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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쥐톨이 (wndmawjs@hanmail.net)
* 창작실 : 10대 나래 1719 ll
* 제 목 : #잔인한연인
* 편수 : 총 36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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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하는 여자와 집착당하는 남자의 미묘한 관계]
"죽여버릴거야."
사람들은 사랑을 집착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내 주위 사람들도 내 사랑을 '집착'이라고 표현 한다.
아니, 집착을 넘어선 스토킹이라고 하기도 한다.
왜, 남의 소중하고 갸날픈 사랑을 집착으로 몰지? 라고 생각하는 바보가 아니다.
왜냐고?
나는, 집착을 하는 여자. 지난초이니까..
"죽여버릴거라고."
"왜?"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는 랑.
이제는 별로 놀랄 것도 없는 일상의 대화이기 때문일까.
오히려 내게 반문하기까지 한다. 왜냐고. 왜냐고? 왜냐고!!?
"너가 그 여자랑 희희낙락 했잖아. 내가 뻔히 옆에 있는데."
생각만으로도 화가 나는 아까의 상황을 다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랑이는 자꾸 나로 하여금 입밖에 내게 만든다.
악마같은 남자.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남자.
"야, 너 같으면 너가 쳐다본다고 그 여자한테 지랄해놨는데, 나까지 야리냐? 그냥 좀 웃어주고, 묻는거에 대답해준게 잘못이야?"
"잘못이지! 쳐다본 그 여자가 잘못이지!! 너가 왜 풀어주려고 노력해야 되는데?!!"
역시나, 내가 먼저 흥분을 하고 만다.
언제나 열을 내고, 토라지고, 풀어지는 나 혼자만의 쌩쑈.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아니, 랑이의 역할이 있기는 하지.
"노력한 적 없다. 그래서, 그게 죽일 일이야?"
"응. 죽여버릴거야."
"죽여. 그런데, 나 너 사랑해."
뜬금없다고, 미친거 아니냐고 생각하리만큼 정말 어이없이.
그는 내게 툭, 던진다.
남들은 아껴두고 아껴둔 다음에, 소중히.. 고이고이 간직하다 꺼내는 그 말.
'사랑' 한다는 말을.
랑이는 아무렇게나 던지고, 또 아무렇게나 닥치는데로 내 입술도 함께 먹어치운다.
그의 생각은 적중한다. 언제나 100%
그의 키스로 내 입은 막아질 것이고, 나는 그의 키스와 더불어 내가 냈던 모든 화들을 싹, 다 잊을 테니까.
그는 어찌보면 굉장히 대단한 남자이다.
아니면, 내가 굉장히 형편없는 여자이거나.
매끄러운 그의 혀가 내 입안에서 춤을 추고, 나 또한 열심히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혀를 놀린다.
그가 내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부족하다고 짜증을 낸 적은 없지만.
나는 나 혼자 불안하고 초조해 진다.
혹시나 그가 나를 실증 낼까봐.
아니면 내가 그에게 부족한 여자가 될 까봐.
그는 꽤 자상한 남자임에도 말이다.
"하아.. 한랑아, 나 사랑해?"
"후.. 사랑해. 조용히 하고 마저 하자."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내가 꽤나 귀찮은 여자란 것을 안다.
집착을 하는 여자.
그리고 그는 집착을 당하는 남자.
내게는 '한랑'이라는 남자가 공기처럼 느껴지고, 내 심장처럼 느껴진다.
없으면 숨이 막히고, 맥박이 멈춰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떨어지지는 못하는 존재.
이런 내가 귀찮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가 날 곁에 두는 이유.
내가 다루기 쉬운 여자라서 인가?
키스를 원하면 키스를 해주고, 잠자리를 원하면 잠자리를 해주는..
그저 장난감 같은 존재 말이다.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내 가슴 한 구석에는 항상 그런 생각이 날 끊임없이 괴롭힌다.
지금, 나는 거칠게 들어와 있는 그의 혀를 느끼고 있다.
아마, 오늘 밤도 그는 우리집에서 자고 가겠지.
[이상한 만남에서 시작된 이상한 집착]
나와 랑이의 관계를 안 사람이면 누구나 궁금해 한다.
대체 이 두사람은 어떻게 만났으면 어떻게 사귀게 된 것인가.
물론, 그 이유도 정상적인 생각 안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우리 둘은 좀 특별하니까.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내 기억력 속에는 말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이 랑이와의 인연이 시작된 날이기도 해서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재수가 없었고, 그 안에 랑이와의 만남도 포함되 있었다.
랑이는 꽤나 한 성깔한다는 우리 학교의 쉽게 말하면 문제아, 멋지게 틀어 말하자면 짱? 정도 였다.
나는 그런 랑이의 명성은 들었지만 직접 대면했던 적도 없고,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라고 일찌감치 치부해 버려서 잘생겼다는 랑이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그 재수없던 날.
내가 랑이의 성질을 건들여버렸다.
내가 한참 보던 잡지에서 나는 오늘 첫키스를 하게 될 것이며, 못하게 되면 내가 상대를 찾아서라도 꼭 해야 한다고 써 있었다.
나를 아침부터 키스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왜냐, 만약에라도 첫키스를 하지 못 한다면..
나는.....!!!
영원히 .. 아기를 낳지 못 한다는게 아닌가.
나는.
아기가 꼭 낳고 싶었던 열일곱. 꿈많은 소녀였다.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던 나는,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나의 운명적 첫키스 상대를 찾았었다.
그러다가.
그만.......
랑이가 제일 아낀다는 뭐라더라. 아무튼 이상한 뱃지, 그 뱃지를 잃어버렸다.
아니, 던져버렸다고 하는게 맞겠다.
발 아래 따위야 신경쓰지 않았고, 워낙 내 내면의 세계에 충실해 있다보니, 누군가 내게 '조심해!'라고 친절히 일러준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순간, 내 발에 무언가가 꽂혔고. 그것은 굉장히 아팠다는 것.
그리고 나는 재빨리 무의식의 반사 속의 그 아픈것을 빼내어 멀리, 저 ~~ 멀리 던져 버렸다는 것.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랑이는 다짜고짜 나에게 와서는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씩씩거리면서도, 잘 참아주었기 때문에.
그때 느꼇다.
아, 이 아이는 적어도 여자를 때리는 파렴치한은 아니구나.
랑이는 갑자기 내기를 하자고 했고, 아마 이때도 특별한 그 머릿속은 어쩔 수가 없었던듯.
나는 미쳤지만, 하루종일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키스 생각에.
뭣도 모르고 키스를 외쳐버렸다.
랑이와 그외 친구들이 벙쩌있는 가운데, 나는 명랑하게 말했다.
아니, 랑이의 표현에 의하자면. "넌 그때 엄청 맹랑한 년 이었지." 이다.
