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 및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그리고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 같은 예도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실제 존재하는 국제적 역학관계를 찬양 또는 비판하거나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 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노동자들에게 생활에 빈 짬을 주지 말라. - 김일성 |
내가 맑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경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그것을 연구하여 우리 민족 현실에 알맞은 길을 발견하자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 이관술
0. Собака
국토완정이 실패했습니다. 조선반도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남조선에 전파하려던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대학살과 납치, 개인숭배와 독재라는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수백만의 피웅덩이 위에서 권력을 지키려던 김일성에게, 소련에서 경고가 날아왔습니다. 소련의 원동정책의 핵심인사들인 김알렉산드라와 김단야가 김일성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발표 현장에는 김용범, 현준혁, 이관술 등 체제의 반대자들까지 초청하여 소련의 의도를 명확히 하였죠.
1953년 7월 3일,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가 6.25 전쟁의 개전에 반대하여 실각했던 강원도 자본가 출신의 사회주의자 조석중은 주북한 소련대사 박진순의 제안을 받고 김영천 대감 고택에 자신이 고른 세 명을 불렀습니다. 소련 공군 출신으로 한국에 포로로 잡혔다가 고생 끝에 복귀한 고려인 온건파 '오승택', 소련 육군 출신으로 민족주의자인 '비우익', 광부 출신 사회주의 운동가로 본래 김일성을 지지했지만 사이가 멀어진 '이덕삼'이었습니다. 세 명의 공통점은 김일성을 반대했으며, 직접적으로 소련파에 속하지 않아 소련측에서도 부담이 없었고, 6.25전쟁의 발발을 열렬히 찬성하지 않았으면서 전쟁이 터지자 전선에서 싸웠다는 것이었죠.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네 명의 의견은 같았습니다. 사회주의 북한의 자주독립, 그리고 제 2의 김일성의 방지였죠. 이들은 가장 먼저 김일성을 지지해 자리에 올린 김일성의 개들, 'Собака', 즉 사바카를 처리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 사바카는 다름아닌 사박가, 네명의 박씨 정치인들을 이르는 속어였습니다. 그들은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 박영빈, 조선노동장 연락부장 박금철, 조선노동당 제3비서 박창옥,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 박정애였습니다.
조사와 연구결과 네명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허가이가 권력에서 미끄러진 이후 권력을 잡은 테크노크라트 박영빈, 소련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웠지만 남로당파와 사이가 극히 나쁜 박창옥, 자기 고향인 갑산에서 대일 무장투쟁을 벌였지만 고향 외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은 박금철,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박정애는 각자의 입지가 존재하는 유력 정치인사들이었죠.
김일성의 실각을 위해 모인 조석중과 오승택, 비우익, 이덕삼은 소련이 원하는 '민주주의적 정권교체'에 맞게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김일성을 체포하고 전시재판을 열거나, 허수아비들을 앉혀놓고 해임투표를 하는 방안 등은 자연스럽게 제외되었죠. 네 명의 추종자, 사바카들도 그들을 직접 만나거나, 그들과 관련된 인사들을 만나 김일성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안이 결정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만난 박달은 여러분의 회유와 설득 끝에 사바카 중 한 명인 박금철이 사실은 일제에 전향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너무 널리 퍼지지 않는다는 조건 하의 공개였죠. 그러나, 본래 김일성 지지자였던 이덕삼과 달리 오승택, 비우익은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두 명은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강위룡과 접촉, 김일성이 사실 보천보 전투에 참전한 적도 없다는 것을 비롯한 온갖 확인되지 않은 추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에 오승택과 비우익은 그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이 추문을 쉽사리 믿어버렸습니다.
오승택과 비우익은 김일성의 심판대에 강위룡을 증인으로 부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친하고 가까운 만큼 김일성의 이야기를 쉽게 떠들 수 있었던 강위룡은 친구인 김일성을 심판하는 것은 꺼려했습니다. 그는 결국 보천보 전투에 대한 자신의 확인되지 않은 증언만을 밝히는 것에 합의하셨습니다. 한편, 오승택, 비우익과 흩어져 돌아가던 이덕삼은 우연히 자신의 옛 상관인 연안파 김창덕과 신규 주조중국대사 김학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의 극렬한 반대파인 그는 김일성을 격렬히 비난하며 중국과 중공 또한 김일성의 실각을 지지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혔습니다.
납북된 이관술이 콤그룹파를 재조직하고, 남로당파들이 움직여 한국에 낙오된 빨치산들을 귀환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동안, 김일성을 몰락시킬 최고인민회의 임시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1. 7월 임시회의
김일성을 파멸시킬 증거를 모은 세 명은, 다가올 최고인민회의 임시회의에서 김일성 내각을 총사퇴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노동당의 회의가 아닌 최고인민회의 임시회의가 개최된 이유는 '민주적 제도 선언'을 위한 소련의 의도 때문이었죠. 김일성과 김일성의 지지세력이 돌발행동을 할 것에 대비해, 오승택, 비우익, 이덕삼은 사전조사에 힘썼습니다.
김일성의 비서 중 한명이었던 재일교포 정치인 영강과 접촉한 오승택은 영강을 쉽게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영강은 말을 빙빙 돌리며, 재일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대단히 무리한 요구까지 제시했습니다. 오승택이 생각하기에 재일교포 북송은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 확충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남북한과 일본을 둘러싼 국제적인 역학관계는 그가 잘 알지 못했기에 오승택은 그러려니 하고 적당히 동의하며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 자체는 함정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영강을 이미 김일성 측 요원들이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죠. 영강은 일부러 터무니없는 조건을 꺼내고 그 댓가인 있지도 않은 김일성의 연설 준비 문서를 정확히 설명도 들은적 없는 일행의 모임 위치인 김영천 대감댁으로 보낸다고 밝혔습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인지, 오승택이 빌려 탔던 차량을 습격하려는 인화물질이 가득 실린 트럭은 다행히 차량을 피해갔습니다.
