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자 시인>
<<김윤자 시인의 양력>
* 1953년 충남보령 출생.
* 공주교육대학교 졸업,.
* 성균관대학교 시창작과정 수료.
* 조선문학 신인상 시당선으로 시인등단.
* 시집 : 『별 하나 꽃불 피우다』, 『푸른 새벽 서정』, 『헤밍웨이의 그 바다』, 『블레드성 펜의 불꽃』, 『마드리드 태양의 문』,
『인레 호수의 포용』, 『세렝게티 누떼의 질주』, 『알래스카 빙하 소야곡』
* 황희 문학상 수상
<<김윤자 시인의 시>
채석강/김윤자
어느 선비가
서해안 끝자락 변산반도까지 와서
학문을 닦았단 말인가
들고 가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책들을
격포항 닭이봉 해변 언덕에
수북이 쌓아놓고 떠나갔음에
해풍과 세월이 켜켜이 다져놓은
초자연의 걸작품 앞에서
혹자는 시루떡을 쌓아올린 떡장바위라 부르고
혹자는 책장을 쌓아올린 책장바위라 부르고
절벽을 타고 흐르는 칼빛 바위림
집시의 날개로 솟아오르는 분무
당나라 이태백이 빠져죽은 강과 같아
채석강이라 부른다는데
달빛을 먹고 자란 뽀얀 속살이
생명의 빛으로 바다의 혼을 흡입하고 있다.
찔레꽃/김윤자
겨울강을 건너온
어머니
파르르 시린 입술로
고뇌의 가시덤불
보듬어 안고
버선발 질긴 목심으로
피워내는
하얀 모시 꽃등
그 빛으로
강산을 밝아오고
조국은 여물어 간다.
그대/김윤자
그대는 맑은 하늘입니다.
이십년이 넘도록 함께 살면서
내게 보인 것은
늘 맑고 잔잔한 하늘이었습니다.
나는 소나기
툭하면 먹구름장 몰고와 퍼부어대는 장대비
피할 사이도 없이, 비에 젖어 떠는
그대의 모습 아랑곳없이.
그 때마다 하늘은 저만치서
있는듯 없는듯 가리워 있다가
곰삭아진 나의 빗물
후줄근히 뿌리고 나면
무지개 꽃 피워 곱게
나의 몸을 물들였습니다.
이제서야 나는
그대, 하늘이 그토록 넓었던 것을
찬연한 청빛이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But이 아니라 And로 곧은 나무/김윤자
내 몸엔 마디가 없습니다.
But이 아니라 And로만 자랐음입니다.
바람님, 죄송합니다.
시리도록 등을 흔들어도
내 스스로 휘어져 화살이 될지언정
바람님의 입김으로 굽어질 순 없습니다.
천둥번개님, 죄송합니다.
따갑도록 머리를 흔들어도
내 스스로 쪼개져 촉살이 될지언정
천둥번개님의 호령으로 부숴질 순 없습니다.
곁가지 한번 뻗어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뜨거운 불혓바닥에 데일까
내민 손 들이밀고
And로, And로 곧은 뿌리내린
외나무다리를 달려왔습니다.
*싸일러스·마아너의 오두막살이
베틀에 십오년을 앉힌다해도
내가 짜내는 무늬는
But이 아니라 And로 곧은
백혈무사의 날선 검입니다.
바람은 가끔씩 But으로 몰아치지만
빛을 향한 나의 문은
언제나 And로 열려있어
화산의 불기둥이 회오리쳐도 타지 않을
파란 자존이 꼿꼿이 솟고 있습니다
삼월의 눈꽃/김윤자
잔치는 다 끝났는데
뒤늦게 오신 손님
드릴 것 없는 애달픈 밤
화롯불도 시들고
따슨 아랫목도 없고
이미 닫아버린
계절의 문 앞에서
조금 서성이다 가시려니 했는데
하얀 고독을
밤 새워 물고 서서
빈 들녘을 밝히시는
삼월의 눈꽃 손님
천상에 고인
백년의 그리움 안고 내려와
한 줌 햇살에 몸을 태우는 아픔으로
하루를 머물지라도
눈부신 행복을 노래하는
애련의 선녀
유리 언덕/김윤자
푸른 날개짓으로
새벽을 가르고 차 오르는 새에게
흰 함성으로 달려오는 유리 언덕
거친 숨결로
파득이는 깃 울음, 하늘이 붉다.