"키스!! 내가 오늘 너에게 키스하면, 나 좀 봐줘어..."
조금씩 잦아드는 내 목소리.
랑이는 무슨 생각인지 알았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랑이는 내기를 좋아하고,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한다.
설령, 아무리 싫어하는 여자라도, 내기로 키스를 해야한다면, 그것도 느껴야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더라도.
기꺼이 느끼면서까지 키스를 한다는 두려운 놈. 그게 바로 랑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쉬운것은 죽어도 안 한다는 랑이.
그에게 내가 제안한 키스내기?는 꽤나 구미가 당기는 아이템이었나 보다.
나는 랑이의 시원한 허락 덕분에 그날 하루, 랑이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나를 피해 다니는 그도 그렇고, 또 따라다니는 나도 그렇고.
온 학교에 싸이코라며 소문이 났었다고 하는데, 그것 또한 후에 안 일이다.
나는 결국 포기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왔고, 포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맥없이 축 쳐진 어깨를 무겁게, 무겁게 하고 걷던 내게.
지나가던 화장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수업시간이라 아무도 없었고, 활짝 열려 있는 그 곳은 남자 화장실.
나는 별 생각 없이 금단의 성역(?)을 바라보앗고, 그 곳에는 랑이가 위엄한 뒷자태를 뽐내며, 쉬아-를 싸고 있었다.
아주 시원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나는 돌진-
쉬아 싸는 그에게 주둥이를 냅다 박고, 무조건 빨았다.
그러면 그게 키스인거라 생각했던.. 순수한 열일곱 소녀였기에.
아마, 그에게는 꽤나 악몽이었을 것이다.
시원하게 쉬아를 싸다가, 왠 들소같은 여인네가 돌진해서는 자신의 입술에 멍이 맺히도록 필사적으로 빨아댔으니..
훗날 랑이는 내게 말했다.
"넌 아마, 입술에 거머리를 키웟던 걸거야. 독했어."
그렇게 나는 랑이의 입술에 책임져야 했고, 몇 번.. 키스를 하다가 자연스레 사귀게? 되었다.
하루종일 쫓아다녔다고 집착이 생겼다면 믿을 텐가?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종일 그를 찾아헤맷고, 그를 찾았을때.
찾고나서 했던 뜨거운 장면들.
내게는 잊지 못하고, 없애지 못하는 운명이 되어 맺혔다.
아무리 흘려보내고 흘려보내서 다 흘려보낸 줄 알앗던 눈물이, 다시금 맺히는 것처럼.
[돈 잘쓰고 잘 노는 사람=한량....=한랑]
무더운 여름, 어떻게 작년보다 더 더워졌다.
서서히 열받아가는 지구. 하긴, 그럴만도 하다.
내가 생각해도.. 세상은 너무 급변하고 있다. 변하고 또 변하다 보니, 과열될 수 밖에.
내 안은 차갑디 차갑다.
변화 따위, 해본지 하도 오래되어서 그런가.
"랑아, 오늘 하루 뭐해?"
시간만 나면 랑이를 쫓아 다니는 내 습관처럼, 랑이도 시간이 날 때는 가끔 나를 찾아준다.
랑이도 나를 연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부분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는 참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이다.
국어사전에는 그런 사람을 흔히 '한량'이라고 쓰던데.
한랑.
그와 참 똑같다고 난 생각한다.
아마, 그의 부모님은 이런 그의 미래를 예측하신게 아닐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우리가 평생을 달고다니는 이 이름이 우리의 평생을 좌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닐란다."
"어디갈까."
"어딜가? 넌 일해야지."
"에? 같이 가는거 아니었어? 그럼 왜 여기까지 온건데?"
그는 내 질문에 평소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태연하게 말을 내뱉는다.
탁자를 앞에두고, 떨어져있는 머리와 머리 사이의 간격을 30cm나 줄이면서 말이다.
"당.연.히 너 놀려주려고. 나 간다."
그는 또한, 참 악마같은 남자다.
저러고 나갈까, 싶지만은.. 진짜 나가는 남자.
하긴, 그러기에 이런 내 곁에 붙어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알겠지.
저러고 나가면 내가 할 행동들을.
"랑아, 지금은 어디야?"
"아.. 그래서 지금은 쇼핑가는거야?"
"도착했어?"
"아직도 거기까지 밖에 못 간거야?"
내 말에 랑이는 대답한다.
"야, 십분동안 가긴 얼마를 기어가겠냐."
그렇다.
나는 나와 떨어진 랑이의 행방, 그것도 회사가 아닌 다른 곳을 가는 랑이라면 언제나 전화를 걸곤 한다.
정말 십분의 한 번 씩.
그렇다고 내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직업은, 교정자다.
뭐, 쉽게 말하면 출판쪽 일인데, 책 교정을 맡고 있다.
랑이는 이 직업이 나와 잘 어울리고 맞는 것 같다고 해주었다.
비록, 그 악마같은 말을 잊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단지 내 집착이 책에 반영된다면 죽어라 틀린것을 찾아 낼 것 같다나.
뭐, 이건 좀 미화한 표현이고.
진짜 말은 상상에 맡기겠다.
이쯤되면 그의 직업이 궁금할 것이다.
상.상.초.월
커플매니저다.
과연, 커플을 이어주기는 하는걸까.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들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나도 그러기에..
하지만 그는 꽤나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또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가끔, 너무나 미운 말을 해서 그렇지.
"너도 기다려봐. 내가 A급으로 하나 연결해 줄게."
이럴때는 내가 진짜 그의 연인으로 있는 사람이 맞나.. 살짝 의심이 가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등에 칼 꽂을거야."
"더럽다. 일루와바."
그러고는 열심히 키스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언제나 우리의 트러블은 스킨쉽으로 끝나고 만다.
그도 나도, 부비는 걸 좋아하는 걸까.
.
.
.
열심히 컴퓨터 화면만을 지켜보니, 조금 눈이 빡빡해졌다.
휴식삼아 반듯했던 몸을 쭈욱 뻣으며 기지개를 켠다.
흐트러지는 자세, 그리고 쭉 뻗은 두 팔과 함꼐 올라간 상의 옷.
마구 접혀 불편해진 그 옷을 다시 내리기가 귀찮다.
사소한 일에서 나는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지, 그가 나 없이 일상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물론, 나에게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의 한랑은 돈도 쓰고, 즐기고 있을 테니까.
혹시라도 또 어떤 여자들이 내 한랑에게 찝쩍대고 있으면 어쩌지?
아.. 오늘은 일하기 틀렸다.
아까 열받은 랑이 전화도 죽여놨던데.
확, 여기 저기 뒤져서라도 찾아낼까.
전화도 못 하고.. 나는 점점 불안해 진다.
"난초야, 어디 안 좋아?"
"응."
"어디가?"
"누가 뭘 죽여놨거든."
