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성의 극복과 현실의 시학
권갑하
1. 들어가면서
지난 20세기는 서구문화에 매몰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혼돈의 시기였다.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외국에 가서 인정을 받아와야만 소위 교수가 되고 그 분야에서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맹목의 한 세기를 투자하여 이제 우리는 비로소 우리 것의 가치에 눈뜨게 되었고, 세계 속에 우리 문화와 예술을 자신 있게 펼쳐 보일 수 있는 자주의식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시조문학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인식과 수용이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제대로 부응하는 것일까. 필자는 우선 시조의 형식적 변신에 좀더 주체적인 자세와 열린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조의 변신은 그런 점에서 무죄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시조가 자유시를 닮으려 한다’는 문단의 비판은 지극히 자유시적 관점일 뿐, 시조문학이 중심이 되는 주체적 관점은 아니다.
양식적으로 신라 향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조는 조선시대 들어 주자학적 사회 이념을 만나면서 형태가 더욱 정연해지고, 말을 고도로 압축하는 평시조의 미학을 꽃피웠다. 번잡스러움을 멀리하고 무엇보다 절조를 중시하던 당시 사회 규범의 총체적 반영의 결과물이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초래된 사회변화에 따라 서술양식에 대한 눈뜸이 생겨나고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성장한 평민 의식이 반영되어 엇시조와 사설시조 같은 서술이 가미된 형태적 변화가 생겨났다. 이처럼 시조는 한 시대의 고정된 양식에 박제되어 온 것이 아니라 열린 정신으로 시대변화를 수용하는 양식적 진화를 거듭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빚어진 지난 1세기의 혼돈도 어떤 식으로든 시조문학 발전의 긍정적 동인으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평시조에서 사설시조로 진화되어온 거대한 흐름 위에서 현대화라는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현시점에서 시조는 평시조, 연시조를 기본으로 단장시조, 양장시조,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을 다양하게 버무린 결합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조의 시조가 창작되고 있으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대화의 수용이다. 이러한 시형으로도 ‘현대인의 의식세계’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창조가 움틀 것이며, 그러한 실험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외적 영향과 시대변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변화의 결과물이 외형적으로 자유시를 닮았다 하여 스스로를 문제시하거나 가두고 기피할 일은 못된다. 그러한 자세야말로 자존심의 결여이며, 주체성을 상실한 열등감의 표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우리는 시조를 통한 자유시의 포용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시인이 시를 씀에 있어 어떤 구조의 시형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시인의 자연스런 선택사항에 속한다. 다만, 그러한 구조가 자신의 시상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냐의 문제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2. 추창호, 임성화, 김병환의 시 읽기
대체적으로 볼 때 울산시조는 평시조의 기풍이 강한 것 같다. 여기 소개되는 시인들도 평소 사설보다는 평시조와 연시조를 즐겨 쓰는 시인들이다. 그만큼 형식에 관한 전통의식이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형식을 취하건 기본적으로 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팽팽한 시적 긴장, 선명한 이미지, 그리고 회화성과 음악성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한다. 시조의 경우 특히 음악성, 즉 운율이 기본적으로 바탕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 외의 요소를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할 경우 자칫 운율의 상투성에 갇혀 감동의 증폭을 떨어뜨릴 위험성이 크다. 시인은 상투적인 공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야 하듯, 시형식의 운용에도 상투성을 극복해야만 좋은 시를 빚을 수 있다.
□ 섧은 단풍과 녹슨 문패 - 추창호
잡초로 산 한 생애를
무담보로 잡혀 놓고
허드레 일감을 찾아
해종일을 헤맨 김씨
그 섧은
가슴을 밝혀
꽃불 켜든 연등 행렬.
- 「단풍」 전문
‘단풍’같은 소재로 좋은 시로 빚기란 사실 쉽지 않다. 가을, 황혼기 등 단풍이 주는 일반적 이미지가 너무 강해 신선감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시인은 구체적인 시적 대상으로 ‘김씨’를 등장시킨다. ‘잡초’같은 생을 살아온 김씨. 그러니 그 생을 담보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허드레 일감을 찾아 해종일을 헤매는’ 일밖에. 초중장의 평이한 서술은 종장의 ‘섧은 가슴’이라는 시적 에스프리 강한 구절을 만나면서 극반전 된다. 그 순간 아름답게만 보이던 단풍이 ‘섧은’ 빛깔을 띠게 되고, 다시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의 ‘섧은’ 일생으로 환치되어 독자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연등행렬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섧은 가슴을 밝혀 꽃불 켜든’다는 구절이 암시하듯, 그것은 잡초처럼 살아온 보잘 것 없는 삶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을 심화시키는 매개물이다. 즉 시인은 참삶에 대한 구원적 행위로 연등 행렬을 끌어온 것이다. 그로 인해 연등 행렬은 자연스럽게 단풍잎과 연상 작용을 일으켜 생명력 있는 이미지를 확보한다. 시적 오브제인 사물과 언어 구성물인 시가 동일시되는 효과다.
