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의 죽음은 완벽한 구속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돌트 신경 2장 8-9항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오늘 아침 Ⅱ장 8,9항을 다루면서, 복음이 퍼져나갈 때에, 하나님이 추수하시면서 당신이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참으로 회개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선택된 모든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8항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서, 바울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의 이 말씀과 일치하게, 우리가 읽은 8항에서, 그리스도는 끝까지 택자를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고, 결국 점과 흠이 없이 영광 가운데 자신을 위해 그들을 드리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말들은 에베소서 5장 27절에서 인용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교회가 언급되었고, 9항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21주일에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전 인류 가운데 태초부터 세말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위해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전하시는 것은 바로 이 교회의 구성원들을 위해서입니다. 이 교회의 구성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완벽한 구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뿌린 피를 근거로 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유일한 피 입니다. 이 피가 언젠가 우리가 안전하게 본향에 도착할 것이라는 견고한 확신을 줍니다. 이 본향에 이미 그리스도가 오늘 계십니다. 여기에서 그 날이란, 세례 예식서에서 읽어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드디어 흠과 점이 없이 하나님의 택자의 모임 가운데 영원한 생명 안에서 드려지게 될 그 날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하고자 하는 복음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목과 두 가지 소논지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완벽한 구속을 확신시킨다.
1. 이 확신이 토대를 둔 견고한 토대
2. 우리가 이 확신으로부터 도출한 풍성한 위로
1. 이 확신이 토대를 둔 견고한 토대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결혼식을 앞두고, 여러분은 장기간에 걸쳐 계획을 세웠습니다. 결혼식을 가능한 멋진 아름다운 날로 만들기 위해서 이를 염두에 두고 저축했습니다. 덧붙여 그 외에 많은 계획도 세웠습니다. 예식, 사진촬영, 파티 등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드디어 이 큰 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그 날, 여러분이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과 더불어 한평생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회에 도착해서, 신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된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돌트 신경 IⅡ장 9항에서 우리는 신랑과 신부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신부는 교회입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자기 생명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주셨고, 이 신부를 자기의 보혈로 사셨습니다. 이 일이 2,000년 전 갈보리에서 있었습니다. 이 신부가 신랑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을 때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역사 마지막 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축하될 때에, 신부는 없습니다.
알미니안에 의하면, 이론상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원 받게 될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위해 보편적으로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회란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나 “아니오”라는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론상으로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서는 아닌 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날 어린 양 혼인잔치 때에] 신랑은 신부 없이도 지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자유의지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이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러나 돌트 신경 Ⅱ장 8,9항은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설사 지옥의 문이 이를 좌절시키고자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될 것입니다. 사단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에 받는 풍성한 위로입니다. 성경은 모든 페이지에서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당신의 백성이 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 일이 우리에게 참으로 과분한 일이 틀림이 없음에도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기에 얼마나 합당하지 않는지를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오늘 아침에 읽은 본문 일부에 초점을 맞추어봅시다. 이 본문은 에스겔 16장 1-14절 예언 가운데 한 단락입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람의 이해를 너머서는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이 주어온 아이로서, 예를 들어 원치 않은 아이, 자기 어머니에게 거절당한 아이, 태어나서 씻기기도 전에 버림받은 아이, 태어난 날이 탄식이 되어버린 아이로서 그려져 있는 이미지를 살펴볼 때에 이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시작부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었다면, 자랑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뿌리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교회로서, 교회 회원으로서, 우리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 버려진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죽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16장의 첫 단락입니다. 이것이 모든 알미니안 가르침, 예를 들어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스스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에 치명타를 가하는 성경의 한 단락입니다. 이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것은 교회의 존재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16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버려진 아이,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이 아이, 자기 핏줄과 싸우는 이 아이를 보셨을 때에, 모른 채하고 지나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도와 달라고 우는 피로 더럽혀진 이 아이를 팔로 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아이를 돌보셨습니다. 내가 어디에선가 읽었던 것처럼, 자라서 그의 집에 여자 종이 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이 아이가 자라서, 성숙해져, 대단히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어, 드디어 사랑의 날(혼인식)이 이르러, 우리가 에스겔 16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날개를 그녀를 덮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에스겔 16장 8절에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것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10절과 그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아가씨를 아름다운 옷과 은금으로 단정하시는 지를 읽습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이 버려진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신부가 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 아가씨는 감사함을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에스겔 16장 후반부에는 이 모든 사랑이 그녀에게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창기와 같이 놀아났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용어는 호세아의 예언들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과도 비슷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특별히 호세아 2장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모든 선물, 가나안 땅의 부유함을 가나안 신, 바알에게 돌렸다는 사실을 읽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랑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 다른 정부를 좇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모든 사랑의 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남편이 신실하지 못하게 된, 그것도 단 한 번이 아니라 몇 차례 반복해서 신실하지 못함을 드러낸 아내에게 사랑을 베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호세아 2장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새 출발하기를 여전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여기에서 주목하십시오.