왜, 핸드폰을 꺼놨을까.
십분마다 켜지는 내 족쇄가 싫었던 것일까.
[질투의 대상은 많고도 하찮다]
"화났냐?"
"아니, 화가 나긴.."
겉으로 안 드러내려 애를 쓰지만 솔직히 좀 많이 삐졌다.
어제 랑이는 하루종일 전화는 불통에, 새벽 3시까지 내게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내가 보낸 문자랑 음성메세지는 다 씹혔단 말인가.
아까운 내 돈.
오기로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사람이 해야겠지.
왜, 사랑에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사랑에는 역시 내가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나 보다.
그를 더 사랑하니까.
더 이상은 견디지 못 하고 오늘 오전에 나는 휴대폰에 아무 단축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는 순간의 환희.
곧 있으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너무 떨렸다.
여기서 잠깐, 단축번호가 왜 아무냐고? 묻는 사람은 센스가 너무 떨어지니까, 센스 좀 기르도록.
그는 또한 이런 내 모습에 한 마디 던졌었다.
"무섭다, 무서워. 그러다가 위급상황에 내가 전화라도 안 받으면 어떡하냐?"
"그래도 걱정은 되나보지? 당연히 받아야지. 안 받기만 해봐라."
"뒤가 더러워서라도 받아야겠다."
쨋든!! 나는 하루만의 겨우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갑자기 울컥, 하는 눈물을 꽉 참아야 했지만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울먹이면 그가 또 뭐라 빈정될 것을 알기에, 입술을 꽉 깨물고 약속을 잡았다.
전화가 끊기고 나는 퐁퐁 울었다.
웃기고 서운했다.
나는 하루만의 폐인의 모습으로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데, 그의 모습은 너무나 말끔할 것 같기에.
아니,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그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건 명백한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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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이~ 화난 것 같은데?"
"아냐, 마실거나 시키자."
"그러지 뭐. 넌 딸기쥬스지? 여기요!! 딸기쥬스랑요, 음.. 그냥 그거 두개요."
"네, 딸기쥬스 두개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넌 또 혼자 뭘 궁시렁 거리냐?"
감동은 먹은 여자의 마음에 꼭 초를 치는 얄미운 것들이 있다!!
끔찍한 알바생 같으니라구.
내 취향을 딱, 알아서 주문하는 멋진 젠틀맨의 모습.. 지은 죄를 의식했는지, 갓만에 보는 랑이의 모습인데!!
저 끔찍스런 알바생이 우리 랑이한테 실실거리는 것을 보니, 활활 타올라 뚝뚝 떨어지던 촛농이 확 굳는 싸늘함이 느껴진다.
에이, 짜증난다.
그래도 폭발하면 안 된다.
내가 모든 일에 노발대발하면 랑이는 참 많이도 쪽팔려한다.
예전의 나 같으면 턱도 없는 일이다.
참 대견하게도 나는 랑이에게 맞춰져가고 있다.
너무나 자랑스러운 나 자신의 모습, 아.. 나도 이제는 좀 참는 여자가 된 건가.
"너 또 알바생 씹고 있지?"
"알면 됬고."
"그렇게 허구한 날 그러면 골머리 안 아프냐?"
랑이는 테이블에 있는 휴지를 조각 조각 찢으며 내게 물었다.
나는 랑이의 말보다 휴지에 더 신경이 쓰인다.
지익- 지익- 한 갈래, 두 갈래로 찢기는 휴지.
부럽다.
저 휴지가 너무 너무 부럽다.
랑이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서 북북 찢기는 저 휴지.
랑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니, 나도 옷을 좀 찢어볼까?
그럼 랑이의 시선이 날 향해 올까?
아니다.
관둬야 한다. 랑이는 내 모든 행동이 쪽팔리다고 한다.
괜히 여기서 옷을 찢었다가는 또 이틀간 연락두절이 될 것이 뻔하기에, 나는 생각만으로 접어야 한다.
바로 앞에서 보이는 휴지에 대한 랑이의 애정이 가슴아파서 고개를 돌렸다.
휴지놈, 행복하냐?
다행히도 새빨간 쥬스 두잔이 나란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이 알바생은 참 된 사람 같다.
어쩜 우리 랑이한테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은 건지, 아주 마음에 드는 알바생이다.
멋진놈. 어깨도 떡 하고 벌어진게 참 인기도 많게 생겼다. 헤헷.
알바생의 예쁜짓(?)으로 나는 한껏 고조된 기분으로 쥬스에 꽂힌 스트로우를 쪽, 쪽 빨아먹었다.
랑이는 그런 내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말을 툭 내뱉었다.
"쪽쪽거리면서 잘도 먹네. 내 입술보다 맛있냐?"
그 말을 듣고는 힘차게 쪽쪽거리던 내 입술의 힘이 모두 쏘옥- 하면서 빠져버렸다.
톡, 스트로우가 입에서 빠지고.
와우~ 랑이도 가끔 도발적이란 말이야. 자극적인 놈.
"자꾸 당연한 소리하면 너 확 부쳐먹어버릴거야."
"부친다, 소리 하지도 마라. 요즘 매일 부침개라 올라올 것 같아."
"아, 맞다. 요즘 비 자주 왔지. 어머니랑 분위기 맞추느라?"
그렇게 랑이는 가족을 씹으면서 간만에 나와 오랫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요즘이 장마가 다가와서 인지, 비가 자주 내린다.
찔끔거리는 비라도 내릴라치면 랑이의 어머니는 부침개를 부쳐먹어야 직성이 풀리신다.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루는 파전, 하루는 김치부침개, 이렇게 메뉴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뭐, 그래도 랑이는 장마철이 죽도록 싫단다.
나 같으면 색달라서 좋을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나자."
"어? 응."
비록 2시간 뿐이었지만 너무 행복했다.
이걸로 오늘 하루는 충분히 버틸 수 있겠군.
아, 잊은게 있다.
찝찝하게 날 괴롭혔던 것을 처단하고 가야지.
"랑이야, 먼저 주차장에 가서 차 좀 빼고 있어. 나 화장실 좀."
"그러던가."
나는 랑이가 나갈 때까지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있다가 알바생을 불렀다.
"네, 뭐 도와드릴까요?"
"돕긴 네 까짓게 뭘 도와? 이거나 쳐먹어라!! 둘이 아주 똑~ 같아!!"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카페를 빠져나왔고, 아마 그 알바생은 좀 뻥졌을 것이다.
어느 미친여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테이블에 있던 미역줄기같은 휴지를 자신의 얼굴에 던졌으니.
그래도 볼만했다.
흰 휴지녀석이 그 여자의 머리에 주렁 주렁 달린 모습은.
커다란 검은 콧구멍에서 흐른, 하얀 콧물 같았다.
"넌 또 무섭게 뭘 실실거려?"
"아니야~ 빨리 가자."
