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그림에 나오는 복음 사가 마태오의 전직이 세관원이었기에
주위 모든 사람들로 부터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부름을 받자 즉시 자리를 박차고 그를 따른다.
후에 아이러니하게 그는 은행가의 수호 성인이 된다.
St. Matthew as the Patron Saint for Bankers and Accountants!
얼마 전에 유명인이 돈에 대해서 외친 대사가
현대인들에게서 돈의 전능함을 그대로 입증한다.
돈이 모든 것이란 말을 넘어
돈만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무서운 말이다.
그야말로 황금만능에 올인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Money is Everything?
No, No. and No!
It’s More than that. Much more than that!
Money is the only thing that matters!”
20여년 전에
장인이 부채가 전무한 회사를 내게 물려 주면서
세 가지를 부탁했다.
은행 부채를 갖지 말 것과
소비자와 납부자, 그리고 고용인들을 항상 은인으로 우대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녀에게 회사를 물려 줄 것이었다.
이 세가지 모두 본인의 깊은 신념과 경험과
사업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어서
작년에 큰 딸에게 회사를 물려 주면서
외할아버지의 세 조건 중
부채를 갖지 말 것과,
소비자와 납부자들, 고용인들에 대한 최대 만족,
그리고 시작은 했지만 완전히 끝내지 못한
전 직원 공동 소유제 영구 법제화를 부탁했다.
All Employee Ownership of Permanence!
돈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다가
돈의 조화(Unexpected Manifestation)에
대해서 한번 숙고해 보려고 한다.
오래 전 MBA를 할 때 재정학 교과서에 나온 글 중;
“사업 목적으로 절대로
부모 친척 친구들의 돈을 빌리지 말고
정식으로 은행 돈을 빌려라.
첫 사업의 실패율은 90%이상이기 때문이다”란 텍스트가 생각난다.
하지만 누가 높은 이자와 담보가 붙는 은행 돈을 원하겠는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파산등의 법적인 보호 장치가 보장되고
돈 때문에 가까운 인간 관계를 헤치지 말라는 권고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개인적인 신념으로
은행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돈을 빌리거나 심지어 돈을 빌려주는 것도
삼가하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가까운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빌려 줄 여유가 있으면 되돌려 받을 생각 말고 그냥 주란 말이다.
돈보다 우정과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이다.
이자가 붙는 은행 대출에 대한 역사는
그리 긴 것이 아니다.
선사이래 인류가 수렵과 채취의 삶에서
유목과 농경 정착을 시대를 지나
중세까지도 고리 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윤리적이고 대 죄악중의 하나로 치부되었다.
지금도 시골 농장 이웃들은 돈 대신
필요한 도움을 무상으로 주고 받으며
신뢰가 있는 삶을 나누며 잘 살고 있는 곳도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당연히 동서 고금의 문헌들에서 증명되듯
고대 인도 베다, 메소 포타미아, 그리스법에서나,
구약에서도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를 금하고 있다.
신약 루가서(6:34-35)에서도 예수는 그 유명한
산상 수훈 설교후에 첨가해서 돈에 대해서
“빌려줄 때 되돌려 받을 기대를 하지 말라 “고 권한다.
단테는그의 신곡 지옥편에서
고리 대금 업자는 지옥의 깊은 7층에서
살생자와 자살자, 수간통을 행한 자들과 함께 분류되어,
타는 모래 바람과 화염 비가 덮치는
광폭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고 표현한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저주받았던
고리 대금업과 이자를 주업으로 하는 행위들 -
도대체 어떻게,왜 이런 유형의 직업이
선망받는 고소득의 업종으로 각광받게 되었는가?
내 생각에는 본격적으로는
13세기 정치와 종교와 경제을 한 손에 휘두르던
가톨릭 교회가 연옥이란 개념을 발명하면서
면죄와 돈을 교체하기 시작하고
전쟁과 권력 유지와 확장을 위해
군주와 교황들이 막대한 자금들이 필요케 되자
군사력과 교화의 확장 시기에 발 맞추어
이 은행 역활이 현대의 자본주의로 발전 개화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유럽의 막대한 부를 소유했던
수도회들과 교회 장상들이 막대한 금액을
크레딧과 수표 대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개인 은행으로 십자군 원정들과
성전 기사회등이 유럽 순례자들에게
성지 순례시의 보호와 비용을 대출하기 시작하면서
15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란치스칸들이 비영리 담보 은행(Monti di pieta)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면서 메디치가 은행업을 흥행시켰고
또 16세기 초의 종교반동으로 카톨릭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각종 개신교들은 고리 대금 은행업에 대한 제제력이 약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대륙 발견과 식민 시대와 세계 대전을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통상에 따른 거대한 자금 유통과 투자는
더욱 많은 이윤을 불러오면서
개인을 상대로 하던 은행업이
거대한 집단과 국가를 상대로 감정이 개입되지않은
거대한 산업 은행들로 비대 흥행하기시작하면서
개인적인 윤리적인 비판이 불가능하게 체계화되고,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는 시장 가격의 정당성이
자금 대출업에 적용되면서 합리화되고,
투자 기회 부가 금액이 인정되면서
점점 높은 이자율이 보장되고,
순전히 한 개인의 이익 창출이
거시 경제속의 과학적 사업 활동으로 인정되면서
차압 법제화와 공공 규제화가 공공으로 안착하고,
윤리적인 비판과 분석은 영영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되었다.
