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와 술과 詩의 달인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의 유차시(孺茶詩)
인생은 온갖 맛을 즐김도 귀중하니
하늘도 사람을 도와 절후를 바꾼다
봄에 자라고 가을에 성숙함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그것은 괴이한 일
그러나 근래 습속은 괴이함을 좋아하니
하늘마저 인정(人情)의 즐겨함을 따르는구나
시냇가 차 잎사귀 이른 봄 움트더니
황금같은 여린 싹 잔설 속에 자랐네
남방사람 맹수도 두려워 않고
험난함 무릅쓰고 칡넝쿨 휘잡으며
일만 잎 따 모아 차 한 덩이 만드니
이는 필시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릴 진품
선사는 어디서 이런 귀중품 얻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를 찌르고
활활 타는 화톳불에 손수 차 달이니
꽃무늬 자기에 따라 색깔을 자랑하네
입에 대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마치 어린 아이 젖내와도 같아
부귀한 가문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우리 선사, 이를 얻음이 괴이하고 괴이하구료
남방사람 선사 처소 알지 못하니
맛보고 싶어한들 어이 전해 줄손가
이는 필시 구중 궁궐에서
고덕한 선사 대우해 예물로 보내준 것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아끼고 간직하다
봉물(封物) 중사(中使) 편에 내게 보냈겠지
나는 이제 세상살이 잊어버린 나그네
좋다는 혜산천(惠山泉) 물 감상하긴 했지만
평생 불우하여 탄식 속에 살아왔는데
일품을 감상함은 오직 이것 뿐인가 하네
귀중한 차 마시고 어이 사례 없을손가
공에게 맛좋은 봄술 소식 전하노니
茶들고 술 마시며 보낸 한 평생
오며가며 풍류놀이 시작해보세
취하고 싶으면 술마시고 깨고 싶으면 차 마셨던 민족의 서사 시인
흰구름 이규보(白雲 李奎報) 선생은 평생을 두고 즐긴 것이 시(詩)와
거문고, 술 그리고 술독을 푸는 차였다고 글로 표현했던 백운 선생.
고려 의종(毅宗) 22년(서기1168년) 12월 16일 지금의 여주에서 태어나
몽고의 난을 피해 임금과 함께 강화로 피난가 있다가 74세에 죽자
이곳에 묻힌 듯 하다는 자손들의 말마따나 선생의 무덤은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백운곡, 선생의 무덤은 강화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란다.
강화에서 전등사로 가다 찬물 약수고개를 지나 목비(木碑)고갯길 오른쪽에
「백운 이규보선생묘」라고 쓰인 입간판이 있고, 여기서 3백여미터
숲속길로 들어서면 선생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남쪽에 있는 전등사 너머엔 길상산(吉相山)이 있고 뒤에는 문수산(文殊山)
이 막아있다. 오른쪽 진강산(鎭江山)과 마니산(磨尼山), 왼쪽엔 대모산
(大母山)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보기드문 명당자리다.
나이 9세에 시를 짓고 유(儒), 불(佛), 선(仙) 삼교(三敎)에 두루 통했고
경사(經史)와 백가서(百家書)를 섭렵, 시 빨리 짓기로도 이름이 났다.
즐거워도 시요, 한숨도 시, 앓아 누워 신음소리 조차도 詩로 변해 나왔다니
그 경지를 짐작 할 만 하지 않는가. 어릴 때부터 술을 알아 술마시고 시짓는
외에 과거에는 소홀했다. 22세 때 4번만에 사마시의 장원이 됐으나 나이
40이 되도록 번듯한 벼슬 한번 못했다.
48세 때 고위직 앞에서 술 마시고 시를 짓다 그 실력을 인정받아 제법
벼슬같은 벼슬을 얻고는 순탄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무인 천하라 최충헌에게 벼슬 구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며
어용문인(御用文人)이라는 시비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사마시좌주로 시험관
이 되는 등 70세에는 인신(人臣)의 신분으로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74세에 강화에서 숨지자 임금은 문순공(文順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고려중기 무인정권 밑에서 한자루의 붓으로 문장경국대업(文章經國大業)의
신념으로 살았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백운소설(白雲小說)』
등 평생동안 7∼8천 편의 시를 지어 해동의 공자로 민족의 서사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중 전해오는 40여 편의 차시가 우리나라 전통차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더없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눈속에서 따낸 어린 차잎을 유차(孺茶)로 명명하기도 한 유차를 읊은 5편의 장편
다구(茶具)에 대한 2편, 다과(茶菓)에 대한 2편, 술과 차에 대한 3편,
차의 효능에 대한 2편, 차의 품격에 대한 3편 등 주옥같은 시가 고려시대
茶史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중 1편만 소개하고...
하늘과 땅을 베고 덮고 (天地爲衾席)
강하를 술독을 삼아 (江河作酒池)
천일동안 계속 마시어 (願成天日飮)
취해서 태평성대 보내리 (醉過太平詩)
백운 선생의 또 다른 호가 시금주삼혹선생(詩琴酒三酷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참으로 어울리는 별호라 아니 할 수없다.
고려의 차세(茶稅)는 가혹했는데 차의 주 산지인 하동땅 화개는 관에서
노약자까지 징발하여 험준한 산중으로 몰아넣었고 차를 공급하는 등의
문제로 민중의 뼈아픈 착취로 이어졌다.
이에 선생은 백성을 괴롭히는 지방군수에게 「흉년들어 거의 다 죽게 된
백성,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았는데, 몸 속에 살은 얼마나 된다고 남김없이
죄다 긇어 내려 하는가. 네 보는가. 하수를 마시는 두더지도 그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백성의 살을 겁탈해
먹는건가」고 일갈한다.
또 「남방사람들 맹수의 위험 무릅쓰고 잔설 쌓인 산속을 뒤져 어린 차움 따」
하던 7백여 년 전 고려시대에도 차를 구하느라 혈안이었다.
지금은 그 지독한 차세도 등어리 벗겨지며 서울까지 등짐지는 사람도 없다.
한해 겨우 100여 톤의 질 좋은 차도 남아도는 현실에 현재의 차인(茶人)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몽고의 정복야욕이 고려에 미쳤을 때 그 예봉을 한 자루의
붓으로 멈추게한 백운 선생의 명문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문화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는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불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간절한 대장경각판 군신 기고문을 지었고
상정예문(詳定豫文)의 발문에서 주자를 사용하여 이 책이 간행된
사실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쓴 것을
알려 주었다.
늙고 병든 몸
어느겨를에 차 품질 따질꼬
일곱 사발에 또 일곱잔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
차를 대하여 술을 찾음이 미치광이 같으나
스님에게 봄술 빚으라 권함이 어찌 잘못이겠나
만취 후에야 비로소 차의 참맛을 알기 때문이지
술이 취한 후에야 차의 진미를 알 수 있다 했으니
차를 보고 술을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좋은 차는 친구에게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마음에 간직하여 차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나누어 준다.
수 많은 잎 따 한덩이로 빚었으니
한덩이에 천금인들 어찌 손쉽게 구할손가.
차는 부귀한 집 깊은 규중에서
어여쁜 처녀 기르듯 한다.
섣달 후 움트는 싹 평생에 가장 사랑하여
맵고 강력한 향기 코를 찌르는구나.
위의 짧은 시들에서 나타나듯 백운 선생이
차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마음이 확연히 나타나 있다.
그 당시 좋은차는 임금님이나 사대부의 차지였고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좋은 차 구하기가 힘들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명상음악 - 시냇물 소리와 산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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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하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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