"신호가 바껴야 가지."
오늘 하루, 랑이의 배려가 너무 좋았다.
비록 어제의 죄의식이 살짝 베어나온 행동들이었지만.
딸기쥬스도 맛있었고, 입술발언(?)도 황홀했고.
다만, 끔찍이 알바생이랑 휴지조가리만 아니었으면.
100% 물빛 데이트 였을 텐데. 아쉽다.!!
[나의 부재, 그를 만나다]
갓만에 찔금거리던 비가 그쳤다.
화창한 날씨, 내가 쉬는 날에 딱 맞추다니 나는 하늘에게 사랑을 받고있는 여자인가보다.
사실, 저 하늘의 사랑 따위 필요없는데.. 나는 랑이의 사랑만 듬뿍 받고 싶다.
이 한 여름의 태양처럼.
"랑, 오늘 나 쉬는날."
"그래서?"
"으응, 나 오늘 재밌는 일 하느라고 못 만나서."
"재밌는 일?"
나는 배실배실 검은 웃음을 지으며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랑이의 궁금한 목소리에 짓궃게 대답한다.
"응~ 진짜 평소에 너무~ 해보고 싶었던 일이야."
"그래? 왠일로 놀아달라고 안하니까 편하네. 재밌게 놀아라."
역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뚝, 하고 끊기는 야속한 전화.
그와 나의 갸날픈 수신호는 끊겼다.
뭐, 그래도 좋다.
오늘 난, 그에겐 잠시 없는 사람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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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보인다.
커다란 은회색의 소렌토.
저 안에 타고 있겠지. 오늘을 위해서 유미언니한테 차까지 빌려왔다.
후후, 정말 알찬 날이 되겠구만.
당연히 회사로 진입하리라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산산조각나고, 회사 앞 카페 주차장을 찾는 소렌토.
물론, 나도 따라 들어갔다.
운전 실력 하나쯤은 꽤 봐줄만 해서 무리없이 주차를 하고, 조심 조심 발걸음까지 죽이면서 큰 카페로 몸을 옮겼다.
조심 조심 숨기지도 못하는 몸 꼭꼭 숨겨가면서 겨우 바로 뒤 테이블에 앉았다.
바로 반대라 등이 마주보고 있어 다행히 들킬 염려는 없겠다.
의자에 몸을 깊숙히 숨기고 귀를 바짝 열었다.
"네, 오늘 소개해 드릴 분은요, 고객님의 수준에 맞춰서 #$^*&*$##^*&#!@$^&%$&"
별거 없는 지루함의 연속.
환한 아이보리 색으로 깔끔한 분위기의 카페는 재미도 없었다.
기분 나쁘게도 예전의 끔찍했던 알바생 닮은 언니야 한명이 주문을 하래서, 가볍게 딸기쥬스를 시켜놓고 멍하니 있는 나.
뭐, 쉬는 날이라 휴식 하나는 제대로 하는 듯 싶다.
아기자기한 카페라면 정도 갈테지만, 이런 늙다리 호텔 커피숍 같은 전형적인 맞선 장소.
여기는 아무리 랑이하고라도 오고 싶지 않은 장소 1위다.
점점 정 떨어져.
그래도, 쥬스는 맛나게 잘 갈았다.
지루한 대화가 끝나고 어느새 저 쪽으로 등판이 없어질라해서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문을 지나자, 행방이 묘연한 그.
쳇, 놓쳤나. 차 쪽으로 가볼까?
"어딜가시나?"
"왁!!"
"어디서 뭐 따는 소리야?"
그의 버릇이 나왔다.
꺼림칙할 때나 더러울 기분일 때 나오는 표정.
한 쪽 눈썹이 퐉, 하고 찡그려 진다.
"놀랐잖아.. 그렇게 어깨를 확 짚으면 어떡해."
"누군 안 놀라냐? 멀쩡하게 쉰다던 애가 내 등뒤에서 음침하게 염탐중인데?"
나는 한껏 찔린 마음을 다잡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다고 봐 줄 한랑은 아니지만.
"어..떻게 알..았어?"
"표정펴라? 나오는데 딸기쥬스 쪽쪽 빨면서 온갖 잡소음은 다 내고, 못 알아보겠냐?"
"하하.. 그랬나?"
"오늘 할 일이 이거였냐?"
랑이는 알 만 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꾸중의 눈빛을 보낸다.
저 한심하다는 시선.
그래도 좋다.
적어도 저건 나만을 향한 스포트라이트!!
이렇게나마 그의 시선 한 번 끌고~
"응. 너무 재밌었어."
"재밌기도 하네."
"착하다. 나 없는 동안에도 얌전하게 잘 있구."
"건 또 뭔 헛소리야? 집에나 가."
그는 내게 살짝콩 꿀밤을 먹이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아 옆에 나란히 걸으며 말을 늘어놓았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을.
"바람 안 피웠잖아."
"야, 피우고 싶어도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피냐?"
"안 피우면 안 피웠다고 인정해."
"알았다, 알았어."
귀찮다는 듯이 내뱉는 그지만, 너무나 사랑스럽다.
나는 달콤함을 듬~뿍 발라서 애교있게 그에게 뻐꾸기를 날렸다.
"좋아! 오늘은 내가 사랑해줄게~"
"언제는 너가 안해"
"평소엔 너가 했잖아!!"
나는 그의 말을 싹뚝 끊어 먹었고, 그는 기분이 나쁜지 묘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무슨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내 할 말을 다 해버렸다.
"밤에 말이야! "
"아아, 밤에? 그럼 오늘 퇴근하고 너네 집으로 갈테니까, 얌전히 목욕 재계나 하고 있어라."
"네~ 몇시에?"
"내 맘. 잠들지 말고 있어라."
가끔 그와의 밤약속(?)에서 골아떨어질 때가 있는 나.
그는 날 사랑해 주는게 좋은가 보다.
역시나 자기 볼 일이 끝났다고 미련없이 차를 타고 쌔앵 가버리는 야속한 남자.
왜 이렇게 내 눈에만 멋있어 보이는 걸까.
그의 매력이, 점점 더 나를 그에게 빠져들게 한다.
벌써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하라면 할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끈적거리고 지금보다 더 집요한 끈끈이주걱이 되라면.
나는 세계 최강의 끈끈이주걱이 될 수 있다.
왔을 때와는 다르게 당당하게 걸어서 차를 탔다.
가면서 입욕제나 좀 사볼까..?
내 부재에도 한 눈 팔지 않는 그를 위해서.
[젓가락 두개]
이제 12시가 되간다.
꼴에 분위기 좀 맞춰보겠다고 불 다 끄고 촛불 켜놨는데, 촛불의 반이 사라졌다.
불을 꺼 놓을걸.. 혹시나 조금 뒤에는 오지 않을까 시간을 끈게 벌써 2시간 째.
