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
가족과 ‘나트랑’과 ‘달랏’을 다녀왔습니다.
후진국이라 살 것은 말린 과일이나 사려고 용돈을 조금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쇼핑에 백만 단위 넘게 써서 여행경비보다 더 썼습니다.
베트남 침향으로 만든 약이 제일 좋고 중년인 사람들은 지방과 미세플라스틱으로 혈관이 막혀 꼭 필요한 것처럼 말하니 비싸도 샀습니다.
아내는 한 알 먹어보더니 바로 눈이 밝아진다고 샀지만 나는 별로 좋아진 느낌이 없었고, 열이 많은 체질이라선지 설사했습니다.
누나는 삿뽀로 여행시 가이드가 자기 몸에 꼭 필요한 것처럼 말해서 가족 것까지 NMN 등 너무 많이 사서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충동구매 했구나 하고 10% 100만원 손해 보고 도로 전부 반품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경험 있는 누나도 또 샀습니다. 누나는 효과를 조금 본 것 같았습니다.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느낀 것은 한국인이 ‘달랏’에서 비닐하우스로 작물 재배법을 가르쳐 이모작만 하던 곳이 4모작을 하여 소득이 배로 증대되자 온 도시 마을이 다 비닐하우스인 곳도 봤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수출 30% 이상을 기여 하지만 총리가 임기 후 바뀌면 공장 세금 면제했다가, 조금만 달라고 했다가, 더 달라고 계속 말을 바꾸고 떼를 써서 인도로 공장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이 어찌나 많은지 유명 관광지가 앞뒤로 전부 한국어가 들려서 외국 온 기분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관광 수입도 한국인에게서 엄청나게 얻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에덴 씨(Eden See) 호텔 식당에서도 한국 사람이 많아서 어떤 여자분이 한국말로 내게 말을 해서 “내가 한국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하자 “척 보면 압니다.” 하시고 알아보는 분이 서너 분 계셨습니다.
월남파병으로 우리 군인이 오천 명이 죽고 고엽제 후유증이 있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는데, 이제 한국이 월남경제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미국이 쌀 생산 수출 세계 1위라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작은 나라 베트남이 세계 2위라는 것은 아무리 날씨가 좋아 4모작을 한다고 해도 너무 잘못된 통계 아닌가 싶었습니다.
야시장 구경 중에 쇼가 끝나고 ‘강남 스타일’ 음악이 나오자, 한국 아줌마들이 흥겨워 춤을 추기에, 나도 우리 노래가 반갑고 즐거워 말 馬 춤을 추어서 흥을 돋워 주니 베트남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1938년 건설되어 1964년까지 운행된 추억의 완행열차가 관광 상품으로 옛 추억을 회상하며 타봤습니다. 역시 한국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라 한국 열차 탄 느낌에 경치까지 소나무가 많은 한국과 비슷하였습니다.
‘다딴라’ 폭포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랑과’ ‘비앙’ 이라는, 여자가 맹수에 잡히는 것을 구해준 남자와 부부가 되었습니다. 서로 원수지간 사이의 부족에서 만나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다친 사람 약 구하러 온 신랑을 뒤따라 가서 신부를 죽였다는 슬픈 연인의 이야기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레일바이크는 이인용인데 바이크라고 해서 페달을 굴려서 사람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람이 앞에 타고 내가 뒤에서 운전하여 사이가 좋아지는데, 출발과 브레이크만 잡고 길은 레일 따라 저절로 갔습니다. 조금 큰 썰매 모양으로 산 위에서 내려갔다 올라오는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인데 그런대로 아랫배에 힘줘야 할 만큼 긴장감 있었습니다.
4인용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서 베트남에서 제일 큰 불교사원인 죽림사를 구경하는데, 경치와 불상 모습이 한국과 비슷하여서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전 국민 80%가 불교 신자라 ‘에덴 씨’ 호텔 안에도 큰 불상이 서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문자가 없어 영어로 베트남어를 표기하고 중국영향으로 한문과 영어 베트남어가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옛날 왕정 때 궁정 모양을 본뜬 이층 콘도형 건물에 숙소를 주었는데, 첫날 더운물이 안 나오고, 변기 배수가 안 되고 하여 다음날 방을 다시 배정받았습니다. 그러자 다음에는 호텔 방 배정 받으면 옷 짐 풀기 전에 변기와 더운물 확인부터 하자고 결론지었습니다.
욕실 바닥이 미끄러워 큰 수건 사용하고, 바닥에 깔아두고 샌들을 다시 가방에 넣을 때 그 물수건으로 닦았더니 ‘수건 더럽게 썼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이드가 세탁비를 더 주었다고 해서 미안했습니다. 아니 내가 매일 안 주어도 된다는 팁 1달러씩 놓고 나왔는데? 그거면 충분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쑤언흐엉’ 호수 정원 마차 투어는 우리 가족만 다 탈 수 있는 7인승인데 내가 우연히 마부 옆에 앉았습니다. 맨 앞자리라 기분이 좋아 말에게 당근 사주라고 팁도 주었습니다. 잠시 마차 해설사가 되어 프랑스혁명 비화를 가족들에게 이야기 해주면서 즐겁게 마차를 탔습니다.
