군도가 마고가 처음으로 정착하였다 하드라도 홍수 때마다 황하가 불어나 물에 잠기게 된다면 폐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섬의 주변으로는 동쪽으로 영주로 비정할 수 있는 장산도(張山島)라는 두 섬이 있으며, 북쪽에 있는 섬을 북장산도라고 하고, 남쪽에 있는 섬을 남장산도라고 합니다.
영주산은 남장산도나 북장산도 두 섬 중의 하나에 있는 산으로 볼 수 있으며,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인 것은 마고시대 사람들이 건너와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국 방방곡곡에 마고삼신이 남긴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만,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다른 고장과 달리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입니다.
제주대학의 현용준 교수의 <무속신화와 문헌신화>에 보면, 제주도의 옛 이름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영주(瀛洲)이고 둘째는 탐라(耽羅) 또는 탐랑(耽浪)라고 합니다.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에서 갈라져 나간 산이라는 뜻으로, 제주신화에 따르면 삼신이 이 고장의 시조인 고씨 양씨 부씨(삼성혈 삼조)에게 시집을 옴으로써 비로소 영주라는 이름을 갖게 괴었다고 합니다.
신화에 나오는 삼신은 태초의 삼신인 마고 궁희 소희 세 분의 후손입니다.
탐라는 북두칠성의 첫째 별인 탐랑성(貪狼星)이 관장하는 나라라는 뜻으로, 이 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주(星主)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마고가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탐랑성 을 관장하는 마고가 성주가 된다는 말입니다. 제주도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 자기의 직계 조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성주상을 차리고 자기 조상과 함께 성주에게도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地, 1454년 간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탐라현(耽羅縣)은 제주도 남쪽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맏이를 양을라(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라(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 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빛 진흙으로 봉인한 목함(木函)이 동해빈(東海濱)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쪽빛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해(西海)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계셔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으니, 마땅히 배필 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가 사시복지 (射矢卜地)하니, 양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 이도(第二都)라 했으며, 부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세종 32년(1450년)에 간행한 영주지(瀛洲誌)에 실린 삼성신화(三姓神 話)가 있습니다.
실린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에 실린 것과 거의 같으나, 탐라를 영주라고 하였고, 세 처녀와 사자가 온 나라를 동해(東海碧浪國)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역사천문학회는 <고려사 지리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탐라는 북극성인 탐랑성에서 온 것이고,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탐라는 인류가 아직 대량으로 출현하지 않고 소수의 인종만 살았던 선천시대(先天時代)부터 지명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주는 동이(東夷)의 시조인 마고가 삼신산에서 신시(神市)를 열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이름이므로, 후천시대(後天時代)부터 쓰 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탐라와 영주는 선천개천이냐, 후천개천이냐 하는 시대적 차이를 보이는 이름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두 번째는 동해빈(東海濱)을 동해바다 해안가로 해석을 해서는 안된고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고선(李固善)이 쓴 <조선기>(朝鮮紀)에 이와 똑같은 지명이 이미 단군조선시대에 나온다.
평제(平帝) 구을(丘乙) 단군 때인 병인 5년(BC2092)여름에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국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빈(지금의 황해)에 닿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 번째로 고기(古記)는 옛 사서(史書)의 이름으로 고기의 기록을 옮겨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당시 기록자들이 고려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저지른 붓장난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기에 지나(之那)가 을나(乙那)로 곡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那)는 나라를 의미하므로, 고씨 양씨 부씨가 탐라(영주)의 시조인 만큼 이들의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지나(之那)로 고쳐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목함과 석함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함(函)의 의미는 문자로 해석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해"가 들어 있는 상자이다.
또한 목함은 '동쪽으로 가는 배'를 상징하고, 석함은 '서쪽에서 실려 온 귀중한 물건'을 상징한다.
다섯 째는, 세 신인과 세 처녀의 삼이라는 숫자는 이들이 '마고삼신(麻姑三神)'의 자식임을 상징한다.