랑이는 올 기미가 없다.
답답함이 밀려와 베란다로 향했다.
열대야.
아니 열섬현상이라고 해야 맞을까, 이 인위적인 더위는.
답답함을 해소하지 못하는 베란다는 무용지물 인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베란다 쯤은 휴식처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에 쌓여서 제대로 열 조차 방출하지 못하고 이렇게 뜨겁게만 달궈지니, 점점 살기가 힘들다.
이 열기가 퍽이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건..
지금 내 마음에서 꾹 꾹 눌러닫힌 채, 열기만 더하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져서 일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복잡한 것은 나도, 랑이도 싫어하니까.
찡그려지는 내 안면을 생각해 주는 것인지, 반가운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랑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것 저것 하다보니까. 왜 이렇게 어두워?"
현관문을 열어주고 자연스레 들어오던 랑이는 내게 질문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치가 빠른 그는 단번에 알아차린 표정으로 짓궃게 웃기만 한다.
절대 내 의도 따위는 모른다는듯이, 한 번 더 혼잣말을 내뱉으면서.
"전기라도 끊겼나.. 되게 음침하네."
음침하기는 하나, 초의 은은한 조명에 비치는 그가 너무나 매혹적으로 보였다.
메마르는 입술을 축인 건지, 내 눈빛을 알아채고 유혹을 하는 건지, 섹시한 그의 혀가 맛난 그의 입술을 왔다가고..
나는 그의 입술을 목표삼아 달려들었다.
조금은 거칠게 시작된 키스가 그에게도 불을 붙였는지, 그는 옷부터 벗어젖힌다.
물론........... 나도 벗는다.
"하아, 오늘은 내가 해줄게."
그의 거칠어지는 숨결을 리듬삼아 나는 내 정신이 아닌 것 처럼 손을 놀렸고, 그는 나쁘지만은 않은듯 조용히 나를 느꼈다.
".......방으로, 가."
뜨거워진 몸 만큼 달아 쉰 목소리가 색기스럽기 그지 없다.
오늘 밤, 달은 내게 너무나 환히 비추는 태양이 될 것이다.
.
.
.
"좋았어?"
"누가 뭘 묻고 있냐, 지금."
두 남녀가 다 벗고서 태연하게 대화하기란, 왠만큼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안된다고 유미언니가 그랬었는데.
우리는 둘 다 안면 두께가 장발이들인가 보다. .. 화장발.
뭐, 어차피 서로 다 보이며 즐겼는데, 새삼스럽게 가리는 것도 웃겨서 내색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런 내가 조금은 질릴지도 모르겠다.
남자란 동물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숭을 좋아하니까.
"어쭈, 대답 안 해?"
"그냥.. 좋았냐고 묻는거야."
"그걸 왜 너가 물어, 내가 물어야지."
그는 꽤나 남성이라는 xy 염색체를 가진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드러내고 그러는게 아닌 은근한 차별.
뭐, 나쁘지 않다. 당당해 보여서 멋있고, 그러는게 재수없지 않고 어울리니까 봐 줄 수 있다.
보기 좋은 떡이라 그런가. 모든게 용서가 된다.
"그럼 물어봐."
"좋았냐?"
"응, 죽기 직전 만큼."
나는 아까의 흥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게 건조해졌다.
이상하게 너무나 행복하지만, 그와의 잠자리 후에는 나 조차도 이해가 안 될 만큼 딱딱한 여자가 된다.
마음 한 구석이 그렇게 시킨다.
잠시 딱딱해져 있으라고.
"어떻게 하면 너가 죽게 될까?"
"음.. 너가 죽으면."
"무섭네."
우리가 하는 말에 언제부터 아무 뜻도,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던 걸까.
당연하게 바람에 의해 몸을 움직이는 구름도, 이런 심정일까.
그저 흐르고 흐르는대로 둥, 둥, 떠다니는 느낌.
모든게 가끔은 허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랑아, 내가 널 귀찮게 하니?"
무서웠던 질문.
그가 정말 귀찮다고 할까봐서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금기의 질문.
참으로 허무하게 튀어나갔다.
잠깐 아주 조금, 다정했던(?) 그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여자의 마음은 너무나 쉽고, 가볍게 움직인다.
"아주 아니라고는 못해. 인정하지?"
"응.. 인정해."
밤을 느낄 수 있었다.
열정과 쾌락이 만연했던 한낮같던 밤이.. 밤 같지 않던 밤이.
지금에야 느껴졌다.
너무나 고요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슬픈 정적.
내 입술마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자.. 내일 출근해야지."
그의 마지막 말로 나는 잠들었다.
꼭 그말이, "하나도 귀찮지 않고 좋아." 라고 하는 달콤한 말처럼 들리면서 말이다.
언제나, 내 일방적인 마음은.
자기합리화를 잘 한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치지 않고, 언제나 저돌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랑.
이건 내 머리가 시키는게 아닌 마음이 시키는 일이니까.
.
.
눈을 떳다.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다.
이중으로 더웠던 밤이었기에, 우리 둘 다 이불을 걷어차버렸다.
정면으로 보이는 천장의 등에 비친 나와 랑이.
꼭 젓가락 한쌍처럼 보인다.
살색의 나무 젓가락.
나란히 있어야만 그 쓰임이 있는 젓가락.
꼭 붙어있어야만 하는 운명.
오늘은 나무젓가락을 사야겠다.
매일 매일 나무젓가락을 쓰겠다 다짐했다.
살색의 두 물체가 너무나 예뻐보여서.
[심장을 뜯어버렸다]
오늘같이 습하고 끈적이는 날이면 생각나는 여자가 있다.
내 눈에 어울리지 않는 눈물까지 차게 만드는 여자.
아마, 내 옆에서 쫑알대는 이 여자가 아니면 난 오늘 굉장히 청승맞은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예전의 난..
나는, 거의 스토커나 다름 없었다.
.
.
.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천사같은 그녀를 만났다.
이미 주위에서는 나를 문제아라 찍어두고 감시의 대상으로 밖에는 쳐다보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를 두려워하고 높이 올려다 보기만 했지, 다가오려 하지도 않았다.
사람의 정이 그립거나 하지 않았다.
나의 심장은 딱딱한 돌이라 생각했던 나니까.
이런 나의 생각에 틈을 만드는 여자가 그녀였다.
한 학년 선배인 그녀는 나를 바보라고 불렀다.
어느 여름의 장마철, 당연히 하늘이 뚫린 듯 비가 내렸다.
나는 그날 크게 싸움을 하고 피도 조금 맺힌 얼굴로 비를 쫄딱 맞으며 길거리를 배회했었다.
그때 누군가 내게 우산을 씌어주며 다짜고짜 화를 냈다.
그녀였다.
"바보야!! 비를 맞고 다니면 어떡하니!!?"