한 차원 끌어올린 영역 공중에서
층층이 쌓인 유리벽을 넘으며
고독한 인내로 가슴을 키우는 작은 새야
날아라, 날아라
성숙한 길을 찾을 때까지
양 날개가 여물 때까지.
마른 사막 물 한모금 없는
빈 길도 넘었는데
시든 땅에 무지개 꽃도 피웠는데
움켜쥔 두려움은 투명한 자유 속에 묻고
더 높은 비상을 꿈꾸어라.
도타워진 발바닥에 용기가 솟을 때 쯤
점점 낮아지는 유리 언덕은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동녘 샛별로 떠오르겠지.
벚꽃, 바람부는 날의 고독/김윤자
연분홍 꽃등 알알이 불 켜들고
그렇게 봄을 밝히셨거든
가시는 걸음은 고요해야지요.
바람이 꽃잎을 휘몰아 간다고
목숨이 다 한 것은 아니지요.
꽃 진 자리 아물고 나면
작은 날개 돋아날테고
푸른 기도로 솟아 오르면
열린 하늘, 비원의 숲은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깨알같은 글씨로 쌓아올린
탑길을 따라가다 보면
해거름 널브러진 슬픈 길목에서도
꿈꾸어 노래하시던 청산을 만나실테고
겁없이 불어오던 비탈 바람 잠재울
솔수펑이는 있겠지요.
여기까지만 견디시면 됩니다.
어머니
섬은 바다를 품는다/김윤자
섬
작고 갇힌 영토라 여기지만, 사실은 태고의 전설같은 밑둥이
바다 밑에 가려져 있어 내면의 세계는 무한대 열린 터다.
해면 위로 드러난 몸을 멀리서 보면, 가련한 모습일지라도 가
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라. 절벽 비탈진 등짝에 제 살점 깎아
피워낸 해송(海松)을
갯바람에도, 갈매기의 넘나듦에도 동요치 않고 함묵으로 자신
의 영역을 매몰차게 다스린다. 멀리 보이는 휘황한 뭍은 그에
게는 지구의 그림자일 뿐이다. 결코 동경의 대상이 아닌. 그
보다는 밤하늘을 칼날같이 지키는 초승달을 사모하며 밤마다
광활한 우주와 상면하여 쪽빛 꿈밭을 일군다.
바다
깊은 해심으로 바위처럼 묵중해 보이지만 얕은 해풍에도 요
동친다. 수시로 돌변하는 몸을 꼭 묶어 섬에 매어두려해도 자
신도 모르게 풀어지는 몸은 늘 뭍으로 달려간다. 뭍의 세계에
홀린 듯. 급한 제 성미에 못이겨 허연 거품을 꾸역꾸역 토해
내며. 그 풍랑에 해어(海魚)까지 중심을 잃고 쓸려 다닌다.
사해(四海)가 섞이어 유동함에 낮에는 색깔이 없다가도 밤이
면 어둠을 틈 타 사나운 본성이 이빨을 드러내고 쏴쏴 운다.
뿌리 깊은 성품을 키우려 먼 바다로 미끄러지듯 질주해 보
지만 더 큰 몸집으로 밀려오는 먼 나라 파도의 몸부림에 꿈은
늘 무산된다.
섬과 바다
섬은 침묵으로 바다를 품는다. 뭍에서 외면 당하여 쫓겨오는,
해일에 헐떡이는 바다에게 섬은 고향같은 존재다. 성난 파도
가 옆구리를 허물어도 괴팍한 바다를 늘상 다독인다. 허물을
감싸 안는다.
