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꽃에 관한 시모음 25)
담벼락 민들레 /서심 정란희
갈기갈기 뜯겨서 상처투성이
송두리째 뽑히는데 웃음 짓네
온갖 수모 속에서도
여전한 그녀의 노란색 미소
오늘도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바람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춘다
전생에 사랑했을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민들레 /지동근
민들레는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꽃도 잘 피운다
시멘트 틈 사이에서도 싹을
틔워 꽃을 피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민들레 홀씨는 깃털같이
가벼워 후 하고 불면 허공에
둥실둥실 바람에 날려간다
저기 날아가는 홀씨도 어느
낮선 곳에서 또 싹을 틔워
노랗고 하얀 꽃을 아름답게
피우겠지
홀씨를 다 날리고 나면
홀씨대로 피리를 불던
시절이 있었지
아주 오랜 세월 전에.
민들레 홀씨 /백수인
세상의 외로움 여기 다 모였네
외로운 사람끼리 등 기대고
작은 마을 이루고 있지만
한여름 곧게 내리치던 햇살
구름들이 떠다니며 내던 우렛소리
시냇물 비껴가던 바람의 눈물
흙 내음 가득하던 발자국 소리
가슴 가슴마다에
하얀 화석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이 투명한 영혼들
한 점 바람결에도
어디로 날아갈지 몰라
은하의 어느 고독한 별나라에 사뿐히 앉을까 몰라
민들레 저작권 /김서하
꽃을 베끼는 복제의 계절
들뜬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락거린다
틈을 보이면 위험한 시뮬라크르의 세상
원본을 밝히지 않는
강을 건너온 바람의 옷소매에서 물냄새가 났다
가벼운 생일수록
뿌리는 질기다
제멋대로 분양된 흰 민들레
그런데 너는 알고 있을까
이번 달에 월세 계약이 끝난다는 것을
봄의 작품들
발신지를 몰라 저작료를 지불할 필요 없으니
끝까지 꽃대를 밀어 올린다마는
너를 안고
궁핍의 페이지를 한 번 더 옮긴다.
조로 /길상호
봄볕 한 모금 마시고 싶어
별들도 몇 번 손대지 않은 듯한
민들레만 꺾어왔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분명 여린 꽃이었어요
근데 뒤뜰 그늘에 널어놓고
저녁에 가서 보니
소쿠리 한가득 하얀 씨앗만
부풀어 있는 거예요
노을을 가다듬는 갓털이
폐경기를 막 지난 여자 같아서
잠시 혼이 빠져 서 있었어요
한꺼번에 늙어버린 꽃,
민들레는 꽃잎 피우면서 이미
씨앗을 굴리기 시작한다죠
수없이 밟히면서 이어온 가계가
계절마저 건너뛰는 법을 가르친 거죠
씨앗이 전부인 꽃을 보면서
후후 입바람도 낼 수 없었어요
민들레 당신 /이기영
나무 둔덕 아래
널부러진 당신의 자취..
티 없이 고왔던 얼굴
하얀 분 치장할 듯 홑씨이고
별무리 진 밤 안개 젖어 추울까
나려 앉는 빛 가닥 모다 모아 안으셨나요..
정성스레 보듬어
오는 바람 마주 서서다 보내고
차마 잡지 못해 애태워
꽃대마저 타들어 지셨나요....
당신 할머니
당신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흔적을 더듬으려
빈 몸으로 하늘만 바라보다
흰 구름 의지하고 가시나요..
떠나가시나요.
민들레..
민들레 당신.
민들레 2 /권오범
조상의 자손번창 소원에 효도하려다 보니
한번 터를 잡으면
다산으로 세상을 덮으려는 욕심 때문에
꽃밭에서조차 미운털 박힌지 오래
바람이 지정해준 곳이 마당이거나
담벼락 틈새기일지언정 상관없었다
눈칫밥 먹고 대를 잇느라
조급증만 키워온 끗발 없는 삶이었으니까
인간의 건강식품으로 인정받아
기름진 보금자리에서 호강스럽게
오순도순 모여 살게 된 비닐하우스
이렇게 금값으로 신분상승할 줄 누가 알았으랴
채소들과 어깨를 겨루게 된 날부터
갈증마저 무시로 해갈시켜 주니
대대손손 천대받아온 역사가 눈물겹다
비록 은혜의 대가가 더 혹독할지라도
민들레 홀씨 /정옥령
노오란 병아리떼
옹기종기 모여
오지랖 넓은
토끼풀 옥색의 동그란 반지
이리 저리 기웃 기웃
거리는가 싶더니
벌써 하얀 속살 벗겨내어
바람실어 지구 한 바퀴
훌쩍 돌아다 보았나보다
민들레 섬 /이기영
둑방길 일찍 핀 노란 민들레
지척의 그대를 알고도 내 안에는 작은 바다
수평선 까뭇한 섬 빛에
희망 품고
눈물자욱 꽃 편지지의 종이배에
민들레 송이송이 실을거예요
섬 언저리 닿을때까지
하얀 낱씨 성성히 엮어지면
외로움 하나 생각하고 후.... 불어주세요
구석 구석 퍼져
지고 피어 민들레 섬이 될거예요..
