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7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믿음, 믿음의 역사 》
살후 1:11~12
〈 이야기의 힘 〉
1960년대에는 라디오 연속극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 중에서 “길 잃은 사슴” “내 이름은 남궁 동자”가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TV가 보급되면서 TV 드라마가 국민의 관심사였습니다.
“여로”라는 드라마를 이웃집에 가서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청률이 70%에 육박하는 드라마도 있었지요?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거리에 인적이 뜸했습니다.
방송사에서는 이에 맞춰, 일일 드라마,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주말드라마…
한주 내내 이렇게 드라마 보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연속극, 드라마(같은 말인데) 이 속에 뭐가 있길래 사람들을 사로잡을까요?
드라마 속에는 다름 아닌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토리’ 혹은 ‘내러티브’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잡아끄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 하나 잘 만들면 대박이 납니다.
요즘 간간히 일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대박이 나면 영화를 만든 사람들, 돈방석에 앉습니다.
‘이야기의 힘’ ‘내러티브의 힘’ ‘스토리 파워’입니다.
일찍이 플라톤이 갈파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요즘에는 OTT서비스로서 대박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
OTT에 접속하면 자기가 원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아무 때고 자유롭게 볼 수가 있습니다.
2,500년 전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 적중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 이야기는 어떻게 힘을 발휘하여 세계를 지배할까요?
〈 이야기는 믿음의 실체 〉
오늘 설교 제목이 《 믿음, 믿음의 역사 》입니다.
먼저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어서 ‘믿음의 역사’를 설교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두 글자를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랑이란 두 글자는 많이 생각하는데, 믿음이란 두 글자는 많이 생각 안합니다.
‘믿음’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간단해요, 믿음은 ‘믿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언가를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란 단어를 이렇게 씁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믿어!” “나는 내 아들(딸)을 믿어!” “나는 당신을 믿어!”
여기서 믿음의 대상은 부모님, 아들 딸 그리고 당신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믿는데 어떻게 믿는다는 뜻입니까?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셨어!”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 “당신은 나를 사랑해”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스토리예요!
☞ 우리가 믿는다 할 때는 이렇게 이야기를 믿습니다.
☞ 우리가 부모님을 믿는 것은,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한없는 희생으로 길러주셨어!”
‘부모님의 희생 이야기’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키가 170이고 몸무게가 80이고, 나이가 80이야!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셨어!”
바로 이 ‘이야기’를 믿는 것입니다.
☞ 한자로 믿을 ‘신’자가 있습니다.
믿을 신(信)자는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믿는 것입니다.
☞ 이야기는 믿음의 실체입니다.
☞ 믿음의 실체는 어떤 사물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 예수 믿음의 실체 〉
우리는 예수 믿는 성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예수라는 인물이 있었어!’
이것은 역사 공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
이 이야기를 믿는 것이 ‘예수 믿음’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 인물 예수의 생존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믿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이야기’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녀로부터 사랑받고 싶습니까? 자기 자신을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이야기를 자녀가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너의 편이야!” 이 이야기를 만들어 제공해야 합니다.
☞ 예수님은 이야기를 창출하셨습니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부활 이야기” “휴거 이야기”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구원하는 이야기”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숱한 이야기들을 만납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믿을 것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인생이 갈라집니다.
허탄한 이야기, 쓸데없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허탄한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은 이야기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사람들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신하고 죄악의 구렁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야기의 얼개는 “창조 – 타락 – 구원”입니다.
“창조 – 타락 – 구원”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 중의 이야기입니다. 핵심적인 이야기이고, 생명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중에서 생명을 주는 이야기가 바로 “창조-타락-구원”이야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절대 서사” “메타 내러티브” “거대 담론”이라 합니다.
이야기 중의 이야기, 가장 놀라운 이야기, 가장 힘 있고, 생명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 이 서사, 내러티브, 담론을 믿는 믿음이 “예수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 이야기 중의 이야기 ‘복음’ 〉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합니까?
사람이 그 이야기를 믿으면, 그때부터 그 이야기가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이야기는 그 사람이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믿고, 그 이야기대로 살아갑니다.
그 이야기, 즉 그 믿음이 역사(役使)를 이룹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짧고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이야깁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우리가 죄에서 건짐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모두 이야기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 중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모여 교회를 결성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이들이 주일마다 모입니다. 모여서 “예수는 그리스도” 이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 “예수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창조 – 타락 – 구원”이라는 절대담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고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이야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가장 복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의 결말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혹은 불행하게 살다가, 죽었다.”
이것이 세상의 이야깁니다.
☞ 복음은 그러나 “영생” 영원한 생명, 해피엔딩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입니다.
〈 믿음의 역사(役事 work produced) 〉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믿음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되는 역사, 히스토리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일구어낸 위업입니다. (役事 work produced)
하나님은 복음을 믿은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에게 섭리하십니다.
“ ~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예수 믿은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은 교회를 결성하고 주일마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사업을 했습니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교회에 첨탑을 세우고 첨탑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았습니다.
밤이면 십자가에 빨간 불을 켰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또 교회를 크고 웅장하고 예술적으로 멋들어지게 건축했습니다.
물론 이 일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속합니다.
☞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 믿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다운 제자가 되어 영생을 얻은 자답게 사는 일입니다.
세상의 칭찬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칭찬, 주님이 바라시는 삶!
그 삶을 우리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다. 그들이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우리가 믿음으로 역사(役使)하면서,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역사에 치중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 예수 믿고 사는 우리, 예수님 이야기를 믿는 우리는 어떤 역사를 이룩해야겠습니까?
예수님 이야기가 “나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예수 믿지 않았더라면 내가 해내지 못했을 일, 업적, 그것이 “나의 믿음의 역사”입니다.
☞ 오늘 설교 들으시고 “나의 믿음의 역사”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오늘 설교 들으시고 “우리의 믿음의 역사”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믿음의 역사(歷史 history) 〉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 땅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인류의 역사에 끼친 업적이 있습니다.
아마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야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이야기”일 겁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의 이야기를 믿은 사람들,
예수의 이야기 속에 자신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낸 업적들이 쌓이고 쌓여서 ‘히스토리’ 역사가 되었습니다.
‘히스토리’는 이야기의 주인공 예수, ‘그의 이야기’ 즉 ‘his story’가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 믿음, 믿음의 역사 》입니다.
‘믿음’은 이야기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믿은 믿음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이루어낸 업적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이루어낸 믿음의 역사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이루어낸 ‘믿음의 역사’ 그것을 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기독교, 믿음의 역사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 ‘믿음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의 이야기를 믿은 사람들이 이루어낸 업적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한 사람, 한 사람, 이제는 ‘나의 믿음의 역사’를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또 내가 예수의 이야기에 들어갔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로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안 믿었더라면 이루어내지 못했을 이야기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었기 때문에 만들어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후로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나의 예수 믿는 이야기’는 어떤 것입니까?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가 자녀에게, 후세대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믿음의 역사,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않겠습니까?
예수 이야기, 더 강력한 힘으로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