오지랖 넓었던 그녀는 나에게 우산까지 씌어주며 친한 척을 했다.
주위에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고 뜯어 말리기까지 했었다고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그런 그녀를 나는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외롭게 뜨거운 마음을 외면한채 살았던 내게, 점점 열리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그것은 곧 집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가 있으면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가 관심을 주는 상대에게도 어김없이, 아니 더 심하게 대했다.
사실을 안 그녀는 내게 헤어짐을 말했다.
절교.
우리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만나도 얼굴을 돌려야 하는.
나로서는, 심장이 뜨거운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무섭도록 매달리기 시작했다.
집을 찾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밤을 새고..
전화 하기를 수 백번, 아니 수 천번도 했으며, 심지어 그녀를 겁탈하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나도 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픈 상처만을 남겨주었다.
나만의 마음을 채우기 위한 이기심으로.
천둥이 치고 번개까지 번쩍이던 어느 절정의 장마기.
그녀가 나를 찾았다.
그녀가 비를 맞으며 자신의 집 앞에서 2주째 사죄하던 내게 얼굴을 보여주던 날.
따스한 손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내 얼굴을 감싸주었다.
그렇게 내 두 볼을 감싸 안고는 나에게 소중하게 지켜왔던 그녀의 입술을 주었다.
살포시, 꽃잎이 앉았다 간 아무 느낌없던 입맞춤.
그녀는 내게 단 한 마디를 하고 떠났다.
"잘가..."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빗물도 내 눈물을 따라올 수 없게 나는 울었다.
나는 뛰는 심장이 있다면 또 다시 그녀에게 얽매이고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 할 것 같아 무서워졌다.
그래서 나는.
내 심장을 뜯어버렸다.
아무 감정도 없는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예전보다 더한 나로 돌아갔다.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누군가로 인해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
.
.
어느 여름.
나는 한 여자아이에게 키스를 받았다.
너무나 황당하게도 남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그 여자아이는 나를 좇아다닌다.
얼마 전의 나처럼.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예전의 나를 발견한다.
웃긴다. 재밌다.
이 여자아이는 나에게 어디까지 집착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지난초.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다.
가끔은 진지하고, 또 웃기고 푼수같은.
놀랄만큼 감성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솔직한 아이.
앞으로 이 아이와 오래 있게 될 것 같다.
.
.
.
.
저 멀리 노란우산을 들고 내게 달려오는 여자.
"랑아!! 비오면 부침개 먹어야 되니까 나 부른거지?"
"당연하지. 집에 있다간 또 먹어야 되. 오늘은 너네집에서 자고가기까지 할거다."
"헤헷, 나야 조오~치!"
해맑게 웃는 이 아이의 웃음으로 싸한 장마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이 아이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내게 웃음을 되 찾아줘서 고마울 뿐이다.
그 뿐이 내가 이 아이와 함께하는 이유다.
큰 이유도, 큰 감정도 없는 내 삶에.
오직 이유를 달고, 조그만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지금의 나는 심장이 없이, 심장에서 나왔던 고인 핏물만 조금 남긴 채, 텅 빈 가슴을 가졌다.
그나마 고인 핏물이 내 가슴을 보온해 주고 있다.
웃을 수 있는 걸 보니..
[얌전하지 못한 고양이]
그가 연락이 없다.
지난 비오는 날 만났던 그는 왠지 우울해 보였었다.
맞다.
그는 여름을 탄다. 봄도 가을도 아닌 여름을..
장마철이 지나면 항상 연락도 없고, 얼굴도 볼 수 없게 된다. 꽤 여러날 동안.
그러면 나만 안달이 난다.
랑이의 어머니를 알게 된 날도 그런 그가 보고싶어 그의 집을 찾아가던 참이었다.
내 앞쪽에 어떤 아주머니가 두 팔에 짐을 너무 무겁게 들고 가길래, 길이나 물어볼 겸 짐을 들어드렸다.
어떻게 된 인연인지, 그의 어머니였고 나는 덕분에 지금까지 예쁨을 받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참 특이하시다.
역시나 오늘도 전원이 꺼져있는 그의 핸드폰.
오늘은 조용히 혼자 보내야겠다.
오늘까지만 참고, 내일도 연락이 안 되면 최후의 대책을 쓸 수밖에.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지난 일주일간의 긴 장마가 살짝 멎었을 뿐인데, 다들 몸들이 간지러웠는지 밖으로 총 출동을 한 것 같았다.
많은 인파 사이에 있으려니, 왠지 외로워졌다.
더운 열기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가 없으니, 그와 함께 자주 가던 카페라도 가야겠다.
그 곳에서라면 그를 조금은 느낄 수 있겠지.
집에선 그가 더 보고파 질 것 같기에, 집보다는 카페가 무난하다.
경쾌하게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상냥한 알바생이 인사를 하고 예전 재수없던 알바생은 없었다.
짤렸나?
그러면 난 좋지만.
나는 최대한 구석진 자리를 찾아 두리번 거렸고, 나는 놀랐다.
내 눈을 동그랗다 못해 찢어지게 만들어 버릴 장면.
한랑이 어떤 여자와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나는 자기 걱정에 밥도 잘 못 먹고, 매일 초조하고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저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핸드폰까지 꺼 놨던 것일까.
갑자기 열이 끓어 오른다.
이제는 이성이고 뭐고, 그와의 연락 두절 벌 따위 걱정도 되지 않는다.
나는 쿵쿵거리며 그 두 년놈을 향해 걸어 갔고, 성난 들소 같은 나의 존재는 모르는 듯, 그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랑이의 맞은편에서 웃고 떠들던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고 그저 흔들었다.
좌우, 상하 할 것 없이 무조건 힘이 닿는대로 내 울분을 풀었다.
그녀의 구불거리는 웨이브 머리는 내 손에 휘감기며 내게 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랑이의 모습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지만 꽤 많이 놀랐을 것이다.
카페는 삽시간에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할 일 없이 무료하던 카페에 싸움이 일어나자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실, 싸움이 아닌 어느 여자의 난동에 불과 하지만 말이다.
랑이는 약 3분간은 멍하니 있다가 상황 파악이 된 건지, 정신이 돌아 온 건지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뛰어든 알바생들도 서서히 개입을 하고, 나는 낯선 사람들에 의해 두 팔이 잡힌 채, 여자와 떨어졌다.
나는 내 양 손에 잔뜩 딸려 온 다갈색의 구불한 머리채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짜악-
내 고개가 돌아갔다.
랑이의 맵고 슬픈 손바닥에 의해..
나는 꺾인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잔혹한 현실을 마주 할 수 없어서.
처음있는 일이다.
랑이가 내게 손을 댄 일은.
내가 아무리 귀찮게 하고, 지겹게 하고 화가 나게 만들어도 랑이는 내게 따귀를 때린 적이 없었다.
