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일은 예수교회 창립기념일입니다. 예수교회 역사에 따르면 1월3일 첫 예배를 드린 것과 교회 이름을 아무 수식어 없이 예수+교회로만 한 것은 모두 주님의 계시에 따른 것입니다.
1904년 증조부님이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와 세우신 시흥교회, 1922년 경 종로로 이사하신 후 할아버지께서 한 평생 섬기신 묘동교회처럼 예수교회는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교회에 출석하던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해 저와 제 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1933년 북한 지역에서 설립돼 남북 분단이 없었다면 접하기 쉽지 않았을 곳인데 사회적으로 분단된 1946년 교회가 월남하여 접할 수 있었고, 월남해서도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면 접할 수 없었을 건데 서울 흑석동으로 자리를 잡았고, 제 할아버지 댁이 그 전처럼 종로였다면 접할 수 없었을 건데 마침 흑석동으로 이사를 하셨고, 제 외가도 월남하셔서 흑석동에 정착하셨기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는 점에서 주님의 섭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회사에서는 기존 교파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점에서 좋지 않게 소개하기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대한복음교회(1935년 창단)와 한국기독교장로회(1953년 한국 장로교 2차 분열 시 창단)처럼 자생교단이라는 점입니다. 설립자들은 당시 감리교(이용도)와 장로교(백남주, 한준명)에서 주목받는 분들이었습니다.
예수교회의 1대 선도감(예수교회만의 직제로 감리교회의 감독과 비슷함)을 지낸 이용도 목사님이 활동하시던 당시는 하나의 조선기독교회라는 생각 아래 다른 교파라도 강단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장로교파에서 1932년 이단 판정을 받으셨고, 이듬해인 1933년 감리교파에서 휴직 처분을 받으셨습니다. 교회 창립 해이기도 한 1933년에 돌아가신 후 잊힌 존재처럼 여김을 받으셨으나 1960년대부터 한국감리교회의 인물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셔서 휴직 처분 후 65년 만인 1998년 복권이 되셨습니다. 특별히 탄생 100주년이던 2001년 이 목사님(4월 6일)과 동갑내기 세 분, 함석헌 선생님(3월 13일), 김교신 선생님(4월 18일), 김재준 목사님(9월 26일)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습니다.
평양신학교(1959년 이후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로 나뉨)의 천재로 통하던 백남주 목사님은 예수교회의 신학교이자 수도원이던 원산 신학산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뜻을 밝혀 강의하신 걸로 유명합니다. 백 목사님은 1935년 예수교회 목사직을 사임했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신 평신도 신학자로, 이른바 토착화 신학으로 유명한 유동식 박사님은 당신 책인 <산화가>에서 당신이 1948년 공주여자사범학교(현 공주교육대학교) 교사로 계시던 시절 백남주 목사님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셔서 우연히 알게 됐다고 소개하셨습니다. 유 박사님에 따르면 백 목사님은 백상조라는 가명을 쓰며 숨어사셨는데 -원산 신학산에서 그리 하셨듯이- 히브리어 성서와 그리스어 성서만을 보셨고 당신의 임종 일시-1949년 모 월 모 일-를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유 박사님은 나중에 이 분의 정체(?)를 알고 워낙 이단자로 유명해 대단한(?) 분이시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언행을 보고 호감을 느껴 이용도 목사님과 예수교회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분은 당신 살아생전에 제가 유일하게 접한 한준명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에 대해 이단이네, 삼단이네 말이 많지만 제가 아는 한 그럴 만한 분이 못 됩니다. <문익환 평전>의 지은이인 김형수 님은 이 책에서 모교인 간도 명동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시던 한 목사님을 문 목사님-시인 윤동주, 김정우, 송몽규 님도-의 선생님으로 소개하고 있고, 문성근 씨를 비롯한 문 목사님 형제들의 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생전에 녹음한 것을 정리해 펴낸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예의 꿈>에서 문 목사님의 부모님인 문재린 목사님과 김신묵 권사님은 한준명 목사님과 그의 누이인 한의정 복음사님-예수교회만의 직제-을 각각 당신들의 친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 목사님은 북한 정권 하에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기적적으로 생환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이용도 목사님의 뒤를 이어 2대 선도감을 지내신 이호빈 목사님이 월남하셔서 1946년 설립하신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10년씩 교수로 봉직하셨습니다.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학교임에도 에큐메니칼한 학풍을 이어가고 있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성공회에서 세웠는데도 에큐메니칼한 학풍을 이어가고 있는 성공회대학교 신학과처럼 중앙신학교는 에큐메니칼한 학풍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기독교장로회를 소속 교단으로 둔 평신도 신학자 안병무 박사님께서 1965년부터 69년까지 5년 동안 학장을 지내신 데서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안 박사님은 한신대학교로 옮기신 1970년 11월 전태일 님의 분신 사건을 접하며 민중신학을 수립하셨습니다. 현재 강남대학교는 중앙신학교처럼 교단 학교는 아니고 협력 관계라고 합니다.