전쟁영웅 답게 김영천 대감댁을 감시하던 김일성 지지세력인 만주파의 요원 두 명을 제압한 오승택은 김일성에 대한 계획을 완화시키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해 김일성의 헝가리 망명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영강이 평양의학대 건물에 감금되어 있다는 정보 또한 입수할 수 있었죠. 오승택은 만주파 측에 혼란을 주기 위해 가짜 무전을 하려 했지만, 만주파 요원들은 책임소재를 두고 다투다 알아서 와해되는 촌극을 보였습니다.
오승택이 고생하는 동안, 비우익은 김일성의 지지자 중 최고의 거물이었던 여성동맹 위원장 박정애와 접촉했습니다. 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을밀대에서 박정애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내비치며, 소련이 지지한 지도자의 신격화에 앞장선 정치적 식견을 드러냈습니다. 박정애의 요구조건은 간단했습니다. 이 일에 참가하는 소련파 인사들이 소련 국적을 포기하고 북한에 완전 눌러앉는 것이었죠. 만약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돌아갈 길을 없애버리란 요구에 비우익은 생각에 잠겼지만 어렵지 않게 동의했습니다. 박정애의 쉬운 동의는 예상 밖이었지만요.
본래 김일성파와 가까웠던 이덕삼은 북한의 방첩기관인 안전기관의 기관장 김정파와 접촉했습니다. 소문으로는 친일파 아버지와 노동조합주의자 언니를 제 손으로 제거했다는 김정파는 이덕삼의 '순수함'에 놀라면서도 감탄하였고, 이덕삼이 사리사욕을 위해 김일성 실각을 도모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김일성의 애첩 김성애를 비롯한 인사들이 곳곳에 포진한 경위연대에 간첩이 숨어있다고 주장하여 출동을 방지한다는 것이었죠.
마침내 7월 9일, 모란봉 극장에서 최고인민회의 임시회의가 열렸습니다 여러 초청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오승택, 비우익, 이덕삼의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잘못에서 배우지 못하는 배신자, 정통성 없는 권력자, 아군이 아니라 적만 늘린 무능한 지도자'라는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일성의 최대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박정애도 쐐기를 박았습니다. 정통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결코 개인숭배의 자리를 넣어놓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김일성이 '정통 교리를 왜곡한 이단'알고 선언한 것이었죠.
베리야의 몰락 이후 상당한 권력을 쥐게 된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일성의 다른 유력 지지자였던 박금철이 일어나 김일성을 옹호했습니다. 특히, 박정애가 김일성을 우상화했던 것을 지적하며 김일성을 열렬히 찬양하였죠. 그러나 초청인사로 와 있던 박달은 박금철 전향서가 있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발언을 해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김일성을 비판하면서 은근슬쩍 일제와 전향자라는 단어를 넣은 이덕삼의 암시를 박금철은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치부가 공개적으로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김일성 변호를 더 하지 못하고 앉아야만 했습니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문 박창옥과 박영빈이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오승택은 김일성의 헝가리 망명시도 증언록과 증거자료를 얻어내었습니다.
비판이 이어지는 동안, 이미 대세는 김일성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권력 분배의 타협으로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되었던 박헌영은 조선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였고, 6.25 전쟁의 개전 당시 김일성과 사이가 멀어진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김일성을 보호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을 지지하였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과 내각 부수상 최창익이 당황하는 가운데, 연안파의 실력자 중 한명인 박일우도 일어나 김일성을 비판하였습니다.
잠깐이나마 남한의 정치맛을 본 오승택이 야당 연합을 구성하려다 조선인민당 간부들에 의해 의견이 묵살되는 사이, 세 명은 마침내 강위룡을 증언대에 세우는 데 합의하였습니다. 김일성의 동생이자 유학파인 김영주가 논리적으로 김일성 반대파들을 비판하는 동안, 망상과 상상으로 머리속이 가득찬 강위룡이 마침내 발언 준비를 마쳤습니다.
강위룡이 자신의 인생 최대의 업적을 아예 부정해버리자 김일성은 분노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위룡의 증언은 허점이 너무나 많았던데다 정작 강위룡도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바로 옆에서 총을 들고 싸웠었기 때문이었죠. 강위룡과 그 형인 강위련을 측근으로써 잘 대해주고 있던 김일성은 이 공격이 자신의 업적 부정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측근들이 모조리 무너져내렸다는 의미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강위룡을 만난 적이 없고, 따라서 속은 적도 없는 이덕삼이 김일성이 당황하는 것을 듣고 의심을 품기는 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습니다.
결국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김일성 내각은 총사퇴하고, 김일성에게만 수여되었던 원수계급이 박탈되었습니다. 조선노동당은 김일성이 부위원장에서 사퇴하게 만들었습니다. 감리교 신자였던 오승택이 김일성의 측근이자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강량욱을 치켜세우는 듯 하며 놀리는 상황이 연출되자, 강량욱도 상임위원회 서기에서 결국 사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예측한 대로, 조선노동당 위원장과 박헌영이 내각을 조각하게 되었습니다. 남로당파가 권력을 쥐게 된 것이었습니다. 김일성 우상화에 앞장섰던 인사들이 자아비판문을 제출하고, 박헌영은 소련의 의도대로 개인숭배를 배격하였습니다. 박헌영과 남로당파는 1945년-46년 동안 한국에서 잠깐이나마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정당 운영을 목표로 움직인 적이 있었기에 소련이 원하는 형태의 인민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죠. 물론 이는 김일성을 지지했던 연안파를 크게 분노시켰고, 중국 내 조선인들의 사회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배척하려는 남로당파와 연안파는 결국 갈라설 위기에 처했습니다.