지금도 신약성경 내내 이 노선을 따라가 보면, 이를 위해서 얼마나 고액의 대가가 지불되었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하나님의 공의를 취하시키지 않기에,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치러진 죄에 대한 속전이 치러졌기에 말입니다. 찬송 40장 가사처럼, 도망하는 신부를 찾기 위해서 속전이 지불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신부를 사셨고, 신부의 생명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신부를 다시 거룩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돌트 신경으로 되돌아가, 점과 흠이 없는 영광 가운데서 신부를 드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사실은 역사 맨 마지막 날에 교회가 거기에 있게 될 때에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단이 신랑에게서 신부를 꾀어 떼어내려고 이 모든 일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애를 쓰든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될 것입니다. 택자는 안전하게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역사 내내 교회의 모든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분열로 찢겨진다고 하더라도, 이단으로 의기소침해진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크게 승리하는 그 날에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이를 때에, 신부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이 묘사한 바와 같이, 깨끗하고 환한 세마포로 단정하여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확신의 토대가 된 견고한 기초입니다. 성경을 펼쳐 구약에서 신약성경까지 이 노선을 따라 가보면, 모든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러한 분명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알미니안의 가르침은 여전히 대단히 강력합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말입니다.
알미니안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면, 만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이 모든 사람을 의도되었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와서 구원받지 않는가? 알미니안의 대답은 일부 죄인들이 단순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허용하지 않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 말이 어떤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일부 죄인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허용하지 않아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면, 실제로 이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에 의해서 우롱당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책임이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주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통제하시는 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통제하는 이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일부 죄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허용하지 않아 자신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를 이길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사람이 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반대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걸려 있는 강력한 토대이기도 한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내가 구원의 확신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내일이 되면 이것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를 어디에 둡니까?
자 성경적인 관점으로 되돌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오직 택자를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8항이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오직 택자에게만 의롭다하시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그들을 확실히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뜻과 의도였습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에서, 하나님은 단지 당신이 구원하기를 원하는 자들만을 선택하셨을 뿐 아니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을 구원받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은혜를 받도록 선택하신 사람들이 때때로 이 은혜를 거스르고 저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왜곡시켜 이 구속이 그들의 삶에 결실을 내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자이시며, 통제하시며,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죄성을 지닌 인생들과 강퍅한 마음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패해질 수 없습니다.
2. 우리가 이 확신으로부터 도출한 풍성한 위로
형제자매들이여! 이 성경적인 관점이 무한한 위로를 가집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이 만일 우리와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맡겨져 있다면, 결코 이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우리의 마음이 구원을 받아들이지만, 다른 날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통제권, 주재시라는 사실이 훨씬 더 우리를 부유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효력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죄된 마음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희생제사라는 사실이 훨씬 더 우리를 풍성하게 합니다. 이것이 돌트 신경 IⅡ장 8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말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족성이 신자인 우리에게 충만하고 완벽한 구원을 보장한다." 우리 신경에는 부분적인 구속이나, 불완전한 구원이라는 말이나 개념이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 신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민족 족속 나라 방언으로부터 모든 택자들, 즉 영원부터 구원으로 택함을 받고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신 자들만을 효과적으로 구속하시기를 뜻하셨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성령의 다른 구원의 선물들과 함께 그의 죽으심으로 택자들을 위해 획득하신 믿음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의 피로 모든 죄, 곧 원죄와 자범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와 믿기 전에 지은 모든 죄로부터 택자들을 정결하게 하시며, 택자들을 세상 끝날까지 신실하게 지키셔서, 마침내 아무런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영광 중에 그분 앞에 나타나게 하시기를 뜻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태초부터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마지막으로 귀향할 때까지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족성에 의해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보장됩니다. 택자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을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믿음을 주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보전하셔서, 마침내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으로 더불어 시작하고 끝나는 구원의 황금사슬이라고 부릅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 즉 모든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립시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안전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과 관련하여,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의 희생제사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의 확신이 매여 있는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요한복음 10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서 자기 생명을 양들을 위해 내어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소유입니다. 그의 보혈로 샀습니다. 이 양들을 이와 같은 보혈로 값을 주고 샀기에, 그리스도는 안전하게 보장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친히 같은 장에서 아무도 그들을 당신의 장중에서 낚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밀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며, 그들이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그리스도에게 귀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서 따뜻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획득하신 구속 안에서 보호받고 보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앎으로 말입니다.
