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십자가 처형’(Crucifixion)이라는 유화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비전통적이고 초현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나무 십자가인데 여기서는 하이퍼 큐브 십자가입니다. 다면체의 십자가에 예수가 달려 있고 그 앞에서 예수를 쳐다보고 있는 한 사람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의 얼굴은 뒤로 젖혀져 알아볼 수 없으며 몸에 채찍에 맞은 상처가 보이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은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입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십자가 앞에 마리아 대신 자신의 아내 갈라(Gala)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가룟 유다라고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어깨에 두른 노란 옷 때문입니다. 노란색은 배신을 상징합니다. 달리는 대부분의 성화에서 가룟 유다에게 노란색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성화에 가룟 유다가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께서 처형당하시기 전에 먼저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는 배신자 가룟 유다를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와서 십자가 앞에 세워놓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와 가룟 유다 사이에 우주도 멈추게 할 것 같은 침묵만 존재하도록 그렸습니다. 왜 살바도르 달리는 가룟 유다를 십자가 앞에 끌어다 놓은 것일까요? 평론가들은 가룟 유다를 비굴하고 스승을 배신한 사악한 죄인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와 독대하는 제자로서의 가룟 유다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룟 유다를 배신의 아이콘이 아니라 배신한 후에 잘못을 뉘우치고 고심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스승을 배신한 가룟 유다라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와 독대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앞에서 예수와 독대하면서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다함께 복음성가 ‘십자가’를 부릅니다.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그의 생명 내 속에 그의 능력 내 안에 그의 소망 내 삶에 나의 삶 주의 것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그의 생명 내 속에 그의 능력 내 안에 그의 소망 내 삶에 나의 삶 주의 것 십자가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바울은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기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는 원어로 ‘쉬네스타 우로마이’인데 ‘십자가에 못 박힌 효과가 지속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의 모습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이라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It's not About Me)’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인쇄하던 인쇄공의 딸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느낌이 있다면 하나님은 두려운 대상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인쇄소 바닥에 떨어진 성경책 조각을 주었습니다. 한 면에 이런 구절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리고 “주셨으니” 나머지는 글씨가 인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구절을 통해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주셨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녀의 변화가 어머니 눈에 띄었습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기뻐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딸은 성경 구절이 찍힌 쪽지를 내어놓았습니다. 어머니가 그 구절을 읽고나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얼 주셨는데?” 딸은 머뭇거리다가 “저도 몰라요. 하지만 무언가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실 만큼 사랑하신 분이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함이니라.” 여기의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함이니라’ 원어로 ‘히나 데오 체소’인데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고정 관념에 대하여 죽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어떠한 위기가 닥쳐와도 자기 생각에 따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모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요 섬기는 자는 낮은 자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완전히 죽어져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정근모(鄭根謨) 박사는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아들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 진후가 열 살에 만성신장염 진단을 받고 투병하며 수술을 반복하다가 서른여섯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박사는 아들의 투병 과정에서 자신의 믿음이 성장했다고 고백합니다. 아들과의 이별 장면을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진후가 천사처럼 밝은 표정으로 하나님 곁에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 이제 네 말처럼 천국으로 갔구나. 진후가 유언처럼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 제가 죽거든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마세요.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데 뭐가 두려워요? 제가 죽으면 아빠가 축복 기도해 주세요. 저는 천국에 입학하러 가요.’ 죽음을 천국 입학식으로 표현한 아들. 그래, 너는 하나님의 품에서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야. 그러나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것을 어떻게 하니? 너의 죽음을 어떻게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겠니? 아빠가 아직도 그 정도의 신앙을 갖지 못한 것이 부끄럽구나. 안녕, 내 아들아.”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인생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영생의 소망,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선물이다. 나는 믿는다. 예수께서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진후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 그 분의 섭리와 사랑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진후의 말처럼 죽음을 축복할 수 있는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믿습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역경 속에도 영생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 20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기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원어로 ‘제 데 크리스토스’인데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된 후로 자아가 죽고 심령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사라질 때 그리스도가 살아납니다. 자신의 죄악된 의지와 자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한다 해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를 주장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아무리 선을 많이 행한다고 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의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진젠도르프(Nicolaus L. Zinzendorf) 백작은 십자가를 보아도 아무런 감동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뒤셀돌프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성화를 보는 순간 피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독일 화가 스텐버그의 작품이었습니다. 성화의 밑에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주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 주느냐”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진젤도르프는 글을 읽는 순간 ‘주님을 위하여 지금까지 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며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영토를 개방하였습니다. 당시 피난민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영지를 주어 경작하게 하였더니 오백여 가정이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예배당을 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려 선교사를 보내자고 제안하여 선교사 50명을 보내었습니다. 진젤도르프는 경건 운동을 펼쳤으며 모라비안 교파의 모태가 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본문 20절 후반절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원어로 ‘엔 피스테이 조’인데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에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주관을 따라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입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까? 누구든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야 말로 진정 가치 있는 삶이요 아름다운 삶인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The Master’s Indwelling)’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은 매시간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끊임없이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예수께서 죽음과 무덤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끝까지 주님을 따라 자아가 죽음에 이를 때 비로소 구원과 생명이 있을 것이다!” 이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옛사람을 못 박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아납니다.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어야 나라가 살아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못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