한편, 남로당파의 복귀는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 또한 불러왔습니다.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중도주의, 진보주의 정치단체들이 모여 거대한 세력을 결성하였습니다. 연안파는 황급히 대중운동을 벌여 공공연히 한국을 지지하고 자본주의를 찬양한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고, 남로당파도 이에 동의하며 일시적인 해빙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연안파가 다급하게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미였기에 남로당파는 연안파 군 장성들을 꼬드기며 권력을 공고히했습니다. 오승택, 비우익, 이덕삼의 후원자인 조석중 또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전하며 강력한 권력의 핵심이 되었죠.
김일성과 만주파를 우상화했던 지명과 시설명들이 모조리 개칭되고, 보천보 전투 조사위원회가 보천보 전투의 실상을 조사하며 김일성이 반국가·반혁명적·종파행위로 불구속 수사를 받기 시작하자, 모두들 세상이 약간이나마 바뀌기는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북한과 전쟁 중이었던 한국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2. 휴전협정
북한의 권력을 쥔 남로당파는 자신들의 핵심·열성 지지자들인 조선인민유격대, 즉 빨치산 조직들을 월북시키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렇기 위해 수만명에 달하는 국군 포로 및 비전향자들을 한국으로 송환시킬 계획까지 꾸몄죠. 이는 본래 인민군 입대자는 포로가 아니라는 기적의 논리에서 한 발 물러난 것이었습니다. 5만 2천명에 달하는 국군 포로가 휴전협정의 협상대에 올라오자 한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김일성의 실각은 급작스러웠고, 빨치산들이 교전권 인정을 요구하며 평화롭게 투항하는 것도 혼란스러웠죠.
그러나 한국 정치권에 무슨 일이 나고 있는지는 몰라도 판문점 회담장에 한국 대표는 도통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최덕신을 비롯한 한국 측 휴전회담 대표가 김포의 유엔군 기지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게 전부였죠. 오승택은 한국의 권력구도가 함태영 대통령, 이범석 부통령, 장면 총리와 자유당, 민주국민당 구/신파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이범석의 사조직이었던 조선민족청년당 출신의 국회의원이자 재북인사인 강욱중과 접촉했습니다.
강욱중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월북자와 납북자들이 사적인 모임을 갖고 있고, 북한에 머무른 지 3년이 된 자신이 최근 정보를 알고있는 것도 그 모임에서 얻은 것이란 거였죠. 그들은 딱히 반공 쿠데타 같은 것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민족자주연맹의 세 확장과 무관한 것은 아닐 터였습니다. 그러나, 당장 휴전협정이 급했던 오승택은 적당히 강욱중이 무슨 말을 하던지, 그 정보가 강욱중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숨겨주겠다며 넘어갔습니다.
강욱중의 정보통에 따르면 북한의 첫 예상과는 달리, 정계 원로인 함태영이 섵불리 발언하지 않는 가운데 자유당 일부와 민주국민당 구파의 지지를 받는 이범석 부통령이 어느 정도 휴전에 유화적이고, 반대로 자유당 소수와 야당인 민주국민당 신파의 지지를 받는 장면 총리가 휴전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범석은 공정한 포로교환이 전제된다면 휴전에 동의, 장면은 포로교환에 남침 인정을 비롯한 여러 외교적 우위가 있어야 휴전에 동의한다는 것이었죠. 손원일 국방장관과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군의 개입은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지만, 정치권의 혼란에는 간섭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었기에 혼란이 길어지는 것이었죠.
이덕삼이 전쟁이 더 길어지면 북한이 결국 불리한 입장에 처할 것이라 전망하는 사이, 비우익은 여러 월북/납북인사들을 만나고 내무성 정치보위국의 도움을 받아 강욱중의 증언이 사실이라는걸 파악했습니다. 고심 끝에, 섵부른 대남 공작을 하는 대신 두 가지 전략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하나는 재북인사들과 일부 납북자들을 송환함으로써 협상 국면에서 유리한 편에 서는 전략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강과 연이 닿아있는 오승택이 재일교포 지원을 밝혀 일본을 움직이는 게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북한이 재일교포들을 알아서 먹여살릴 것이란 소문에 일본이 암묵적으로 북한의 편을 드는 사이, 납북인사 일부 송환이라는 말이 들리자 온 한국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최덕신을 대표로 한 한국 대표단이 판문점에 복귀하자, 유엔군 사령부는 최종 협상안을 제시했습니다. 현 전선을 휴전선으로 삼고, 포로는 포로는 양국이 확보 중인 포로 모두 원하는 의사에 따라 잔류 혹은 송환하되, 기존 포로송환 협정에 따른 중립국에서의 유예기간을 둘 것. 단, 해당 중립국은 인도로 하되, 사회주의 국가인 인도의 특성을 고려하여 미국 대표단이 공정한 유예기간이 있도록 감시할 것. 북한 측은 납북 인사들을 '원하는 이들에 한하여' 송환하되, 송환을 취소하면 휴전도 취소될 것이 협상 조건이었죠.