욕실 한 구석에 녹슨 문패 놓여있다
“집 한 채 온전히 갖는 날 달아라"시던
아버님 속 깊은 정이 가슴팍을 후려친다
당찬 첫 울음만큼 푸른 희망이었기를
제대로 된 노래 하나 가지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랬을 그 뜻 아직 바로 볼 수 없다
남루한 삶의 때를 비눗물로 씻어 내리며
시궁창으로 흘러드는 허드렛물을 바라보며
만 근의 무게에 눌린 내 전체를 들어본다
-「문패」전문
앞의 작품이 ‘단풍’을 통해 삶을 관조하는 깊이가 돋보인다면, 「문패」는 현대인의 애환을 담은 자기성찰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집 한 채 온전히 갖는 날 달아라’며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문패’. 하지만, 아직 문패를 달지 못하고 욕실 한 구석에 보관해오고 있는 작중 화자. 그런 죄책감으로 욕실에 놓여 있는 문패를 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이 작품이 특히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것은 ‘문패와 욕실'의 절묘한 환경 설정 덕분이다. 마무리의 셋째 수에 이르러 비로소 욕실은 자신의 부족함을 늘 깨닫고 반성하는 공간으로, 시궁창으로 흘러들고 마는 허드렛물의 숙명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시적 확장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새로운 어휘와 구절을 찾아다니는 사냥꾼이며, 시는 그렇게 잡은 생명력 반짝거리는 어휘를 적절한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창출하는 고도의 설치 예술과 같다. 그만큼 어휘 선정과 배치가 중요하다. 시인이 고통스런 퇴고를 거듭하는 것도 결국은 어휘와 구절의 치밀한 재배치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내 집을 마련하여 번듯하게 달지 못하고 욕실에 처박아 놓은 자신의 문패를 보고 그것을 물려준 아버님의 속 깊은 뜻과 기본적으로 이름이 주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 시는 비교적 쉬운 서술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시궁창으로 흘러드는 허드렛물과 같은 삶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가슴을 저미는 반성과 다짐, 분발 등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끈다는 점에서 무척 값지다.
추창호 시인의 시편들은 이처럼 하나같이 현실에 강하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만큼 그의 시적 인식이 건강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향기로운 사랑, 그 성적 긴장 - 임성화
그대가 건넨 사랑
한 알 왕사탕이었다
녹을수록 빨려드는
한 입 가득 향기로움
어쩌면
서로를 섞는
예비연습 하는 걸까.
- 「내 사랑」 전문
위의 시는 읽을수록 묘한 느낌을 갖게 되는 작품이다. 그것은 ‘서로를 섞는’이라는 종장의 표현에 기인하는데, 이것이 시의 이미지를 끝까지 끌고 가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건네 준 한 알의 알사탕. 그 알사탕의 달콤한 맛에 깊이 빨려들수록, 입안 가득 향기로움이 넘쳐난다. 순간 시인은 사랑의 그대로부터 건네 받은 알사탕을 입안에 넣고 굴리며 향기로움을 맛보는 것을 ‘서로를 섞는’ 사랑 행위의 예비연습이 아니냐고 되물음으로써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단시조에 있어 종장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1
조금씩 쌓여 가는
세월의 껍데기들
스르륵 진공청소기
쏙 빨려 들어간 잡동사니
한 꺼풀 어둔 마음을
걷어내고 있었다.
2
어지럼증 앓는 삶이
발목 삐어 기우뚱댄다
민들레 꽃씨 날 듯
풀풀 나는 먼지 군상
사유로 닦아 내어도
깃털처럼 또 앉는다.
- 「게으름의 실체」 전문
연구논문처럼 제목이 구체적인데 우선 주목하게 된다. 이런 경우 제목에 걸 맞는 내용이 뒷받침되지 못할 경우 완성도의 결함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떤가.
첫째 수는 온갖 잡동사니를 다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를 보면서 나이가 들수록 쌓여 가는 세월의 나쁜 껍데기도 다 빨아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그런 상상이 평소 자기 불만으로 드리워진 어두운 마음을 걷어내 준다는 상황의 도입이다. 다소 모호한 서술은 둘째 수에 이르러 조금씩 껍질을 벗는데,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여도 또다시 풀풀 나는 먼지군상처럼,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바로 서지 못하고 ‘발목 삐어 기우뚱거리’는 것이 우리네 삶임을 파악한다. 나아가 정신을 가다듬고 수없이 닦아내어도 ‘깃처럼 또 앉는’ 것, 그것이 바로 ‘게으름’임을 낚아챈다. ‘사유로 닦아 내어도 깃털처럼 또 앉는다’는 마지막 종장 구절은 앞부분의 모호한 서술을 말끔히 걷어내 주면서 ‘게으름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어려운 화두를 붙잡고 퍼즐 찾기처럼 미로를 헤매다 비로소 찾아낸 출구처럼 희망과 깨달음의 메시지가 이 시에는 담겨져 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게으름의 찌꺼기를 진공청소기로 일거에 빨아낼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하루하루를 마음먹은 대로 온전히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랴. 진공청소기의 이미지가 그런 점에서 무척 강렬하다.
