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금기풍 서예가 추모비 건립
남천 안후영
2021년 8월경 청주시립 미술관 정삼수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2016년 옥천향토문화( 옥천향토사연구회 발행) 20집에 근현대사 인물로 금기풍 선생님을 조명하는 글을 올렸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니 필자의 이름이 나와서 옥천군청에 문의 연결이 되어 통화를 하였다.
2022년 3월경 시립미술관 5주년 기념, 작고 서예 예술인 우정 금기풍, 서봉 김사달, 우송 이상복 유묵전을 하는데 운곡 김동연 회장의 자문으로 이루어졌다. 금기풍 서예가의 작품을 수집하는 데 협조 요청을 받았다. 서울에 금 선생님 가족과 옥천 대전에 사모님 친정 몇 분에게 작품이 있는 걸로 확인했으나 10여 점에 불과했습니다. 인터넷에서 5점을 구입하여 15점을 확보했다.
2021년 12월 20일 금기풍 선생님 서예 제자인 현석 조향원 선생의 전화를 받았고, 2022년 1월 5일 옥천 산소 옆 금 씨 문중 재실에 금 선생님 작품이 몇 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청주에서 김동연 회장과 저와 셋이서 만나서 각신리 뒷산 추모재에서 현판, 주련, 봉화금씨 중시조 비문 등 8점을 확보하고 기뻐했다. 재실 옆 금 선생님 산소가 봉분이 허물어져 가슴이 짠한 분이 금 선생님께 영향을 많이 받은 김동연 회장이 산소에 추모비와 정화작업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봉화금씨 금효길 회장은 종중 이사회를 열어서 상석, 둘레석, 망부석 등 600만 원을 들여서 정화작업을 하였다.
2022년 3월에 충북미협 서예 분과 위원회 9명이 모여서 금기풍 선생 추모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개최하여 위원장에 김동연 서예가를 부위원장에 필자를 선임하여 추진키로 하였다.
비문 내용은 남천 안후영 제자가 하고, 글씨는 운곡 김동연 회장이 쓰고 조성옥 명인이 새기기로 하였다.
규모는 1,300 * 1,000 * 350 좌대 350 mm
화강석에 오석을 박음 형태로 하였고, 총 경비는 800만 원 예상.
서예가 우정 금기풍선생 추모비 제막식을 2022년 5월 15일 오후 2시
옥천읍 옥각2길 봉화금씨 사당(재실) 옆 산소에서 제막식을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유제와 필자가 건립 경과보고와 약력 소개 비문 낭독을, 김동연 추진위원장의 식사, 시립 청주미술관장의 축사와 금종호 유족인사 기념식수 등을 하였다.
충북에서 1세대 서예인 추모비 건립에 후학 서예인 57명이 성금으로 이루어진 것은 최초의 행사일 것이다.
첫 번부터 기획하였고 추모비를 세우기까지 수고 많은 김동연 회장과 봉화금씨 종친회원 여러분과 금효길 회장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57명의 건립기금을 흔쾌히 내어주신 57명의 서예인과 충청북도지사에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금 선생님 작품이 적어서 세분이 아닌 두 분의 작품전시회를 3월 24부터 6월 5일까지, 청주시립 미술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 금기풍 서예가 약력
1925년 3월 28일 충북 영동에서 출생
유년기에 옥천읍 옥각리 거주
죽향초, 대전중고, 국학대 사학과 졸업
옥천상업고등학교 역사과 교사
서울 신림여중 교장으로 정년퇴임
동아국제미술전 문공부장관상(1968)
국전추천작가, 국립연대미술관 초대작가
충청북도 서예전람회 초대작가 심사위원
한국서가협회 공동회장
국민훈장 목련장, 충청북도문화상
우정 금기풍 선생님 작품을 찾아서
남천 안후영
청주시립 미술관 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금기풍 서예가를 아시냐는 전화였다. 어떤 연유로 나에게 전화를 했냐고 했더니만 인터넷 검색에서 금기풍을 쳤더니만 내 이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옥천군청에 전화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했다.