박헌영 내각은 결과에 만족하여 휴전협상을 진행하라고 밝혔습니다.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미군 육군중장, 북한측 수석대표 남일,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 한국 수석대표 최덕신, 북한 내각수상 박헌영,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협정문에 서명함으로써 6.25전쟁이 마침내 정전상태로 들어갔습니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3년간의 전쟁이 멈추는 순간이었죠.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북한에게 있어서 뼈아픈 실패였습니다. 자신들이 소련의 도움으로 세운 사회주의 체제를 남쪽으로 '넓히려다' 실패하고, 미제의 침략이었다고 정신승리를 하다가 그마저도 되지 않았으니까요. 중립국에서 송환유예기간을 갖는다고는 하지만, 북한에 잡혀있던 국군포로 대부분은 김일성 정권이 저지른 포로 학대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한국과 제3국을 선택했습니다. 미국의 폭격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체제에 실망한 인민들을 수습하는 것은 박헌영 내각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오승택-비우익-이덕삼의 사진이 휴전협정 체결시에 찍히면서 한국에도 세 명의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한국공군에 잠깐이나마 알려졌던 오승택 중장의 존재가 큰 논란이 되며 이승만파였던 최용덕 공군참모총장이 사임, 군에서 이승만파의 영향력이 완전히 축출되는 일도 있었죠.
그러나 휴전이 남북관계를 급격히 진전시키지는 않았습니다. 9만 6천명에 달하는 재북인사들 중 실제로 송환된 것은 극히 일부였고, 그마저도 '남조선을 제대로 맥여보자'라는 의도에서 송환된 인사들은 친일인사들이었습니다. 도망치듯 월북했던 최승희,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춘원 이광수, 최민환 자작, 김동원 전 국회부의장, 허영호 전 동국대 총장 등 기득권 엘리트 친일인사들을 받은 한국은 처음에는 송환식을 성대하게 열었다가 크게 분노했지만, 반일의 구심점 이승만이 없는 상황에서 친일인사들의 영향력은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한국을 달랬지만, 이는 충분하지 못했죠.
한편, 박헌영의 신임을 받게 된 오승택-비우익-이덕삼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중추로 들어섰습니다. 오승택은 민족보위성 부상으로 영전하며 조선인민당 서기로 임명되었습니다. 비우익은 외무성 부상으로 영전하며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 부장(2인자)에 임명되었죠.
이덕삼은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영전하고 조선노동당 노동부 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석중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조선노동당 농민부장으로 영전하였죠. 김일성을 지지했던 소련파 및 기술관료들이 대거 축출되거나 전문직으로 이전되고, 마찬가지로 김일성을 지지했던 연안파가 몰락하며 박헌영 내각의 시대가 공고해졌다는게 모두에게 알려졌습니다.
2-1 경제노선
1953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북한에서 일순위로 정한 것은 당연 경제복구였습니다. 한때 일제의 산업 중심지였던 한반도 북부는 전선의 이동과 미국의 폭격으로 산산이 부서진 잿더미에 불과하였고, 이 경제를 어떻게 복구해야할지에 대한 의견은 정파마다 갈렸습니다. 크게 노선 갈등(중공업 우선, 경공업 우선, 농업 우선)과 산업 방향(수입대체산업, 수출중심산업),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서만 보이는 노동자 참여 문제(유일관리제와 독립채산제,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통제경제, 노사공동결정제, 유고슬라비아 체제)였죠.
오승택이 중공업 우선-수출 중심 경제-노사공동결정체를 주장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는 동안, 국가계획위원회 고문으로 자리를 보전한 정준택 등의 테크노크라트와 각계 고문이 초청된 가운데 경제노선을 결정할 내각회의가 열렸습니다.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인 이덕삼은 본래 정통파였던데다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했습니다.
비우익의 도움으로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의 경제노선을 파악한 이덕삼은 경공업과 중공업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본래 일제가 중공업지대로 건설해놓은 땅이었고, 군수산업을 위해서는 중공업은 필수였기에 자연스레 산업화가 되지 못한 중국과 극동 소련 등지의 수요를 책임질 수출 중심의 중공업 정책이 채택되었죠. 다만, 이덕삼은 노사공동결정제나 노동자 자주관리 등을 쉽사리 도입하지 않고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멈춰섰습니다. 이덕삼을 지지하는 광부 및 광업 종사자들은 '어차피 다시 노동자들을 탄압하면 정권교체를 이룩하면 그만이다'라며 인민민주주의 실험이 어느정도 성공한 것 처럼 보이는 반응을 보이며 이 타협안에 찬성했습니다.
이윽고 경제 전후복구 4개년 계획의 초안이 잡히며, 자신들의 경제노선과 남로당파의 경제노선이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눈치챈 정통파와 남로당파의 화해가 이뤄졌습니다. 이는 남로당파가 조선인민군을 장악할 구실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을 지지했던 장성들이 대거 사임하고, 그 자리는 중립적인 인사들이 채웠습니다. 그와 동시에 군축이 이루어져 부족한 노동력을 전역군인들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경제복구를 위해서는 노동력이 너무나 모자라, 남녀 동일임금, 미성년자의 노동 투입 등 온갖 조치가 이뤄지고 자발적이고 제한된 농업집단화까지 시작될 정도였죠.
