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방/엄재국-
이 작은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
금고 속에 들어 있는 반지며 진주 빛 목걸이
본 적 없는 둥근 열매의 팔찌를 훔치려면
캐비닛의 비밀 번호를 알아야 한다
나비는
날개와 날개 사이의 촘촘한 눈금들을 접었다 폈다
낯선 번호의 가시를 헤치고 꽃잎을 연다
다이얼이 돈다 문이 열린다 와르르 쏟아지는,
도대체 둥근 빛깔의 보석들
일시에, 눈앞 캄캄하므로
나풀나풀 나비는, 환한 대낮에 등불을 켜는 것이다
그가 다녀간 자리
부서지고 달아난 문짝들 수북한데,
이슥한 봄날,
꾹꾹 눌러 퍼 담은 향기를 등에 지고
비틀비틀,
산등성일 오르는 나비의 뒤를 밟은 적 있다
-나비/김사인-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나비를 읽는 법/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가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動詞)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
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
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
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나비/이화은-
저 가벼운 터치를
시라고 말해도 되나
저 단순한 반복을
시라고 말해도 되나
저 현란한 수사를
시라고 말해도 되나
허공을 즈려밟는 위험한 스텝을
꽃에 얽힌 지루한 염문을
한 번쯤
하루쯤
한 생(生)쯤은 몸을 바꾸고 싶은
저 미친 외출을 시라고, 시인이라고 말해도 되나
-나비의 연안/정원숙-
철구조물이 둘러쳐진 아파트 신축 부지에
잡풀들이 무성하게 번지고
나비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허공과 땅 사이에서 몽생과 몽사를 연모하는 나비들
가장 날카로운 생의 모서리를 끌어안고
스스로 몸을 낮추는 나비의 날개가 뜨겁다.
허공의 무게를 다 얹고도 가벼이 나는
날개 사이로 강이 흐른다.
그 강줄기 따라 나비 한 마리 갖고 싶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화려한 나비는 독이 많고
초라한 나비는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나비의 날개에 어둠이 깃들면
나비는 내 마음 내륙에 앉아
차윤취형(車胤聚螢)의 눈을 밝힌다.
나의 내륙엔 어딘지 모를 곳으로
꿈틀꿈틀 기어가는 애벌레들과
새벽 발바닥의 이슬을 핥아먹는
번데기들의 행렬
내 눈빛이 차조처럼 단단해지고
내 언어가 비녀못으로 강심에 꽂힐 때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나비는 내 글에 차유칠을 하며
내 이매(夷昧)를 완성한다.
나비의 날개에 올라타 밤의 연안을 떠돌 때
꿈 안과 꿈 밖에, 거울 속과 거울 밖에,
먼젓번 생과 이번 생과 다음 생 사이에
연안이 세워지고
나비와 내륙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내 무덤은 나비의 날개 속에 있다.
-나팔떠들썩팔랑나비/나병춘-
나팔인가 하였더니 나비였다
노랗게 펴오르는 날갯짓 소리에
어디선가 나팔소리
봄비에 젖어드는 노랑 나팔소리
나비인가 했더니 회오리였다
돌개바람이었다
돌풍을 몰고오는 노랑나비 떼
나도 몰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빗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림자들이
한 마리 짐승처럼 울고 있었다
회오리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도 한 마리 노랑떠들썩팔랑나비였다
노랗게 노랗게 울려퍼지는
그 옛날 그집에서 들려오던
풍금 소리
그집 앞, 서성이던 발자국소리
연못으로 던져지던 돌멩이들의
텀벙 텀벙, 물결쳐가는 건반소리
호주머니에서 소리 없이 으깨지던 노랑 감귤이었다
아 그 옛날 휘어지던 아슴한 골목길이었다
수선화 흐드러지게 핀
연못가 돌계단이었다
몇 번인가 넘어졌다 일어서서 바라보던
알전구 불빛이었다
-나비/이용임-
죽음의 기억은 섬처럼 흘러다닌다
향기로운 무덤을 열고 나와 거울을 손에 든
죽은 황녀의 비명 소리처럼
젖지 않는 바다를 날아가는 피로*
혼곤한 잠이 남긴 야뇨의 흔적처럼
병의 내력은 돋을새김으로 읽힌다
미열이 퍼지는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속으로
파닥이며 표류하는 맥박
긴 목을 수그린 아름다움
길게 속눈썹을 내리깔듯 날개를 펼치면
하늘은 그늘이 되어 잠긴다
죽지 않는
봄 꽃 잎 색 무늬
라니, 저 불결한 얼룩이라니
* 김기림
-장미에 앉은 나비/엄재국-
붉은 호수에 책 한 권 빠뜨렸다
나는 저 책을 집어 들 수 없어
느리게 몸 벙그는 호수의 물결이 꼭 꿈속 같아
누가 내 꿈속에 책 한 권 넣어 준 것 같아