그리우면 바라 볼
노란빛 민들레 섬이 될거예요..
민들레 꽃 /박인걸
민들레 꽃말이 일편단심이라지요.
소박하고 잔잔한 생김새에서
잡초의 굳센 정신이 읽혀지고
자생하는 끈기와 억척에서
흉내 낼 수 없는 비범함이 엿보여요.
돌봄 없이 살아남는 민들레꽃은
범접할 수 없는 의지가 가득하고
아무렇게 흩어져 흔들리며 피어도
자신만의 강한 신조를 안고 살아요.
짓밟히고 짓이겨져 부러질 때면
애처롭고 가련해 속상하지만
어느새 다시 일서서 배시시 웃을 때면
대견함에 항상 맘이 놓여요.
봄바람 살랑대는 초원 언덕에
무리지어 샛노랗게 일어서서
파란 하늘 향해 일제히 얼굴을 들고
무음의 떼 창을 불러댈 때면
꽃들의 노래가 가슴을 파고들어요.
민들레 꽃 쓰다듬은 한 낮 햇살이
되돌아와 내 얼굴을 어루만질 때
꽃향기에 내 마음은 새털이 되네요.
민들레 /이인해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내 인생의 백지 위에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진술 같은
착한 시 몇 줄 쓰고 싶네
흙먼지 풀풀 나는 길섶에
가난하게 자리 비비고
기침 콜록이며 한세월 살았어도
밟히고 밟힌 꽃대궁 힘겹게 일으켜 세워선
어느 날 아침 노랗디노란 꽃 한 송이 피워
그 누가 보든 말든
민들레라 이름지어놓고 홀씨나 되어
바람 좋은 날 있으면 그냥 서운할 것도 없이
이 세상 홀홀이 떠나면 그만이듯
버리고 버린 나날 끝에
그런 시 몇 줄 쓰고 싶네
민들레 홀씨 /박정미
봄바람 부는 날
엄마가 만들어준
노란 저고리 벗어두고
깃털처럼 가벼운 몸으로
봄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며
세상 구경 떠나봅니다
파란 하늘 흰 구름 위에
해님과 사이좋게 낮 잠도 자보고
어둠이 밀려와 밤이 되어
별님과 고향 노래 불러보며
눈물도 흘려봅니다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흘리면
봄바람은 어느새 돌 뜸에
홀로 남겨 놓고 떠나갑니다
길섶에 핀 민들레꽃 /박정재
가다 보면 노란 동전 하나
길가 풀숲에 떨어져 있네
밟고 지나간 그 자리에도
황금빛 동전이 떨어져 있네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지만
노란 둥근 꽃은 예쁜 얼굴로
가는 길 따라 곱게 피어서
봄이 오는 길을 장식하고 있네
매화꽃 아래 잡초 사이에서
땅에 뒹구는 목련화 곁에서
요란한 꽃구경 인파의 곁에서
민들레꽃은 조용히 피어 있네
너를 보면 내가 살아온 흔적이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을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너의 삶은 純粹 바로 이것이었네
민들레 /이종숙
가꾸지 않아도 앉은 자리마다
밝은 미소가 번지는 것은
가지고 있는 성품이 단아하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당당하게 얼굴 한 번 붉히지 아니하고
편안한 것은
단련된 스스로 낮춤이며
뭇발길에 밟힐수록
성실하게 일어서는 것은
자생의 행복함을 알기 때문에
노란 꽃망울 어느 곳에 있어도
하얀 솜처럼 따듯한 미소가
세상 속에 인자함으로 웃는다
민들레 /배찬희
바람의 목소리로만 이야기하리라
태양의 오랜 갈증으로만 사랑하리라
죽음조차도 조객을 부르지 않는
그 결벽함으로 고백하노니, 민들레
향기를 잃고 손님을 잃어버린
죽어서 더욱 빛나는 네 이마 위에서
순결을 보았노라, 민들레
제 무덤까지도 마셔버리는
그 냉정함으로 울어대는 산새처럼
이젠 더 이상 슬프게 노래하지 않으리니, 민들레
바람에 날려 방향 잃은
한 마리 십자매로
내 집에 네 둥지를 들어다오.
애장을 파먹고 미쳐버린 여우처럼
온 산 누비며 달아난 곳
네 온기가 남아 있는
불빛 홀연한 토담집 꽃 밭
눈 맑은 소녀의 손 끝에서
수줍게 다시 피어나는
요절한 시인의 숨결.
민들레 /박재원
살랑살랑
비단결 바람
해맑은 하늘빛 미소
그대 모습 같은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
잔잔히 스며오는 숨결에
마음 설레이고
산소처럼 맑은 공기로 반겨줄
한 송이 꽃으로 피워
살짝 웃는 틈새 사이로
행복이 전해지듯
누군가의 아픈 가슴에
희망의 꽃을 안겨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