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크시도다
시편 116:1~14
오늘 저녁 읽은 시편은 지은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칼뱅 선생은 여러 가지 내용의 분석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이 쓴 시가 아닌가 하고 추측합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했는지 그것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여하튼 예닐곱 가지의 심각한 문제로부터 구원받은 놀라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시편을 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편의 기자가 누구이든 우리는 거기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편의 내용으로 보아 큰 환난을 만나 사람 편에서 생각하면 별로 희망이 없는 어려운 형편에서 그래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고, 문자 그대로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을 하고 감격한 가운데 이 시편을 쓴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 부분(1-5)은 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평생 기도할 것을 다짐한 것이고,
둘째 부분(6-11)은 이 성도가 그토록 어려운 환경에서 건짐 받은 사실을 말하면서,
셋째 부분(12-19)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의 평생 하나님께 서원 한 것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다함께 오늘 본문 1-2절을 읽으십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 하였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를 부르라”고 하신 말씀 따라서 그가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사실 이 시인의 고백이면서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그의 기도의 응답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도다”
이 시인은 환난 중에 겸손하면서도 진지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은혜롭게 받아들이셨고 그의 처지를 감찰하실 뿐더러 그에게 평안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려고 기다리시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진해서 하나님께 간구 할 때 응답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기도하는 입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어린애가 말을 잘해서 그 말에 감동되어 아버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어도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무엇을 소원하는지를 알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줄로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십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한나가 실로에 있는 장막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기는 하는데 소리가 나지 않아 옆에서 볼 때는 꼭 술취한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축복의 응답이었습니다.
그 기도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울려 퍼지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레미야 8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 우리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굽어살피시나이까?” 하는 말씀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은 더욱 하나님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마음 속에 차고 넘치는 사랑의 고백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편 1절에도 비슷한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 참 좋은 하나님 참 좋은 하나님
참 좋은 하나님 나의 하나님
2. 내 목자 하나님 내 목자 하나님
내 목자 하나님 나의 하나님
3. 참 되신 하나님 참 되신 하나님
참 되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4.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참 좋은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사실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인은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기도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가 됩니다.
제가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캐나다 토론토에 사시는 우리 교회 출신 집사님한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작년에 캐나다에 연합집회를 인도하시러 오셨다가 밤 집회가 끝나고 호텔로 가시는 길에 저희 집에 들러서 예배를 드려 주셨지요. 그때 저는 17만 5천불의 은행 부도를 내고 어떻게 할 수 없는 막연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목사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예배드리면서 시편 50편 14-15절 말씀을 읽으시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믿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유익한 기회로 만드실 것”이라고 하신 대로 목사님께서 떠나신 다음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떠나 신지 일 주일 후에 외국 사람이 30년 동안 경영하다가 경영난에 빠져서 처분하는 가게를 하나 맡게 되었는데 저희가 맡은 다음부터 그 가게가 어찌나 잘되는지요. 놀라울 정도로 잘됩니다.
그래서 1년 반만에 그 동안 졌던 빚도 거의 다 갚게 되었고 매일매일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사실을 피부로 체험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희 내외가 가게에 나오면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자기들끼리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애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그저 감사해요.”
저는 이 전화를 받고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릅니다. 그저 믿음의 식구들이 어디서나 믿음으로 살며 승리하는 것을 보면 그것 이상 기쁜게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기도의 맛을 알면, 응답의 체험이 있으면 안하고는 못 견디거든요. 그러므로 시편 기자처럼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내 생명의 마지막날까지 매일매일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의 호흡이 있는 동안 영혼의 호흡인 기도가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계십니다. 이사야 49장 15, 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본문 5절에 시인은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를 친절하게 대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며 구원해 주십니다.
이 시인의 경험을 보세요.
