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註] 2015. 2. 5 <산지기나라> 카페에
올린 졸작수필을 카페 정지조치로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원고를 청탁해온 문인협회 나름의 입장이 있겠으나 스스로 자신의 첫사랑을 까발리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무리 글속이라 해도 젊은 날의 불장난으로 치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가 자신의 애정행각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내 젊은 날의 어설픈 로맨스를 아내에게 고스란히 까발리는 꼴이니 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글을 시작한 것은 요즘처럼 치매가 많은 현실을 걱정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첫사랑이지만 더 이상 기억에서 멀어지기 전 활자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 감는 날까지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던 비밀스런 사연인지라 자꾸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신변잡기로 비치기 십상인 스토리지만 반세기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하니 이래저래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6.25가 앗아간 아버지로 인하여 모진 가난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야했던 성장기의 나는 낭만적인 이성간의 사랑 같은 호사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한 내 앞에 운명처럼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탄 이브 자정 무렵이었다. 그것도 대구의 도심이었던 시청 앞 단팥죽 집이었다. 그때도 성탄절 분위기는 지금처럼 흥청거렸다. 임시로 통행금지까지 해제하자 청춘남녀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단팥죽집은 비싼 땅값이라도 말해주듯 홀이 협소하여 한참을 기다린 후 자릴 잡을 수 있었다. 작고 네모난 탁자는 두 사람이 비집고 마주 앉기에도 협소했다. 막 주문을 하려는데 낯선 소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생판 처음 보는 청년과 합석하기가 거북했던지 목례를 보내면서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당시 대전에 근무하던 나는 성탄을 맞아 작은 선물꾸러미를 사들고 초등학교 때의 은사를 찾아 그곳에 당도했었다.
당시엔 대전에서 대구까지 걸린 열차시간도 길었던지 퇴근하자마자 서둘렀는데도 밤이 깊어서야 닿았던 것이다. 굳이 시청 앞까지 찾아갔던 것은 목적지인 종로초등학교 인근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그곳에 있는 직장 당직실을 찾아가 하룻밤 신세를 지면서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짙은 자주색 코트에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는 말수가 적었고 큰 눈동자를 껌벅이면서 시종 웃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그녀는 안강에 사는 고모 댁을 찾아가는 길이라 했다. 그해 2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서울의 Y대를 지망했다가 낙방한 재수생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박진영. 진영이 자신의 집 주소를 내게 적어준 것은 전화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당시엔 나도 주경야독을 목표로 부산 전근을 희망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맡고 있던 대전시내 승압공사 준공이 늦어지면서 상사는 나의 전출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본사에서 나의 부산행을 승인했다. 한여름 늦더위가 물러나기 시작하던 8월 말이었다. 부산에 도착한 나는 진영에게 서신을 띄웠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답신이 사무실로 날아들었다. “부산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니 기죽지 말고…” 하면서 남포동 에츄드다방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는 당시의 대전과 부산의 도시 규모 차이를 마치 시골뜨기인 내가 서울 구경이라도 온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불과 8개월 만인데도 서로를 몰라볼까 걱정했던지 하늘색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오겠다는 것까지 밝혔다. 진영은 서울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해 가을, 범어사 계곡을 찾아 나의 직장 동료들과 진영의 학교 친구들이 어울려 ‘라노비아’와 ‘새드 무비’로 미팅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의 노래에 찬사를 받은 진영은 학교가 파하면 광복동 클래식 음악실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진영이 나와의 간극을 좁혀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매개체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그녀가 보내오는 엽서였을 터이다. 나보다 대여섯 살이나 위인 직장 사무실 선배는 일부러 총무과까지 찾아가 진영의 엽서를 들고 오는 것 같았다. 선배가 나를 아껴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영의 엽서 내용을 큰 소리로 낭송하며 사무실을 들어설 때의 당혹스러움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디어 강”으로 시작되는 진영의 엽서였다.
서로 만나서는 차마 주고받을 수 없는 낯 뜨거운 애정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문학소녀다운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밤비가 추적대는 창가엔 고독이 몸부림…” 어쩌고 하는 식의 당시 라디오방송 전파를 탔던 <한밤의 음악편지>에서도 자주 듣던 말도 빠지지 않았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때 이미 결혼 적령기에 달했던 그 선배가 보기에 엽서를 보낸 사람의 표현이 얼마나 유치하고 진부해 보였을까.
야간대학엔 내가 원하는 전기과가 개설되지 않아 훗날 편입학할 요량으로 우선 기계공학과를 택했다. 그 무렵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 교수들은 의욕적으로 강의에 속도를 내는 바람에 전공이 다른 나는 무척 힘들었다. 칠판만 쳐다보며 노트에 휘갈겨도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다. 이렇게 쌓이는 나의 노트정리를 진영이 자진해서 도와주었다. 난 사무실에서도 외근 직원들이 조사해오는 자료들을 도맡고 있었다.
그렇게 과욕을 부리며 갈팡질팡하다가 급기야 난 신경쇠약 증세로 병원을 찾는 신세가 되었다. 중년의 신경과 의사는 나에게 이성간의 진한 사랑에 몰입하든지 탁구나 바둑과 같은 취미활동을 해보라는 자가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하숙엔 가까운 시외전화국에 다니는 체신공무원들과 나와 같은 직장 청년들이 칠팔 명이나 묵고 있었는데도 대범하게 진영은 내가 없는 하숙방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나의 노트를 정리했다.