한편, 1953년 8월 25일 2대 최고인민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라는 단일 원내교섭단체를 유지하되, 2인 선거구를 도입하고 조직력에 따라 자유롭게 후보를 내게 함으로써 제한적인 선거자유화가 실시되었습니다. 최고인민회의의 주요 기관은 2/3 의석을 채우는 정당들이 연합하여 득표순으로 배분하는 절차가 미리 준비되었죠. 재북인사들의 비밀스러운 정치활동이 제한적으로 허가되며 여러 야당들의 힘이 커지는 가운데 노동조합과 종교단체들이 대표하던 의석은 정당정치의 선진화를 명목으로 전부 조선노동당에 통합되었고, 마침내 선거가 치뤄졌습니다.
조선노동당은 결과적으로는 단독과반에 실패하였습니다. 이는 김일성 신격화의 무력화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충격과 반발이 심리적 저항감으로 이어져 노동당이 아닌 후보들에게 몰표가 몰린 결과였죠. 자신들의 권력이 확고하다는 것을 눈치챈 남로당파는 박헌영 내각을 이변 없이 추인하는 함편 최고인민회의 개혁의 다음 단계인 부문위원회 설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나마 제대로 된 기간으로 기능한 바가 있던 지방인민위원회는 큰 격변기를 맞이합니다. 1945년-46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민주적 의사결정과 집행이 다시 시작된 것이죠. 심지어 인민위원회가 내각이 아니라 옛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부활시켜 대표자대회의 하위기관으로 편입시키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인민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라는걸 생각해 볼때, 이는 국제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었습니다..
2-2 12차 코민테른 세계대회
조선노동당 연락부장으로 승진한 비우익은 1953년 12월, 4년 만에 열리는 코민테른 세계대회에 조선노동당 대표로써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소련 대표인 소련공산당 제1서기 니키타 흐루쇼프가 중국공산당 총서기 보구, 발칸공산당 티토와 함께 참석하는 공산주의 진영 유력자들의 모임인 코민테른에서 북한의 입지는 크게 올라간 뒤였습니다.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제도 실험이 소련이, 그리고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즈다노프 주석이 원하는 것이란걸 사회주의 진영 인사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당외인사로 참석한 오승택과, 조선노동당 대표단에 포함된 이덕삼 또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집권 공산당 뿐만이 아니라 여러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을 전부 초청한 코민테른의 자신감에 놀란 상태였습니다. 신생국가인 이스라엘과 같이 친소중립 노선을 천명한 나라의 인사들도 있었죠. 오승택은 이스라엘 통일노동당의 대표로 파견된 이스라엘 국방군 총참모장 이스라엘 갈릴리와 크게 친해졌습니다. 인구가 적지만 전쟁 경험이 있고 산업 잠재력이 풍부한 두 나라는 군사고문단 상호 교환과 북한의 무기 자력생산 노하우 이전 등을 약속하였죠.
오승택과 갈릴리가 '자유민주주의에 대비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사이, 자료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비우익이 연단에 올라 노동당의 발표를 개시했습니다. 인민민주주의 제도 어쩌구 하는 것에 시큰둥하였던 인사들은, 비우익이 북한의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 참가하는 여러 정당들이 모든 권력을 가진다라고 발언하자 얼어붙습니다. 러시아어로 북한의 인민위원회는 '소비에트'로 번역되었고,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에 있다'라는 말은 1917년 10월 혁명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으니까요. 특히 여러 정당이 참가한다는 면이 그러하였습니다. 레닌의 암살 시도 이전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 소비에트 대회는 6개 이상의 정당이 참가하는 다당제 권력기관이었으니까요.
1928년의 트로츠키 추방 이후 공산당 외의 모든 정당이 불법화된 소련이 이 발언을 허가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를 시사했습니다. 일당제 다자후보 선거를 제한적으로 실시하는 소련'도' 북한의 모델을 따라갈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죠. 사회주의 진영의 인사들은 당황했지만, 소련과 독립적으로 간선제 입법부와 지역 인민대표대회 체제를 구축한 중국 공산당 대표 보구가 박수를 치자 비우익의 발언을, 즉 북한의 정책을 코민테른이 지지한다는게 명확해졌습니다.
이윽고 인민민주주의의 대표인사인 티토가 연대에 올랐습니다. 티토는 유일관리제 폐지와 다자후보 선거의 도입, 일국일당제를 '권장사항으로 격하'하는 것이 코민테른의 공식노선임을 천명했습니다. 부탁이라는 단어를 빌려 강제화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관료독재 정권에서 탈피하라는 티토의 의사만큼은 모두에게 전달되었죠. 이는 특히 정권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던 북한의 연안파에게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중국 대표단에 속하여 있던 조선 독립운동가이자 중국 공산당 및 인민해방군의 고위인사인 양림은 이 동요를 정확히 노렸습니다.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이 북한에 파견되어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 즉 중공군의 인력이 필요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조선인이지만 중국 사회주의 정권에 충성한다는 이중적 정체성을 잘 유지하고 있던 양림은 북한을 도우면서도 중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을 미리 준비해온 뒤였습니다.