저 여자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일까.
랑이에게... 그렇게 중요한 여자일까.
랑이는 나를 때리고 그녀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나는 꺾인 고개를 그때까지 들지 못했다.
아까의 경쾌했던 종소리가 내 고막에 닿았고, 나는 랑이가 나갔을 거라 짐작되는 그 유리문을 바라보기 위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내 주위에 몰려있었고 저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떠들었다.
나는 게임에 나오는 좀비처럼 스윽, 스윽 발을 끌며 힘없이 카페를 나왔다.
해가 쨍쨍하다.
여름해가 나를 녹여버릴 듯 쨍쩅하다.
더위에 처량히 녹는 아이스바처럼 내 생기가 녹아 흐르는 것 같다.
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단축번호를 눌러 랑이에게 전화를 했다.
'고객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하오."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닫는데, 들리는 작은 마찰음이.
아까의 상처를 드러낸다.
랑이가 화가 많이 났을까.
그냥 집에서 얌전히 기다릴걸..
잘못했다.
괜히 나와서 랑이를 정말 정말 화나게 한 것 같다.
[나의 사랑은 아름답다]
벌써 맞았던 뺨의 붓기는 다 가라앉았는데, 랑이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 날도 그렇게나 보고 싶던 랑이의 얼굴은 많이 보지 못했는데.
랑이 없이는 죽을 것 같던 나도.
살아가긴 살아가고 있다.
매일 그 몰래 찍어둔 폰카도 보고, 몰래 녹음해 둔 통화 녹음도 듣고.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겨우 겨우 그를 느끼고 있다.
"난초야 어디 안 좋아?"
"응.."
"왜, 누가 또 뭘 죽여놨냐?"
"이번에는 나. 나를 죽일 것 같아."
유미언니는 내가 일하는 출판사의 사장이다.
부잣집 딸.
하지만 소박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여자이다.
언니는 내가 멀쩡하던, 이차원세계에 가 있던 항상 나를 귀여워해주고 걱정해준다.
조용하던 언니가 어딜 갔나 했더니, 그새 커피를 끓여왔다.
향긋한 커피 향이 내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정시킨다.
"커피나 마셔. 너 그렇게 우울하게 있으면 내 마음이 안 좋아."
"땡큐. 아, 우울해~"
"너랑 안 어울려. 걱정되는거 있으면 그냥 질러."
지를까.
지난초.
너 안 그랬잖아. 항상 마음보다는 몸이 앞섰는데..
그깟 따귀 한 번에 쫀거냐.
"언니, 나 오늘 일찍 퇴근해도 되?"
"그럴 줄 알았다. 가라. 대신, 내일 일찍 출근해!!"
"언니 사랑해~"
나는 뜨거운 커피를 혀가 델 정도로 한 번에 마시고는 짐을 챙겼다.
언니는 놀랐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뛰어가는 내게 말한다.
"네 몸 좀 생각해라!!"
내 몸 생각할 겨를이 어딨나.
랑이 몸 걱정하기도 바쁜데.
택시를 타고 그의 회사로 목적지를 잡았다.
당장에라도 그를 봐야겠다.
한 번 마음을 먹으니, 더 이상 내 마음을 주체 할 수가 없다.
차창 밖으로 쌔앵 지나는 가로수.. 사람.. 건물..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이는데, 저마다 다른 모습, 다른 생각, 다른 용도가 있겠지.
나는 내 집착이란 이름의 사랑도.
단지 그 색깔이 달라서 사람들이 특이하게 쳐다 본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사랑은 핑크빛인데, 내 사랑은 보라색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날 이상할 정도로 관심있게 쳐다 본다고 생각한다.
내 사랑도 사랑이고, 내 사랑은 아름답다.
"오천원이요."
"여기요. 감사합니다."
막상 오천원의 반토막 거스름돈을 받고 내리니 자신이 살짝 없어졌다.
화난 랑이는 언제나 무섭다.
예전 짱으로 이름 날렸던 남자, 한랑이었으니까.
무섭지만 설마.. 날 죽일 듯이 패지는 않겠지.
그때의 그 손지검은..
단지, 너무 화가나서, 너무 쪽팔려서 그랬던 것일 테니까.
핸드폰을 들었다.
떨리는 손끝이 버튼을 꾹 누르고, 얼마 전과는 다르게 시원하게 들리는 연결음.
단조로운 뚜르르 뿐 이지만 몇 일 동안 날 괴롭히던 변비가 뻥, 하고 뚫릴 것 같은 기분이다.
"왜 전화 했냐."
"지금.. 바빠?"
"별로. 용건 빨리 말해."
딱딱 끊어지는 랑이의 음성.
그리웠던 그의 달콤한 음성.
평소보다는 많이 차갑지만 그래도 날 거부하지 않는다.
그거 하나로도 나는 한껏 용기를 얻어 그를 불러낸다.
"나.. 지금 회사 앞. 나올 수 있어?"
"카페에 가 있어."
"응! 아예 퇴근하고 나와~ 한 시간 후 잖아."
"그러던가."
나는 언제나처럼 그가 전화를 끊고나서야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
마냥 좋기만 하다.
올때와는 다르게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회사 앞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
.
.
.
한시간이 지나면 퇴근을 하는 그를 만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카페 점원들의 눈치를 겨우 이겼던 나.
벌써 세시간 째.
나는 바람맞은 여자의 전형을 연출하고 있다.
겨우겨우 두시간째에 시켰던 커피 한잔.
리필을 하고 또 하고.. 그렇게 세시간을 채우고.
매니저란 사람이 와서, 그만 나가달라고 한다.
"소..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손님이 너무 많아서요.. 대신 다음에 오시면 파르페 공짜로 드릴게요."
"아니에요. 죽치고 있던 제가 잘못이죠. 죄송합니다."
나는 쓸쓸히 그 안을 걸어나왔다.
더운 공기가 내 폐로 들어간다.
뜨겁고 따가운 타다 남은 재가 내 가슴을 잠식한 듯, 숨을 쉬기가 버겁다.
정말, 랑이는 나를 바람 맞힌 걸까.
멍하니 길가를 걸어서 택시를 잡았다.
힘없이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서서히 오한이 든다. 감기가 들은 것일까.
"어이, 아가씨 괜찮아? 많이 아픈거 같은데."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내가 걱정이 되는지 묻는다.
"네, 괜찮아요. 아저씨 빨리 가주세요.."
아저씨는 조금 더 속도를 내는 건지, 나는 차창밖 풍경이 좀 더 못 알아보게 바뀐 것을 느끼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랑이의 얼굴이 떠 오른다.
내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다.
.
.
.
랑이의 집 앞.
그의 차가 있다. 안녕 쏘렌토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확인을 해야겠다.
적어도 랑이가 무사히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 했으니까.