내가 너무 꼿꼿한 자세로 냉랭하게 대한 때문인지 진영은 가끔씩 자신의 옆집 남자 얘길 꺼내곤 했다. 어릴 때부터 이웃에서 함께 자란 동네 오빠라며. 그 오빠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타가 선망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인 S대생으로 방학 때가 아닌 주말에도 수시로 부산 집을 찾아와 자기에게 노골적으로 치근댄다고 했다. 직장 업무와 학습으로 과부하가 걸린 나는 그런 말들도 무덤덤하게 흘려듣고 있었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나의 부산생활도 한 해가 지나 늦여름이 되었다. 꿈같이 달려온 날들 속엔 진영의 헌신적인 도움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땅거미가 내려앉던 중앙동 옛 부산역 앞 막걸리주점에 둘이 마주 앉았을 때 그는 뜻밖의 선물을 내밀었다. 벌써 지난 봄 나의 생일에 전하려고 했지만 기회를 보다가 늦어졌다고 했다. 사랑고백을 담은 <역에서>란 제법 긴 자작시에 부산역 야경을 그림으로 바탕에 깐 액자였다.
하지만 난 그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영은 은연 중 나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는 눈치였지만 나에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맹목적인 사랑만으론 결혼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몸뚱이 하나뿐인 궁색한 처지에다 은행대출 같은 제도마저 열악하던 때였다. 그보다 더 다급한 것은 곧바로 닥칠 군 입영이고 서로 나이차가 없다는 것도 난 부적격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난 그때까지 술을 마실 줄 몰랐다. 그날은 내가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느라 힘들게 막걸릿잔을 기울여야 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진영도 자신의 마음을 관철하지 못하자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날 밤 자신은 귀가하지 않겠노라고 객기를 부렸지만 불과 한 달 후면 내가 입영을 해야 한다는 말은 끝내 꺼내지 못했다. 그러고 그해 찬바람이 선들거리던 9월 말 난 부산을 떠나 입대를 했다.
대구 신병훈련소를 거치는 사이, 세월은 또 그렇게 빠르게 흘렀다. 백설이 온 세상을 뒤덮은 날, 예고없이 강원도 산골 원주까지 진영이 날 찾아왔다. 처음 대구에서 그녀를 만난 날로부터 이태가 지난 때에 원주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바쁘게 달려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러면서 군에 매인 나의 처지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입대한지 겨우 석 달, 내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은 그대로였다.
그런 나의 속마음을 한 번 더 확인하자 이틀을 여관에서 쓸쓸하게 보내던 진영은 말없이 떠나갔다. 귀로에 신탄진에 살고 있는 언니 집에 잠시 들러서 쓴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자신은 이제 입산을 결심했으니 더 이상 찾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대한민국 남아라면 누구나 감당해야하는 병역의무지만 그의 편지를 받아들자 난 가슴이 아팠다. 그 전 해에 세상에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동백아가씨' 노랫말이 떠올랐다.
뒤에 의정부로 부대를 옮긴 후에도 정말 진영이 머리를 삭발하고 절로 들어 갔을까가 궁금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세상엔 동갑내기 부부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땐 내가 진영을 잡고 있는 만큼 그녀의 앞날을 막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단념해야 한다는 최면을 수없이 자신에게 걸었던 것이다. 마음을 닫은 탓인지 진영에 대한 애정은 아침햇살을 만난 새벽안개처럼 그렇게 점차 옅어져 갔다.
천 명이 넘는 말기 암 환자에게 일본의 호스피스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것’을 물었더니 그 다섯 번째에 ‘마음에 깊이 남는 뜨거운 연애를 못한 것’이란 대답이 나왔단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솔직해진다고 하니 거짓말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진영은 과연 어떤 사랑이었을까.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절박함 앞에서 그녀를 통해 알게 된 첫 이성간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내 인생에 또 다른 삶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첫사랑이란 테마 앞에서 오랜 동안 잊고 지냈던 여인을 떠올리자니 그녀와 함께 했던 날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진영이었다. 불과 1년여 세월을 함께 하면서 그녀는 가족관계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었기에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부산역 좌우로 산동네에 위치한 하숙집과 진영의 집은 각각 영주동과 수정동이었다.
진영이 태어나 성장한 도시 부산을 떠나 오늘의 ‘강남사모님’으로 등극하기까지 삶에 쏟았을 열정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반세기 세월이 어제 같건만 우린 어느새 여든에 이르고 말았으니 어쩌랴. 세월에 떠밀려 그녀도 지금쯤은 야박하게 자신을 뿌리쳐 눈물까지 쏟게 했던 비정한 남자를 아련하게 추억으로 그리고 있을까. 누가 먼저 지구를 떠날는지 알 수 없지만 부디 자신이 즐겨 찾는다는 그린을 끝까지 누리다가 떠날 수 있길.
1964 봄 대전
1965 봄 태종대
1965 여름 남포동
1966 봄 원주
1967 봄 김포공힝
1967 겨울 의정부
1968 2월 의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