양림의 조건은 다름아닌 조선노동당을 옛날로 쪼개어 연안파의 조선신민당과 다른 파의 조선공산당으로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정확히 어떠한 여파를 가져올지, 양림이 왜 이것을 원하는지, 박헌영과 조선노동당 지도부가 이를 원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기 이전에, 비우익-오승택-이덕삼은 양림이 내건 조건에 혹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이 기술자 유학과 원자재 및 공장복구 지원등을 제안하였지만, 30만 명에 달하는 인력 지원은 그 어떤 나라도 제공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세 명의 열정은 너무나 강렬했고, 양림이 제공한 지원안이 너무나 눈부셨기에 세 명의 눈을 잠깐이나마 멀게 만들었습니다. 북한이 본질적으로 독재국가이며, 자신들도 그 독재기관의 톱니바퀴의 일부라는 것을 잊은 비우익-오승택-이덕삼은 박헌영 등과의 아무 논의 없이 사고를 쳤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은 티토가 일국이당제를 긍정했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하였고, 오승택은 한수 더 나아가 조선노동당의 설립은 전시 임시조치이므로 전시체제를 해체하고 조선노동당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조선노동당의 94만 당원 중 1/5인 19만 명이 신민당으로 분리해 나가며 조선노동당은 쪼개졌습니다. 본래 남조선신민당 당수였던 조선인민당의 백남운까지 탈당해 신민당에 가담하며 북한 정계에 개편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오승택은 조선인민당 내에서 사고뭉치로 낙인찍혔습니다. 한편, 양림은 자신은 그냥 말만 했을 뿐이라며, 북한에 공식 루트로 '중공군 20만 명 주둔'이라는 제안을 한 뒤였습니다. 즉 신민당이 탄생하지 않았더라도 인력지원은 약간 더 적을 뿐 예상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것이죠.
박헌영은 비우익을 불러 양림의 제안이 외무성과 내각, 조선노동당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사실을 추궁하며 질책하였습니다. 오승택은 민족보위부상에서, 비우익은 외무부상과 조선노동당 연락부장에서 해임되었고, 오직 의견을 내지 않았던 이덕삼만이 자리를 보전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 약속도 한 것이 없던 양림은 중공군 사령원으로 부임한 뒤 신민당 전당대회에 주조중국대사 김학철과 함께 참석함으로써 신민당이 중국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박헌영이 만족한 부분은 이스라엘-북한 군사훈련이었습니다. 대규모 전차부대 운용과 산악전, 제공권 없는 전투 노하우 등을 전수하기 위해 전시 북한군의 간부였던 연안파 장성들이 대거 교관이 되어 약속의 땅으로 떠났고, 신무기 개발을 위한 나치 독일제 무기와 저격술 노하우를 가진 이스라엘 교관단이 북한에 도착하였죠. 이는 박헌영과 남로당파가 사실상 절대권력일 쥐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반대파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자 박헌영 내각은 정치범을 대거 석방하고 죄수들을 노역에 투입하여 경제복구를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3차 개헌안이 준비되어 최고인민회의 내 부문위원회를 통해 최고인민회의의 힘을 강화하고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주석'으로 개칭하여 국가원수의 권력을 늘리는 방안도 준비되었습니다.
2-3 민족대책부
1954년 2월, 그동안의 사고 끝에 오승택은 영강의 요청을 명목으로 외무성 특사가 되어 일본으로 '방출'되었습니다. 일본의 재일교포들 중 다수를 아우르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이하 민전 인사들을 만난 오승택은 일본공산당이 일국일당제 문제로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래 진짜 일국일당제에서는 한 국가에 있는 인민은 무조건 해당 국가의 공산당에 가입하여야 했습니다. 한인들이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죠. 민전은 하위기관인 '민족대책부'와 민족대책부 내의 조국방위위원회를 통해 일본공산당의 무력투쟁을 도와주고 있었고, 일본공산당 현장 대원의 대부분, 심지어는 70%를 한인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덕수를 비롯한 친북파는 이에 반발하여 민전 내의 갈등이 극심해진 뒤였죠.
일국일당제가 권장사항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은 한인들이 더는 일본공산당 내에서만 활동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기에 민전 내에서도 혼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북한 내각은 두 가지 방향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재일본 한인들의 북한국적을 인정하고 민전을 일본 내 한인 권익단체로 개편하는 것, 다른 하나는 민족대책부와 조국방위위원회를 인정하는 것이었죠. 둘 다 극단적인 해결책이고 무언가 잘못되면 오승택이 덤터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대숙청과 6.25전쟁에 휘말려 고생을 하였든 소련 태생으로 혁명이 '이식된' 북한에서 머무른 오승택은 일본 혁명의 어려움과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민대부 및 일공 인사들과 좀처럼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민전과 영강 또한 북한에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며 냉소적으로 굴었습니다. 그나마 이덕삼이 이전에 논의된 재일교포 북송에 대해 '가족 단위 대규모 이송'을 제안하여 민전 내 북한 지지자들을 크게 늘릴 수 있었죠.
오승택은 계획을 준비하였습니다. 민전의 영향력을 있는 것보다 훨씬 부풀려 일본 정부를 겁박하여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더욱 유리하게 진행하는 한편, 재일본 한인들의 권익을 향상시키자는 것이었죠. 북한 내각은 이에 더해 일본 정치권 내에서 아군을 찾아보라는 무리한 조건까지 덧붙이는 대신 막대한 공작금을 제공하였습니다.
재일동포 30만의 북한 이송을 발표하여 민전을 아군으로 만든 오승택은 아무리 사고를 쳐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북한에서 사고뭉치 기질을 맘껏 발휘하였습니다. 민전의 요란한 선전에 정작 이덕삼이 깜빡 속아넘어가 양림을 찾아가 일본공산당에 대한 중국의 외교적 지지를 요청했습니다. 일본공산당은 강력하니 나머지는 알아서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찬 뒤였죠.