3절에 보면, 그는 커다란 환난과 고통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쳤다”고 했습니다. 육신으로 말하면 사망의 줄 이상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으며 음부의 고통, 말하자면 지옥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으로는 육신적으로나 심령면에서 그 이상의 고통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악의 상태에서도 시인은 신실하게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4절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입니까? 이와 같은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은 후에 너무 감격해서 이런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주님, 나는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주님, 내일 하루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고통이라도 받겠나이다.” 얼마나 의미 심장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영생 얻는 길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가면 이것은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환난 중에서 구원받은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보통 믿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을 알고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더욱 큰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 성 카타린은 주님께 기도하는 중에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난 당한 줄을 아느냐? 너는 나를 위하여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일생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헌신적으로 전염병 환자를 돌보고, 나병 환자를 치료해 주는 봉사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조금도 어렵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감당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내지 선교를 처음 시작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여러분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중국 내지에 선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우리의 필설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선교에 힘을 썼지만 전혀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선교 본부에서는 희망이 없어 보이니까 철수하라는 지시가 왔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불쌍한 심령들을 위해 나를 보내셨고 성경에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면서 계속 열심히 일했습니다. 여러 해가 되어도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교 본부에서는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까 몇 번 편지를 보낸 후 아예 선교비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그러나 테일러 선교사는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기도의 제목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이고, 다른 하나는 “에벤에셀(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모르나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고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이 장래에도 도와주시리라 믿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내지 선교에 성공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오늘 본문 7-8절을 읽어보십시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먼저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서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6절 하반절에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했는데 이 말은 깊은 불행 속에 빠졌을 때에 도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내하며 희망을 잃지 않게 도와주셨으며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다시 덤으로 살게 되었고,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주님으로부터 건짐 받고 날마다 성화 되는 자리에 나아가 장차 하나님 앞에서 영광 받을 것을 생각할 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눈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시며, 통곡하는 자의 베옷을 풀어 주시며, 너희에게 기쁨을 주실 때 저희의 눈을 눈물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그 세상에 임할 때까지는 완전히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빠지는 데서 건져 주셨고,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우리의 발이 거의 넘어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낮에도 밤에도 우리를 지키시며 실족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인간이 갈망하는 참된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명예에 있습니까? 지식에 있습니까? 권세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렇습니다. 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주님의 주시는 참된 평안이 여러분의 영혼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와 같은 영육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일까요? 감사와 헌신입니다.
9절 말씀을 읽어보십시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이 얼마나 신실하고 귀한 결단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 하는 다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다짐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감격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가운데 감격하여 그렇게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삶은 진정으로 새로운 삶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으로 본문 10절 이하에서 우리는 시인의 경건한 결의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시인의 실상을 봅니다. 10절에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지만 그를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함과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하였습니다. 같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그의 목동의 지팡이를 왕의 홀로 변하게 하여 그에게 주신 확증을 특별히 믿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념을 가지고 견뎌냈습니다.
비록 사울이 자기에게 분노하고 그 때문에 크게 고난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그의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영광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하늘나라를 값 주고 사신 분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해서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그리고, 두려워한 시인의 모습을 봅니다. “내가 큰 고난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이 말은 “내가 놀랐을 때에 내가 겁이 나서 소스라쳤을 때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이 나를 추적할 때에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사실 다윗과 관계를 가졌던 모든 사람들, 사울이나 그의 신하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자기편에 서리라고 기대했던 친구들도 궁정에서 그가 수치를 당할 때 그를 버리고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이와 같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도의 신앙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가 분명히 믿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 시인은 두려움이 생기고 그 믿음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크고 쓰라린 고뇌에 처했을 때, 더구나 그것이 오래 걸릴 때, 우리는 지치고 낙담하여 좋지 못한 결과에 처하게 될 때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볼 때 멸시와 저주의 눈으로 대하거나 무자비하게 되지 말고 오히려 “내가 저와 같은 처지에 이르렀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더구나 사람은 거짓되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 24-25절을 보세요.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끝으로 이 시인의 감사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하나님은 은혜롭게 환난에서 이 시인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그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겠나이다.” “내게 주시는 어떤 잔이라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고백과 열의입니다.
그리고 “내가 감사의 희생을 주께 드리겠나이다”
마음이 전적으로 감사한 사람들은 감사제로 저희의 감사한 심정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우리 모두에게 이 시인과 같은 체험과 감격, 그리고 헌신의 다짐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시 116편
내 서원을 여호와께 갚겠습니다.
1. 시 116편은 어떤 시인가?
* 단편적인 성격의 시/ 이 시에는 표제도 없다. 그리고 이 시에는 운율로 평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 시에는 탄식, 간구, 신뢰와 감사가 어떤 일정한 순서 없이 나타난다. 또한 여러 곳에서 번역하기 힘든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단어나 문장의 어려움과 내용의 논리적 순서의 어려움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 감사시/ 이 시는 한 마디로 개인적인 감사시라 할 수 있다. 우선 시인은 여호와의 도우심을 이미 체험했고, 이제 그에게 여러 곳에서 감사를 드리고 있다.(1, 2, 12-14, 17-19) 그리고 이 시는 1-15절은 8절만 제외하고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른다. 그리고 16절은 2인칭, 17-18절은 2인칭과 3인칭, 마지막으로 19절은 3인칭이 사용된다. 이런 하나님의 인칭 변화는 감사시의 한 특징이다.
