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보비치의 탄식에서 2022.10.24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미국 여배우 밀라 요보비치(46)가 지난 10월 11일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에 관해 투고한 것을 읽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내 고향은 오늘 여러 차례 미사일 공격을 받았습니다. 한때 평화로운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걸었던 거리에 민간인들은 죽어 드러누워 있습니다. 파괴에 넋을 잃은 나는 사람들이 지금 겪을 비탄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내 마음이 그분들과 함께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은 그분들을 위해 으스러지고 내가 함께 서 있다는 걸 그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썼습니다.
요보비치는 키이우 출생으로 의사였던 세르비아계의 아버지와 이혼한 배우 출신 어머니를 따라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뤼크 베송 감독의 <제5원소>, <잔 다르크>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못 봤습니다. 불타는, 강렬한 눈빛과 중성적인 연기가 돋보인다고 합니다. 요보비치는 세 딸의 어머니로서 이란 등지의 여성 인권 문제를 SNS에 줄곧 제기하고 있습니다.
올해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재래식 화기와 비행기의 폭격은 물론이고 자폭 드론과 지대공 미사일로 지상을 공습해 병원이건 학교건 때려눕히는 아수라장으로 바꿔 세계인들을 경악시키고 있습니다. 양측 군인이 각기 1만 명 이상 전사했고 부상자는 약 10만 명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민간인도 약 3만 명 숨졌습니다. 인프라의 괴멸로 재건 비용은 1,000조 원 이상이 들 것으로 추정합니다.
◇밀라 요보비치의 투고문.
(요보비치 인스타그램 캡처)
우크라이나 국민 4,300만 명 중 1,000만 명 이상이 국외로 피난했습니다. 선전포고 없는 전쟁에 빨려 들어간 자국민을 위해 세계에 SOS를 치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희극배우 출신이라고 깔본 국내 정치인이 대선과정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늘 반소매 셔츠 등 군복을 입고 러시아에 맞서는 그의 투혼을 보면 대통령의 중요한 자질은 애국심의 문제이지 전직(前職)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고전하는 러시아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동원령을 내렸죠. 무엇보다 러시아는 한 대에 560억 원(약 4,000만 달러) 하는 최신예 수호이 35 등 항공기를 55대 이상 잃었다고 합니다. 영토는 러시아의 30분의 1 정도인 우크라이나 60만 평방킬로미터를 국경 주변에서 몇 만 명 정도의 러시아군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평균 10만 명이 주둔했던 소련판 베트남전쟁으로 소득 없이 철군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입증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당시 세계 3위급인 1,700여 개의 핵 탄두와 170기의 미사일을 보유했습니다. 미국 러시아 영국이 우크라이나를 구슬려서 군사적, 경제적 위협을 가하지 않도록 한다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만들었고 핵무기는 러시아에 넘겼죠. 벨로루시, 카자흐스탄도 핵무기를 모두 폐기해 안보가 취약해졌습니다. 한반도의 비핵화가 얼마나 어려울지 알려주는 교훈이자 남한에도 '공포의 균형' 대책이 절박한 이유입니다.
러시아의 약소국에 대한 침공 만행에 로마 교황도 개탄했지만 국경선을 바꾸는 살육 전쟁이 계속돼도 안보리는 개입하지 못했죠. 유엔은 지난 2월의 철군 요구 결의안에 이어 10월 12일 유엔특별총회가 4개 점령지역의 합병 무효와 러시아 군의 즉각 철군 결의안을 압도적으로 의결했을 뿐입니다. 요보비치의 무력감이 조금은 풀렸을까요? 우크라이나 침공을 본 독일은 보다 많은 회원국으로 나토를 강화하자고 강조합니다. 러시아가 공격의 빌미로 삼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접근도, 여러 국가들이 가맹을 서두른 것도 뭉쳐야 침략하기 어렵다는 현실 때문이죠. <도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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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현황. 파란색이 30개 회원국. 붉은 글자로 쓴 스웨덴과 핀란드의 신규 가입은 기존 회원국들의 의회 비준 절차가 진행 중. 노란색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가입을 희망한 나라들. (VOA캡처)
1950년 6·25전쟁 때 유엔의 활약은 대한민국에게 천운이었습니다. 유엔은 1945년 10월 24일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을 주축으로 한 회원국들이 2차 대전의 교훈으로 전쟁을 방지하려고 국제연합 헌장을 비준하며 공식 출범했습니다. 유엔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여 유엔 사상 최초로 16개국이 유엔군으로 참전했고 6개국이 의료지원을 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아냈습니다. 중공의 참전으로 자유민주주의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도 이룩하지 못했지만…. 이웃 일본은 병참기지로서 전쟁 물자를 신속히 보급했습니다.