가짜뉴스 살포와 공작 등을 통해, 미국과 일본을 약간이나마 흔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보안대 막료장인 핫토리 다쿠시로가 츠지 마사노부와 손잡고 재건된 일본군으로 미일연합군의 불침항모이자 군사기지 일본열도를 건설할 것이란 소문이 퍼지자, 제네바 평화회담을 준비하느라 바쁘던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가 황급히 방일 일정을 잡았습니다. 거기다 더해, 미국이 미군과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구 일본군 인사와 기시 노부스케 등을 모아 군사지원 목적의 기술독재 정권을 일본에 설립할 것이란 뉴스 또한 퍼졌습니다. 이 소문은 정작 제국주의 여당인 민주당이 아닌, 보수주의 야당이자 전후 인사들을 대거 영입한 자유당에 큰 타격이었죠.
자유당과 당수 요시다 시게루는 소문이 너무 때좋게 퍼졌다며 미국 측에 방일 중지를 요청하였지만, 매카시즘 광풍이 불고 있는 미국 정계는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일본공산당과 좌파사회당, 우익협동조합주의 인사들이 모여 총폭탄으로 무장한 빨치산 조직인 '섹트'가 형성된 뒤였습니다. 섹트는 구 일제의 무기와와 곳곳에서 밀수된 2차대전기 무기류로 보안대와 총격전을 벌였고, 덜레스 국무장관은 방일 도중 도쿄 한복판의 차량에서 고립되어 헬리콥터로 구출될 정도였습니다.
코민테른, 특히 중국공산당이 일본에서의 대중 무장조직 형성 및 봉기를 대서특필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자, 사실 중공은 한게 없었음에도 일본은 이게 소련과 중국의 직접적 공작이라 철썩같이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취추바이의 코민테른 총비서 옹립 이후 일본공산당을 불법화한 여파가 돌아왔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죠. 양림 장군은 사태 수습을 위해 상당히 고생하였지만, 그는 이덕삼이 대단한 공작을 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한인 동포를 도운다는 생각, 그리고 세 명을 이용했던 것의 앙갚음이라 생각하여 세 명의 공작을 도왔습니다.
미국 정부는 섹트의 출현에 경악하여 일본 민주당 내각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꾸 이러면 자유당-우파사회당 연립내각이 정권을 쥐게 될 것이란 경고였죠. 양 손을 들고 항복한 민주당과 하토야마 총리는 결국 섹트 측에 특사를 보냈고, 변장해 있던 오승택과 북한의 대표단 인사들, 민전과 일공 인사들이 특사단을 맞이하였습니다.
논의와 협상 끝에, 재일 한인이 재산을 가지고 가족 단위 북한으로 이송되는 것을 배려하고 도울 것이며 조선학교의 교육기관을 인정하는 조건은 쉽게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부분의 문제는 좀 더 어려웠습니다. 오승택은 재일 한인들이 일본 영해와 영토에 있는 한 일본 국적자로 대우받는 것을 요구하였지만 일본은 미국의 압력을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로 끝내 거부하고 재일 한인들의 통일지방선거 참정권과 조선적 보유자의 특별영주권 보장만을 약속하였습니다.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인 대표단체와 일본 정부간의 회담을 정기적으로 열라는 제안에 친한 한인단체인 '민단'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되물었죠. 조건을 민전과 유관단체라고 명시한 오승택은 민단 측에 요식적인 제안을 보내자는 방안을 내각의 허가를 받은 뒤 진행하였습니다. 당연히 민단은 거부하였지만, 일본과 북한 측에는 좋은 명분이 되었죠.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구 조선인민당 인사들인 조동호, 김필중, 김성숙(金星淑), 최근우 등이 경찰 조사를 받고 '오승택은 도대체 뭐하는 이상한 사람이냐' 같은 말이 오갔습니다.
그러나 민단이 빠져버린 이상 더 문제는 없었습니다. 민전은 한인 대표단체로 완전히 자리매김하였고, 오승택은 재일본 한인 사회에서 여운형의 명망이 높다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당이자 여운형의 정당인 조선인민당으로 송환되는 재일 한인들을 영입하는 공작을 진행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인들의 진정한 권리진작을 위해 원내 정당인 일본 좌파사회당과 접촉하여 합법노선은 좌파사회당이, 비합법노선은 공산당이 진행하는 투트랙 전략 또한 완성되었죠.
한국 정부는 일본에 재일교포 북송은 준 선전포고다라면서 협박문을 보내고, 일본민주당 인사와 북한이 한국으로 보낸 친일파들이 어차피 한국을 식민지배로 일본이 도와준것 아니냐고 망언을 하며 한일관계가 더욱 나빠지는 사이, 55년부터 개시될 재일교포 북송사업이 마침내 준비되었습니다.
결과는 복잡했습니다. 일본공산당은 여전히 불법 정당이었지만 폭력투쟁의 중단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역량이 전부 섹트로 흘러들어갔으며 일공이 그를 방조, 묵인, 심지어는 지원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죠. 우파사회당이 좌파사회당이 미쳤다며 관계 단절 수준까지 가는 사이, 일본 민주당 내각의 도움으로 크게 출세하였던 핫토리 다쿠시로 보안대 막료장과 구일본군 인사들이 대거 사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재무장은 인정하여도, 일본제국의 부활은 원하지 않았던 민주당 인사들의 대담한 선택이었죠.
