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풀 [허민]
소주병이 비석 대신 거꾸로 박혀있는
외로운 무덤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강아지풀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어린 시절 콧수염은
머리에 꼬리를 달고 태어난 슬픈 짐승이 되었다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어야지, 하는
지난 말씀들은 왜 그리도 어려운가
머리가 되기 위해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무수히 깎여나갔을 코 밑의 강아지풀을 생각한다
꼬리가 잘린 그 자리에 거뭇거뭇 돋아났을
저물녘 하루살이 떼들의 혼돈을 떠올린다
아침마다 무수히 쓰러지는 그 어제의 주검들이
가볍지 않은 무게로 쌓여
강아지풀은 갈대처럼 머리를 기울였을 것이다
꼬리를 머리로 꽃 피웠던 계절이 버거웠을 것이다
여름이면 매미 울음 가득한 묘소에 올라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강아지풀을 바라보곤 하셨다
어느덧 아버지의 그 메마른 줄기도 한 겹 한 겹 벗겨져 내리고
나는 벌써 아버지의 낫을 대신 들어
아침마다 얼굴에 자라나는 꼬리를 자르듯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코 밑을 벌초하기 시작했다
강아지풀로 태어나 강아지풀로 죽는 한해살이,
해마다 여름이면 다시 피어오르는 질긴 운명이 낫을 들게 했다
휙휙 베어지는 삶의 꼬리들을 따라
배밀이 하는 그림자 하나 저물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내년이면 묘비명 같은 그 이름이 무덤 가운데에 또 피어나겠지
벌써부터 따끔거리는 내 코 밑의 뿌리처럼
- 계간 스토리문학, 2022년 1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