섬은 넓은 치마폭으로 해어를 품는다. 거친 물살에 시달려 기
진한, 심장이 작아 떠는 치어(稚魚)에게 섬은 어머니 같은 존
재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감을 알면서도 비스러진 고기들을
늘상 보듬는다. 가슴을 키워준다.
섬은 안다. 혼자임을. 궁극적으로는.
정작 자신은 마음 속의 또 하나 외로운 섬에 갇혀 꿈꾸듯 살아
가야 함을.
한라산 백록담/ 김윤자
먼발치에서 당신을 보고 간 한 여인이
다시 그리움 안고 와
하루의 역사를 온전히 쌓고 갑니다.
영실코스 가파른 절벽길을 숨이 멎도록 걸어오르며
오백나한의 기암 속에 망자로 선다해도
나는 진정 행복하여서
당신 그 넓은 품에 뒹굴어도 보고
병풍바위 지나, 구상나무 숲길 지나
선작지왓 고산의 너른 평원을 가로지르며
오월의 꽃불로 일어서는 철쭉꽃 축제의 물결에
지친 육신이 일어서고
노루샘 약수로, 혼미한 영혼이 일어서고
윗세오름봉에 거룩한 당신이 보일 때
발보다 눈이 앞서 달려가
당신을 사랑한 낮달이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하늘에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걸고 왔습니다.
어리목코스 하산 길에서
당신의 따슨 숨결로 키운 노루도 만나고
제주 바다 위, 순결한 해무와
무한한 자유로 용솟음치는 운해의 설경도 만나고
해가 지기 전 어서 가라고
숨가쁜 음계로 깔아놓은 나무 계단을
잘박잘박 걸어 내려오며
당신만큼 용감해지리라 다짐하였습니다.
포로 수용소-거제도 기행/김윤자
이념의 벽이
이다지 두터웠던가
나는 지금, 철갑차에 실려
다시 못 돌아올 다리를 건너고 있다.
여긴 포로 수용소.
6.25 동란이 낳은 눈물의 바다.
좌익과 우익이 패를 나눠
서로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간 자국들
예까지 밀려온 수만명의 북한 동포가
그래도 살아보겠노라고
손끝이 닳도록 제련하는 저 모습
어디까지 진실로 믿어야 할까
폭동이 일어 불길이 번지는 막사에는
민족 자존의 혼이 흐르는데
서러워라
아직도 총뿌리 거두지 못한
이념의 벽 앞에
통곡으로 거제 골을 울리는
동포의 푸른 넋.
보성 녹차밭 향기/김윤자
여름 향기를 만나러 왔는데
첫사랑 여인을 찾아
녹차밭과 상록수 길을 거닐던
드라마 속의 한 남자
사랑의 향기를 만나러 왔는데
사람의 사랑보다 더 진한
차밭의 땀방울과
푸른 향기를 만난다.
이십 오년을 자식 기르듯
정성을 쏟은 재일교포의 손끝에서
해발 삼백 오십 미터 산기슭
아무도 돌보지 않던 볼모지 땅이
중국 용정차밭 못지 않은 고고함으로
풍요가 넘실대고 있다.
산중 대한 다업 주식회사
전남 보성 녹차밭
희망은 빈터에서도 피어오른다고
하늘 향기를 읊조리고 있다.
곡우에 따는 우전차와 세작 종작 대작
천상의 옥향을 물들이고 있다.
겨울산/김윤자
그렇게 등이 휘신 줄 몰랐습니다.
거칠어진 잔등에
그렇게 골이 깊게 패이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봄 언덕 오르내리듯 마냥 좋아라
삼백 예순 날 질겅질겅
밟고 다닌 것 죄스럽습니다.
따스한 피가 흐르던 시절에
품안에 파고들던 산꿩도 산다람쥐도
제 둥지 틀어 떠나 가버린 동지섣달
서릿발같이 서걱이는 한숨만 스미는데
허연 달빛마저 은가마 타고 내려와
성긴 머리에 귀빈인 양
상석에 자리하시오면
초로의 설운 가슴, 어이하시란 말입니까.
