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위를 부르심 -
☆ 2014년 가해 3월8일 (녹)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수도회] 내적 혁명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이사 58. 9ㄷ - 14
† 복음 : 루카 5, 27ㄴ - 32
★ 이사야 예언자는 안식일의 존귀함과 참뜻을 일깨워 준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을 '기쁨'과 '존귀한 날'로 부르시며, 사람들이 자신의 일과 관심사에만
빠지는 것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신다. 안식일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풍족하게 될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신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당신은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하는 여러 계명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하였듯 그리스도인은 그 계명이
생명의 길로 이끈다는 점을 믿고 존중합니다. 특히 이 사순 시기에 교회는 종교적
의무를 각별히 상기시키며 단식과 금육 같은 절제의 실천으로 계명에 충실한
삶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준수 여부를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으로
삼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비판적으로 대하시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십니다. 또한 단식과 관련해서는 단식할 때에 침통한
표정을 짓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말라고 하십니다(마태 6,16 참조). 이는 남들에게
경건함을 인정받으려는 허영심을 경계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계명의 본정신인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쁨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지녀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 준수의 상징과도
같은 안식일을 주님께서 다름 아닌 '기쁨'이라 부르신다고 전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지요. 애써 무게 잡는 경직된 얼굴, 권위주의적이고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며 비난하는 모습을, 우리는 단식을 철저히 실천하며 규정 준수에
완벽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고 싶으신 모습은 격의 없이 어울리는 식탁에서 피어나는
소박하고 진실한 기쁨의 얼굴일 것입니다. 우리가 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의 지배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이웃에게서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얻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 매일 미사 -
◈ [청주] 의인인체 하는 죄인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루카5,27-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 5,27ㄴ-32
의인인체 하는 죄인
연초에 직원 시무식이 끝나고 다함께 영화 ‘타워’를 보았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 벌어진 최악의 화재참사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화재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어린 딸을
위해 고분 분투하는 대호의 용기, 엘리베이터에 갇힌 인건 커플을 구해주는
임산부의 결단력, 대학생 아들에게 등록금을 전해주고 싶었던 청소부의 희생
등 충분한 감동이 있습니다. 화재가 났을 때 소방대원은 목숨을 걸고 불속으로
뛰어듭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당하더라도
인명을 구하고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합니다. 보통 사람은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만 그들은 위험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앙이라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리재고 저리재고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불을
향해 달려가는 소방대원처럼 주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 안또니오 아빠스는 어느 주일 성당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10,21).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대로
자신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준 다음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말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바로 회개입니다.
2014년 가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27ㄴ-32
어제 운전을 하다가 저의 인내심 없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순특강이
있어서 직접 운전을 해서 어느 본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시간이라
도로의 정체가 약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요. 빨간 신호등에 서는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잠시 뒤에 신호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제 앞에 있는 차는 꼼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도 움직이지 않는 차를 바라보면서 ‘아니 운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정신을 두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자동차 경적을 울렸습니다.
그제야 앞 차는 움직이더군요. 문제는 그 차까지만 신호를 받아 교차로를
넘어갔고, 저는 또다시 신호에 걸려서 신호대기를 해야만 했다는 것이지요.
괜히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났습니다. 그런데 문득 “왜 화를 내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강 시간이 늦은 것도 아니었고, 오랜만에 라디오를 들으니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신호대기를 몇 십 분씩 하는 것도 아니지요. 몇 분 조금
늦는 것뿐인데, 또 하루 24시간 중에서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시간에 비교할 때, 신호 대기하는 몇 분의 시간은 별 것도 아닌데도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내심이 없는 것일까요?
사실 기다림도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친한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자신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의미 있는 날을 기다리는
시간 역시 커다란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기다림은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짜증과 불평만
낸다면 그 기다림의 시간은 내게 최악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다가올 부활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인 것이지요.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맞이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부활에 합당한 마음의 자세를 갖춰
나갈 때, 이 기다림의 시기는 분명히 기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우리들 모두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주님 앞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계속해서 집착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랑의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늘 불평불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사실
서두르지는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기다리시며 우리들이 참으로 회개하여 당신
앞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날과 그때를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지요.
따라서 그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 전에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루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만이 부활을 가장 기쁘고 영광스럽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다. 매일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영화 ‘어바웃 타임’).
회개하여 주님의 품에 안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웃어요.
웃음은 전염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느 피정의 집에서 강의를 했을
때입니다. 오전에 강의를 하는데, 사람들이 피곤해서인지 반응이 그리 좋지가
않았습니다. 힘들게 오전 강의를 끝내고, 점심식사 때였습니다. 점심식사 때
역시 오전 강의 때 보였던 약간 어두운 분위기가 그대로 지속되어서 조용함
속에서 식사를 하시더군요. 그런데 잠시 뒤, 어떤 식탁에서 이 고요를 깨뜨리는
엄청난 웃음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뭐가 그렇게 재미나는지 모두가 신나게
웃으면서 식사를 하더군요. 그런데 잠시 뒤, 이 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팀 역시 웃음꽃을 피우면서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이 웃음의
분위기는 이 식당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지요.