그냥 생각으로도 아픈데, 랑이의 얼굴까지 확인하면.. 내가 상처를 받을 것 같다.
이번엔 정말 상처가 새겨 질 것 같다.
나는 랑이에게 미움이란 마음을 느끼고 싶지가 않다.
"안녕, 랑아. 내일보자.."
태양은 어디로 사라지고, 초연하게 달빛 만이 내 등 뒤를 비춘다.
주황빛 가로등이 그나마 태양을 닮아 내 앞을 밝혀주고.
오늘은 좀 걷고 싶다.
[용서의 말]
"언니, 나 오늘 조퇴 좀 해도 될까? 마감일은 알아서 지킬게."
"그래. 요즘 아파보인다. 빨리 들어가."
"응."
도저히 못 하겠다.
머리는 어지러워 모니터를 쳐다 볼 수가 없고 괜히 숨이 막히고 오한이 인다.
땀이야 여름이라 난다지만, 추운건..... 감기 몸살인가.
요즘 랑이를 못 봐서 후유증이 생긴게 틀림 없다.
힘이 쭉쭉 빠지는 기분 나쁨을 체험하며 겨우 집이 보이는 거리까지 왔다.
다음부터는 아프면 택시를 타야지.
얼마 전에 좀 무리를 해서 교통비가 오버됬다.
하지만 아플때는 돈을 아끼면 안 되는 것 같다. 지금이 딱 돈 아끼다 죽기 직전이다.
아스팔트 바닥을 보며 걷던 내게 어디선가 굉장히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움이 지나쳐 눈물이 핑 돌만큼의 낯익은 음성.
"지난초, 왜 이렇게 늦어?"
"라..랑아."
"회사에선 나갔다고 한 지가 한시간이 넘었는데, 거북이냐?"
"어떻게 .."
"너 핸드폰 어딨어?"
힘없는 내 목소리는 아랑곳없이 랑이는 화가 난 모양이다.
랑이의 말에 나는 핸드폰을 찾으려 백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유미인지 암튼 너네 출판사 사람이 받더라."
"아.. 놓고 왔나봐. 미안해."
"아프다며? 들어가자."
랑이는 내게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거의 3주 만의 느낄 수 있는 랑이의 제취.. 촉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역시 우리집은 랑이가 있어야 사는 것 같다.
물론 나도.
랑이가 있으니까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 같다.
"랑아, 내가 미안했어."
"됬어."
"아~ 랑아~ 정말이야~ 다시는 너 쪽팔린 일, 화나게 하는 일 없을거야. 약속!!"
랑이는 마지못해서 내가 내민 새끼 손가락의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밥은 먹었냐?"
"먹어야지. 랑이는?"
"일루와 봐."
랑이가 식탁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나더니 나보고 손짓을 한다.
나는 충견인냥 그의 앞으로 갔고, 그는 나를 향해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잘못을 사죄하는 입장임으로 무릎을 꿇었다.
"눈 감아."
또 눈도 감았다.
몇 초 뒤.
가만히 있던 내가 눈을 뜰 수 밖에 없었던 건, 느껴지는 건조한 랑이의 입술 때문에.
영 점 몇 초 인지도 모르게 살짝, 바람처럼 왔다 간 랑이의 입술.
나는 그동안의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얼마 안 떨어진 거리의 있는 랑이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또 먹고, 또 먹고.
나는 랑이를 실컷 먹었다.
랑이는 그런 나를 내치지도 않고 맛있게 먹게 내버려두었다.
랑이가 해 준 용서.
내게는 어떤 용서의 말보다 크고 어떤 용서의 행동보다도 절절하게 다가왔다.
키스를 하며 눈물이 흘렀다.
랑이가 뭐라고 할 테지만 오늘은 좀 흘려줘야지.
오늘은 살짝, 랑이의 어깨에 기댈 수 있을까.
"울지마, 옷 버려."
기대하지 않는다.
랑이는 랑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악마.
랑이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
.
.
"그 여자, 누구야?"
“너한테 머리 뽑힌 애?”
랑이는 장난스런 말투로 내 양심을 찌른다.
나도 나의 만행은 다 반성했다고..
“글쎄.. 소중한..애라고 해야하나?”
나를 또 도발하려는 건지, 랑이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비친다.
“죽여버릴거야.”
“왜?”
랑이는 내 말에 항상 여유롭게 웃기만 한다.
내 말이 진담 같지 않아서 일까?
나는 진짠데.. 진짜 하는 말인데.
이런 내 마음을 알면, 랑이는 나를 떠날까?
랑이도 나를 무서워하고.. 나를 끔찍하게 여기면서 나를 버릴까?
그런 랑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두렵다.
너무나 싫다.
“너한테 소중해야 하는 건 나뿐이야.”
“내 마음이잖아.”
“내꺼잖아.”
랑이는 그저 웃기만 한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체념이 섞인 실소 인지, 사실이라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저런 애매모호한 태도.
짝사랑을 하는 여자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알까?
뭐, 상관없다. 나는 짝사랑을 하는 여자가 아니니까.
"밥먹자. 입술힘 썼더니 배고파."
"응, 곧 차릴게."
"됬어. 나가서 먹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을 챙겼다.
여름은 이게 좋다.
외투를 입고, 벗고 할 필요가 없다.
땀 때문에 빨래거리는 많지만 적어도 귀찮음은 없지 않은가.
나도 이제 제법 랑이를 많이 닮아있다.
랑이는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
여자가 귀찮게 구는 것도.
밥을 차리는 것도 귀찮아 하고.
나에 대해 아는 것도 귀찮아 한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과연 랑이는 내 핸드폰 번호를 외우고 있을까...?
먼저 신발을 꿰어 신고 나가는 랑이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활짝 웃는다.
갓만에 밥다운 밥,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겠구나.
마음이 편안해 졌으니까.
"랑아, 우리 뭐 먹어?"
"내 마음."
"그래! 내가 네 마음 많이 먹을게. 배불러 터지게."
"또 까분다. 내가 결정할 거라고."
"응!"
생각만으로 기쁘다. 배가 부를 때 까지 먹는 랑이의 사랑.
뭐, 지금도 충분하게 배가 부르지만 말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너 같은 돼지가 먹을 내 마음 없다."
랑이가 혼잣말을 했다.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놓쳤다.
"응? 랑아, 뭐라고?"
랑이는 아무 대답이 없다.
아마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지? 귀찮은걸 싫어하니까..
아깝다. 아쉽다.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이었는데.
나는 랑이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랑이는 자연스레 내 허리에 손을 끼워 넣었다.
따스한 랑이의 겨드랑이에 내 어깨를 들이밀었다.
여름이라 암내가 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전혀, 네버 나지 않는다.
내 코는 사랑에 막혀버렸나 보다.
아, 아니다.
맞다, 랑이는 무언가를 겨드랑이에 뿌리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