프랑스 루이 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민혁명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본국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는 마차를 준비시켰습니다. 평소에 타던 화장실 두 개인 왕족용 마차는 바로 눈에 띄어서 잡히니, 화장실이 한 개인 마차가 빠르고 평범해 보이니까 남자들은 작은 마차를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기어이 화장실 두 개인 큰 마차를 고집하여 타고 도망가다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 다 와서 안심되었는지 잠시 쉬면서 산책하다 농부의 신고로 잡혀서 사형당했습니다. “결론은 여자는 남자 말을 들어야 해요.”라고, 말하니 누나들이 “그 얘기 사실이니?” 하고 내 말을 반신반의하셨습니다.
또 사상의학 창시자인 ‘이제마(李濟馬)’도 이제마 아버지가 주막에서 술에 취해 잠들자, 주막 주모가 딸이 못생겨 시집을 못 가고 노처녀로 있어 억지로 합방시켜 ‘이제마’를 낳았습니다. 조부님의 꿈에 탄생 태몽이 백마가 천리를 거침없이 달리자, 제주도에서 얻은 말 이란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고 ‘제마를 서자 庶子라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잘 키워라’ 고 유언 하셨습니다.
막둥이 지용이도 꿈에 백마를 보고 낳았다고 호를 ‘가마(嘉馬)’ 라고 짓고, 딸 연주는 아내가 태몽을 예쁜 조개를 많이 주어서 호를 금성(金星:venus) 로마신화 미美의 여신 女神 비너스가 조개에서 태어난 것을 생각하고 지었습니다. 큰아들 장남은 내 호가 가산(嘉山)이라 돌림자로 가호(嘉湖) 호남고등학교 졸업생이라 호자를 넣었다고 해설했습니다.
아내는 감기로 아파서 술도 못 먹고 내가 조용하다가 감기가 나아서 가족들과 흥겹게 이야기하니 기분 좋아했습니다.
음식은 우렁에 돼지고기를 넣은 요리가 특이했습니다. 랍스터에 해산물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코스요리는 먼저 경험한 형님이 나이 든 사람은 다 먹지도 못하고 값이 열 배로 비싸다고 거절하자 가족들 모두 삼겹살 무제한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노래방 기계에 우리말 노래 선곡 책도 있었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너무 심심해 재미없어 내가 부르려 하자 우리 가족 가이드인 막내 누나가 ‘시끄럽다’라고 부르지 말라 해서 못 해서 조금 서운했습니다.
린푸옥 사원(Linh phuoc pagoda) 은 1949년 건설된 달랏 시市 최고의 관광명소로 깨진 유리와 도자기 파편으로 타일처럼 장식한 유럽과 동양의 미를 합한 예술 건물로 제일 감동을 주었습니다. 47m 용 조각이 웅장하고 섬세한 비늘을 색색 도자기 조각으로 볼만했고, 불상과 커다란 종을 관광객들이 두드려 은은한 소리가 들려 즐길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롱손사寺에는 1889년 지어진 14m 높이의 간다라 미술 풍 커다란 흰색 서구인 모습 백불상白佛像이 있었습니다. 152개 돌계단을 올라가 하얀 불상 앞에서 부처님 손 자세로 앉아, 우리 가족은 사진을 남겼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계단 앞에 구걸하는 분들에게 우리 가족은 적선積善을 하였습니다.
마사지 한 시간 받은 우리 가족은 다들 너무 좋다고 내일 한번 더하자는 둥 하다가 다음날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삼윤三輪 자전거 앞자리에 한 사람씩 태우고 뒤에서 패달을 밟는 구식 이동 수단을 타고 나트랑 야경을 구경했습니다. 차 車와 오토바이 홍수 속에 위험하게 보이기도 하고 옛날 이동 수단 경험이라 색달랐습니다. 오르막길을 페달 구르지 않는 것을 보니 배터리로 가는 전기 자전거가 확실하였습니다. 국제 행사 유치로 없던 도로 신호등을 만들어 놓으니 더 사고가 많아져 다시 철거한 자유분방한 교통질서의 나라, “버스 운전사가 오토바이 사이를 추월해 갈 때마다 위험해 보여 발이 간지럽다.”라고 작은형님은 말하며 기사에게 팁을 한국 돈 만 원을 주셨습니다. 가이드에게 “한국 돈 단위 기사님이 아느냐”고 물으니 안다고 하며 기사님 입이 ‘귀에’ 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장거리 운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기사에게 주는 팁은 우리 가족과 승객 전체 안전을 위해 주는 것이라 보기 좋았습니다. 한국 초콜릿 등 간식을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산악지대가 70%로 한국과 비슷한 나라, 우리 1970년대 수준의 경제와 도로 주변 쓰레기가 국민 의식 수준이 후진국이지만 왠지 정감이 갔습니다. 우리 가족 형님들이 월남전에 파병 될 뻔했던 나라. 나트랑 해변에서 밤에 맥주와 피자를 먹고 즐기는데 러시아 사람과 동양인들이 가득한 식당은 젊은이들이 많아서 활기가 넘쳤습니다. 바닷가 풍경이 부산 해운대 비슷하다 느꼈는데, 경상도 아줌마들이 주위에서 놀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니 더 재미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사람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첫댓글 덕분에 대리 만족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다감님