어떤 책에서 본 글입니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도 당신과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그러면 오직 당신의
얼굴만 젖을 것이다.”
웃음에 함께 동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울음에 함께 동참하기란
쉽지가 않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울고 있다면, 아주 친하지 않은 한 그 사람
곁에서 위로하기보다는 그 자리를 피하는 선택을 할 것입니다.
우는 것이 치유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어떤 모습이 세상을 바꿀 것인지 또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바꿀 것인지는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웃으십시오. 세상도 당신과 함께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함께 웃어
주실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2014년 가해 3월8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 5,27ㄴ-32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본당의 신부님께서 임기를 마치시고
‘안식년’을 하기로 하셨습니다. 송별미사를 하시고 신부님께서는 인사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제 안식년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미사 후에 할머니 한분께서 신부님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안 됩니다. 안식년이 어떤 년인데 그년하고 함께
지낸다는 것입니까?’ 할머니께서는 아마도 안식년을 여자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안식년은 사제들이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저는 23년
사제생활을 했지만 아직 안식년을 갖지 못했습니다. 작년에 안식년을
신청했지만 교구장님의 ‘특별한 사랑’에 힘입어 안식년을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습니다. 안식년을 하게 되면 여행도 가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어머님과
함께 지내고 싶고, 피정도 가고 싶습니다. 동창 신부 한명은 안식년을 두
번이나 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정상적으로 신청을 해서 받았고,
다른 한번은 교구의 인사이동에서 명단이 빠져서 한 번 더 안식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교구장님의 ‘특별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 안식일의 두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이 되면 장사하는 분들이 물건을 더 이상 팔지 않고 남은 물건은 가게
밖에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가지고 가서 안식일을
지낼 수 있다고 합니다. 안식일의 본 취지를 잘 이해하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호텔에서 본 것입니다. 안식일용 엘리베이터는 모든
층에서 정지를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 합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모든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도록 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해는 가지만
그것이 진정 안식일의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많습니다. 추운 겨울에 보일러를 끄고,
전기장판에 의지해서 지내는 분이 있습니다.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친구들의 폭력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지하도에서 신문지를 이불삼아 노숙하는 분도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장애가 된 분도 있습니다. 세상은 ‘1등만 기억하는 사회’를 향해서
쉴 새 없이 뛰어갈 것입니다. 일등, 일류는 성공과 출세의 보증서와 같고,
편안함과 부유함을 약속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성적순으로, 능력순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꽃밭에 여러 종류의
다양한 꽃들이 꽃밭을 아름답게 만들듯이, 우리의 세상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합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등만 기억하는 사회가 아니라, 넘어진
사람, 실패한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도 기억하고 함께 어깨를 보듬고
살아가는 사회가 진정 행복한 사회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세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이 못
마땅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것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을 원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내적혁명 -회개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사58,9ㄷ-14 루카5,27ㄴ-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 5,27ㄴ-32
내적혁명 -회개의 여정-
어제의 감동적인 체험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대혁명이다!”
수녀원에서 오전 고해성사를 주고 귀원하여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저절로
터져 나온 탄성입니다.
이웃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정리의 달인’이라 일컫는 사랑 많은 도반이
제 집무실 안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창의, 담대한 실천력이 똑같은 공간의 집무실을 별천지의 공간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완전히 구조가 바뀐 내부의 모습은 그대로 내적혁명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새삼 외적공간을 넓힐 것이 아니라 내적공간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비워
넓히는 것이 회개임을 깨달았습니다.
‘있는 자연 그대로’에 만족하는 내 성향에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형제의
성향은 저에겐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자 깨달음이었습니다.
회개하라하여 회개가 아니라 이런 사랑의 감동이 회개에로 이끕니다.
감동과 더불어 제 자신의 모습을 많이 들여다보며 성찰한 날입니다.
말 한마디 없어도 무언의 사랑의 실천이 이웃을 회개에로 이끕니다. 하느님
사랑이든 사람 사랑이든 끊임없는 사랑의 체험이 내적혁명의 회개를
촉발합니다.
회개의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이 모두 여기에 해당됩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여정의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리 레위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를 따라라.”
명령하십니다. 바로 회개에로 부르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위력을 지니는 것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루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레위의 행동을 회개의 본보기로
제시하십니다. 루카는 마르코나 마태오와 달리 그리스 말의 “따르다.”를
단순과거가 아닌 반과거로 씁니다. 이로써 그는 ‘따름’ 곧 ‘제자 됨’이
점진적이며 항구적인 일임을 가리킵니다(성경주석 신약254쪽).