그리고 마침내 1954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1차대회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조선노동당이 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부활시키고 당기 또한 별과 톱니바퀴가 들어간 옛 깃발로 바꾸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기관지가 두개로 늘어나며, 다른 당도 이 절차를 따라 졸지에 북한에 여러 개의 신문이 각자의 후원세력을 지닌 채로 경쟁하게 된 것이었죠. 이는 정치권력을 이념적으로 독점하되 시민사회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좌파공산주의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급진적 변화였습니다. 특히, 허가이가 조선노동당 간부로 복귀하여 75만 명의 당원 대부분을 쳐내고 대중정당이 아닌 전위당으로 당을 개편할 것이라 밝히며 북한의 체제 실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오승택은 최고인민회의에 새로이 설치된 부문위원회인 외교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비우익은 외무성 부상으로 영전하였고, 이덕삼은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유지하였습니다. 세 명에게는 다시 돌아온 기회였죠.
그러나 이 모든 정책에서 가장 이익을 본 것은 오승택-비우익-이덕삼을 발굴한 당사자이자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좌파공산주의에 가까운 인사로써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조석중이었습니다. 오랜 동지 김원봉과 손잡은 그는 좌익 민족주의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을 부활시키고 노선을 정립하여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북한에 펼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세력표
조선공산당(남로당파), 인민민주주의 :박헌영, 이현상의 남로당파는 조선 본토에서 초기에 사회주의 활동을 한 극좌 정파입니다. 이들은 소련 노선을 북한 땅에 맞게 해석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갖췄으며,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기관지 :해방일보]
조선공산당(콤그룹), 정통맑스주의 :이관술, 이순금 등의 콤그룹은 남로당파가 일제의 탄압으로 은신해 있을 때 일제에 맞서 투쟁한 투사들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정통마르크스주의 성향이 있으며 이상적이고 급진적으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파에서 기원한 남로당파와는 달리 고려공산당 상해파에서 기원했지만 사이는 나쁘지 않습니다. [기관지 :해방일보]
조선공산당(이북 국내파), 볼셰비키레닌주의 :현준혁 등 일찍이 김일성을 반대했다가 실각했던 이북 국내파는 우익과의 합작에 적극적인 온건파 집단입니다. 이들은 남로당파의 인민민주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북한에 지지기반이 있기 때문에 남로당파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기관지 :해방일보]
조선공산당(정통파), 스탈린주의 :박정애, 최용건을 비롯해 본래 김일성 지지파였던 이들은 주로 북한에 지역기반이 있는 군인과 기술자들입니다. 이들은 북한의 엄혹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선 자급자족과 강력한 정부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기관지 :정로]
조선공산당(소련파), 레닌주의 :허가이, 정상진을 비롯한 소련계 고려인 인사들은 북한 내 지지는 별로 없지만 소련에서의 국가 및 당운영 경험을 가진 이들입니다. 이들은 본래 김일성을 지지했지만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기관지 :정로]
조선신민당, 신민주주의 :최창익, 김두봉 등으로 이뤄진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북중국에서 반일 투쟁을 펼친 조선신민당은 연안파라고도 불리며 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세력입니다. 어느 정도 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은 경공업 자급자족 노선을 지지하며, 반대파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합니다. [기관지 :전진, 독립신보]
천도교청우당, 혁명적 민족주의 :주로 청우당이라 불리는 이 정당은 민족주의 정당이지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지지합니다. 천도교 종교색은 생각보다 약하며, 독립운동 당시의 전설적 경력 때문에 ‘말 잘하는 청우당’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기관지 :개벽신보, 당성]
조선민주당, 기독교 민주주의:이들은 기독교 민주주의, 민족주의 정당입니다. 사회주의 북한에서 이들의 입지는 넓지 않지만, 북한 땅은 본래 엄청난 기독교세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는 조선민주당으로 향합니다. [기관지 :조선민주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티토주의 :오기섭, 허성택 등이 있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직후 조선 내 공장을 노동자 자주관리로 장악한 경력이 있는 직맹은 지금도 노동자 자주관리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대표단체입니다. 조선공산당의 '부활' 이후, 조선직업총동맹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라는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습니다.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인민공화당, 부하린주의 :의열단과 조선민족혁명당의 후신인 인민공화당은 김원봉의 정당으로써 조선신민당과 기원이 같지만 사이는 좋지 않습니다. 최근 김원봉의 사당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이념노선을 재정립 중입니다. [기관지 :광명일보]
조선인민당, 중도맑스주의 :여운홍, 장건상, 강기덕의 조선인민당은 콤그룹, 이북 국내파와 사이가 친한 민주사회주의 정당입니다. [기관지 :조선인민보]
민족자주연맹, 진보주의 :중도 민족주의자들이 설립한 평화주의, 진보주의 단체인 민족자주연맹은 비공산주의-비자본주의 중립국가로써 남북한 평화통일을 지지하지만, 현재로써는 북한 측에 기울어진 정치단체입니다. [기관지 :조선중앙일보]
한국독립당, 삼균주의 :전설적인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독립당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좌익 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정당입니다. 옛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기관지 :독립당당보]
여러분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1) 한반도 내에서 어떠한 형태, 어떠한 규모로든 '독립된 자주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 수호할 것.
2) 일왕 숭배의 연속선상에 있는 개인숭배, 일인 독재 체제를 철저히 혁파하고 다시는 비슷한 체제가 등장하지 않게 할 것.
[최종 목표 1 :독립된 사회주의 체제 건설 및 수호] :진행 단계 1/6
[최종 목표 2 :개인숭배와 일인 독재 혁파 및 재발 방지] :진행 단계 2/6
오늘 중 최대한 올려보겠습니다.
장렬하게 실패... 최대한 빨리 올리겠습니다.....
@렌지파일 하다보니 댓글을 18개나 봐드렸군요(?) 읽고 잘 수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ㅋㅋ (3시 기상 예정(?))
@dear0904 스탈린격하 이벤트 쓰는중입니다!
2편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