이 감사시는 큰 축제 중에 회중 앞에서 불려졌다.(14, 17) 예루살렘 성전의 앞마당에 감사제를 드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고(19), 시인은 환난 때 약속한 찬양의 약속을 이제 실천한다.(14, 18) 이 시에서 시인이 어떤 환난에 처해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본문에서 몇 가지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기꾼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는 것(11)과 3절과 15절에서 시인이 죽음에 가까이 갔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2. 시 116의 내용은 무엇인가?
1) 짜임새
이 시는 크게 두 연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1-9절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극심한 고통 중에 부르짖은 시인의 간구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10-19절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에 대한 보답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행한 서원을 굳게 지킬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첫째 연: 체험적인 고백(1-9)
-. 1-2: 감사의 고백
-. 3-6: 과거에 드린 간구에 대한 회상
-. 7-9: 구원에 대한 감사의 고백
둘째 연: 감사와 서원의 다짐(10-19)
-. 10-11: 과거의 회상
-. 12-14: 찬양의 약속 이행
-. 15-16: 시인이 얻은 교훈
-. 17-19: 찬양의 약속 이행
2) 풀이
# 첫째 연/ (1-9)
-. 감사의 고백(1-2)
*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큰 환난과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직접 자기의 입으로 그리고 자기의 음성으로 간구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가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했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체험했던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체험이 필요하다. 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되어진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구체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다. 그 체험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제 자신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사랑의 고백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사랑 고백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깨닫고 드리는 사랑고백이어야 한다.
-. 간구에 대한 회상(3-6)
* 사망의 줄, 스올의 고통/ 시인은 자신이 당한 극한 어려움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그 하나가 사망의 줄이다. 사망이 줄로 사람을 꽁꽁 묶어 꼼짝 못하게 하는 듯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제 꼼짝 없이 죽었구나!”하는 상황까지 직면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스올의 고통은 바로 음부의 고통을 말한다. 죽음 이후 저 불신자들이 던져지는 음부에서나 맛볼 것 같은 고통을 당시 경험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 환난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던가를 보여준다.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이와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고통 중에서 체험할 수 있는 남다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임에 틀림이 없다.
*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시인은 이런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이다.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 속에서도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구원 받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 것이다.
오늘도 성도들은 기도의 줄을 놓지 말아야 한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도의 줄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인은 자신의 간구를 들으셔서 자신을 그토록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음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성도들은 분명히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 구원에 대한 감사의 고백(7-9)
*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후대하시는 분이시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탕자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후대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 아버지처럼 후대하신다는 것이다. 비록 죄인이지만 그 아들을 보내셔서 그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정도로 후대해 주시는 분이시다. 당신에게 그토록 모질게 했지만 그래도 후대해 주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성도들은 자신을 후대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 내가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이제 시인은 감사한 마음을 삶으로 표현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겠다는 다짐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다짐이다.
오늘도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 둘째 연/ (10-19)
-. 과거의 회상(10-11)
* 나는 믿었도다/ 시인은 깊은 환난 속에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다 거짓말쟁이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들 저들이 등을 돌리더란 것이다.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들이 다 떠나더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믿을 것이 못되더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믿을 분은 하나님 뿐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도 성도들은 오직 믿을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할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만 의지해야 할 것이다.
-. 찬양 이행의 약속(12-14)
*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인은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주님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으니 이제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께 보답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성도들에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의 보답으로 서원을 갚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환난 중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드렸던 것 같다. “구원해 주시면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다. 이제 구원 받았으니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이다.
오늘 성도들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다급해서 기도하며 드린 서원을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잊어버리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
-. 시인이 얻은 교훈(15-16)
*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치 없이 허망하게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 없는 죽음 가운데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신 다는 것이다.
오늘 성도들도 이런 깨달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허망하게 죽거나 고통 가운데 던져 넣지 않으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시인은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면서 자신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자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더란 말이다.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일꾼이더라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고 자신의 사명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늘 성도들도 이렇게 정체성을 깨닫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명도 깨닫고 살아야 한다.
-. 찬양의 약속의 이행(17-19)
*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시인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바로 “감사제”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감사제는 화목제의 일종으로 희생 제물 가운데 하나님께 태워드릴 기름과 제사장의 몫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사에 참석한 모든 회중이 제물을 나누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며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한 것이다.
* 성전 뜰에서 지키리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성전 뜰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호와께서 임재해 계신 성전 중심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성도들에게도 성전 중심의 삶에 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