가을이 으스러진 자리
다 찢긴 베적삼, 잠방이 구겨 깔으시고
등걸잠으로 누우시니
낙조에 걸린 산그늘이
허리를 휘휘 감아
쓰러져 굳어진 장승인 듯 보입니다.
매화 꽃송이 같은 노래 깔아드리면 일어나실까
언 입 옹알이며 종일 속삭여드려도
복숭아 속살 같은 옛 얘기 펼쳐드리면 웃으실까
언 손 내저으며 종일 재롱을 떨어도
쩍쩍 갈라진 살점 사이로 아픔만 토해내실 뿐
바위보다 무거운 표정 그대로이십니다.
초원의 빛, 테스에게/김윤자
백합의 꽃술로 축제의 날 그를 만난 건
가슴 흔들어 놓은 그 사람을 만난 건
승화된 슬픔이라 여기자.
가문의 혈통에 눈 먼 아버지가
끌려가는 짐승으로 마차에 실려 보낼 때도
가난이 죄였겠지.
거짓 혈통임을 알았을 때도
사촌 오라비, 알렉이 부랑아란 것도
아침 찬바람이라 여기자.
참을 수 없는 건 달빛 숲에서 꽃성이 무너진 것
한번의 박힌 칼날이 생의 절벽이 된 것
당하여 눈물로 살아간 너보다
읽어 내리는 내 눈이 더 서러워라.
목사의 아들 에인젤, 백합의 향기로 다가온
그 최초의 젠틀맨은 널 사랑한다 했지
네 몸 속 검은 그림자를 이끌어 내기 전까지는.
잔인한 입술 침묵할 것을
죄의 불꽃이 일렁여도 안으로 삭일 것을
물망초 소녀 테스야, 형장의 이슬로 잠든 언덕에
참회의 눈물로 무릎꿇은 그를 이제는 용서하길.
초원의 빛으로, 초원의 사랑으로.
울릉도행 썬플라워호/김윤자
바다에서 바람과 파도만 먹고 자란 네가
꽃처럼, 사람처럼 아름답구나.
하얀 동체 너른 품속에
수백 명의 사람과 수십 대의 차를 싣고
포항과 울릉도를 오가는 바다의 어머니
높은 파고에도 넘어지지 않고
뜨거운 함성으로 태평양 바다를 가른다.
비행기에 탑승하듯
고정된 철계단을 걸어올라 승선할 때
너의 깊은 속심을 알았지만
그 높은 곳이 겨우 일층 선실
머리 위에 삼층 객실을 이고, 짠물에 뿌리를 묻고
내달리는 눈물겨운 질주
너는 거룩한 바다의 이방인
단체여객C실, 배 후미 창문을 따라오는
하얀 물보라 기둥을 보며 황홀하다고 느끼는 가슴과
멀미를 다독이려 무아의 적멸로
사각의 선실 바닥에 널브러져 누운 두뇌
이 모든 것은 공포의 무한지대로부터 해방시키는
너에게서 얻은 바다의 자유, 바다의 평화였다.
황금빛 요한 스트라우스-오스트리아 문학기행/김윤자
도나우 강의 지류가
정문에서부터 흐르는 녹색지대
한때는 왕실 전용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외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비엔나 시립 공원에
바이올린을 어깨와 목 사이에 올리고
푸른 다뉴브 강의 물결, 그 잔잔한 선율을
낭만의 손놀림으로 연주하는
황금빛 불멸의 영혼
시간을 돌리는 꽃시계는, 분명
정방향으로 돌아가는데
그는 여전히 정지된 시간의 품속에서
생시와 동일한 평화로운 모습
사람은 가고 없는데
예술은 살아서 타오르는 맥으로
역사를 이어가고
아직도 세계인의 가슴에는 다뉴브 강의 왈츠가
쉼없이 흐르고 있으니
황금빛 요한 스트라우스의 심오한 선율 하나가
지구를 예쁜 끈으로 동그랗게 묶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