이 문맥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개개 양들을 위해만 자기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양무리 전체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특별히 복음주의 운동에 맞서 강조하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 운동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가져야 하는 개인적인 관계에 많이 강조합니다. 나는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주 교회에 관한 성경적인 개념을 희생시키면서 이렇게 한다는 사실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 여러분이 어느 교회를 다니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우리가 요한복음 10장에서 읽는 내용과는 정반대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10장 16절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생각합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날 대세사장적인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저희도 다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0,21) 저는 여기에서 찬송 40장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노래하면서, 그리스도가 자기 피를 흘리신 사람들인 신부인 교회가 이 찬송 2절에서도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위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여행하거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통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공통된 결속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도 결속되어 있습니다. 함께 우리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믿습니다. 함께 우리가 이 목소리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께서 시편 23편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합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요한복음 10장을 살펴보면, 이 장에서 우리는 또한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양을 아신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 말은 그리스도가 여러분 개개인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여러분이 힘든 유혹을 받았을 때조차도 그분은 특별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구원과 관련하여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러분을 다루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특정한 죄된 욕구들에 의해서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식으로 이 양들이 그리스도에게 매달릴 때에, 어떤 능력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사단이 삼킬 자를 찾는 우는 사자와 같이 포효하면서 거니는 이 세상 안에서 이 사실은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은 모든 짓을 다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꾀려고 합니다. 유혹거리로 공격합니다. 때때로 아주 쉽게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들도 이 유혹에 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젊은이들만 바라보지 말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합시다. 부모인 우리는 우리자녀들이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믿음으로 삽니까? 아니면 우리가 진실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은 즐거움을 날마다 새롭게 반향합니까? 가정에서 식탁에 앉아 쉽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필요로 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먼저 거울을 쳐다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는 않습니까?
교회 청소년들과 관련하여, 사단은 참으로 대단히 적극적이며, 때로는 사단이 참으로 교회 세례단에서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공적인 신앙고백을 열정적으로 했던, 교회를 떠나 자신의 죄된 정욕을 따르는 회원들, 즉 양무리 가운데 몇 마리를 낚아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단이 그리스도의 장중에서 이 어린 양들을 낚아챌 수 있었습니까?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녀를 둔 많은 부모들은 이와 같은 어려운 질문들과 씨름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오늘 아침에 뚜렷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의 약속이 여전히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이 약속을 부모들이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은혜 안에 사는 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탕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던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되돌아올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큰 위로가 있습니다. 설사 때때로 우리가 종종 무기력감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소망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렬할 때에도 말입니다. 소망을 포기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0장에서 우리는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이 살도록 죽으셨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생명을 양무리를 위해서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녀에게 손을 뻗을 수 없는 곳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거기에 계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잃어버린 이 양들에게 펼쳐집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도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생명을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부모들이 탄원해도 되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 자녀들이 항상 주님의 길 안에서 걷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녀들 성장하여 그들 역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우리가 오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밤낮 우리의 손을 포개고, 이 목자의 장중에 우리 자녀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님, 자주 우리는 무기력을 느낍니다. 주님, 우리는 많은 죄와 연약함을 지닌 우리 자녀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저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협착하고 좁은 길에서 그들의 발걸음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사단이 어떤 시도를 하든지, 그리스도가 자기 보혈을 흘려 사신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당신의 장중에서 낚아 채임을 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신 방법을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영원하신 왕이신 그리스도는 참으로 당신이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속 안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보존하실 것입니다.
항론파들은 이 모든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항로파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단지 구원만 획득하셨고,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예" 혹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찬양의 책에서 여러분에게 오류 1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성부께서는 특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특별하고 한정된 작정이 없이 그분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도록 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으로 획득하신 것은 필연적이며, 유익하고, 가치 있으며, 비록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구속이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무결하고 온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오류를 반박하면서, 이사야 53장의 경이로운 예언의 말씀을 참고구절로 달아 놓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와 같은 경이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위한, 우리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 장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전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라" (53:10)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끝에 자신이 받지도 못할 것을 위해서 비싼 값을 누가 지불하겠습니까? 이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안전한 거처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안전한 본향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지옥의 문이 이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이 일은 기필코 일어날 것입니다. 사단의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9항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7항에서 우리는 이 거룩한 교회에 대해서 읽습니다. 하나님께 받쳐지도록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별된 교회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거룩한 교회가 온 세상의 격노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보존될 것입니다.
세상의 이 격노 때문에, 교회의 역사는 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7항은 아합 왕의 위험천만한 재위를 언급합니다. 이 시기 동안 마치 교회가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이 7,000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에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그 당대에서 자기 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백성이 없이 지내실 수 없으신 영원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날에도 교회는 위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위험천만한 요인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마태복음 24장에서 이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처럼 말입니다. 시대의 표적들과 시대 끝에 있을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24절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단이 택한 자도 미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기 보혈을 뿌린 이 양 무리들을 자기 장중에서 낚아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추수를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9항의 결론적인 문장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구주로 변함없이 사랑하며, 신실하게 섬기고, 지금 그리고 영원무궁토록 그분을 찬송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나의 장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보장된 여러분과 저의 장래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선포된 것과 같이 이 복음을 결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하게 이 복음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능력을 통해서 위에서부터 주신 믿음을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끝까지 보존될 것입니다. 설사 때로는 우리의 심령이 환란 한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격노한 적들이 우리의 영혼을 놀라게 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작하신 일을 완벽하게 끝내실 것이라. 그의 시작된 일이 그의 자비로 결코 중단되거나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오 주님, 우리의 바위이시며 구속자시여, 저희는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복음에 단지 놀랄 수밖에 없으며, 이에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