2016년도 옥천향토사연구회가 매년 발행하는 연구지 옥천향토문화 20집에 근현대 인물사에 우정 금기풍 서예가의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내용인즉 시립 청주미술관 개관기념 특별전을 개최하는데 금기풍 서예가와 김사달 서예가와 이상복 서예가 세 분의 작품을 전시하는데 많은 협조를 부탁하는 것이다. 두 분의 작품은 자손들이 많이 보관하고 있는데, 금기풍 서예가의 작품을 찾을 수가 없어서 애로가 많다는 것이다. 작가 선정은 청주에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김동연 서예가의 자문받아 전시회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금기풍 선생님은 옥천읍 옥각리에서 사셨으며 1958~1962 까지 옥천실업고등학교에서 역사과 교사를 하실 때 은사님이시다. 1963년에 서울 경일중하교로 전근 가셨다. 서울 삼선중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임 하셨다. 국전 서예부 특선, 대한민국 미술대전 추천작가, 국립 현대미술관 초대작가, 한국서예 100주년 전 출품,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한국서가협회 공동회장, 고문, 국전 23회 입선 특선, 등 서예협회 활동을 많이 했다. 선생님은 2008년 84세에 소천하셨다. 선생님은 성품이 온유하고 고고한 선비처럼 예술가의 품격이 높은 존경하는 어르신이라고 운곡 김동연 서예가와 현석 조향원 서예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금기풍 선생님 장녀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려고 여러 번 전화해도 통화가 어려웠다. 금 선생님 부인 곽소환 여사의 친정 사촌이 대전에 곽우희님과 곽경상님께 연락을 하여 6점을 확보했다. 인터넷 헬로마켓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작품 1점을 간신히 구입을 했다. 금 선생님 조카인 금종성님과 금효길님께 연락을 했더니만 몇 점을 확보하였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미술관 팀장으로부터 금기풍 서예가의 작품이 적어서 전시회를 할 수 없다는 통보가 왔다. 선생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쉬움이 크다. 청주에서 활동하는 김동연 서예가에게 작품 수가 적어도 그냥 특별전을 갖도록 부탁의 말씀을 전 했다.
일주일 후에 서울에 사는 현석 조향원 선생의 전화가 왔다. 금 선생님의 서예 제자이고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수학과 교사였다. 뒤 늦게서야 금 선생님 서예 유고전 소식을 듣고 아쉬움이 커서 인터넷을 통하여 3점을 구입하고, 서울 삼선중학교에 찾아가서 학교를 둘러보니 금선생님 작품 두 점을 행정실 벽에서 발견하고 좋아서 쾌재를 불렀다고 하였다.
2008년도 금 선생님 소천 후 2~3년 후에 서울 현석 조향원 서예가 외 몇 분이 선생님 산소를 찾았었는데, 근처에 금씨 재실이 있는 걸 기억하고 재실에도 작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1월 5일 옥천으로 내려오기로 약속했다. 청주에서 운곡 김동연 서예가도 오기로 했다. 산소도 참배하고 재실에 들어가 보니 주련 6점과 현판 1점을 발견하여 너무나 기뻤다. 재실 관리하는 금효길 종친회장을 따라 중시조 산소에 올라보니 비문 한점을 더 찾았다. 지금까지 어렵게 두 달간 25점을 확보했다.
청주 운곡 김동연 서예가는 고등학교 시절 금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서예가로 정진하는 계기가 되어,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 현석 조향원 서예가는 금 선생님 퇴임 후 학교에서 교원 몇 분과 자모 회원 몇 분이 방과 후 서예 교실에서 오랜 세월 동안 서예 공부를 받은 수 제자이다. 금 선생님을 존경하는 열정이 똘똘 뭉친 수제자이시다.
작품 전시회가 무산돼도 작품을 찾는 과정에서 좋은 분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시간이 기적처럼 찾아와서 기쁘고 감사하고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옥천 학림산방에서 보이차를 마시며 금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서울에서의 서예 활동과 청주에서 김동연 서예가의 초청으로 전시회를 한 옛 추억들을 나누면서 기쁨의 시간을 함께했다. 금 년 봄에는 금 선생님의 산소에 청주 김동연 서예가의 주선으로 근사한 비석을 세울 기대를 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서예가 우정 금기풍선생 추모비
우정 금기풍 서예가는 충북 영동에서 1925년 3월 28일 출생하였으나 옥천군 옥천읍 옥각리 마을로 이사 와서 어린 시절을 지냈다. 옥천죽향초등학교 대전중학교 국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에는 문교부 시행 고등학교 교원자격 검정고시 합격(서예)하였다. 1958년 옥천실업고등학교에서 사회과 교사로 학생들 교육에 전념하였다. 성품은 과묵하고 온화하여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교육자였다.
1963년 서울 경일중학교 삼선중학교 신림여자중학교에서 교감으로 승진하였고, 1988년 정년퇴임 후 학교에서 서예교실을 열어 후배 양성에 정진하였다. 1957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 특선을 23회를 하였다. 1981년 국전 서예부 특선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수 개의 작품이 예술의전당에 소장되었다. 1985년부터 1999년까지는 한국서예가협회전에 매년 출품하였고, 1988년에는 한국서예 100주년전(예술의전당)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는 청구묵림전에 열정을 쏟았고, 1988년 9월에는 88올림픽 서예전에는 초대작가로 출품하기도 하였다. 1993년에는 한국서예100인전에 초대작가로 출품하였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는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국제서화전에서 특급예술대사 및 서화예술명인 인증서를 받았다.
한국서가협회 공동회장과 고문을 역임하였다. 충청북도 문화상, 동아국제미술전 문공부장관상, 국민훈장 목련장, 충북미술대전 초대작가상 등을 수상하였다. 금선생님은 2008년 12월 11일 84세로 소천하였다.
가족은 부인 곽소환 여사(1928.7.26.~2018.10.16.)와 4남 3녀를 두었다.
2022년 5월 15일
서예가 우정 금기풍선생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