□ 일몰, 그 눈부신 슬픔 - 김병환
날름한 묵필 한 획 그어온 능선 위로
핏빛의 빗살무늬 세상 다시 밝혀놓고
못 다한 애욕의 그림자 침몰하고 있었다.
- 「낙조 1」전문
이 작품을 풀어보면 이렇다. 초장은, 힘들고 복잡한 하루하루의 삶이지만 다 보내고 장엄한 일몰 앞에 서고 보면 구비 구비 살아온 인생도 실은 묵필로 그은 한 획의 능선에 불과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중장은, 하지만 한 생애와 목숨은 ‘핏빛의 빗살무늬’처럼 소중한 것이며, 다시 한번 세상을 밝힐 정도의 가치와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 한편으론 아무리 하찮은 목숨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한번은 세상을 밝힐 핏빛 뜨거움과 강렬함을 갖고 있다는 진술이다. 종장은, 못 다한 애착과 탐욕의 그림자를 안타까이 드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생이지만, 결국은 그 생을 마감하고 침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요, 천리(天理)임을 웅변하고 있다. 짧지만 무척 내용이 깊은 작품이다.
천년을 빗질해도 헝클어진 구름 조각
개운포 검은 물에 형상을 담궈 놓고
폐수에 몸을 뒤채며 묵상하는 처용암.
화강암에 새긴 처용가 무심한 글귀들이
잡풀로 머리 풀고 석양에 곡을 한다
사당 앞 쓰러진 고독도 해신 불러 굿을 한다.
공단 저쪽 불어오는 납빛 무게 바람 몇 점
처용은 폐혈증으로 밤낮 구토를 해대고
발 묶인 목선도 두엇 실어증을 앓고 있다.
혼들이 빠져나간 철거민의 빈집들
대들보도 수몰된 채 갈대마저 무릎 꿇고
고압선 저 혼자 외로이 메시지를 전송한다.
- 「처용암 일몰」 전문
이 작품은 처용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의 풍경을 통해 산업화의 폐해와 현대인의 비극을 표출하고 있다. ‘일몰’이 유한한 삶의 비극을 암시한다면, ‘처용암’은 훼손된 역사의 안타까운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구도 속에서 시적 화자 앞에 펼쳐진 현실 상황은 어둡고 스산한 살풍경의 연속이다. ‘폐수에 몸을 뒤채는’ ‘잡풀로 머리풀고’ ‘ 곡을 한다’ ‘쓰러진 고목’ ‘굿을 한다’ ‘납빛무게’ ‘폐혈증’ ‘밤낮 구토’ ‘실어증’ ‘철거민’ ‘무릎 꿇고’ ‘저 혼자 외로이’ 등의 시어들이 그러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산업화, 공단화의 길을 걷고 있는 울산의 오늘, 나아가 현대사회의 황폐화와 그로 인해 초래되는 현실의 아픔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 하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런 처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그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상상력에까지 시적 확장을 꾀하지 못하고 현실의 단순 묘사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3. 나오면서
아무래도 우리가 시를 읽고 즐길 때, 스스로는 매우 객관적이고 자유롭게 접근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부지불식간에 어떤 문학적 경향이나 선입관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시를 포함한 모든 인식 작용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러한 인식행위가 편견이라는 토대 위에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추창호, 임성화, 김병환 세분의 시인에 대한 필자의 시 읽기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먼저 밝혀 두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번 소시집이 주는 값진 의미는 대부분의 시편들이 현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처절하게 다가오는 현대문명과 환경 문제, 날로 심화되는 현대인의 욕망과 인간 소외 문제 등 현실 속에서 시를 캐내는 작업이 시조에 있어 더욱 치열하게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는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평시조를 창작하는 시인들은 독자가 지루해 하지 않도록 하는 문제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조가 갖고 있는 형식의 상투성에 갇히면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도 빛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권갑하 약력
1958년 문경 출생. 1992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제17회 중앙시조대상(신인상 부문) 수상.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금 받음. 시집 <단 하루의 사랑을 위해 천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 이 교보문고 베스트 셀러 시집에 오름.
* 출처 : 울산시조 제7집 '소시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