세 신인은 모흥혈(毛興穴)에서 출생했다고 하지만, 모(毛)는 무당이 모무를 출 때 들고 추는 쇠꼬리이며, 혈(穴)은 모를 꽂는 구멍이고 흥(興)은 모를 구멍에 꽂아 일으켜 세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즉 모흥혈은 춘분 마지굿을 할 때 모를 꽂아 세우는 구멍으로 고 양 부 세 사람이 모를 꽂아 놓고 쇠꼬리 춤을 춘 곳으로 보아야 한다.
세 처녀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를 찾아 온 '마고삼신'의 후예임을 상징하고, 아마 세 처녀가 가지고 온 것에 종자 이외에 마고의 신표인 '천부삼인'과 '해혹복본'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기록에는 아니 나오나 이 고장 무가사설에 "할로(漢拏) 영주(瀛洲) 삼신산(三神山) 상상고고리(上峰) …" 라는 대목이 있다.
무가에서 한라산을 영주 삼신산으로 보고 또한 이 고장에서 하는 영등제는 2월 바람으로 오는 마고삼신을 마지하는 마지굿이다.
영등제에 오는 마고삼신은 어디에서나 두 딸(궁희와 소희)을 데리고 나타난다.
여섯번째로 일본국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붓 장난이다.
제주가 탐랑성과 마고삼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후세의 사가가 제주의 역사를 폄하하기 위 하여 붓 장난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며, 벽랑국은 '바다나라'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 된다.
마고는 왜 삼신을 영주로 보낸 것일까?
<부도지>에 따르면, 마고가 생존했던 시대에 지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 불가사의한 현상때문에 마고가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종 들에게 삼신신앙을 전파하려는 의도가 있었지 않나 합니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지구에 기상재해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할 당시의 지구가 당한 재해의 원인은 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에서 온 것으로,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때를 선천先天이라고 하고,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때를 후천後天이라고 합니다.
세차운동의 실체를 몰랐던 마고는 자손에게 왜 지구가 쓰러져 선천과 후천이 생기는지 그 의혹을 밝히라고 하였고, 그가 떠나온 직녀성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는 모흥혈에서 삼신신앙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는데, 모흥혈에서 남삼신과 여삼신을 '할로 영주'의 시조로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고는 선교사로 떠나는 삼신들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보냈다고 하는데, 그 하나가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겨 신체(神體)로 모신 '천부삼인(天符三印)'이고, 다른 하나가 삼신시대의 삼신신앙의 교리인 '해혹복본(解惑復本)'입니다.
삼신들이 곳곳에서 활동을 함으로써 '해혹복본'을 교리로 하는 삼신 신앙과 칠성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천부삼인을 그대로 거울에 옮긴 것이 명두(明斗)이며, 마고는 명두를 걸어두는 신당을 최초로 삼신산에 지었는데, 이를 방장(方丈)이라고 하였고, 방장은 사방 한 장(3.3m) 규모의 전각이었다고 합니다.
또 방장이 있는 곳을 소도(蘇塗) 즉 솟대를 세우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굿을 할 때 쓰는 신대는 방장에 세운 솟대에서 나온 것으로, 무당이 굿을 하기 전에 굿상에 올리는 시루에 한지로 접은 가지 꽃을 붙인 신대를 꽂는 풍습은 마고시대의 방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안택굿에서 무당이 가지 꽃이 핀 신대를 꽂은 시루를 들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옛날에 상고시대에 임금이 제관이 되어 굿을 할 때 행했던 의식이 그대로 굿에 남아서 전해 오는 것입니다.
안택이라는 말이 지금은 한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굿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상고시대에는 서사택 방위와 동사택 방위를 좌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
이상의 마고이야기는 <부도지>를 중심으로한 고대사연구가의 논문을 주로 참고했으며, 단군시대 이전의 상고사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오래동안 수집한 자료에 근거했습니다,
이야기나 소설체로 쓸어가면 본질의 왜곡이 생길수도 있으므로, 가급적 조사된 내용으로 전개하다보니 글내용이 무척 딱딱해졌습니다.
그리고 마고성 시대이후의 이야기는 당분간 올리지 않기로 해습니다.
이해바랍니다.
첫댓글 스페인 방문때 고야의 작품을 많이 감상 했었는데 이렇게 그의 스토리 잘 보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