오늘은 유엔의날입니다. 부산시 남구에는 6·25 전사 유엔군 약 4만 명 중 2,300여 명을 모신 세계에 유일한 유엔군 묘지가 있고 경기 강원 등 국내와 해외 각지에 6·25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역사를 잊지 않게 해줍니다.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에서 지난 7월 27일 제막된 <추모의 벽>에는 6·25전쟁의 미군 전사자 3만6,634명과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지원단 카투사 전사자 7,174명의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 모두 새겼습니다. 이 공원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미 육사의 2023년도 졸업 예정자들이 이것을 단합 구호로 삼았다고 합니다. 파리의 센강 변의 프랑스군 6·25참전 기념비에는 전사자 292명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 2021년 제막됐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에는 2004년 186명의 전사를 추모하는 한국참전기념비가 건립되었고 캔버라의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전쟁기념관에도 한국 전쟁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춘천시 호반에는 1968년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개막에 참석한 에디오피아 참전 기념탑이 있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는 1951년 2월 엄동설한 속에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낸 미군과 프랑스군 대대의 승전을 기념하는 지평리전투 UN(프랑스)군참전충혼비가 역사를 주시합니다. 가평군 읍내리에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4개국의, 포천군 영북면에는 1,296명의 육해공군이 참전한 태국군 기념비가 있습니다. 수원의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비문에는 “정의와 승리를 추구하여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 세계의 평화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몸 바친 288명의 고귀한 이름 위에 영세 무궁토록 영광있으라”고 새겼습니다. 전사자 수가 약간 다릅니다. 프랑스군 전투기념비는 국내 격전지 여러 곳에 세워졌습니다. 인천에는 콜롬비아 참전 기념비도 있습니다.
지난 9월 윤석열 대통령의 유엔과 캐나다 순방 때 영부인 김건희 여사는 별도의 일정으로 캐나다 보훈병원에서 100세 참전 용사의 어깨를 껴안았는데 어느 좌익은 트위터에서 접대부
◇양평군 지평리에 세워진 지평리전투 UN(프랑스)군참전충혼비(주한 프랑스대사관 웹사이트 사진 캡처)
같다고 생트집 잡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었을 100세 노병은 제시 셰네버트 씨, 오빠와 함께 간호병으로 입대해 1951년부터 의정부 야전병원에서 복무했고 나중에 간호장교가 된 6·25 참전 여군이었습니다. 악의로 매도하는 이런 글을 참전 용사들이 읽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6·25 참전 유엔군의 연인원은 약 200만 명입니다.
이름도 몰랐던 낯선 나라에서,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의 자유를 지켜주라는 조국의 부름에 응하다가 산화한 아들과 딸들은 여러 나라에 연결됩니다. 우리들 쪽의 종북 좌익이나 종중 사대(従中事大)는 배은망덕한 짓이죠. 옛날엔 안보에 여야가 없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미사일을 불꽃놀이처럼 쏘아대는 안보 위기 상황에 무슨 돌연변이로 등장한 ‘친일국방’이라는 조어 프레임의 맹목적 반일주의에 반성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걸핏하면 정치적 이득을 위해 좌익 정치인의 무덤을 찾는 정치인들도 이 나라를 피로써 지켜준 유엔군 전사자들의 묘지를 먼저 찾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유엔데이에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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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