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디자인한 혁명가 정도전 유배지, 나주 회진 출처 : ☞ : 전남일보 2020-07-28 By 편집에디터... 에서 옮겨 편집... ☜ 원문보러 바로가기 클릭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과 함께 유학 공부 1375년 원나라 사신 영접 거부, 3년간 나주 유배 1392년 이성계 도와 조선 개국… 한양 천도 주도 유배지에서 구상한 ‘민본주의’ 토대위에 조선 설계 왕세자 책봉에 반기를 든 이방원 세력 칼에 숨져 ↑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 삼봉 정도전이 나주 회진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머문 초사 ↑ 삼봉 정도전 초상화 ↑ 도올 김용옥이 쓴 신소재동기 ↑ 초사앞에 건립된 소재동비 ↑ 유배지 표지판
정도전이 혼신의 힘을 다해 단행한 것은 천도였다. 1394년(태조3), 경복궁을 완성하고 한양으로 천도한다. 정도전은 궁궐 이름인 경복궁은 물론, 정전인 근정전,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과 숭례문·흥인문 등 서울의 모든 궁궐과 문의 이름도 손수 짓는다. 오늘 경복궁 궁궐 이름 속에 그가 남아 있는 이유다.
그 핵심 인물이 후일 태종이 된 방원이다. 사병을 대동한 방원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송현(경복궁 동쪽 고개, 오늘 중학동)으로 쳐 들어가 정도전의 목을 벤다. 조선을 디자인한 혁명가 정도전이 방원의 칼날에 스러진 것이다.
그러나 나주에는 조선 건국을 디자인했던 삼봉 정도전이 3년간(1375~1377) 머무르면서 '민본사상'을 정립한 유배지가 있다.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 소재동, 지금 도로명 주소로는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길 3-93번이 그곳이다. 왜 삼봉 정도전이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 소재동에 유배오게 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해야 될 것 같다.
반원정책을 펼친 공민왕이 살해된 후 우왕 1년(1375)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고려에 오게 된다. 이인임 등 친원파는 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려 했지만, 정도전·권근 등은 격렬히 반대한다. 『고려사』의 다음 기록을 들여다보자.
우왕(禑王) 초 북원(北元)의 사신이 오자 이인임과 지윤이 그들을 맞아들이려 하자, 정도전이 김구용·이숭인·권근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인임과 경복흥이 그 글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도전에게 원 사신을 맞이하라고 명령하자, 정도전은 경복흥의 집을 찾아가서 이르기를, "제가 마땅히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明)에 묶어 보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또한 태후(太后, 명덕태후)에게도 사신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자 경복흥이 더욱 노하여 정도전을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당시 34세 정도전이 보여준 결기가 놀랐다. "만약 나를 영접사로 보내면 원 사신의 목을 베든지, 사로잡아 명에 보내겠다."라고 대들었던 것이다.
소재동기에는 1375년 당시의 소재동의 모습과 남도의 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동리는 바로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인 거평(居平) 땅으로, 소재사(消災寺)란 절이 있어 동리 이름을 삼은 것이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 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또 술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하여 함께 마시었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이란 자가 있어 약간의 글자를 알았고, 그 아우 천(天)도 담소를 잘했는데 모두가 술을 잘 마셨으며, 형제가 한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이란 자가 있어 늙어 중이 되어서 안심이라 불렀는데, 코가 높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행동이 괴이했으며, 모든 사투리·속담·여항(閭巷)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 김천부·조송이란 자가 있는데, 그들도 술을 마시는 것이 김성길·황연과 비슷했다. 날마다 나를 찾아와 놀고, 매철마다 토산물을 얻게 되면 반드시 술과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한껏 즐기고서 돌아갔다. 다만 내가 찬찬하지 못하고 너무 고지식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아 귀양살이로 멀리 와 있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 대접하기를 이렇듯 두텁게 하니 ……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이 되므로 그 시말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하는 것이다."
마을 규모는 대 여섯 가구였고, 딸린 식구까지 합해도 서른 정도였다. 소재동기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은 황연과 김성길·김천 형제, 김천부, 조송과 서안길인데, 다 농부였고 서안길만 마을 옆 소재사 승려였다. 마을 사람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철 따라 나오는 토산물을 채취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소재동 주민들은 유배 온 정도전에게 온갖 호의를 베푼다. 술자리를 같이하고, 철 따라 음식을 제공해주며, 초가집을 지을 때 아낌없이 일손을 보태준다. 오늘 남도인들의 인심과 똑같다. 정도전은 소재동 농민들이 아낌없이 내주는 인심에 큰 감동을 받았고, 소재동기를 써 남기게 된다. 그리고 유배지 남도땅 나주에서 만난 농부인 '민'에 대한 깨달음은 이후 민본사상의 근간이 된다.
↑ 백동마을 입구 표지판
나주시청을 지나 무안 가는 길로 10여 분 달리면 오른쪽에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라는 간판이 보인다. 오른쪽 길로 꺾어 곧장 가면 댐이 나오는데, 그 댐 밑 마을이 백동마을이다. 백동마을 앞 정자 주변에 일렬로 늘어선 멋진 노송을 따라 왼쪽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 산비탈에 꽤 깔끔하게 서 있는 초가가 나온다. 정도전이 머문 초사를 복원한 초가다.
2005년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쓴 「신소재동기」다. 정도전 유배지에 도올 선생의 글이 새겨 있다니 반갑고 놀랍다. 신소재동기는 정도전이 쓴 소재동기를 바탕으로 도올의 생각을 조금 더 보탠 글인데, 도올의 여느 글처럼 명문이다. 도올이 신소재동기를 쓴 사연이 중앙일보(2007.8.13) '도올 고함, 삼봉의 최후 그리고 대종손의 비보'라는 글에 나온다.
'다시면에 삼봉(정도전) 귀양지 안내판을 세우려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논두렁에 선 게시판 글 하나를 읽고도 새 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인물이 또 나올 수도 있는 일! 암 도와주고 말고.' 나는 「신소재동기(新消災洞記)」라는 문장을 써서 내려보냈다. 백동마을 어귀에 지금도 그 게시판은 외롭게 서 있다. 당시 나주시장이었던 신정훈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으니, 고려대 교수로 있었던 도올 김용옥과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열쇠로 굵게 잠긴 방안을 구멍 난 창호를 통해 들여다보니 덜렁 삼봉의 초상만 걸려 있다. 당시 '초사(草舍)'라는 편액을 걸었다는데, 지금은 삼봉의 시 '중추가(中秋歌)'가 대신 걸려 있다.
삼봉의 초사는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자)의 초당보다 더 길이 청사에 남으리라. 그가 전하는 것은 초사의 이름이 아니요, 조선왕조를 일관한 민본(民本)사상이요. 인민의 삶과 정신을 혁신한 토지개혁, 종교개혁 등의 영구혁명론이다. 그 사상이 동학, 의병, 독립운동, 광주민중항쟁을 거쳐 오늘 우리 사회의 개혁정신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이곳 소재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혁명의 샘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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