이어 예수님께서 함께 어울리시는 30절의 죄인들은 단순한 죄인들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임이 들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죄인들처럼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역시 회개한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평생, 매일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에로 부르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32).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 받아야 할 병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로
비유하십니다. 병이 곧 죄임을, 죄에서 기인한 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에서 제외될 자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은 이런 병자이자 죄인인 우리 모두를 교회의
성사를 통해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치유하시고자
부르십니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의 은혜가 참 감사합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가능케 하는 ‘회개의 시스템’ 같은 수도원 일과표가
고맙습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이나 주님의 회개의 부르심에 응답해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해 성전을 찾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런 회개는 일상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완성됩니다.
바로 이사야가 회개에 따른 사랑의 실천과 그 은혜를 적시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성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이사58,9-11).
회개에 따른 사랑의 실천과 주님의 은혜에 대한 묘사가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부르심에 회개로 응답한 회개한
죄인들인 우리 모두에게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주님인 내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내 상속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이사58,1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인이 돼라.
2014년 가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복음 : 루카 5,27ㄴ-32
< 죄인이 돼라 >
이번 성지순례 여행 중 가이드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소매치기
조심하세요!” 였습니다. 물론 저는 소매치기가 가장 극성이라는 로마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스라엘에도 소매치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건을 팔러 와서
파는 척하고 그 밑으로 손을 넣어서 귀중품을 훔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이드의 말대로 정말 볼품없는 물건들을 가져와서 위협까지 해가며 물건을
훔치려는 현지인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나자렛 성가정 집으로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제 옆으로 붙었습니다.
그러더니 어떤 명찰을 보여주며 가이드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못하는 척 했습니다. 가이드를 괴롭히거나 물건을 팔려는 사람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끈질기게 자신이 이스라엘 정부에서 발급받은
명찰이라고 저에게 보여주며 계속 가이드를 찾았습니다. 그것이 위조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제가 바보스럽게 가이드에게 안내해 주겠습니까? 그는 눈을
한 번 흘기며 맨 앞으로 뛰어가 가이드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관광감시관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클러지를 입고 있으니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저에게 물어본 것이었는데 저는 끝까지 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판단하고 있을
때는 그 사람보다 항상 위에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레위라는 세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먹고 마십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만 어울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투덜댑니다. 예수님은
의사가 필요한 이들은 병든 이들인 것처럼,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오늘도 수많은 죄인들이 등장하지만 또 유일하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만이 예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잘 살았는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구원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될 날이 오지 않도록 주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또 남들이 보기에도 하느님의 법을 철저히 지키는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행동으로 잘 사는 성인과 같은
사람들, 또 죄를 많이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또 각자가 둘로
나눠집니다. 행동으로 잘 살기는 하지만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부류, 그리고 완전하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손한 성모님과 같은 부류입니다. 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말하는 부류와, 오늘의 세리와
죄인들처럼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부류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부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자신은 잘 산다고 하면서도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고, 또 죄인이면서도 뉘우칠 줄 모르고 역시 판단하기를 잘하는 예수님
왼 편에 매달렸던 도둑과 같은 부류입니다. 결국 어떤 부류에 속하건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 교만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죄를 지었건 성인처럼
살건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심판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고,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야고 참조).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Gibson과 Fink박사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도 없고 특별히 잘못을 저지르며 살지도 않는데 긴장과
불안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면밀히 조사해보니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된 하나가 바로 ‘남을 비판하는 정신이나
태도’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남을 심판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심판받아
이 세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병자가 되고 죄인이 되는 길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남의 잘못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는
의인이 아니라,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지닌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죄를 피해야겠지만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것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바로 더 겸손해지라는
의미에서일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영적 겸손’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적어도 하느님 앞에선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였습니다.'
2014년 가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묵상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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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에 가득 찬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던지신 일침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오늘은 ‘영적 겸손’이라는 말을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을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과연 하느님 앞에서 건강한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하느님 보시기에 늘 건강한 마음과 깨끗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역시, 너무 쉽게 스스로를 의인의 무리에 속해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대상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맑은 영혼의 소유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도 삶을 마감할 때까지
입에 달고 사신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여,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시오니 내 죄를 없이하소서.”(시편51,1)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모습 중의 하나는 겸손함입니다.
적어도 하느님 앞에 선 우리는 그래야만 합니다.
이를 ‘영적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한 이들이 아니라 병든 이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결국 이 세상 모두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건강하다고 착각하면서 편견에 찬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께 치유 받아야 할 아픔을 지닌 마음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들 안에서 서로를 보듬어 주며 살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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