잠이 피워 올린 꽃, 그 꿈결에 날아든
나비를 가만히 펼치려 들면
바람도 없는데 나풀나풀 책장은 혼자서 읽혀진다
단 한 번의 꿈으로
날개 가득 출렁대는 수심을 밤새워 읽고
수 백 년이 흐른 아침
홀로 눈 비비면 장님이 된다 해도
호수 깊은 곳에 앉아 있는 꽃의 내용을 덮을 수 없어
어느 못된 꿈속을 다녀왔는지
펼치던 파문을 느리게 접고 있는
누가 저 책을 다시 읽을 것인가
먼지 펄펄 날리는 겉장을 나는
침 발라 넘길 수 없어
-산수유, 화엄나비떼/정윤천-
구례 산동 마을에 소방서도 없이
대책도 없이
산수유, 화엄나비떼
켜켜이 개켜 두었던 방 안의 것에서부터
벽장에 가둬놓았던 은밀함까지 들고 나와
흔들리며
흔들리며
널어대기 시작하는
널다가
널다가
지칠 만큼이나 널어버린
막무가내로 널고
죽을 듯이 널기도 하는
그러고 나면, 이 산중엔
누비고 감친 맵시의 누비이불의 바다
어쩌자고
저렇게도 화엄나비떼의 바다
-나비와 나방의 차이/송재학-
나방협회 문건의 요지는 내가 나방과 나비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나비만 너무 각광을 받았다고 비
난했다 나비의 보호는 나방의 파멸을 부를 것이고 결국 鱗翅類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경고장이다 나
도 한때 야행성의 나방을 주목해왔다 야행성이란 존재의 언어이다 나방과 나비 사이에 적대적인 시
선 말고도 죄의식, 질투, 근친이라는 모자이크 처리된 말들이 있다 나방은 무모하고 나비는 아름다
운 걸까 하지만 나방의 모노크롬은 내 취향이기에 그 부분만 답장을 보냈다
등불 주위를 맴도는 나방의 주인은 바로 등불의 주인, 나비에 대한 나방의 적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은줄표범나비가 등 쪽에서 날개를 수직으로 세워 합치는 매혹은 답장에 적지 않았다 의문은
있다 나방이 녹음 소리 내면서 나비였을까 돌연변이 나비의 야행성 때문에 나방이었을까 내 불온한
장자꿈이 도착했을 때 분가루 떨구는 날개 소리 들었다 나비 떼 솟아나오기도 하고 나방 무리들 한
움큼 머리칼처럼 빠져 나오기도 하는 나비꿈
-흰 나비 떼/송종규-
소금 꽃 같은 흰나비들이 파밭에 앉아 있다
하늘은 온통 난장판,
흰나비들에게 어깨를 빌려준 두 평 반 파밭이
튀밥처럼 가벼워진다
불청객처럼 들어와 앉은 쇠비름 풀 하나의 그림자도 흘리지 않으려고
햇살은 두 손을 받쳐 들고 앉아 있다
쇠비름 풀 맛의 비리고 물컹하던 기억처럼
사람의 한 생애 또한 비릿한 맛,
머리가 허연 노인은 꽃잎과 고요 속으로 숨고
세상의 가장 후미진 곳에 호미 한 자루가 코를 박고 엎드려있다
햇빛과 바람과 흰나비들이 쏘아올린 들숨으로
세상은 찰랑거린다, 자욱해진다,
소금 꽃 같은 흰나비들이 내 방에 앉아 있다
-나비/홍문숙-
어느 허공을 허물면서 온 것일까
가까운 곳의 잎들이 꿈을 꾸기 시작하고
나비의 행방이 연둣빛으로 변하는 이 알 수 없는 느낌
오래 전 사람 하나가
접혀 있던 몸 안으로부터 한 순간 모로 돌아눕고
나는 정지된다
어제 읽은 서책의 페이지가 날개처럼 열릴 때
그래, 길이란 나비로부터
또 다른 몸 안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유배 같은 것
세상의 모든 하루가 금지된 행방이기 때문이고
저뭄이 서녘 하늘을 물들이는 서러움 때문이다
나비가 날아온다
내 폐허의 고요를 깨우며
어느 나른한 오후 나비 한 마리 너울너울 건너왔고
나는 서둘러 오랫동안 밀쳐놓았던 장자(莊子)를 꺼내어
잠언의 날들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나비/고재종-
1
낳자마자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는 삶이기에
꽃빛 꽃빛 도화꽃빛
저토록 애절한가
먼 데서 너는 오지만 이내 꽃은 꿈속일 뿐
2
저 도화나무는 불끈불끈 땅도 잘 붙드는데
나는 되레 무슨 마음을 팔랑이며
너 날아간 자취도 없이 날아간 데를 우두망찰한다
나는 여기 있거나
왜 나는 여기 없는가
-겨울 나비/심은섭-
오후, 빙점을 지난 수은주 발가락이 발갛다
회색 하늘의 양수가 터진다
흰 옷을 입은 천사들이 울컥 쏟아져 나온다
천사들은 지상으로 몰려와 나비 떼가 된다
생의 암호를 풀 난수표 찾는 사람들의 속눈썹으로 걸어가
그들에게 물이 된다
물이 된 나비들은 천상으로 가려고
2호선 순환 전철을 타지만
정류장에서 서성이던 몇몇은 손금을 보며
낯선 시외버스를 가볍게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하얀 내 방에는 하얀 나비 한 마리 들어오지 않는다
혼란 속에 혼란이 있고
하얀 내 방 유리창이
유리벽을 닮아가고 내가 나비를 닮아 간 뒤
지난 봄 떠났던 나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갈증 속에 갈증이 있고
밤눈이 어두운 날개가 있어도 날아야 했던
나비들, 어쩌면
영혼이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와 함께 물방울이 되고 있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