특히 황금 만능의 시대에
개인적인 돈을 더 벌기 위한 어떤 탐욕과 욕심은
더 이상 비윤리적 행위나 종교적 계율을 어긴 것으로
종교적인 단죄 목소리마저 사라져 버렸다.
오직 투자자의 더 많은 이윤만이 미래를 보장하는 사회속에서
마침내 투자란 이름의 돈은 모든 사회 전반에 걸치는
기초 자금의 역할로 모든 프로젝트는 자금의 응집없이는
시작조차 못하게끔 절대 필요한 피와 살, 시금석이 되었다.
문제는 과연 돈의 진정한 역할이 삶의 수단으로서 편이성을 넘어
그 부작용(Side Effects)이 그 위험 수위를 넘어 섰다는 데 있다.
진정 돈의 조화는 무진장하다.
돈을 위해 사람이 목숨까지 걸면서 노예가 되길 서슴치 않지만
반면에 진정 인간에게 수단을 넘어서 궁극의 목적이 되는 현상이 문제이다
돈이 남아 돌아가면 투자를 해서 굴려야고 한다.
더 욕심이 나면 위험도가 높은 곳에 투자하라고 한다.
더 많이 벌어서 도대체 무얼 하자는 말인가…?
남아 돌아 가는 돈을
이자는 커녕 필요한 자에게나 공공자금에 무상으로
제공되는 제도 설립은 불가능할 것일까?
무쌍으로 투자하는 것이 진정 공산 사회주의적 발상이며
자본주의 정신에서 어긋나는 것일까?
미친 생각인가?
그러면 많은 인구가 같이 부유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직원이 소유주가 되는 전직원 소유제는 어떤가?
진정한 부자는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부유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자라고 랄프 에머슨은 외친다!
또 돈은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
감옥살이하는 죄수의 돈과 젊은 대학생의 돈의 쓰임과 효용성이 다르고,
같은 금액의 가난한 과부의 돈과 억만장자의 헌금의 질 또한 다르다.
무상으로 주면 사람들이 게을러 진다고 하지만,내 신념은 그렇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말고 은행의 본 업무를
극대 이윤을 위한 투자 투기에서 융통으로 바꾸고
주식 투자와 증권 시장의 씨를 말려
월 스트릿의 인력을 생산과 서비스 산업에 투자케 하고
그래도 남는 돈이 있다면
그냥 자선이나 빌려 주는 것이 아닌
무상으로 주는 것은 어떨까?
Am I crazy?
I don’t think so.
가난한 국가가 부유한 선진 국가 보다
더 높은 차관금과 이자를 물어 내야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더 높은 보험금과 위험 요금이 적용되고
부유한 자에게는 무상으로 제공하고
심지어 더 좋은 보호장치을 더 해주는 것이
지금 현재 은행들이 하는 어카운트 운영 작태가
과연 옳은 것인가!
우리는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세상속에서
그냥 떠 밀려서 남들이 다 하니까 그렇게
잘못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 그냥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허무 체념 주의자들이다.
니체는 그의 사후 저서
‘힘을 위한 의지, Der Wille zur Macht,’에서
우린 능동적인 허무자 아니면, 피동적인 허무자
둘 중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능동적인 허무주의는 전 사회에 홀로 도전하는
자신마저 파괴 될 수 있는 힘든 삶을 살게 되지만,
피동적으로 남들이 하니깐 그대로
잘 못 된 것을 알면서도 그냥 뒤 따라 가는
자기 방어를 최우선시 하는 류형은
더욱 위험한 자들이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돈을 벌고 힘을 키우는 의지나 본능과 목적은
“약한 자를 짓밟는 것이 아니고
강한 자의 잘못과 대적하는 것이다”고 외쳤다.
(니체의 힘으로 향한 의지에서)
19 세기 유럽에서 시작한 무서운 질병이
20 세기와 21세기의 동양으로 건너와
식민의 잔해로 부도덕과 비윤리적 황금 만능이 맘몸을 섬기는
주체를 잃어비린 원숭이의 삶을 살고 있다.
마태 복음 6:24에 아무도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한다.
“그대는 하느님과 맘몬(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도 여전히 깊은 울림이 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을 여행에 비유한다.
니체는 외친다:
"가장 비참한 여행자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간이며,
가장 위대한 여행자는 습득한 모든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하여
스스로 목적지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