설립목사님들 말고는 소설 <화수분>의 작가이자,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어서 돌아오오>, <주여 어린 사슴이>의 작사자이며, <내 진정 사모하는> 가사의 번역자인 전영택 목사님이 유명하고, 예수교회 목사님은 아니지만 이호빈 목사님의 사촌 동생으로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교)의 설립자이며, 찬송가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작사자인 牧園 이호운 목사님이 이용도 목사님 댁에 유숙하며 영향을 많이 받은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자 평신도 가운데서는 소설 <순애보>의 작가인 박계주 선생님이, 여자 평신도 가운데서는 현재는 다른 교회에 출석하시나 원래 교우인 원로 성우 고XX 선생님이 대중이 널리 알 만한 분들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우이시나 ‘친구 따라 강남 가듯’ 학창 시절 친구 따라 개신교회인 예수교회에 출석한 영화배우 안XX 님도 예수교회와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서울 대치동 묘동교회 인근에 예수교회 예배당이 한 곳 있었는데 ‘(대치동에서) 예수교회로는 전도를 할 수 없다’고 당회에서 결정해 얼마 있지 않아 XX감리교회로 간판을 갈았습니다. 대한이든 한국이든 아무 수식어 없이 예수+교회로만 한 것은 주님의 계시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만 감리든 장로든 교파주의를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전하며 따르겠다는 취지에서 한 것인데 당회의 결정이 이해는 되지만 설립 취지에는 반하는 것이어서 씁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자생교단인 예수교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세 곳 모두 한국의 기독교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교세가 약합니다. 그러나 교인 수가 많고 적음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익히 증명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자생교단 세 곳 모두 진정한 의미의 교세가 더욱 커지기를 기원합니다.
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대한기독교서회 1977
유동식 <산화가> 정우사 1978
심원 안병무 선생 기념사업회 <갈릴래아의 예수와 안병무> 한국신학연구소 1998
우원기념사업회 <끝날의 징조와 사는 길-우원 이호빈 목사의 생애와 사상> 강남대학교 출판부 2000
김형수 <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2004
문재린/김신묵 <기린갑이와 고만예의 꿈> 삼인 2006
첫댓글 목사가 어려서부터 다녔던 예수교회의 창시자 이용도 목사님과 그분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자세히 알려드리지 못하며 지내는 데, 이런 일들에 대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잘 정리해서 알려주는 임철원 집사님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임철원 집사님, 글이 세로로 좀 길어지더라도 읽기 쉽게 좀 끊어서 써 주시면 안 될까요?
가로로 너무 기니까 읽다가 줄을 잃기도 하고 다음줄을 찾기가 힘들어요.
들여쓰기를 해 주시든지, 아니면 단락을 나누어 주셔도 좋을거 같아요. 읽을 엄두가 안나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